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크리스챤 입니다 "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때, 나는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많지만, 잃었던 나를 찾고 용서받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때 나는 자랑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늘 휘청거리기에 목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때, 나는 성공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도 많지만,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도록 예수님이 용기를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 때, 나는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점이 너무 많은데도, 주님은 나를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때, 나는 아직도 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의 이 아픔을 예수님과 나누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보다 선하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단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면서~
    추워지는 날씨에도 모두모두 건강 조심하시고 날마다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12월 되시길 소망합니다~~ ^^

출처: 사모님사모님/참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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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ㅁ


교리를 가르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과 가치 (아더 핑크)



“하나님의 말씀을 보든, 교회 역사를 보든 간에,

교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장기간 결핍될 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결과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성도의 이해를 밝게 해주며, 지성을 훈련하며, 판단력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함이다.

교리는 감사의 동기를 마련하여 주며, 선행에의 동기를 마련하여 준다.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전혀 배우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이

건전할 수가 없다.

근본적인 교리를 “하나님 말씀의 초보”(히 5:12), 혹은 ‘성경의 기본진리’라고 하는데,

이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감동과 성경의 권위’, ‘영원토록 복되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성들’,

‘그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 ‘우리의 타락’,

‘중생’, ‘무조건적인 칭의’

이런 것들은 진리의 성전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들인데,

이것들이 없으면 성전은 유지될 수 없다.


옛적에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베임을 당하는도다)” (호 4:6)

그리고는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목마를 것이며..(사 5:13)

하나님께서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고 하신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시의 교리를 통하여 제일 먼저 전달되어 졌다.

교리적인 기독교가 되어야만 실제적인 기독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이 감정이나 충동적인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원리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깨닫고 바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에 의해서 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우리는 진리의 지식(요 17:3, 딤전 2:4)과 진리에 대한 믿음(살후 2:13)에 의해

구원받는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또한 우리는 진리에 의하여 자유(요 8:32)케 되고 성화(요17:17)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의 은혜도 증가한다.(벧후 1:2, 3:1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우리를 보존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이다.(시 61:7, 잠 21:28)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 61:7),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 21:28)〕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이사야 19:10에 나온다.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히브리 원어는 ‘터’)에 근심하리라”(사 19:10)

우리의 계획과 행동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2차적인 진리들이 도출되는 곳이 바로 ‘1차적인 원리(*터)들’ 이다.

모든 교훈의 기초가 바로 이 진리들인 것이다.

‘의인의 믿음과 소망은 신앙의 원리들 위에 설립된다.’(메튜 헨리)

이 기초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동치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것을 시험해보신다.

‘신앙의 기초들이 무너질 때 의인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안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뒤흔드는 자들의 모든 계획들과 시도들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구해야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이 거룩한 믿음 위에 서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존 길)



지난 세기 동안 교리교육은 눈에 띄게 쇠퇴하여 갔다.

주의와 신조들이 무가치한 것들로 인식되었다.

신학공부보다는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 대한 공부에 열심 내었다.

‘우리에게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달라!’ 는 요청이 있었다.

이 요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는 

그 요구가 영적이며 적절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중요한 의미도 내포하지 못한 가상의 구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양성적 인격, 중보자적 특징, 

택함 받은 자와의 공적인 특징과 그들에 대한 구속사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그분의 신성, 독특한 인성, 약속의 머리되심, 

그리고 그분의 삼중직을 인정할 때만 형성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그리스도 교훈’(요이9)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분리(‘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교훈은 

주님의 신비한 인격과 그 큰 구원에 관한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신비)’(골 4:3)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진리의 말씀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영광뿐 아니라  기독교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교리에 나타나고 있는데,

교리는 인간의 고안물이 될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왕자의 죽으심, 

그분이 순종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은

가장 최고로 고상한 거룩하고도 신비한 진리들로서 

유일한 이성의 최고봉을 훨씬 능가하는 진리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우리들을 향하신 요구들과 그것을 실천하게 해주는 원동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리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진리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 그것들의 상호관계, 그 주제의 일치성, 영광의 주님의 대한 찬미 등을 

이해하게 될 때 분명하여 진다.

어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리가 일관성이 없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교리의 부수적인 것들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전체적인 이해와 안목이다.

그런데, 그것은 부지런하고 끈질긴 적용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설교는 많지만, 슬프게도 교육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선포하고,

그 각각의 관계를 설명하며, 진리의 전 영역을 보여주여야 하는 것이며,

균형에 따른 안정감을 얻게 하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가 나타나게 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공언할 뿐만 아니라, 증명도 해야 하며

확신시키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입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

(행17:2,3)는 말씀을 읽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인 능력을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것을 증명도 하지  않고 믿으라고 강권하지는 않았으며

자기가 강권하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를 내세웠다.

그는 복음의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교리들을 전파했는데,

그때마다 쉽고도 결정적인 논리로써  그것을 증명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4)

강론이 악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강단에서 그 강론을 그쳐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면,

올바를 원리들로부터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며,

명쾌하고도, 확실한 주장들을 추론해 낼 수도 있다.

어떤 명제의 진리들을 효과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며,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 대답한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볼 때 명백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보적인 문제인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때,

바울은 간단하면서도 인상 깊게 강론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먼저 이방세계 특성과 행위를 길게 증명한 후, 구약을 인용하여 결론짓기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과 양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여” 

그 로마의 관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행 26:25)


그러나, 슬프다!

이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설명하며,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경험만 외쳤으며 교리의 지식은 무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보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심지어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조차 결핍하고 있다.

소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설교들이 신학적인 강론을 대신하게 되었고

복음의 커다란 근본들은 모욕을 받고 있다.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되었던 지역에 다시 가톨릭이 들어가곤 했었다.

바로 그 때, 경험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건전한 교리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은 그 행위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마르고 시들게 될 때에 

쇠미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믿음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순종은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행위 없는 교리 또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지식들은 실천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와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처음 불을 밝힌 자는 또 다른 불에 이를 것이다.’(존 길)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먼저) 교훈과 (그 후에)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는 말씀의 순서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마찬가지로 디도에게도 분부하고 있다.

“이 말(3-7의 교훈)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기쁘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슬프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되,

그 줄기와 가지, 그 대의(大意)와 효력을 다 가르치는 자는 너무도 너무도 적다.

영적인 진리를 바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 보다

더 멋지게 영적인 마음을 꾸미는 교양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멀리하는 것도 거기서 시작된다.

영적인 결실도 거기서 시작된다.

교리는 하나의 틀(모형)이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던져 우리 마음의 모양을 얻는 것이다.(‘교훈의 본’, 롬 6:17)

뿌려진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 추수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늘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문하생의 삶이 결정된다.

16,17세기의 기독교를 상징했던 그 순결성, 그 독실함, 그 열심,

인간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설교는 주로 교리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과 교훈을 포기하느니

그들의 생명을 내어 놓았고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행동이 선하기만 하며, 그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께 옳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가장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이 청교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찰스 스펄젼,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리 멕체인,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교리 전파에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첨부파일 교리교육의 영적인 가치.hw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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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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