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

복음이 율법 없이
천국이 지옥 없이
선포될 때
사탄이 세력을 떨친다.
-이안 머레이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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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드링크 중독'이 한때 127㎏에 달했던 건장한 보디빌더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안타까운 사연이 공개됐다.

지난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맨체스터에 사는 거대한 근육을 자랑했던 보디빌더가 무분별한 음식 섭취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딘 웜비(39)라는 이름의 이 남성은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기 위해 20년간 몸만들기에 진력했다.

근육을 최대로 키우기 위해 하루 1만 칼로리가 넘는 식단과 스테로이드가 포함된 헬스 보조 식품을 먹어왔다.

↑ 건강할 때 딸과 함께 한 딘 웜비, 현재 간암 투병 중인 모습(왼쪽부터). 딘 웜비 페이스북

특히 딘은 운동을 할 때마다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하루 7~8캔씩 에너지 드링크를 마셔 심각한 중독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이 몸에 독이 돼 지난해 11월 딘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과도한 음식 섭취와 에너지 드링크 중독으로 3주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것.

전문가는 과도한 에너지 드링크 섭취가 간암을 급속도로 촉진시켰다고 진단했다.

특히 에너지 드링크에 포함된 '암페타민'이라는 각성 물질은 심각한 간 손상을 초래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철저한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의사가 말한 3주를 넘기고 최근까지 항암치료를 받으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딘은 "근육을 늘리려고 에너지 드링크를 자주 마시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경고했다.

뿐만 아니라 딘은 현재 자신의 암 투병기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하고 있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행복을 여는 비결  

행복은 작습니다.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마세요.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마세요.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답니다.

행복은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려요.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답니다.

행복은 연습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가는 길은 만 갈래지만 방법은 하나랍니다.

행복은 습관입니다.
아는 길이 편하고 가던 길을 또 가듯이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에 배이는 향기입니다.
하나씩 날마다 더해 가는 익숙함이랍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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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Barrier Reef (호주)

 

세계최대 산호초지역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자연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대보초)면적 20만 7,000㎢. 길이 약 2,000km. 너비 약 500~2,000m. 나되며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으나 군데군데에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산호초가 바다 위에 나와 있어 대륙의 방파제와 같은 외관을 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산호초 지역이자 가장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산호초에는 1,500종에 달하는 어류가 살고 있다. 관광의 중심은 케언스와 브리즈번인데, 관광객 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50곳 중 2위로 선정될 정도의 위용을 자랑한다. 케언즈 앞 바다를 둘러싼 거대한  산호초 장벽은 세계의 다이버들이 가장 동경하는 곳이다.

 

 

 

 

 

 

 

 

 

 

 

 

 

 

 

 

 

 

  

 

 

 

 

 

 

 

 

 

 

 

 

 

 

 

 

 

 

 

 

 

 

 

 

 

 

 

 

 

 

 

 

 

 

 

 

 

 

 

 

 

 

 

 

 

 

 

 

 

 

 

 

 

 

 

 

 

 

 

 

 

 

 

 

 

 

 

 

 

 

 

 

 

 

 

 

 

 

 

 

 

 

 

 

 

 

 

 

 

  
출처: http://cafe.daum.net/dndrleks/mhSo/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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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계산 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강물속에 두 딸이 빠지자
곁에 있던 아버지는 물 속에 뛰어들어가서
아이들을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탈진끝에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내가 뛰어들면 저 사람을 건질 수 있을지,
없을지 계산을 하지만
부모는 그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인공호흡이 처음 생겨난건 과학자에 의해서도,
의사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한 어머니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간신히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냈는데
숨을 쉬지 않고 축쳐져 있자 엄마가 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입에 계속해서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물을 토하며 의식을 찾았습니다.
인공호흡은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이 자연스럽게 동행합니다.


【 좋은글 中에서 】




 

기독교와 몰몬교의 교리 차이점

 

기독교와 몰몬교의 교리 차이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사이비 이단 대책 위원회, 사이비 이단문제 상담소 제공

몰    몬    교

기    독   교

1> 육체적 하나님을 믿는다.(교성88:27)

2> 많은 하나님으로 다신교를 주장한다. (값진 진주 4:5)

3> 하나님들은 한때 사람들이었다고 믿는다.(1844 스미스가르침 P.345)

4> 아담도 하나님으로 믿는다.(교성27:11, 78:15-16)

5>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분리된 세 하나님으로 믿는다.(교성130:22)

하나님 영성을 부인하고 또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육을 가진 존재로 피조물이며 사람도 종국에는 하나님이 된다고 믿는다.

1> 하나님은 유일신이다.(이사야 44:6)

2> 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4)

3> 전지전능,무소부재,만왕의 왕 유일한 하나님

     (딤전1:17,6:15-16)

4>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마28:19)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유일한 분이시며 절대적인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다. 또 삼위일체되신 제1위격인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부 아버지와 성자 아들은 하나되심을 믿는다.

 

* 그리스도에 대하여

1> 예수는 우리의 맏형이다.(구원2:33-34, 교성93:21)

2>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다.(교성 132:37, 구원교리1:18)

3> 그리스도의 성령잉태를 부인하고 육체적 탄생으로 아담이 아버지라 한다.(저너랄논단1권 P.50)예수는 다처가라한다.(교성132:61-62,저너럴디스커스2, P.81-82)

4> 예수는 대속자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모세서6:53,교성1:32,믿음의 아티클85,89)

예수는 우리의 맏형이며 육체적관계로 태어났고 갈릴리 가나에서 결혼했으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개인의 죄사함과는 관계가 없고 몰몬의 계명을 지켜야만 죄사함받고 구원받는다고 한다.

1>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메시야이시다.(요한복음4:25-26)

2> 성육신하신 분이다.(요한복음 1:14)

3>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시다.(마태복음 11:27)

4> 성령으로 잉태하심이시다.(마1:18, 눅1:35)

5>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빌립보서 2:6-11)

6>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로마서 9:5)

성육신하시고 신성을 동시에 가지신 완전한 신.인 양성의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분이시다.

 

* 성경에 대하여

1> 몰몬경과 교리성약을 경전으로 믿는다.

    (니파이29:6,구원의 교리Ⅲ P.165)

2> 성경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저너럴논단 2권 P.75)

3> 성경이 훼손되고 누락되었다한다.(니파이 1서 13:28)

신구약 성경은 구원의 안내서가 못되고 요셉 스미스가 받은 몰몬경과 교리성약 및 값진 진주가 구원의 안내서이므로 몰몬경을 경전으로 삼는다.

1> 영감성(디모데후서 3:15-17)

2> 계시성(출애굽기 24:27, 요한계시록1:10-11)

3> 정경성(요한계시록 22:18-19, 누가복음 16:17)

4> 유일성(요한복음 10:35, 디모데후서 3:16)

5> 불변성(누가복음 21:33, 베드로전서 1:25)

6> 생명성(베드로전서 1:23, 히브리서 4:12)

신구약 성서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정경으로 믿는다.

