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케팅 원리 적용의 결과

 

- 박순용 목사 (배교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 기독교)

 

 

실용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해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아무리 놀랄 만한 마케팅 원리를 동원해도,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칭의, 성화의 삶과 최후의 심판 등의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포장할 수 없습니다.

 

실용주의의 더 심각한 위험은 이러한 현상이 초래할 결과에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교회에 적용됨으로써 파생된 결과는 크게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 예배에 대한 왜곡, 말씀 선포와 교육에 대한 왜곡, 회심관에 대한 왜곡, 하나님의 복과 인정에 대한 왜곡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왜곡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입니다.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가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 없어도 된다는 인식, 곧 현대판 이신론을 만들었습니다. 이신론이란 하나님의 존재만 인정할 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론입니다.


즉, 교회가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람의 구원과 회심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전도 방법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입니다. 교회가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후 사람들에게 세상을 맡겼듯이, 구원도 그 길만 하나님이 마련하셨을 뿐 이후의 것은 사람의 수완에 맡겨 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잘 팔 수 있도록 옆에서 보조 역할이나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진리 왜곡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조장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까지 양산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의 왜곡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용주의적 신앙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가 교회를 움직이면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절대적인 신뢰는 답답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인간 손에 맡겨 두고 일절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하나님에게 누가 절대적인 의존과 신뢰를 바치겠습니까?

 

 

2. 예배에 대한 왜곡


두 번째 결과는, 예배에 대한 왜곡입니다. 문화 행사와 예배 사이의 경계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예배를 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있습니다.


온갖 문화 프로그램을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인 예배에까지 끌어들이고, 부담 없는 예배를 표방하며 예배를 오락화 하는 일까지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강대상의 주요 게스트가 되고, 예배 시간 대부분이 다양한 공연으로 채워지는 일들을 이제는 아무도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배를 즐기는 태도가 점점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구도자 중심적인 예배’ 개념을 교회에 도입하면서, 예배의 목적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것보다, 참석자들의 욕구 충족과 즐거움을 더 우선시합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방식대로 성전에 나와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그리고 급기야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마케팅 원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처럼 조작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저 종교적 유흥에 불과한 자리를 만들고 있기에 하나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웰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케팅 위주의 접근이 안겨 준 최고의 실망은 그들이 최고의 정찬으로 내놓은 예배가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실 열 명 중 여덟 명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예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와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결과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배다운 예배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고 경건한 예배, 하나님께 집중된 예배, 우리가 만든 분위기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이끄심으로 생겨난 감동이 있는 예배를 찾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산만하고, 시끄럽고, 조작과 선동이 난무하는 예배가 점점 흔해집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모습을 답답하고 칙칙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다음 세대에 대해 걱정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젊은 세대는 마케팅 원리에 따르지 않는 교회를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공연과 결합한 형식의 예배를 세련된 예배라고 생각하며 동경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몇 십 년 후, 하나님께 집중하는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예배가 오히려 독선에 치우친 이상한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왜곡 (대중의 기호 중심)


세 번째 결과는, 교회 안에서 제시하는 가르침과 설교 메시지의 왜곡입니다. 소비자 만족을 최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따르려면, 소비자가 좋아하는 것은 부각하고, 소비자가 싫어하는 것은 기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당에 와 있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로 선포하는 설교 주제나 사람들이 서점가에서 주목하는 기독교 서적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죄와 심판이나 복잡하고 지루한 교리들을 다룬 것은 여간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보나 예수 믿고 잘 되는 것, 복과 치유, 우리 삶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의 제시 등에만 열을 올릴 뿐,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회개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실제로 1983년 미국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그 해 기독교 출판사 여덟 곳에서 출판된 도서의 87.8퍼센트가 자기 계발과 성공, 대인 관계 기술과 자존감 향상 등 현대인이 선호하는 충족적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동향은 우리나라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행한 경향은 10~20년 안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합니다. 그래서 일단 미국에서 대중성을 획득한 아이템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하지 않고 수입 먼저 하고 보는 형편입니다. 그 결과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교회 속에도 깊이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마케팅 원리를 따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말하는 교회가 과연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을까요? 죄에 대한 선포 없이, 회개에 대한 언급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불가능합니다.


