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를 누가 외칠 것인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편89:14-18]

무리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en clothed in soft raiment?]

보고 들어서 믿고 체험하여 더 믿고
더하여 은사를 받으라는 유혹적인 기도원식 예배는
방언은 필수가 되어 주문을 하듯이 외우듯 연습과 훈련을 하여 받고
치유가 기본이 되더니 어느 때부터
사이비 부흥사나 사이비 선교단체들은 순회(巡廻)팀을 만들어
집회 때 강사의 시나리오(?)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연출을 하게 되었다.
강사의 인도로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다가
‘보혈’ ‘피로 산 구원’등 자극적인 강사의 바람이 새는 마이크소리를 시작으로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라는 강권(强勸)적이 되면서
부흥사가 팀이 된 여기저기에 섞여있는 사람들 중 한사람을 지명하여 나오게 하여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하면서 머리를 밀면 쓰러지고
바닥에 엎드려 입신하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강사의 손이 몸에 대기만 하면
쓰러지는 일을 연출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제 참석자들에게 그리하여 군중심리처럼 쓰러지는
쓸어져야 죄 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는
이제 쓰러지지 않으면 아직 죄가 남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회개하라는 강사의 핀잔이나 야단을 여러 사람 앞에서 들어야 했다.
시범을 보인 입신 자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체험의 간증을 하고
또 다른 간증 자는 특별히 믿음 좋은 자로 인정된 자가 되었고
은사도 무당 식 귀신분별은사, 예언을 받고 예언을 하여야 최상의 믿음이 된 예언의 은사, 영혼을 읽는 분별의 은사, 등 온갖 분별없는 분위기 몰 이식
선동인지 협박인지 예배인지 간증인지 분간 못할 형태였고
다른 신유집회도 그런 팀을 짠 사람들과 더불어
개척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존의 중소형 교회의 부흥을 위한 방편으로 누룩이 되어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형태의 모임은 공식처럼 매 순서 마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할 때 마다
은사를 주고받듯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였고
그 집회의 헌금은 강사와 교회의 목사가 헌금을 나누거나
강사의 강사비와 유행처럼 번진 기도원 건축과 교회건축비로 사용하였고
집회의 마무리는 늘
지상명령인 선교를 위하여 'OO선교회, ‘선교연합회,
‘국내 국제 선교회, ‘선한...이웃, 마리아, 장애인..., 등 수 많은 단체의 이름으로
작정헌금 작정서를 나누어 주고 우편으로 헌금할 것을 다짐 받았다.

보여주기 식 치유 예배와 온갖 간증과 입신 경험의 간증 등
무분별한 행위로 체험이 성경으로 여과된 분별이 아니라
특정한 구절의 성경을 대입하여 그럴듯한 해석과 인식과 분위기 잡기 식 집회는
기존 예배의 엄숙한 형식에 얽매인 율법적인 환경에서 감성의 해방 같은
죄에서 해방 같은
죄의식의 해방으로 의식(意識)하여
복을 빌어주고 복을 받는
헌금을 낸 만큼 배로 차고 넘친다는 물질적인 세속화는 성경의 의를 초월하고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리 저리 성경을 짜깁기하는
반 복음적인 일이 다반사 이었다.

미국에 온지 십년 만에 또 똑같은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금이빨, 금가루 기적,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기적, 키 크기 기적, 입신, 성령의 춤
예언, 직접 계시, 선지자 학교 등 ...
그리고 오늘날 자극적이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분위기 몰 이식 감성의 경배와 찬양, 같은 찬송가를 몇 번씩 부르고
외치는 구호와 박수...
그런 모든 자극적인 집회나 예배는
이를 테면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감성이라는 열차를 이끄는 형태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열차가 믿음이라는 기관차를 끄는
믿음에 의(義) 보다 감성적인 자극이 의(義)를 끌기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구절과 장을 대조하여 뜻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설교를 듣고 그런가 상고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스턴트 음식이 음식의 고유한 참 맛을 잃게 하듯이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기 보단 쉽고 간단하게 단정하여 다수의 뜻을 좇는
인스턴트 신자가 되어갔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이 세대의 우리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천 명에게 떡을 떼어 준 예수님의 말씀은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do not understand? 마가복음 8:21]
마음이 둔함을 탓하신다.
둔함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 라
믿음이 있다하나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지 아니하고
마음의 중심에 깊지 않은 믿음의 뿌리는
작은 거슬림의 못마땅한 감정에
조금 힘든 환경에
작은 사건에 갈대처럼 끝없이 흔들리는 생활이 습성이 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주께 주시는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없어
그리스도의 사랑만 입으로 외쳐대는 어리석음이
사랑을 말하고 노래하고 찬송하나 사랑 없는 사랑이 갈증이 되어
서로의 의를 바라는 굶주린 갈등이 되어 삶을 지배하면
화려한  자색 옷을 입은 자의 높은 마음을 품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니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는 [디모데 후서3:2-7]
그런 자들은 화려한 가운이나 자색 천을 걸치기를 권위의 상징으로 좋아하고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를 자청하여 자기 자랑의 교만에
스스로 침몰(沈沒)한 자 이거나 그들을 좇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으신 자색 옷은
친히 세상에 오셔서
로마 군병이 조롱한 유태인의 왕으로서 우리의 왕으로의 상징 이였고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종교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하여 돌아가심으로
친히 낮아 지셔서 언약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언약을 증거하고
다시 오시어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눈부시고 호화로운 헤롯 성전의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갈릴리
빈자(貧者)들의 갈릴리
경멸의 땅 갈릴리 그 길로 향하셨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태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도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27: 28-31]