 

* 사람에 대하여

1> 사람은 자존하는 영이다. (교성39:29)

2> 피조가 아니라 자존하는 영의 조직으로 영원한 존재로

     본다.(모세서 3:5)

3> 아담과 하와도 죽지 않는 존재다.(니파니2서 2:22)

4> 육체가 있어도 타락전에는 피가 없었다.(구원의 교리 P.90)

5> 어린이는 완전무죄라고 가르친다.(교성33:38)

사람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땅에 와서 살기전에 영들(Spirits),곧 자존하는 영적 존재로 죽지 않을 몸이며, 아담은 유성의 하나님이며, 우리 육체와 영의 아버지이며 우리도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

1>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다.(창2:7)

2>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1:26)

3>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      (슥12:1,창2:7)

4> 사람은 죄값으로 죽음에 이른다.(히9:27, 롬6:2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범죄하여 죄값으로 죽음에 이른다.

 

* 타락에 대하여

1> 타락은 자녀를 갖게함이다.(니파이2:25)

2>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지혜로운 처사라고 한다.

    (모세서5:10-11)

3> 아담의 타락을 타락으로 보지 않는다.(구원의 교리1:114)

4> 아담의 죄는 진정한 죄가 아니다.(구원의 교리 1:114)

아담과 하와의 범법과 타락은 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축복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으로 인식하며 이는 곧 지상에서 인간들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한다.

1>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불순종에서 기인한다.

    (창3:5)

2> 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심에서 왔다.(창3:5)

3> 이 죄로 저주받아 우리에게 전가되었다.(창3:15-19)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창3:11)과, 하나님과 똑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창3:5)으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했다.

 

* 구원에 대하여

1> 요셉 스미스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다.(브리감논설 p.435)

2> 모든 사람은 자연히 구원 얻는다.(지옥이 없기 때문에)

3>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믿음의 조건 p.85-87)

4> 멜기세덱 신권을 소유해야 한다.(구원의 교리 p.33-34)

5> 죽은자도 대신 침례로 구원받는다.(교성124)

6>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다.(구원의 교리 Ⅱ권 p.28)

구원은 선행에 의하여 얻어지고, 몰몬교만이 구원이 있고, 조상과 죽은자도 대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으며 인간은 계속 하나님이 되어가고 있다는것이다.

1> 예수의 오신 목적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마1:21)하고      자 십자가에서 그 죄를 대속키 위함이다.(마20:28)

2> 예수의 십자가로 그가 오신 목적을 완전히 이루셨다.      (요19:30, 벧전2:24-25)

3>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롬1:16, 10:9-10)

예수는 인류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 천국에 대하여

1> 일등천국은 해의 천국이다.(구원의 교리1권 p.54, 2권 p.20)

2> 해의 천국은 남녀간 독신자는 들어갈 수 없고, 신전 성례자와 계명을

    지킨 자들이 들어간다.(구원의 교리 1권 p.56-58, 교성 132:17)

3> 달의 천국이다.(교성76:71-74)달의 천국에 가는자는 몰몬의 율법없이

    죽은자외 세상에서 몰몬의 복음을 거절했다가 죽은 후에 받아들인자 및

    땅에서 존경받은자 용감하지 못한자(교성76:71-81,맥콘카이교리p.708)
  * 달의 천국사람은 해의 천국사람에게 지배를 받는다.(교성76:78)

4> 별의 천국이다.(구원교리 2,p.210)
별의 천국은 깨끗지 못한자, 거짓말장이, 마법사, 몰몬교가 아닌 모든 기독교인 및 몰몬성약을 깨뜨린 자가 간다. 모든 인간은 위의 세가지 천국 중에서 자기의 선행에 따라 선택하여 들어간다고 한다.

1> 마음의 천국(누가복음 17:21)

2> 교회 천국(마태복음 13:33)

3> 천년 천국(요한계시록 20:4)

4> 영원 천국(사65:17, 히스기야11:16)

하나님께서 인류의 궁극적 구원은 영원한 천국, 곧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 교회에 대하여

1> 몰몬교만이 유일한 참교회라고 한다. (믿음의신조 p.204)

2> 몰몬교만이 유일한 지상의 하나님의 무리라고 한다.(메콘카이p.603)

3> 몰몬교에 들어와야만 구원 받는다고 한다.(구원교리2권 p.1-구원)

이름대로 몰몬교는 "말일의 교회"천사로부터 아론과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받았을 때 교회가 원상복귀되었다고 하며 몰몬교만이 참교라고 주장한다.

1>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골로새서 1:18)

2>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에베소서 1:23)

3> 교회인 몸의 지체는 성도이다.(엡 5:30)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의 집합체로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 종말론과 재림에 대하여

1> 요셉 스미스의 작은 아들 에프레임이 시온에 흩어진      지파를 모은다.(구원교리 Ⅲ p.253)

2> 미국의 미조리땅이 시온의 도시를 세울 장소이다.

     (교리와 성약 57:1-2)

3> 몰몬의 새 시온은 미국이다.(교리와 성약 57:3)

몰몬교 신조 10조에 의하면 미 대륙에 시온(예루살렘)이 건설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상을 다스리고 땅은 새로워져서 낙원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1> 휴거하다.(살전4:17,고전15:51)

2> 천년왕국(계20:1-6)이 성취된다.

3> 신천신지(계21:2-22) 영원천국이 완성된다.(계22:5)

4> 백보좌 심판이(계20:11-15)있으며 구원받지 못한자는 지옥에 들어간다.(계20:10)

5>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살전4:16, 살후1:17) 지상재림(마24:30, 스가랴 14:4)으로 본 그대로(행1:11)오신다(계1:7. 11:12) 심판주로 오시나(살후1:8-9)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마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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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 CEO들의 좌우명 ★

1. 성공하려면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
(존 데이비슨 록펠러/록펠러재단 창립자)

2. 때로는 한순간의 결정이 인생을 바꾼다.
(나폴레옹 힐/미국 성공철학자)

3. 무조건 믿지 마라. 검증하라.
(스티븐 D. 레빗'괴짜경제학'공동저자)

4. 중요한 일을 절대 e메일로 보내지 말라.
(엘리어트 스피처/미국 뉴욕주 검찰총장)

5. 타협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라.
(한스-올로브 올슨/볼보 자동차 회장)

6. 누군가를 위해서 일할 때는 진심으로 하라.
(지그 지글러/미국 성공철학자)

7. 가장 훌륭한 일은 모험과 도전정신으로 이뤄진다.

(윌리엄 맥나이트/3M 전 CEO)

8. 학벌이나 경력이 아닌 '태도'를 먼저 봐라.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그룹 창시자)

9. 돈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라.
(말콤 S.포브스/포브스지 전 발행인)

10. 회의 시간 3분의 2는 '듣는 시간'
(A.G.래플리/P&G CEO 겸 회장)

11. 인내는 어떤 실력보다 강하다.
(벤 호건/프로골프 선수)

12. 당신은 뭔가 더 대단한 것을 해낼 수 있다.
(칼로스 M.구티에레즈/미국 상무장관)

13. 당신의 지위가 아니라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브래드 앤더슨/베스트바이 부회장 겸 CEO)

14. 즐기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라.
(짐 콜린즈/경영 컨설턴트,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 저자)

15. 여성이 성공하려면 그 누구보다 현명해야 한다.