 

마케팅 원리로 파악한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이 파악하고 있는 인간의 필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복음을 듣고 스스로 순종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을 제시하는 동시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실용주의 관점은, 인간은 타락해서 성령 하나님의 개입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없이는, 그 누구도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수용할 수 없다는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효과적인 방법과 뛰어난 수완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팔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심리 치료법, 잘 생활할 수 있는 테크닉, 자신의 자아에 몰입하게 하는 가짜 복음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음은 효과적인 마케팅을 진행한다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 참혹한 죽음을 야기한 우리의 죄, 이것이 수완 좋게 전달한다고 해서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 떠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특성입니다.


실용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해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아무리 놀랄 만한 마케팅 원리를 동원해도,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칭의, 성화의 삶과 최후의 심판 등의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포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끼는 것은 전할 수 없는 교회,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는 교회, 심리학적 위로밖에는 줄 것이 없는 교회, 이러한 모습의 교회를 원하십니까?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수용한 교회의 종착지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 출처 :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5820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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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 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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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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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 후크마의 중생의 본질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알미니안들ㅡ처음에는 레몽스트랑트(Remonstrants)라고 불리움ㅡ은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뤄지는 변화라고 돌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주장했다. 이 돌트회의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펠라기우스주의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했다:

     

    돌트 총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ㅡ여기서 ‘돌아선다’는 것은 ‘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ㅡ 은혜는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본성에 가장 적당하고 고상한 방법인 설득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오류를 배척한다.18)

     

    돌트에 모였던 신학자들이 알미안주의자들에 대답했던 내용들, 특히 그들이 볼 때 성경적 중생관은 인용할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19)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본성상 영적으로 죽었다.(엡 2:1,5; 골 2:13; 롬 8:7,8). 죽은 죄인들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께 대한 저항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순간이다. 중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불란서 신학자인 요한 카메론(John Cameron:1579~1625)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에서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나 지성을 밝게 비춰서 사람의 의지가 결과적으로 도덕적, 영적 문제에서 지성의 인도함을 따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장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배격됐다.

     

    이 견해는 기능 구조 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잘못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실제적이기도 하다. 내 마음으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죄와 범법함들 가운데서 죽어’ 있다면 나는 결토 올바른 행동들을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트회의에 섰던 알미니안들은 중생에서 의지의 역할에 대해 온당치 못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람 의지는 죄의 영향을 절대로 받지 않으며,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의지가 잘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한 장애물이란 “마음의 어두움과 억제되지 못한 감정들”20)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은 전적 변화로서 한 인격 전체를 변화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용어를 빌리자면, 중생은 새로운 마음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인격의 중심부이며, 모든 내적 기능의 중앙으로 정신적, 영적 경험들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즉 생각, 느낌, 의지, 믿는 일, 기도하는 일, 찬양하는 일 등이 결국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중생 시에 새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원천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 된 성향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것은 아니다.21)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점은 우리의 자연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태도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리가 본성상 죄와 부패 가운데 죽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자연적 방법으로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소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영역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의식적 삶속에 반영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의식의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은 중생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용어를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내가 새마음을 너에게 줄 것이라.”, “만일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이러한 종류의 표현구들은 중생 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 속에 있는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

     

    18)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7항. 근자에 나온 알미니안적 중생론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이하 각주 생략}···

     

    19) Canons of Dort, Ⅲ~Ⅳ, Art. 12. Art. 11도 보라. 개혁주의 신조들 가운데 나타난 중생에 관한 언급으로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질문 8항; [벨직 신앙고백문] 24항(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유효한 부르심’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Ⅹ장 및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31항을 보라.

     

    20)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3항.

     

    21) 중생과 죄 된 성향들 간의 관계는 본서 12장에서 다룰 것이다.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69쪽~173쪽.

    * 읽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누고 칸을 띄웠습니다.

     

     

    http://cafe.daum.net/jesuname/BsLS/77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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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회개하십시오!!

    '큰빛 교회' 담임목사부터 회개하십시오

     

    홍혜선이를 교회로 초청해서 성도들에게

    거짓 영에 미혹시킨 수 많은 한국교회 분별없는 담임목사들!!

    옷을 찢으며 회개하십시오


    홍혜선의 마이크 밑에서 거짓말에 속고 있는 성도들에게 

    홍혜선이가 서있던 강대상에서 담임목사 당신이 무릎꿇고 사죄하란 말입니다. 


    생각 좀 하며 목회 합시다!

