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cafe.daum.net/ymh779/D6Rg/17541 글쓴이; 깡아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바다를 자주 찾게 된다. 내게 그만큼 스트레스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바다를 즐겨 찾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다는 살아있고 바다가 내게 가르치는 교훈들이 쏠쏠하게 제법 많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는 나의 감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스승이라고나 할까...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인생살이의 희노애락(喜怒哀樂), 보다 깊은 삶의 여정을 배울 수 있어 좋고, 검푸른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는 행운이라도 얻는 날이면,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시상(時想) 비스무리한 아름다운 언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제법 형이상학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는 날이면 날마다, 때로는 거칠고 높게, 때로는 얕고 부드럽게, 파고의 높낮이는 달라도 파도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사르륵사르륵  모래를 감싸 안듯, 다독다독 다독이듯 부드럽기 그지 없는 천사의 치마 자락 같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치마 자락에 폴싹 뛰어들어 어린애처럼 투정이라도 부리며 실컷 울고 싶을 만큼 정겨운 때도 있다. 이렇듯, 파도가 잔잔한 때면 물과 하나가 되어 물장구를 치면서 키득거리는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비키니 수영복의 눈부신 아가씨들이 한껏 뽐내며 백사장을 활보하기도 하고 수영도 하며 물놀이를 즐기지만, 막상 집채보다 크고 태산만큼 높은 파도가 휩쓰는 때면 유약한 아이들과 여인들, 뿐만 아니라 장정들이라고 하여도 보통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바다의 위력이다.

바다는 이렇듯 무딘 감성을 일깨우고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바닷가에 매일처럼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파도 앞에서 모두 꼭 같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배우게 된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극명하게 다른 반응으로 대응하는 두 부류의 인생을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으르렁거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더 멀리 달아나려고 도망을 치는 나처럼 유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고의 높이가 더해 갈수록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파도타기를 즐기는 근육질의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즉, 꼭 같은 환경에서 두 가지 다른 반응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찌 파도 앞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생이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모든 분야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천한 자와 존귀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교수와 학생은 그들대로, 모두 꼭 같은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로 나뉘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뉜다. 알곡과 쭉정이, 가라지와 곡식,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감사의 사람과 불평의 사람 등등...

믿음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감사하는 수준과 믿음은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감사하는 수준을 봐서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잴 수 있다. 신약에서 병 고침을 받은 열 문둥이 중에서 감사를 알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만 참 믿음의 소유자로 주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볼 때, 감사하는 수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재는 시금석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 된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가 쉬운 대로 부모 자식 간의 예를 한번 살펴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다. 부부지간도 형제. 자매도 이웃 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이것은 육신 적인 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와중에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재앙 속에서 여지껏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십자가의 사랑…인간 편에서 보면, 값없이 그저 받는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꾸어야만 할 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 하나만 제대로 깨닫게 되어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업그레이드 시키자