홍포(Scarlet fobe)는 홍색 염료로 물들인 홍색 옷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마가는 홍포를 자색 옷으로 표현했고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And they clothed him with purple, and platted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about his head, 마가복음 15:17]
요한도 자색 옷으로 표현했다.
자색 옷도 왕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이고
성막을 지을 때 장식으로 쓰인 자색 실,
성막의 기구를 싸 두던 자색보자기 등이 있으나
자색은 권위의 상징이자 존귀를 상징이며 성(聖)스러운 상징이지만
그러나
자색 가운을 입은 종교지도자는 이미 제사장이 되어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 노릇을 하기에
그런 자 무리들의 모임 공동체는 투명할 수 없고
투명하지 못함은
신자와 신자사이에 높아 질려는 교만이 직책이 되어
낮은 곳으로 오셔서 높아지신 예수님의 복음이 사랑이 됨을 알지 못하고
진리에서 멀어졌기에
공의와 멀러진 까닭이었기에
우리가 사는 미국이 신앙의 공동체로 공의가 시들었기에
정의가 희미해져 가고
그 원인은 초심으로 살려는 청교도 신앙이 둔해졌기에
이 도시 저 도시에 화려했고 거대했던 교회는 황폐(荒廢)한 건물이 되었고
수많은 church street 의 교회는 건물만 남아 교인이 없는 거리가 되었듯이
한국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의 건축과 더불어
신앙이 초심을 잃은 종교집단이 되어 감은
교회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처럼 역사에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시고 경고하신다.
기억하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무리는
다름 아닌 호화(豪華)한 대제사장이며 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며
그들을  따르는 맹신자 광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또 배교가 있을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주어 또 경고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나나기 전에는
그 말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2:3]

공의를 잃어버린 교만의 길은
박수 받기 좋아하고 그 박수에 열광하는 권위와 존경의 길은
고귀하고 존귀한 길 같으나
비천하고 미천한 길이라
이미 세속화된 신앙이라 분별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래서 보고 듣지도 못하고 자기 합리화의 긍정의 늪에 빠져서
자극이 없으면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자극이 없으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마음의 둔함은
영혼의 눈을 가려서 단순한 진리가 혼미한 머리와 혀에 머물러
몸에 미치지 못하는 지식에 함몰(陷沒)하면
그 지식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자기 지식에 갇혀 습관적인 예배와 관례(慣例)적인 의식에 머문
예배의 지속(持續)이 타성(惰性)이 되어 젖으면 굳어지고
둔한 마음에 둔한 영혼이 길들려져 배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사이비가 많은지
이 세대를 본받고 이 세상을 본받아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곡해(曲解)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세속의 욕심에 탐욕(貪慾)한 자들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 and perfect , will of God. 로마서12:2]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지 않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자들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to every man that is among you,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ccording as God hath dealt to every man the measure of faith.
로마서 12:3]

돌아보라
보이는 만큼 그 만큼의 믿음의 분량으로 라도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의
맘몬(manmon)의 우상이여.
세상을 보라
세상의 막장 연속극을 보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연속극의 이야기가 설교에까지 등장하는 비극을.
세상의 언론을 보라
세상의 언론이 공정하지 못함은 정의 보다 인기를 모색한 선전으로 빛바랬고
시대와 사상에 굴절된 정의를 정의라 하기에
충동과 선동을 조장함은
회칠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건물에서 일어나는 진리와 무관한
세속화된 획일한 인간관계와 맘몬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빛이 곧듯이 빛이 밝듯이 진리가 그렇듯
투명하지 못한 조직과 재정은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상태라
진리를 얘기 하고 들은 들 진리의 변함없음에 떠난
진리의 항구를 떠나 세상의 거친 풍랑에 떠밀려
언제 부셔질 줄 모르는 난파선과 같은 현대의 교회는
이미 공동체의 공의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외쳐야 한다.
누가 외칠 건가
공의가 사라진 삭막한 광야에서
사랑이 메마른 광야의 공동체에서.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사야4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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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 요즘과 같이 지성이 발달한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충고하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생각은 큰 잘못이다. 우상 숭배는 우리의 주변과 우리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위기에 처했다. “역병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상 숭배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이나 피조물이 창안한 것에 돌리는 행위로 정의하고 싶다. 우상 숭배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야만이냐 문명이냐에 다라, 즉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무지나 지식의 정도에 따라 우상 숭배의 형태가 크게 달라진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얼마든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 구약에서 우상은 하나님과 경쟁 관계가 아니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디딤돌, 곧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상 숭배는 멸망의 아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살후2:4) 위세를 떨치고 있다.