    성경 좀 보며 목회 합시다! 


    벌써 홍혜선의 거짓말에 생각없는 목사가 성도들 이끌고 도망갔으니 

    정말 한심한 것을 넘어 헛웃음이 나올지경입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917

     

     


     

     

    <홍혜선과 아버지>

     

     

     

    연극배우였던 홍혜선 조부모 부모를 따라 연극을 하고

    글쓰는 재주는 있어서 연극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사람이


    하나님과 홍혜선이를 주인공으로 환타지 소설 몇 개 쓰고 강대상에서 

    마이크 잡고 연극하는 것 좀 보고 듣고는

    목사들이 더 난리가 나서 성도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 넣는

    이런 무식한 짓들을 그만 멈추란 말입니다.  


    한심하고 답답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이 무엇인지 

    홍혜선이를 자기 교회로 초청한 목사님들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홍혜선이를 초청할 만큼 이해력이 떨어지는 목사님들을 위해

    아이들이 보는 쉬운 번역서인 '쉬운성경'으로 가르쳐 드립니다. 

     

    고전 14:3-4

    3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를 주는 말을 합니다.

    4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덕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사람

      은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하고 영적인 은사이며 축복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의 목적과 이유는 

     

    한국전쟁이 나서 한국이 망조에 이른다는 예언을 말하는 목적이 아니라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데 홍혜선이가 기도해서 폭발하지 않는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예언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사역한다고 교회 조명 꺼놓고 찬양소리 크게 틀어놓고

    귀가 찢어지게 마이크 소리로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러라고 주시는 예언이 아니라...

     

    '홍사목(홍혜선을 사랑하는 목사들)' 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냐면 

     

    14, 사람(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며,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를 주고

    15,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거 하라고 하나님이 예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 자녀들에게 격려하며 위로 하라고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홍혜선의 예언이라는 말 중에 덕을 세우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말 한토시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듣고 싶고, 믿고 싶은 목사님들의

    분별없는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망한다'. '전쟁난다'. '목사들 회개하라'. '성도들 회개하라'

    맞는 말입니다.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도 맞았고 신약시대에도 맞았고 미래에도 맞을 말들입니다.

     

    인류가 존재하고 인간의 죄성이 있는 한 100% 맞을 말들입니다. 

    홍혜선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망조 예언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위협하고, 강압적이고, 독설적인.... 이런 단어조차 사용하고 싶지 않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는 듣보잡 예언과 성령사역을 하는 홍씨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강대상에서 성령사역한다고 헌금이나 

    갈취하는 부흥강사 '아류', 'imitation', '코스프레' 홍혜선이를

     

    미국에서 건너와 영어단어 몇 개 쓰면서

    마이크 잡고 설교하니 그럴듯 해 보여 여기 저기 목사들이

     

    "우리 교회도 오세요, 우리 교회로 와 주세요" 

     

    그렇게 교회에서 홍혜선이 거짓말 듣고 몇 십만원, 몇 백만원 

    두둑하니 감사하다고 사례금 줄텐데

    그 돈은 어디에서 나온 돈입니까? 성도들의 헌금 아닌가?

    왜 헌금을 그렇게 쓰레기 처럼 버립니까?

    담임목사가 그렇게 쓸데없이 버리라고 성도들이 힘들게 헌금하는 줄 아시오?


    예수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노릇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목사들이 나서서 호도하지 말란 말입니다. 


    홍혜선이야 자기 환타지에 빠져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 거짓말을 들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망가지고 상처받고 그래서 

    실족한 믿음의 성도들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누가 멧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지겠습니까? 

     

    홍혜선을 초청해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듣게 한 

    당신들이 그 엄청난 죄의 대가를 책임지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예언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겠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런 심판의 예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 모두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예언적 소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망한다'라는 예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와 사망에 눌려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격려와 위로와 복음을 전하라고 예언을 주시는 것이지

    전쟁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빠지라고 예언을 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홍혜선이 처럼 12월에 한국전쟁이 나고 백두산이 자기가 기도해서

    폭발하지 않는다는 망조의 예언을 듣고

    목사들이 더 날뛰는 것을 보면 나도 목사지만 참 부끄럽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만 선포하십시요.

     

     


     

     

     

    어떤 인터넷 정보에서 보니 홍혜선이와 함께 사역했던 사람이

    예전에 홍씨가 성령사역한답시고 교회목사와 눈이 맞아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홍씨의 상반신 누드 사진을 첨부로 올렸습니다.