(인드라 누이/펩시콜라 CEO)

16. 약해지지 말자.
(래리 페이지/구글 공동창립자)

17. 당신이 리더라고 생각하고 일하라.
(조지 샤힌/시벨시스템즈 CEO)

18. 여자의 일로 승부하라.
(마사 스튜어트/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 창립자)

19. 큰 야망을 품었을 때 커다란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미국 상원의원)

20. 나를 알고, 나를 이기고, 나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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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수민족 원시의 삶을 사는 인도의 본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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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박사는 『교의신학V-구원론』(서울:은성문화사,1972)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오르도 살루치스) 9단계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텍스트 북으로 크게 의존하였던 루이스 벌코프는 양자를 독립적인 단계로 제시하지 않았고, 마지막 영화단계도 생략하고 있습니다. 박박사는 1950년대에 구원론을 저술한 H. Kuiper아 J. Murray등의 저술을 읽으므로서 벌코프의 구원 서정론을 약간 수정 보완하게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구원서정론은 누군가 입시준비를 위해서 요약한 것입니다. 박은제 목사님이 제게 보내준 많은 자료중에 속해 있습니다. 후일에 시간을 내어 본격적인 정리를 해 보고자 하나 당분간 임시적으로 아래의 요약으로 대체합니다.


① 소명 :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을 신앙으로 수납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롬 8 :30).

② 중생 : 사람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요 3 :3-5)

③ 회심 : 죄인이 죄에서 더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요일 1 :9)

④ 신앙 :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신뢰함이다(막 1 :15).

⑤ 칭의 :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관한 모든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롬 8 :30).

⑥ 수양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요 1 :12)

⑦ 성화 :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셔서 그의 전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닯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8 :14).

⑧ 성도의 견인 : 택함을 받은 자들을 기어코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딤후 4 :18).

⑨ 영화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이다(롬 8 :30).

 

 

루  터

로 마 가 톨 릭

펠라기우스

1

준비단계

소 명

충족한 은혜(저항, 차동가능)

회개(죄인자력)

2

조 명

협력은혜(칭의준비) 하나님의 말씀접수. 죄악상태통찰 긍휼희망. 하나님사랑시작 죄의 증오. 계명순종결실 세례받을 욕구

순    종

3

회 심

 

4

중 생

 

5

신  앙

 

6

칭  의

 

7

신비적 연합

주입은혜(칭의의 은혜)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온다.

 

8

갱  신

 

9

보  전

 

 

 

 

 

개혁파

알미니안파

칼빈

1

소  명

소명(순웅, 저항)

소명

2

중  생

회  개

신앙

3

회  심

신  앙

중생

4

신  앙

칭의(의의전가)

회심

5

칭  의

중  생

성화

6

수  양

성  화

칭의

7

성  화

견  인

예정

8

성도의 견인

 

부활

9

영  화

 

 

 

 

2. 소명이란 복음을 죄인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명사의 의미로는 καλειν, κλησι?, κλητο?, εκκλησια가 있다. 소명의 발령자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특히 성부이시다.

실물적 소명과 말씀의 소명으로 구분되며, 외소(external calling),와 내소(internal calling)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외적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 제시하여 사죄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인데, 이 경우에 죄인은 응답을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소명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다.

외적 소명의 요소로는 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제시, 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초청,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며 구원에 이른다는 약속의 제시 등이 있다.

외적 소명의 특징으로는 외적 소명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 즉, 이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모두 아무 차별없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외적 소명은 성실한 소명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복음으로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내적 소명이란 복음이 제시될 때, 죄인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경우로서, 이 소명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 외적 소명에서 전해진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내적 소명을 받은 죄인의 마음 속에서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내적 소명의 특징은 도덕적 설유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즉, 하나님은 권능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수용하도록 설득하신다.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킨다.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즉, 성령께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확실하고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


3. 중생에 대하여 약술하라.

 

중생의 정의 : 협의 - 죽은 영혼을 일깨워 새생명의 원리를 심어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광의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람의 첫 번 응답. 즉 말씀에 응답하여 새생명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약1:18, 벧전1:23). 칼빈의 경우에는 회심과 성화의 전과정을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과정을 말한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계속한다.

중생의 본질 :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인간의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므로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중생의 논리적 순서 : 말씀전파(외소) - 성령의 역사(새생명의 발생) - 유효적 소명 - 거룩.

중생의 필요성 :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과 평화하고 교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영혼의 전 성향을 갱신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중생의 역사가 필요하다.

중생은 하나님 편의 단독 사역이다. 중생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씀이 있어도 성령의 일깨우는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의 단독 역사이다.


4. 회심(convers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회심의 성경적 의미 - 국민적 회심(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니느웨 등), 넓은 의미의 피상적 회심 = 일시적 회심(자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 처럼 보이나, 허식적 회심에 불과), 좁은 의미의 진정한 회심(중생자가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을 의미) = 반복 회심 등이 있다.

회심의 특징 : 회심의 특징은 구원과정의 한 부분이며, 회심은 재창조의 동작, 각성의식에서 회심하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음이며, 단번적인 변화, 돌연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이 있다. 이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 일어난다.

회심의 정의 : 회심은 죄악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구약의 개념으로는 ??? ‘후회하다’의 뜻으로서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는 ‘떠났다가 돌아오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심의 구약적인 개념은 계획과 행동을 수반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약의 개념에서는 μετανοεω 는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며, επιστρηφω는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개념에서 회심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의 요소 : 知(생각의 변화로서 자신의 생활이 죄로 가득찬 생활이었음을 인식하는 것), 情(감정의 변화로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意(목적의 변화로서 죄에서 떠나 전격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의 회개의 개념 - 통회, 고명(고백), 보속이 있다.

통회 - 죄에 대해 진정한 애통과 비애를 느끼는 것

고백 -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신부에게 고백하는 것

보속 - 죄인의 행동의 회개로서 자신의 죄를 인내와 선행으로 속량하는 것

회심의 특징 : 회심은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회심은 인간의 의식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죄를 벗고 하나님을 향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은 좁은 의미로는 단회적이며, 넓은 의미로는 반복적이다.

회심의 창시자와 선행자는 하나님이지만 사람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인간의 협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회심은 회개의 복음, 구원에 필요하며, 사죄에 필요하다. 회개의 과실(열매)로서 성실한 자백 수복과 개선, 깨어 죄를 대적함, 하나님 사랑이 진정한 회개의 열매이다.


5. 신앙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앙(πιστι?)란 하나님의 진실성에 관한 확신이다.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중심으로 그에게 신뢰하는 것 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다.

일반적 기초적 의미의 신앙 : 자아헌신, 의견보다 강함, 즉각적 확정, 증언에 기초하고 신뢰를 포함하는 확신을 의미한다.

종교적 구원적 신앙 : 신앙의 개념은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이적의 신앙, 진정한 구원적 신앙으로 구별된다.

신앙의 조성자 : 신앙의 조성자는 성령의 중생하게 하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으로, 성령의 증언으로 신앙이 조성된다.

신앙의 본질과 자리는 마음이다.

