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두 천사가 여행 도중 어느 부자집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부자는 천사들에게 수많은 객실 중
        차가운 지하실의 비좁은 공간을 내 주었다.
          두 천사가 잠자리에 들 무렵,
          늙은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주었다.
          젊은 천사가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대우하는 자들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늙은 천사가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네" 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밤 두 천사는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농부인 집주인 부부는 자신들도 부족한 음식을
          함께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침대까지도 내주었다.
            다음날 아침, 농부 내외가 암소가 죽은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은 암소는 그들이 우유를 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이것을 보고
            젊은 천사가 화가나서 늙은 천사에게 따졌다.
            부잣집은 모든걸 가졌으면서도 불친절 했는데 도와주었으면서
            궁핍한 살림에도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나누었던
            농부의 귀중한 암소를 어떻게 죽게 놔둘 수 있나요?

            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다.
            부자집에서 잘때 난 벽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그래서 나는 그 금을 찾지 못하게 구멍을 막은걸세.
            그런데 어제밤 우리가 농부의 집에서 잘 때는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내가 대신 암소를 데려가라고 했지.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네.
              살다보면 이해할 수도 없고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날 선 칼이되어
              자신과 주변을 상처 입히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보이는 이면에 숨어 있는 따스한 천사들의 메시지를 읽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합니다.

                I. O. U - Carry & 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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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대스다 못가의 인생



                  < 요한복음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이하 생략)



                  서울의 사대문, 사소문의 이름들을 아십니까?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이라고요? 아니 대문에다 동서남북만 갖다 붙이면 되나요?
                  아닙니다. 원래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이라고 합니다.
                  사소문도 마찬가지고요. 북에는 창의문(자하문), 동에는 혜화문(홍화문), 서에는 소덕문(소의문), 남에는 광희문(수구문).
                  수구문은 발음이 바뀌어 시구문(시체 문, 시체가 나가는 문)이 되었고요.

                  예루살렘 성에도 많은 문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문들도 동서남북으로 이름을 붙인 문은 없고요.
                  그 중 황금의 문과 미문은 오늘날도 나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황금의 문으로 메시아가 들어온다고 믿고 있고 이슬람은 '메시아 못 들어온다.' 그 황금의 문을 벽돌로 꽉 막아놓았지요.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유대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많은 훼방과 위협 속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이야기가 성경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3장에는 문들과 망대들의 이름과 성벽구간 별로 누가 건축을 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느헤미야 3장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여기에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가장 먼저 건축한 문이 양문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문들의 이름이 양문, 어문, 옛문, 본문, 골짜기문, 샘문, 엘리야십의 집 문, 수문, 마문, 함밉갓문, 모두 10개입니다.

                  성경의 맨 뒷부분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 몇 개라고 되어 있지요?
                  열 두 문이지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거기 써져 있고요.

                  아무튼........,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 곧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희생제물인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양문에 어린양 예수님이 오셨으니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 병자들의 앉은 모습은 전혀 은혜롭지 못 합니다.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을 동하기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이 때다!” 비호같이 제일 먼저 달려 들어가는 한 사람만이 병이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절에 기록된 병자들의 종류를 보십시오.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세 종류입니다.
                  소경이나 절뚝발이(앉은뱅이), 혈기마른 자(중풍병자, 반신불수)는 모두 제 힘으로는 못으로 달려 들어갈 수 없는 병자들입니다.
                  그러니 잽싸게 달려 들어갈 수 있는 병자는 어떤 병자이겠습니까?
                  아마도 치통환자나 무좀환자 같은, 병자도 아닌 병자들이거나 꾀병 환자들 아닐까요?
                  하긴 그런 종류의 별 것 아닌 병을 고치겠다고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천사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병이 가벼운 재빠른 병자 한 사람만이 병 나음을 입는다면...
                  결국 그곳은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현장, 뒤처지는 자는 도태되어야 하는 살벌한 세상의 축소판인지도 모릅니다.
                  상태가 중한 혈기 마른 병자, 중풍병자에게는 절대로 가장 먼저 못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풍병자는 전혀 가능성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며 38년이나 그 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왕 나왔으니 ‘삼십팔 년’이라는 숫자도 살펴봅시다.
                  우리말에는 화투용어에서 나온 삼팔따라지, 따라지 인생이라는 자조의 말이 있습니다.
                  삼팔광땡이니 대박이니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삼팔선이라는 선으로 민족이 갈라진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니 신명기 2장 14절에 비극적인 “삼십팔 년”이 나오는군요.
                  열 정탐군의 말에 겁을 먹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이스라엘 백성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군인이 “삼십팔 년” 동안 광야에서 멸절되었습니다.
                  왜 40년이 아니고 38년이냐고요?
                  출애굽해서 시내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고 성막을 만들고 가데스바네아까지 오는데 2년이 지났거든요.

                  38년.......
                  38년 된 중풍병자의 모습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면...
                  바로 고통 속에서 소망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 하는 죄인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나긴 삼십팔 년을 베데스다 못 가에 앉아있던 중풍병자에게 주님은 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아직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희망을 가지고 사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대답은 병이 낫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매달려 있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나이다.”
                  어느덧 병이 낫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못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요?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여 행복과 불행을 느낍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과 누울 곳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데
                  풍성한 물질문명 속에서 오히려 상대적 빈곤과 절망에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불행이 아닐까요?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목적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그게 죄인들 세상이요 영혼이 병든 병자들의 인생살이인지도 모릅니다.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인생의 목적은 잃어버리고, 어떻게 사느냐, 사는 수단에만 매달려 사는 오늘날 세태 ....!
                  당신은 행복합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당신의 삶은 목적입니까 수단입니까?
                  당신의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까, 이 땅 살아가는 동안의 평안과 물질과 부귀입니까?

                  어쨌든 그런 병자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 병자가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박살나고 다시 세워지는 순간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못에 먼저 들어가는 38년 한이 된 목표가 우스워지는, 전혀 새로운 출발의 순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삶, 차원이 다른 삶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에 38년 중풍병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베데스다 못 가에서
                  왜 사는지도 모르는 채 허망한 꿈을 좇아 인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에 벌떡 일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영원한 생명의 소망 가운데 걷고 계십니까?
                  주님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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