     

    "과거에 일들이라 그렇수도 있고 이제는 하나님의 예언을 하는 사람이다."

    '홍사목' 목사들 중에 이렇게 믿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유부남과 간음을 저지른 여자에게 하나님이 과연 남한과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영적 예언의 권세를 주셨을까요?

     

    그리고 한국전쟁이 어디 동네 양아치들 싸움입니까?

    한반도에 걸쳐있는 패권국가들이 강건너 불구경하고 있을까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세계에서 가장 쎈 나라가 다리 하나씩 

    걸쳐놓은 판국에 동네 양아치 싸움으로 끝날 것 같냐 이 말입니다.

     

    세계가 뒤 흔들리고 인류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전쟁을

    목사와 간통이나 하고 연극 시나리오 쓰던 하나님 이름팔이나 

    하는 여자에게 이 엄청난 인류의 역사를 말씀해 주셨겠냐 이 말이외다.

     

    "이제는 회개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령한 사람이 됐다"

    그래도 이렇게 믿고 싶습니까?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수백번 왕복하고

    하나님의 직통 계시와 예언을 들으시고

    백두산이 자기 기도 때문에 안터지고 

    한국전쟁도 자기 기도 덕분에 안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을까요? 


    홍혜선이가 정말 정상인지 귀가 있으면 좀 제대로 보란 말이오!!


    '홍사목' 목사들 덕분에 서울 부터 지방 곳곳 교회 강대상에서 굿판을 벌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굿판 한번 신나게 벌리고 성도들의 헌금 뚱뚱하게 수거하고 미국으로 가면서 홍혜선이가 하는 소리를 


    귀가 있으면 좀 제대로 들어보시라 이 말입니다!


     

    <2014.11.29.출국>

     

     미국으로 출국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 '홍사목' 목사들 홍혜선이 불러 놓고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광기를 재현하고 있으니 무아지경이오.

    이민교회 힘들면 더 성경보고 기도를 해야 할 일이지 홍혜선이가 왠 말입니까!


    20년 전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오신다는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홍사목' 목사들이나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014년 12월 14일 주일 04:30분" 한국전쟁 일어난다는 홍혜선 예언입니다.

    12월 14일 주일아침 예배시간 홍혜선이를 불렀던 한국과 미국의 '홍사목'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12월 14일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성도들에게 부끄러워서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지 내가 더 걱정이 됩니다.


     

     



    목사님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생각 좀 하며, 성경 좀 보며, 분별 좀 하며 목회 합시다. 

     

    제발 더는 하나님 교회에 기독교 무당들 데려와서

    성도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지 맙시다. 


    그래도 무당들이 신뢰가 가면 '홍사목' 당신들끼리 한데 모여

    거기서 기독교 굿판이나 신명나게 하십시오.

    내가 얼음띄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씩 보내드리다.


    이런 후안무치한 믿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렇게 할일 없고 생각없으면 조용히 목양실에 앉아 다시한번 

    창세기부터 성경통독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하기 싫으면 올 겨울 눈이 많이 온다고 하니 거리마다 

    눈이나 쓸면서 사회봉사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기독교 무당에게 봉사하느니 눈길이나 쓸면서 좋은 일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독교 무당짓 하지 말고

    성도들 선무당이 하는 굿판 자리에 끌고가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그렇게 좋거든 본인만 혼자 가시기 바랍니다. 


     

    나도 홍혜선이 마냥 예언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교회에 무당하나 불러놓고 굿판 벌려 

    성도들을 미혹하게 한 모든 목사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기독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입니다.
    |
    글쓴이 : 志咸| 원글보기

     



    (written by 90세 노인)
    ♥이 글은
    우리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읽어야만 하는 글입니다!!
    반드시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이 글은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플레인 딜러(Plain Dealer)에 사는
    90세 노인인 레지나 브렛(Regina Brett)이 쓴 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예전에 내가 인생에서 배운 45가지의 교훈을 글로 적었다.
    그 글이 내가 인생에서 지금까지 썼던 가장 유용한 칼럼이다.
    내 나이는 이제 8월이면 90이 넘는다.
    그래서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그 칼럼을 게재한다.“



    1.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생은 좋습니다.