신앙의 성분 : 신앙은 지성적 성분, 감정적 성분, 의욕적 성분으로 구성된다.

다른 파들의 신앙관 : 로마 가톨릭의 신앙관 : 역사적 신앙과 구원적 신앙의 구별이 없다. 표명적 신앙과 묵종적 신앙, 비형성적 신앙과 형성적 신앙으로 구별한다. 알미니안주의 신앙관은 하나의 칭의하는 행위로 만든다. 불완전한 행위를 완전한 행위로 계정한다. 사람이 창시한다. 칭의의 원인과 근거이다. 자아 충족 경향.



6. 칭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칭의의 정의 :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이다.

칭의의 중요성 : 칭의가 미치는 영향은 죄인의 상태가 아닌 신분에 해당한다.

칭의의 성질 : 은혜성, 법정성, 선언성, 제정성, 즉각 완전 최종성.

칭의의 특징 : 1)죄책의 제거, 2)외계에서 단행, 3)단번에 단행, 4)성부의 선고

칭의의 구성과 구별 : 1)사죄 - 중요성, 포함성, 무차별성 2)영생권 3)능동적 혹은 객관적 칭의와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로 구별된다.

칭의의 때와 관계 : 1)영원부터의 칭의 - 도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단행되었다고 주장한다. A.Kuyper, Herman Hoeksema 등이 주장하고, H.Bavinck가 이에 반대하였다. 2)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의 칭의 3)신앙으로 칭의 - 성경에 의한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칭의된다.

칭의의 근거 : 1)사람의 선이 아니다. 2)그리스도의 의다 3)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롬5:17-19)

칭의의 다른 견해들 : 로마 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한다.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강조한다. Schleiermacher는 우리 안에 구속의 시작의 주관적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Ritschl은 은혜로 죄인을 영접하여 자기와 교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신정통(Barth)주의는 칭의를 순간적 행위로 말하나, 오히려 칭의는 성화와 제휴하여 전 노정을 행진하는 것으로 보았다.

칭의 교리에 이의 : 1)행위에 의한 심판 2)은혜의 제외 3)불경건한 처사 4)방조에 인도한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칭의의 요소 : 소극적 요소 - 죄의 용서를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을 제거한다. 적극적 요소 - 자녀됨과 영생에의 자격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다. 그래서 영원한 기업과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보증받는다.


7. 수양(收養;Adop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수양의 개념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이다.

수양의 절차와 자격의 함의 : 아들(子)격의 함의 - 1)하나님의 독생자 혹 맏아들 2)하나님의 총애받는 피조물 3)하나님의 파견하신 권세를 받은 재판장 4)신적 수양의 대상들로서의 사람들(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특정적으로는 영적으로 구속된 양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되는 자들)

양자의 기업 :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기업


8.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약 명사 : 동사 ?γιαζω의 다양 의미, 거룩의 관념을 표현하는 형용사들, 성화와 성결을 표시하는 명사들

구약 관념 : 위엄적 거룩, 윤리적 거룩, 파생적 의미의 거룩.

성화의 정의 :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성화의 특징 : a.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의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또한 협력해야 한다. b.성화는 칭의와 달리, 법정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다. c.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d.그러므로 성화는 죽을 때 완성된다.

성화의 성질 : 1)하나님의 초자연적 공작 2)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공작 3)의식적 협력 4)거룩한 생활의 실제이다.

성화의 특징 : 1)옛사람과 새사람 2)온사람에 영향을 미친다. 3)현실적인 변화이다. 4)성장성 5)장구한 과정이다. 6)완성기는 죽음과 부활의 때

성화의 조성자와 방편 : 1)삼위 하나님, 특별히 성령이 조성자이시다. 2)신적 조성자 강조의 필요 3)성령에 전적 의뢰 4)성령 공작의 신비 방편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와 묵상, 섭리적 지도, 방편의 고집적 사용을 통해 성화된다.

완전론 :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현세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신자라도 그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결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백과 사죄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중생한 신자는 매일 그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 중생함으로 죄는 그 지배력을 상실하였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와 말씀과 성령에 의지하여 죄와의 전쟁을 계속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날마다 닮아가야 한다.

성화와 율법 : 율법은 신자 생활의 규범이다. 율법에 의한 선행이 강조된다. 이는 강요없는 생활지도의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율법은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감사 생활의 규칙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9.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

 

교리의 진술 :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그의 영에 의해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화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도 최종적으로도 타락할 수 없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 얻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ⅩⅤⅠⅠ. 1)

견인의 정의 : 견인(끝까지 인내함)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이다.(요10:28-29, 롬11:29, 빌1:6, 살후3:3, 딤후1:12, 4:18)

추론적 증명 : 1)선택의 교리 2)구속언약의 교리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대언의 효력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5)마음에 성령과 말씀의 역사 6)구원의 확신

견인 교리의 이의 : 1)사람의 자유에 모순 2)나태와 방종에 인도 3)부도덕에 인도 4)성경에 위반 5)이의의 결과-견인 교리는 성도에게 큰 위안과 능력의 원천이 된다.


10. 영화에 대하여 약술하라.

구성과 시기 : 영화는 현세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에서이다. 죽음에서 영혼의 완전성화와 부활에서 신체의 영화가 이루어진다.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데, 성령의 순간적 행동과 하나님이 구원의 조성자이기에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된다. 또한 신체의 부활에서 구속이 완성되어 온사람의 최종 완성한 구속으로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영화된다. 영화의 시기는 개인별로 다른 때(성화의 완성)와 모든 성도들이 동시에(구속의 완성) 곧 죽음과 부활 때에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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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웅 목사님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 네 종류의 친구!

첫째는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그와 같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는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 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는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을 띄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친구가 많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깊이가 중요합니다.
산과 같은, 땅과 같은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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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네바다 51 구역1)의 한 도로에서 접시 모양의 비행체(비행접시, UFO)를 수송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기사원문>> UFO transport near Area 51, Nevada on 21st March 2015

▼ UFO Being Towed in Nevada near Area 51 - 3/21/15

https://youtu.be/bjjU-Y1sag8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이 타고 온 UFO로 알고 있는 접시 모양의 비행체(비행접시)는 독일이 2차 대전을 치룰 당시 마지막까지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제 3 제국의 비밀 무기로 알려져 있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나치가 개발하고 있던 바로 이 비행체(비행접시)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을 몰래 미국으로 데려와 계속적인 실험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091122 V7 프로젝트 : 하우니브

https://youtu.be/_kWmKW94EGY

대중들에게 UFO로 알려진 이 비행접시를 연구하고 실험한 곳이 바로 네바다 주에 위치한 51구역으로 불리는 공군 기지이다. 이곳에선 종종 접시모양의 비행체가 목격되거나 촬영되어 외계인 연구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장소가 되었는데, 이제 한 시민이 바로 이곳에서 삼엄한 호의를 받으며 트럭으로 운반되고 있는 ‘비행접시’를 촬영하였다. 