업그레이드된 감사란 어떤 것일까?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 다니엘의 감사가 바로 이런 감사다. 다니엘은 주어진 환경이 좋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가정이 안전하고 일신이 평안하거나 받은바 은혜가 커서 그 은혜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감사는 죽음 앞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단 6: 10 절 참조)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였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아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 감사에도 두 종류의 감사가 있다. 주어진 환경이 좋을 때 감사하는 것, 주어진 환경이 열악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은총도 “일반은총”이 있고 “특별은총”이 있다. 일반은총이란 세상사람 모두가 누리는 은총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햇빛과 비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 동일하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지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로 선택된 택자들, 창세전부터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들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이 마음속에서 받아지고 확실하게 믿어진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특별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분류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당신 자신이 믿어진다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도의 입에서,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와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실상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서 어려울 때 더욱 감사하라고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려움이 당하게 되면 정금 같은 믿음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네 속물이 위대한 신적 기적을 체험한다고 하여서 감사의 마음이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눈앞에서 홍해가 쫙 갈라지는 크나큰 기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신적 기적이 두 눈 앞에서 실현되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하였고,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는 순간적이었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과 입에서 불평이 떠나질 않았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나는 예외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감사와 불평이 번갈아가면서 내 마음을 주장한다면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개인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도움이 될가 하여 잠시 나눈다. 우리가 개척하였고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사랑하던 교회가 이번에 큰 환란을 통과하였다. 길고 캄캄한 터널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내던져졌다.(그렇다 순전히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예전의 숫자 2/3 정도가 대풍에 흔들리는 선 과실처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1/3정도가 가차 없이 돌아섰고, 1/3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무대응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작정하였으나 만들어진 말들, 온갖 유언비어가 우리 지역을 강타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는 일들이었기에 심히 당황이 되었고 낙심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함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은 선하시고 모든 일에 섭리하신다.”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을 깨달았다. 이런 때일수록 고개를 들어야 한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은 한, 반드시 주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큰 환난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은 지금 이 자리에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세워주신 그분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은 항상 내편이시다!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만이 내가 할 나의 본분이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정하니까 마음의 동요가 끝나고 하늘의 평강이 몰려왔다. 물론, 아직은 복잡하고 어렵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확실하게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환난 중에서 성도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목하 배우고 있는 중이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양무리가 모인 곳이다, 그 양무리가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양들의 선택이 내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목자 되신 그분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나니까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몰려왔고 찬송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교인 쟁탈전도 아닌데 성도가 어디로 가건 얼마가 모이건,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믿으며 교회와 교회 사이에 심판하실 분도 그분이신데 우리가 서로 다툴 일이 뭐가 있는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라 명하신 그분을 감사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자. 내 교회, 내 이웃, 내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함을 깨닫고 따뜻하게 치하해주는 말, 감사함을 나타내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특별운동이라도 벌려보는 한 주간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듯, 헤아려보면 감사할 조건이 많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감사치 못하는 것이다.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닫는 곳에 감사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환란 중에서 감사하는 성도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성도이다. 이런 차원이 높은 감사, 업그레이드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23)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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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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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듯이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여러 다른 곳에 거처한다할지라도 마음에 역사하시기에 그들은 같은 믿음과 같은 진리를 믿고 받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
      내적인 부름은 성령님께서 외적인 말씀의 부르심과 동반하여 그 사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러브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연합할 자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윌리암 아메스
      그리스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원리가 작용되는 과정이다. 내적인 부름은 영적인 계몽이며, 여기서 약속들은 내적인 말씀에 의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된다. -윌리암 아메스-
      하나님에 의해 영적이며 신적인 빛이 곧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데 이는 자연적인 도구에 의해 얻어진 무엇과는 전혀다른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육신에 있는 편견은 거룩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제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진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적절히 민감해 지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교리에 대한 완전한 반감이다. 이것은 진리를 입증하는 논쟁에 대해 무익하며 마음에 힘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적 교리들의 영적인 탁월함을 밝혔을 때에는 이것이 모든 반감을 부수고 모든 편견을 제거하며 이성을 거룩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논쟁의 힘에 마음을 열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죄로 죽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은혜로 불러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며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한다 -프란시스 튜레틴
      양자됨은 우리에게 아들의 특권, 즉 아들들의 새로운 본성의 거듭남이다. -스테판 차르녹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렇듯이 두번째 창조, 거듭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지식과 의와 진실한 거룩성, 사랑에서 새롭게 만드신다. -바바서 파웰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변화이다. -토마스 아담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일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한데, 다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 세상의 어떤 약도 성령님의 거룩케 하는 역사가 없이는, 상처와 병이난 부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료하고 고칠 수는 없다.
      -오지 스윈녹-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꾸밈: 최송연의 목양연가"묵상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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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뿐인 여자, 그 상처들로 인하여 몹시도 뒤틀리고 꼬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 낮 뙤약볕 아래 우물가에서 낯선 남자가 물을 좀 달라 하는데 차갑게 쏘아붙입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달라 하십니까?”
유대인에게 몹시 반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주님이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내게 생수를 구했으리라.” 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을 계시하자,
“흥, 두레박커녕 바가지도 없이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가요?” 하고 쏘아 부칩니다.
주님이 다시 “내가 주는 물을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시자,
“그래요? 그럼 그 물 내게 주세요, 다시는 여기 물 뜨러 올 필요 없겠네요.” 하고 비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꼬고 쏘는 여자의 말대꾸를 계속 받아 주시며,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계시해 나가십니다.