    2. 의심이 들 때는 그저 약간만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3.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인생을 즐기십시오.


    4.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의 직업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친구와 가족만이 당신 곁을 지켜줄 것입니다.

     

    5. 카드빚은 매달마다 정산하십시오.



    6. 당신이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 스스로 진실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7. 누군가와 함께 우십시오.
    혼자 우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을 치유해 줄 것입니다.


    8. 신에게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신은 그것을 받아줄 수 있습니다.

     

    9. 첫월급을 탈 때부터 은퇴할 때를 대비하여 저축을 시작하십시오.

     

    10.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쓸데없는 짓입니다.



    11.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과거가 현재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12.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13.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14. 만일 어떤 인간관계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면,
    그런 인간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15.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결코 눈을 깜빡거리지 않습니다.



    16. 숨을 깊이 들이쉬십시오.
    그럼 당신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17.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잡동사니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18. 어떤 고통이든지간에 그것이 실제로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항상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19. 행복해지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0. 당신이 인생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대답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21. 촛불을 켜십시오. 좋은 침대시트를 쓰십시오.
    근사한 속옷을 입으십시오.
    그런 것들을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지 마십시오.
    오늘이 바로 가장 특별한 날입니다.

     

    22. 준비는 항상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하고,
    실전에서는 흐름에 따르십시오.

     

    23. 괴짜가 되십시오.
    자주색 옷을 입기 위해서 나이가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24. 섹스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뇌입니다.

     

    25. 당신 외에는 아무도 당신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26. 소위 재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일들을
    다음 질문의 틀 속에서 판단하십시오.
    ‘5년 후에도 이 일이 정말로 내게 중요할까?’

     

    27. 항상 삶을 선택하십시오.

     

    28. 용서하십시오.

     

    29.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30.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합니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31. 상황이 좋건 나쁘건, 상황은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32. 당신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 말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33. 기적을 믿으십시오.

     

    34. 신은 그저 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35. 인생을 청강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당히 앞으로 나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36. 성장해가는 노인이 죽어가는 젊은이보다 낫습니다.

     

    37. 당신 자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인생에서 오직 한번 뿐입니다.

     

    38. 결국 마지막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39. 매일 밖으로 나가십시오.
    기적이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0.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쌓아 올린 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41. 질투는 시간낭비입니다. 당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42.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43. 당신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잘 차려입고 당당하게 나오십시오.

     

    44. 양보하십시오.

     

    45. 인생에
    나비넥타이가 묶여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93%는 이글을 전송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글을 전송하는 7%중 한 명이라면
    이 글을 ‘7%’라는 제목으로 전송해 주십시오.

    저는 그 7%의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친구들은 우리가 선택한 가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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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의 삶 속에
    늘~좋은 소식이 가득한 날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배경음악:

    Just for You / Giovani Maradi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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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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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주관한 ‘21세기의 교회와 선교 -설교자를 위한 WCC 제10차 총회 주요 문서의 내용’ 주제 제3차 심포지엄이 15일 오후 서울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우진성 목사(과천영광교회)의 사회로 신익상(감신대)·최순양(이화여대)·박지은(이화여대)·이은경(감신대)·김희헌(성공회대) 박사가 발제자로, 김기석(청파교회)·김경호(들꽃향린교회) 목사가 논평자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발제자들은 지난 WCC 제10차 총회의 주요 문서들을 살피며, 그 안에 나타난 생명과 양성평등, 생태정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 평화통일 등의 문제들을 고찰했다.

    특히 최순양 박사는 ‘WCC 문서와 양성평등의 문제’를 다루며 “WCC 문서를 통틀어 볼 때 양성평등의 관점이 ‘세상을 향한’ 혹은 ‘주변부를 향한’ 부분에서는 적용돼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 또는 ‘신학교육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에는 적용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기독교 선교의 핵심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 및 한국 교회교육에 대한 반성과 제언’을 제목으로 발표한 이은경 박사는 “나와 남을 가르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하나요 이웃이며, 친구이자 가족이라는 생각을 먼저 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 신앙교육의 목적이며 교회의 책임”이라고 역설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서 ‘한국교회 선교과제로서의 통일선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김희헌 박사는 “한국교회가 통일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먼저 겸허히 서야 할 것”이라며 “과거에 형성된 반북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나 더욱 큰 경제적 욕망을 확장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복음의 요청에 대한 신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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