오랫동안 외계인 어젠더를 통해 외계인과 UFO의 존재를 믿도록 설득했던 세계정부주의자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작한 이 비행접시를 비밀스러운 장소로 옮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UFO에 대한 믿음에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UFO 추적자들이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 모습을 공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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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계인 침공”으로 NWO가 실현되다.
2. UFO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고 있는 세계정부주의자들의 숨은 의도
3. New World Order를 위한 일루미나티의 외계인 어젠더  

1) 51구역(51區域) 또는 에어리어 51(영어: Area 51)은 미국 네바다 주에 위치한 군사 작전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정식명칭은 그룸 레이크(Groom Lake) 공군기지로, 위도 51도에 위치하고 있어 통상 '51구역'이라 불리고 있다.

1955년 정찰기인 U-2기를 최초로 네바다 주에 보내면서 설립된 곳으로, 이후 신무기의 개발 및 시험을 위한 철저한 비밀 기지로 건설되었다. 그동안 미 정부는 해당 기지에 대해 노코멘트 하였으나, 2013년 6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355페이지 짜리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해당 지역의 실체를 인정하였다.

이 비밀기지가 특히 화제를 모은 이유는 이 곳에서 UFO를 많이 봤다는 제보가 많다 보니, 외계인 연구, 비밀 신무기 연구 등을 위해 설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추락한 UFO의 잔해가 이 곳으로 옮겨져 연구되고 있다는 설과, 로즈웰 사건과 관계되고 있다는 설과, '그레이 외계인' 이라고 불리는 외계인들이 있다는 설 등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UFO 마니아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미 정부가 이를 인정하기 전까지는 해당 구역에 대한 용도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는데, 가장 유력했던 건 미군의 비밀 항공기, 특히 스텔스 항공기의 시험 비행 임무를 실시한다는 추정이었다.

실체가 공개된 지금 현재도 51구역의 부지 내에는 완전히 출입 금지된 것은 물론이고, 접근조차 금지되고 있고, 이 경고를 무시하고 진입했을 경우에는 경고 없이 발포하는 경우도 있다.(“51구역”,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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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신자들 / 박신 목사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30:11,12)


영토와 통상 분쟁 ?왕조들 간의 해묵은 반목으로 17세기 전반부에 30년간이나 전쟁의 광풍이 유럽 전역에 몰아쳤습니다. 그 여파로 기아와 흑사병이 만연하여 일반인마저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독일의 아이렌 버그 지역의 마틴 린칼트라는 목사는 하루에 장례식을 50번을 치른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자기 가족의 장례식도 집전해야 했습니다. 


그런 생지옥 가운데 그분은 66개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다 감사드리세 . 온 마음을 주께 바치세.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이 기뻐하네. 예로부터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지금부터 영원토록.”이라는 시도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여건이 되지 않는 전쟁의 와중에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고 한없는 사랑을 영원토록 받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편의 표현대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고 상복은 입었지만 찬양의 옷을 덧입었습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이 30 년간이나 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몰랐을 것입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감안해 보면 거의 전 평생을 절망 가운데 보낸 셈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찬양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고난이 자꾸 겹치고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흔히들 어떻게 반응합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도 고난이 자꾸 겹치면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 놓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무 진전이 없으면 이제는 자기의 잘못을 고치거나 뭔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테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구출해달라는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금식, 봉사, 헌금, 성경공부, 등등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찬양도 해보지만 잠시 그 때뿐 변화가 없으면 서서히 체념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 자체를 포기하려니 뭔가 불안해서 교회 활동은 여전히 성실하게 참석은 하지만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때로는 하시니까 이런 고난을 끝없이 주는가보다 단정지어버립니다. 믿음은 이제 허울만 남았고 아무 힘을 발휘 못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산소 호흡기에만 의존하는 식물 신자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이 유일한 신앙 활동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실제로는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예컨대 30 년간이나 고난이 계속되었기에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돌리지 않는 것만도 그나마 잘하는 일인 양 생각합니다.


예의 린칼트 목사의 경우는 그런 흑암 중에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좋은 일에만 감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감사가 절로 되는 일에 감사 못할 신자는, 아니 불신자도 없습니다.  

  

같은 독일 목사로 종교 개혁을 이룬 마르틴 루터에게 있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카토릭 당국과 홀로 맞서 싸우느라 온갖 음해와 핍박에 시달려 오랫동안 염려와 낙심 속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누가 죽었느냐?” 물었습니다. 아내는 곧바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아내가 “지금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곧 바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는 완전히 낙망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며 현실에서 실패하여 극도의 실망에 빠질 수는 있어도 완전한 좌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좌절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범사에 감사는 여전히 잘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이 재앙을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을 믿기에 그나마 인내는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많은 신자들이 “감사거리에 대해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 당신에 대해 감사하라”는 권면도 잘 알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30년간이나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면 도무지 하나님 당신에 대해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도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자라는 지성과 연약한 영성으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커튼 뒤에서 눈에 안 보이게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겠지 믿고 감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내이지 실제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반드시 찾아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고난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외면, 부인, 망각, 잘해야 인내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선 끝없는 고난이라도 신자를 향한 끝없는 사랑, 자비, 긍휼이며 최소한도 그분의 주권적 섭리입니다.


온 사방에 질병과 죽음뿐이었던 린칼트 목사가 어떻게 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 땅에서 절망이 넘치면 필연적으로 남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의 소망뿐입니다. 사람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죽음의 공포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생애를 회개하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영원을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회귀하게 됩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이 똑 같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그동안 서로 쌓았던 원망과 시기와 죄악들을 자연히 용서 내지 용납해 주게 됩니다. 침몰해가는 여객선에 함께 탄 승객들 간에는 용서와 긍휼이, 최소한도 동일한 고난을 나누고 있다는 동료애라도 나타날 것 아니겠습니까? 온 사방에서 육신은 죽어나갈지라도 영혼의 생명은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루터 목사의 경우에도 자신의 대적을 언젠가는 하나님이 막아주시겠지, 설령 순교하더라도 천국에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다시 힘을 얻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자기마저 주저앉으면 이제 겨우 작은 불씨가 붙기 시작한 개혁이 틀림없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 있는 큰일을 자기가 중단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종교개혁이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솔직히 감사거리가 생겨야 감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적인 인간 습성입니다. 두 마틴 목사님들은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제로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또 그 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바라 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따져 볼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감사가 잘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세상에 눈이 가려 하나님 쪽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 탐욕이 있고 세속의 쾌락과 죄악을 밝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소망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잘 보지 못하고 있으니 갑갑합니다.


이제 점점 정답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데 사실 그 답도 간단합니다. 신자가 죄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님은 신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그런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그분의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일을 잘 발견할 수 없어 끝까지 침묵하는 하나님으로만 비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마틴 목사가 고난 가운데 발견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나라에 당신의 백성들로 채워서 당신에게 세세토록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려주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처한 환경과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에 바탕을 두고 섭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당연히 이 땅의 좋은 것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끝없는 고난도 주십니다. 