 

죄 중에서 우상 숭배의 죄만큼 교회에 혹독한 심판을 가져다준 죄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애굽, 앗수르, 바벨론의 군대에 짓밟혔다. 예루살렘이 불타고, 열 지파가 뿔뿔이 흩어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포로로 잡혀 갔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우상 숭배의 원인이다. 야담의 후손을 오염시킨 이 큰 유전병은 온갖 형태의 죄를 통해 나타나는데, 우상 숭배도 그중 하나이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부터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7:21,22)이 흘러나온다.

 

인간은 형태는 다를지라도 제각각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록 타락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폐허 속에 묻혀 있는 고대의 비문처럼, 글자들이 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양피지 사본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쯤 지워진 글자처럼 희미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갖고, 어떤 식으로든 무엇인가를 경배하려는 성향을 띤다. 어디를 가더라도 거의 예외 없이 이 진리가 확실히 증명된다.

 

자연인에게는 마음과 믿음과 영의 종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은혜로 새롭게 되지 않는 한 타락하고 부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한, 인간은 잘못된 것을 예배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우상 숭배는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개간되지 않은 땅처럼 언제라도 잡초를 무성히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천성적으로 성경이 명령하는 예배가 아니라 속되고도 감각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성향과 습성이 존재한다. 나태함과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눈에 보이는 보조 수단이나 디딤돌을 고안하고, 결국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에 돌리는 죄를 범한다. 우상 숭배는 살짝 경사진 넓은 길처럼 쉽고 자연스럽다. 그와는 달리 영적 예배는 마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듯이 우리의 성향을 거스른다. 오직 은혜로만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진리로’(4:23)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자연인의 마음은 그런 예배를 싫어하고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기를 기뻐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못하는(16:18)’ 교회는 유형 교회가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집합체, 곧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백성 가운데서 불러내신 참신자들이다. 유형 교회는 종종 극악한 이단 사상을 지지하곤 했다. 유형 교회에 속한 교회 가운데 신앙과 실천의 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로부터 안전한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우상 숭배를 하거나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5:11).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이는 신자들 사이에서 우상 숭배가 모습을 드러낼 것을 암시한 말씀들이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9:20). 이 재앙이 유형 교회에 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요한 사도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상 숭배는 유형 교회 안에서 실제로 나타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 (우상 숭배의 종말을 말씀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과의 일치와 연합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다. 일치는 이론상으로는 매우 고귀한 개념이다. 그러나 진리 없는 일치는 아무 유익이 없고 해로울 뿐이다. 평화와 화합은 귀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복음 없는 평화, 곧 공통된 믿음이 아니라 획일화된 감독 제도에 뿌리를 둔 평화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무익한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주교 쥬얼은 저서 변증학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일치와 평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황이 진정으로 우리와 화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상 숭배로부터 영혼은 지키는 방책을 몇 가지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그 모든 내용에 정통하라.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 성경을 아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경계하라.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성경의 검을 한쪽에 버려두지 말라. 성경은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때에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다. 그 빛이 없이 길을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성경은 천하 만민의 공도(公道)이다. 그 길을 떠나 아름답고 오래되고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것처럼 보이는 곁길을 선택한다면, 결국 형상과 유골을 숭배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실을 찾는 습관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복음을 철저히 고수하라.

복음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철저히 고수하려는 경건한 열정으로 자신을 무장하라. 복음의 일점일획이라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거나 부처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더욱 부각시켜 복음의 참된 요소를 흐릿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거든, 절대 동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영혼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 무엇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예배와 관련된 문제라면 무엇이든 조심하라.

 

누구의 설교를 듣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꼼꼼히 따지라. 결벽증이 심하고 너무 예민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개의치 말라. 우리는 사소한 행위가 중요한 원리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번 퇴락의 길로 접어든 그들은 점차 깊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했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강력하게 미혹되어 거짓을 믿기에 이르렀다(살후2:11). 그들은 마귀를 시험하다가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골적인 우상 숭배로 나아갔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교리로 무장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구원에 관한 건전하고도 명확한 교리로 무장하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의 토대 위에 우리 자신을 굳건히 세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의지하는 수단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 뿐이다.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라.

무엇보다 우리는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눠야 한다. 날마다 그분 안에 거하라. 날마다 그분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으라, 날마다 그분의 충만하심을 받아 누리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중재자나 다른 위로자, 다른 중보자라는 개념이 전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땅한 자리에 앉으신다면, 믿음의 다른 요소들도 이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 성례와 예식 등이 모두 본래의 부차적인 위치로 한 단계씩 내려갈 것이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23-269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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