나의 입술의 고백

올 삼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자매를 일전에 방문하였다. 유월쯤에는 일터에 돌아가 일할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지금 팔월 말이 되었건만 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약해 있다. 좋은 의사를 만나 수술이 성공적이고 많은 위로객으로 그분의 병실은 꽃속에 뭍혀 있었었다. 그런데 오(5)개월이 지난 지금은 병색이 완연하고 본인도 투병생활이 힘드는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도, 앞으로의 생을 놓고도 뚜렷이 무엇하나 잡을것이 없는 그 허무함이 그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땅에 던져진 날은 확실하지만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지금 은 그런대로 산다고 하지만 내일 일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생명과 건강이 있을 때 우리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가야할 곳이다. 내가 가야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화평할 수있다.

그러나 그 좋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이루어야할 과제이다. 침례받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시인하므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다.(롬10:9)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한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고 하루 아침에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새벽기도도 하고 성경도 공부하는 것이다.

한 자매는 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은 의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쁨으로 예배나 성경공부를 하기보다는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애를 쓰며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작동하여 그에게 가까이 오시기를 원하신다. 지성과 감성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신다.

눈먼 자 거지 바디메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바디메오는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담한다. 소경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주님은 나의 의지와 소원을 나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가야할 천국에 대한 확신은 내가 생명이 있을 동안에 해결해 놓아야할 과제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아들이니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도마와 같이 우리도 고백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입술은 무엇을 고백하며 살고 있는가!

글쓴이:  어느 자매
펌 글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 5대 교리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 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태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ㅇ ?루스임ㅔ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아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성령은 효과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은 죄인들이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한 만큼 성공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지 않는 한 중생시킬 수 없다. 즉 믿음(인간이 공헌하는 부분)이 선행해야만 중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혜로부터의 타락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알미니안에 의하면 :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

 

※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됨 :

(비록 이러한 순서로 나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항론"(Remonstrance)에 담겨진 사상의 체계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1610년 네덜란드 교회에 제출하였고, 이것은 1619년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되었다.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 부패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엘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살게 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 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특별 구속 혹은 제한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외적 부르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을 향해 반드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지속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외적 소명(모든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하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적 소명(오직 택한 자만을 부르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 칼빈주의에 의하면 :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

 

 

※ 도르트 총회에서 재확인됨 :

이 신학체계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성경에 담긴 구원의 교리로서 재확인 되었다.

이 체계는 당시에 "5대 교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5대 교리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로 형성되었고, 이때 이후로 "칼빈주의 5대 교리" 로 알려지게 되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구세주의 부활은,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그 죄책들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며, 주님께서 의로우신 종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인데, 그 부활을 새로운 출생(a new begett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말씀은, 그분이 이전에는 인생의 연약함으로 감춰져 있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책으로부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새롭게 출생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1).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엡2:5,6 참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복'(갈3:14)을 받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은, 모두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relative)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해서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상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physical)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이 구절을 번역한 사람은 뒤에 나오는 5절을 참고하여 '살리셨도다'라는 말을 1절에 삽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한 '충만케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도 영적 생명으로 충만케 하였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사도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한 뒤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nature)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빠져들기 쉬운 본성,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그 본성에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입니다. 종이나 노예가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의 상태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들을 채워 넣거나 그의 본성에 새로운 뼈대를 세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와 본성은 서로 다른 것들입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의 위계상 피조물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위에 첨가된 것입니다.

 

본문의 뒤에 따라 오는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화목, 곧 우리의 범죄함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와는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 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nfusing)’ 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condemnation)’에서 ‘무죄언도(absolution)’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pollution)’에서 ‘친교(communion)’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right)’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fitness)’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perfect)’ 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to)’ 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in)”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46~50p 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하나님의 편지

 

네가 힘이 들 때 하늘을 한번 더 보아라 끝도 없는 창공
그곳에서 나는 너를 보고 있다
 웃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기쁨이고 
 울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가슴에서 짓이겨지는 아픔이 온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통을
없이 해 주고 싶어도
인생으로 주어진 숙제로서 어차피 네가 넘어야할 산이고
네가 한번은 지나야 할 고행이라서
그리하여 너의 오만함의 돌덩어리를 깎아내어
나의 귀한 보석으로 만들어내 귀한 사랑으로 보듬어 주려함이니
너무 슬프다고만 말고 너무 아프다고만 말고 너의 마음과 생각을
더욱 굳건히 지켜 내 귀한 열매가 되어 주기를 내 아가야~

 나는 간절히 바란다. 네가 태어나기 전 너는 이미 내게 선택하여 졌고
이길로 오기까지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 내 사랑아~ 내 보배야

내 아들을 피 흘리기까지 너무나 아팠던 천 갈래 만 갈래의 가슴 아림의그 십자가!
네가 모르는 죄까지도 씻어 주려는 나의 간절한 애태움!
그 육 천 년속의 기다림속에 너는 분명히 내게서 준비된 열매였었다. 

나에겐 사소하고 작지만 이러한 희생을 자주 바쳐다오..
너에게 주어진 귀한 생명과 바꾸는 죄 어리석은 사탄의 놀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마지막 주어진 그날을 강하게 버티고 이겨서
 내가 너를 부른 내 사랑을 확인 하려무나 너는 세상의 어느 것 보다 견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보배 첫 열매이노라

 나 또한 너를 위한 그 아픔을 모른 채 하지 않는다.
가끔은 빛이 찬란한 하늘에서 너를 지키고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너를 향한 눈길을 놓지 않는다.

 아 멘 브라질 10세 소년의 찬양(음표)

 

출처: 사모님사모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