감사거리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감사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일이 자기에게는 진짜 소중하고 귀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 안 짓고 선해지며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자비를 받는 것도 신자에겐 아주 소중하고 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발견하여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더 큰, 아니 진정한 자비이자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일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어찌 다른 데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복을 받는 일 외에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면 매사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두 말씀을 합쳐서 해석하면,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을 발견하면 당연히 그 마음에 기쁨이 오는데 하나님의 보물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소유를 다 팔더라도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환난 중에라도 정말 귀하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섭리를 발견한 자는 환난이 끝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범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서 하나님의 보물을 발견한 자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범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진정한 감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신자가 끝없는 환난 중에 염려와 실망에만 끝없이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 혹은 인내만 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억지로 감사하려고 노력해 비슷하게 감사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 믿음이 좋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는 침묵하는 것 같아도 일하고 있는 하나님을 범사에서 특별히 환난 중에 발견하고 반드시 감사할 거리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신자에게가 아니라 그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해야 하며 그 일을 신자도 정말 그렇게 여기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겸비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찬양을 부르며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진정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는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자로 칭송을 받아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죽여서 상복을 입고 있는 신자도 사람들 눈에는 얼마든지 찬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비췰 수 있다는 것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12/21/2006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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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큼은 '행복하자.
링컨의 말처럼 사람은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결심한 정도만큼 행복해진다.. 오늘만큼은 '주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하자' 무엇이나 자신의 욕망대로만 하려 하지 말자.. 오늘만큼은 '몸을 조심하자' 운동을 하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자. 몸을 혹사 시키거나 절대 무리하지 말자.. 오늘만큼은 '정신을 굳게 차리자'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배우고,나태해지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노력과 사고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책을 읽자..
오늘만큼은 '남에게 눈치채지 않도록 친절을 다하자' 남 모르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 보자.. 정신 수양을 위해 두가지 정도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하자.. 오늘만큼은 '기분좋게 살자' 남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어울리는 복장으로 조용히 이야기하며, 예절 바르게 행동하고,아낌없이 남을 칭찬하자..
오늘만큼은 '이 하루가 보람되도록 하자'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하루가 인생의 시작인 것 같은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자. 오늘만큼은 '계획을 세우자' 매 시간의 예정표를 만들자.. 조급함과 망설임이라는 두가지 해충을 없애도록 마음을 다지자. 할 수 있는데까지 해 보자.
오늘만큼은 '30분정도의 휴식을 갖고 마음을 정리해 보자' 때로는 신을 생각하고 인생을 관조해 보자.. 자기 인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얻도록 하자..
오늘만큼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자' 특히,아름다움을 즐기며 사랑하도록 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의심하지 말자. -오늘만큼은-시빌F.패트리지-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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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죽을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통 하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을 웃으며 볼수 있듯이 .. 시간은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 내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이 멀어지게 되고.. 내가 아둥 바둥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준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과 내 마음 다 쏟고 상처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비 바람 불어 흙탕물을 뒤집어 쓴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실수들은 누구나 하는거다 아기가 걸어 다니기까지 3천번을 넘어지고야 겨우 걷는 법을 배운다 나는 3천번을 이미 넘어졌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일에 좌절하나 .. 이세상에서 가장 슬픈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뻐긴다 해도 결국 하늘아래에 놓인건 마찬가지 인것을 .. 높고 높은 하늘에서 보면 다 똑 같이 하찮은 생물일 뿐인것을 .. 아무리 키가 크다해도 하찮은 나무보다도 크지 않으며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 해도 하찮은 동물보다도 느리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짖발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질투하지 말고 ..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아 마찬가지 우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인연으로 남길 기도해 본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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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경호국에서 디자인한 ‘비스트/The Beast’ 라고도 불리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차

‘캐딜락 원 (Cadillac One)’은 150 만달러이며

총알이나 폭발물로부터 보호가 되는

움직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합니다.

미 대통령은 12대의 전용차를 교대로 타며

차가 쉴 때는

비밀경호국 지하 차고에 주차되며 24시간 보안이됩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가던지

두대의 차가 움직이며 1갤런당 3.7마일을 갑니다.

자동차 행렬을 할 때는 45대의 무장한 차들이 호위를 하며

대통령이 타고 있는 전용차와 똑같이 생긴 차가 합류를 하며

지역 경찰과 이동통신센터와 무장한 더 많은 차량들과

앰뷸런스가 동시에 움직입니다.

이 차는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사에서 만들며

가솔린 V8엔진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전용차의 최고 스피드와 무게는 기밀사항이며

창문의 방탄유리 기술도 기밀사항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요새

obama car skitch

강철과 알루미늄과 티타늄

그리고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움직이는 요새.

차 밑에는 강판이 깔려있어 폭탄과 수류탄을 막아줍니다.

펑크나지 않는 차

obama cabin tires

차는 완전 밀폐되어 있어서 생화학 공격도 막아주며

타이어는 케블러(Kevlar, 고무의 강도를 높이는데 쓰이는 인조물질)

강화 타이어라

펑크가 나지 않게 해 줍니다.

창문을 열 수 없는 차

obama car skitch

오직 운전석의 창문만 열 수 있는데 단 3인치만 열립니다.

만약 타이어 펑크가 나면

강철 림이 차를 계속해서 달릴 수 있게 해 줍니다.

폭발되지 않는 연료탱크

trunk

거품이 새지 않도록 봉인된 연료탱크는 폭발될 수 없으며

비록 직접 타격이 가해진다해도 폭발되지 않습니다.

트렁크 안에는 대통령 혈액과 같은 타입의 혈액과

산소 공급기와 소방장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방벽 역활을 하는 캐딜락 원

obama car windows skitch

대통령의 차는 대통령이 가는 곳에 함께 가며 항상 전략적으로

군중들과 대통령 사이에 장벽을 이루어 줍니다.

두꺼운 5 인치 (12.7 cm) 방탄 유리 기술은 기밀사항입니다.

차의 무게도 기밀사항입니다.

최류가스 캐넌이 장작

obama car skitch

대통령 전용차가 해외로 나갈 때는 한쪽에는 성조기,

다른 한쪽에는 방문국의 국기가 장식됩니다.

최류가스캐넌과 나이트비젼은 차 앞쪽에 숨겨져 있습니다.

캐딜락 원의 사이즈

obama car skitch

대통령 전용차의 길이는 18 피트 (5.4864 m)

높이는 5.10 피트 (1.5545 m)입니다.

위성폰 설치

obama car skitch

빌트인 위성폰은 부통령과 펜타곤으로 직접 연결이 됩니다.

약 20cm의 문두께

obama doors the beast

무장된 문은 8인치 (약 20.32 cm)나 되며

무게는 757기의 문 만큼 무겁습니다.