주님이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남편에게 있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전 남편 없습니다.”
“그래, 남편 없다고 생수 못 주겠다는 거지요?”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놀라고 맙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갈 데까지 다 간 타락한 여자, 동네사람 눈을 피해 땡볕아래 물길러 우물에 나온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 사람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선지자시로군요.”

그런데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생활과 죄를 말갛게 드러내시는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도망하지 않고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말 속에는 그 옛날 북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이를 하나님이라면서 예배하던 우상숭배,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흩어지고 더럽혀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해 온 뼈아픈 민족의 과거, 그 속에서 또한 타락하여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적 비관과 원망과 냉소가 깔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상처투성이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기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 때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글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는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안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예표였습니다.
성막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겠지요.”
사마리아 여자가 그 비참한 환경과 삶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 그의 질문과 말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로라.”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겠습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라니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난리를 합니다.
그 때까지의 좌절과 아픔과 차별과 모멸과 수치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참 생수요 진리가 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켜버린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구원을 기다린, 상처뿐이었던, 주님을 만난 여인의 변화요 승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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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세계 최대의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숲과 하천이 흐르는 동굴 안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 동굴은 200-500만 년 전 유수침식지 아래
석회암 작용으로 형성되었고

산 중심부의 꼭대기 부분 돌들이 무너져 내려
거대한 내부 공간이 만들어졌다.

동굴은 길이가 5.5마일(약 8855m), 넓이 650피트(약 198m), 높이 150m로
세계 최대 동굴이며 아직까지 계속해서 확장 중이다.

동굴 안에는 적어도 150개의 독립된 작은 동굴이 있고
호수와 하천, 삼림까지 존재한다.

이 동굴은 산중에 있는 하류 동굴이란 의미로
가끔씩 비춰지는 햇빛을 통해

탐험가는 운좋게도 동굴 안의 복잡한 석질구조를 볼 수 있었다.

동굴은 쩡 손 산맥 아래 위치하며 몇 백만 년 동안
베트남 중부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1991년에야 한 현지 농민이 눈보라를 피하려다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농민은 그 후 이 동굴을
다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2009년에 영국 동굴탐험대가
그 농민의 도움으로 마침내 동굴을 발견해

그때부터 이 동굴은 정식으로 세계 최대의 동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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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 스테판 차녹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호후5:17)

 

1. 본문은 놀라운 교리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이라면, 그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가 대신한 그 모든 사람은 다 죽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근심해서는 안 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그분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칼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신 분의 영광과 그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이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은 삶의 목적이 다르다. 자아는 모든 자연인의 최상의 목적이다. 자연인에게는 자아가 그 목적이고, 거듭난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자신을 의존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담의 큰 죄악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담은 자기 자신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피 속에도 그러한 욕망이 흐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이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찍 죽음을 당하사--우리들을 피로 구속해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즉, 우리를 더러운 욕망의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셔서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다(벧전1:18,19). 그저 가까운 선조들의 잘못된 길에서뿐만 아니라, 첫 조상 아담의 망령된 행실에서도 구속되었다. 자기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 흉악한 우상숭배, 곧 자기숭배에 빠져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4) ‘우리를 위하여’ 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그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통치권을 얻으셨다.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그 통치권이 확증되었고,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과 봉사의 의무가 늘어났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성장해 갈 때, 그것은 영적 성장의 위대한 증표가 될 것이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이다. 그분의 즉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후5:16).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외적 치장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분을 알게 된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난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이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인다.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자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게 되고, 누구나 그분에게로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들은 지나갔다. 대신에 하나님께 지명하신 새로운 머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 그렇게 지명되신 분을 우리의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죄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며, 또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담이 가장 실패했던 것은 불신앙과 자기 사랑이었다.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은혜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 스테판 차녹, 『거듭남의 본질』, pp 2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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