자료출처: businessinsider.com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복음과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

 

    글/김철호


 

    들어가는 말

   I. 로마카톨릭체제
   II. 로마카톨릭의 중대한 오류들
   III. 결론


 



 

 

우리는 왜 로마 카톨릭을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이 그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종교적 편견이나 개신교의 시기심에서 나온 비평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는 파수꾼과도 같이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와 사상을 반대하지만, 카톨릭교도들, 즉 천주교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며, 진리의 말씀의 은혜와 약속에 함께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호소하며 경고해 주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는데, 그는 일반 크리스천들 사이에 매우 객관적이고도 신중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그의 접근은 언제나 신중했고, 소극적 비판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습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로이드 존스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와 무기력함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 같은 태도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다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본고는 바로 그 단 한 번의 예외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마귀의 속임수'를 다루는 성경본문 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해명(?)입니다. 이렇듯 본문이 다루는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는 로이드 존스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그리고 최소한의 비평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해 보인다면, 그것은 로이드 존스의 접근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가려진 실체와 실상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비록 작은 분량이긴 하지만, 모든 개신교도들뿐 아니라 카톨릭 교도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객관적으로 제시한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 그것은 종교적 편견과 비평을 뛰어넘어서 누구나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당면과제이며, 이 시대의 영적 분별을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들어가는 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장11절)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 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껏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 로마카톨릭 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 로마카톨릭의 중대한 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 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 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 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젭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 결 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영님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저자소개 :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 Jones; A.D. 1899-1981)

금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의 남 웨일즈 카티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의학에 뜻을 두고 공부하여, 영국의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수련기간을 거친 후, 23세의 약관의 나이에 국왕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 경(Sir Thomas Horder)의 수석 조수가 되는 등, 훌륭한 내과의사로서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참된 삶을 희구하는 그의 열망은 그로 하여금 1927년 의학계를 떠나 남 웨일즈의 애버라본시의 웰쉬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게 한다. 1933년도의 자료에 따르면 웨일즈 지역으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복음적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938년에 그는 런던 버킹햄가에 있는 G. 켐벨 몰간 목사가 시무하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부목으로 부임, 그와 함께 사역하였다. 그리고 켐벨 목사가 1943년에 은퇴하자, 1968년까지 그 교회에 재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간에는 일반적으로 복음 전도자로서 순회 설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초청받은 여러교회들에서 설교하였고, 때로는 학생 신앙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영적 지도자들의 공적모임에서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와 책자를 통해 의사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드러내는 일에 앞장섰다. 동시에 그는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병들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1981년 3월 1일, 82세의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주요 저서로는 「로마서 강해」- 전 8권 / CLC; 「에베소서 강해」- 전 8권 / CLC; 「복음의 핵심」양무리서원; 「산상수훈(上, 下)」/ 정경사;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두란노; 「영적침체」/ 새순출판사; 「매일의 묵상」/ 엠마오; 「믿음의 시련(시73편)」/ 청교도신앙사, 「목사와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 등 다수가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와 개혁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데 일관해 왔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온갖 우상을 버리는 크리스천의 양면적 필수의무 중에 적극적 측면을 빛낸 사역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이 한 측면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단정해 버릴 수는 없으니, 바로 그가 남긴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가 그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적극적 진리의 선포로써 거짓 진리를 드러내는 접근방법을 택하였을 뿐,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일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음이 본고를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한 편의 설교 본문이지만, 그는 평소 로마 카톨릭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을 이 한 글에서 집약적으로 표출해 냈습니다. 모든 개신교도들에게는 영적 의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깨워 주고, 모든 천주교인들에게는 진리와 진실을 볼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제시하는 데, 이 작은 책자가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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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최송연

나의 머리에 넘치도록
겹겹이 쌓여만 가는
추악한 생각들은
기어이,
정결한 당신 머리에
가시관을 덮씌우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두 손에
대못을 박은 것도
나의 두 손으로
움켜쥔 탐욕이 부른
잔혹하고도 모진 대가였습니다

갈 곳 가지 말아야 할 곳
돌아다닌 나의 허영심은
당신의 두 발에
대못을 박았고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될
정욕들이
당신의 그 순결한 가슴에
깊은
창 자국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위하여...
갈기갈기 찢기시며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저
모두 쏟으셔야만 했습니다

고난의 주님 그리스도여,
나 이제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를 위한 당신의 그 죽음 때문에...
내가 살아났음을....

사랑의 아버지여,
나 이제 엎드려 고백합니다
영원토록, 나 또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으로 입었도다."
(이사야53: 5절 말씀)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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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연합의 경제적인 이익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슬림들의 이해가 맞물려 유럽 남쪽이 몸살을 앓고 있다. 美 후버연구소 역사학자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사진)은 최근 "지중해 문화가 퇴보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워싱턴 타임즈 기고글을 통해 "아랍의 봄이 북아프리카 거의 전 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지적하고, "지중해 주변의 이슬람 경제권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라며 "지중해는 종교와 정치 및 경제의 각종 긴장에 시달리는 침체된 전근대적 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

 

hb.jpg지중해 문화가 퇴보하는 이유

 

지브롤터의 고지대에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14㎞가 약간 넘는 거리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이 보인다. 동쪽에는 지중해의 망망대해가 아시아까지 2400㎞나 펼쳐져 있다. 로마인들이 ‘우리의 바다’라고 불렀던 지중해 덕분에 로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럽을 통일하여 500년 동안 세계적 문명이 번성한 단일 제국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지중해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오토만, 피렌체, 베니스 같은 역사상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지브롤터의 좁은 해협에 있는 고대의 ‘헤라클레스의 기둥들’이 역사적으로 항상 발전과 번영의 표지판 노릇을 한 것은 아니다. 오토만 제국의 등장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고전적인 도시국가들이 역사에서 사라짐에 따라 지중해는 세계적 변화의 촉매가 아니라 박물관과 더 비슷해졌다. 그에 비해 개혁과 계몽으로 활력을 충전한 북부유럽 문화는, 이슬람과의 소모적인 지구전이 벌어진 지중해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했다.

 

17세기 초가 되자 북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도는 뱃길을 이용하여 더욱 쉽고 안전하게 중국 및 인도의 부유한 시장에 도달했다. 신세계의 발견으로 지중해는 부와 문화의 동력을 또다시 외부세계에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시적으로 지중해에 활력이 되살아난 듯이 보였다. 북아프리카에서 거대한 분량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되었다. 수에즈운하는 유럽에서, 자원이 풍부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페르시아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유럽 통합과 아프리카 및 중동의 계속된 식민지 독립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민주적이며 상업적으로 상호 연결된 신생 국제사회가 지중해에서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되었다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 아랍의 봄은 북아프리카 거의 전 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시리아의 유혈내전이 악화되어 레바논의 민병대와 이란의 용병부대 및 터키와 이슬람 수니파 소속 토후국들 및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중국, 유럽, 러시아, 미국 같은 무기 공급국들까지 휘말려들어 스페인 내전 같은 양상으로 변화할 조짐을 보인다.

 

지중해 주변의 이슬람 경제권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다. 유럽연합의 남쪽 부분의 경제도 마찬가지 파탄이 나서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이 보조금과 대출을 놓고 다투는 가운데 물주인 북유럽은 갈수록 인내심이 줄어든다. 북아메리카와 중국 및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천연가스와 원유 매장지가 발견됨에 따라 지중해의 에너지 공급자들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수에즈운하의 중요성이 오래지 않아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노령화와 인구 감소에 직면한 유럽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로부터 젊은 무슬림 이민자들을 계속 받아들인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젊은 무슬림 이민들은 불을 찾는 불나방처럼 유럽의 부유한 사회에 끌려들어 가지만 유럽을 부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소모품처럼 이용당할 뿐이다.

 

최근 스웨덴의 폭동과 영국 병사의 잔인한 참수행위 및 프랑스 도시 교외의 주기적인 폭동은 모두 지중해가 이제는 휴가의 관문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지중해는 종교와 정치 및 경제의 각종 긴장에 시달리는 침체된 전근대적 사회로 변하고 있다.

 

국제적인 폭력사태의 진원지라는 점 외에 지중해는 새로운 부와 기술 및 소비상품을 만들어내는 바깥세상에 중요하지 않다. 외부세계는 지중해의 과학이나 기술혁신의 덕을 별로 보지 않고 발전 중이다.

 

지중해가 부흥하기에 앞서서 입헌정부들이 무슬림세계 전역에 수립될 필요가 있다. 화석처럼 경직된 유럽연합의 관료체제는 근본적 개혁을 하든가 없어져야 한다. 경제적 신념과 번영 및 안보가 보장된 풍토가 만들어져야 새로운 세대의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중해 문화는 지금 21세기로 발전하기보다는 침체된 18세기의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빅터 데이비스 핸슨 (美 후버연구소 역사학자)


요한복음을 쓴 이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아들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에 대한 조명을 위해 요한복음을 설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형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복음서로서, 주님의 모든 모습과 신자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적용적 설교)

요한복음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고, 그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합니다. (가현설, 인간예수, 외경복음)

그래서 요한은 대체 이들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 이들에게 정확히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자문하며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해 주목해봅시다.

그는 그저 일반적인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좀 더 편하고 행복하고 위로해주는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칭찬과 위로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말을 들으려고 교회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위로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위로는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도를 위로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이끌어가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하기위해 가르침을 중시합니다. 교리입니다.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습니다.

 

지식과 삶은 마치 십계명의 두 돌판과 같습니다. 첫 돌판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두 번째 돌판이 인간에 대한 계명이라면, 이 순서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먼저고, 그 지식에 따른 삶으로의 귀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삶은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교리에서 출발하여 삶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리에서 생명이 나오고 체험이 나오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요한의 위로이며, 우리 상황에 합당한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마침내 그를 찾고 알고 놀라고 경탄하게 될 때까지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위로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도움입니다.”

 

Q> 설교에서 교리를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데, 이것이 청교도들이 흔히 해왔던 조직신학적 교리설교와는 어떤 차이를 갖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예수의 신성이 성경의 메시지에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조직신학적 설교를 말함)

 

Q> 소위 ‘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어떠한 자리에 서게 될까? (즉 복음만 설교하고, 율법에 대한 부분을 도외시한다면, 구원받음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하지 않음)

 

첨부파일 1. 요한복음을 쓴 이유.hwp

카페 문화와 설교연구원/글쓴이: 정대원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미국이 낳은 유명한 전도자 무디목사님이 집회를 끝내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무디에게 찾아와 말했다. 저는 모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제가 꼭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다 좋은데 다만 문법적으로 틀린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제가 듣기에는 여간 거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말씀을 전하실 때, 단어를 사용하시는 일에 보다 신중을 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디는 이렇게 답변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힘껏 고쳐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된다면 저도 선생님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형편없는 언어로 설교하지만, 그래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지금까지 수천명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그 정확하신 언어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습니까? 이 물음에 교수는 그만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언변으로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영혼구원의 사랑이다.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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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s.jpg이슬람은 지금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슬림들 외에는 이슬람의 급성장을 반갑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든지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범죄가 늘어나고 테러가 발생하는 등 달갑지 않은 현상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만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승객들이 가득 타고 있는 출근용 비행기를 납치해서 빌딩을 들이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까? 이것이 전쟁 상황이라거나 또는 마피아 같은 갱단들의 앙갚음이라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혹시 이해하며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일 년에 한 달씩 금식하는 철저히 헌신된 종교인들이 평화로운 대도시에서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식의 틀이 깨져버리는 느낌이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윤리관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관은 인류 보편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이슬람 공동체를 움마(Ummah)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움마에 유익이 되는 행위는 선행이고 움마에 손해가 되는 행위는 악행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살인 간음 폭력 도둑질 거짓말 등의 행위는 악행이라고 보지만 이슬람의 윤리관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살인이나 폭력 등 강력한 범죄행위도 움마에 유익이 된다면 선행으로 장려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종교에는 최소한의 인류 보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인정한다면,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에는 도덕성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이슬람에도 도둑질하면 손을 자르라(꾸란5:38)는 처벌과 간음한 여인은 가슴까지 땅에 묻고 돌로 쳐 죽여라(하디스)는 처형 등 윤리를 해친 자들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강력한 처벌 규정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금요일마다 대규모 기도회가 열리는데 가끔은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가 설교를 한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는 대통령보다 높은 직위다. 필자가 이란에 있을 때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설교를 하는 날은 일삼아서 듣곤 했다. 어느 날 금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TV를 켰는데 그가 설교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리기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어떤 여인이 울먹이면서 질문을 했다고 한다. “폭력이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더니 거두절미하고 정답만 알려 달라고 다그치더란다. 최소한 누가 누구를 때리는 폭력인지 말해보라고 했는데도 상황을 배제하고 제발 폭력 자체의 선악을 대답해 달라며 통곡을 하더란다. 아마 남편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고 속이 상해서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최고 지도자의 대답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폭력은 좋은 폭력도 있고 나쁜 폭력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슬람을 대항하는 폭력은 악한 폭력이지만 이슬람을 돕기 위한 폭력은 좋은 폭력이다”는 것이 그날 그의 설교의 핵심이었다.

폭력 뿐 아니라 살인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된다. 꾸란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과는 다르게 표현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라는 명령에 다른 조건을 붙이지 않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나쁜 것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꾸란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꾸란17:33)”고 명하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것을 형법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정당한 이유만 있으면 법정에 가지 않고 살해해도 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가르침이다.

이란에 있을 때 신문에서 “배교자는 법정에 끌고 갈 필요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쳐 죽여라”는 칼럼을 읽고 놀랐던 일이 있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그 칼럼을 읽고도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무슬림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슬람의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꾸란을 보면 “4개월의 유예 기간이 지났는데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교도들을 발견하면 어디서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하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 구절이 전쟁터에서 적을 만나면 죽이라는 뜻이라고 미화시켜 설명한다. 하지만, 2절에서 4개월 동안의 여행을 허락하고 나서 4개월이 지나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라고 했으므로, 여행객들을 죽이라는 말이지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라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만나든지 죽이라는 것은 재판 절차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슬람의 윤리는 전쟁 윤리다.

이슬람에는 세상을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전쟁의 집(Dar al harb)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특별한 세계관이 있다. 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평화의 집은 무슬림들만이 살 수 있는 곳이고 이슬람 이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쟁의 집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과는 항상 전쟁상태라는 것이 이슬람의 세계관이다. 이교도들과의 전쟁을 지하드(Jihad)라고 하는데 이는 무슬림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아래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를 보자.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알라의 사도(무함마드)를 찾아와서 “지하드와 (상급이) 동등한 행위를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그런 행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대는 무자헤딘(지하드 전사)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모스크에 가서 금식하면서 쉬지 않고 이슬람식 기도를 드리며 전쟁이 끝나서 돌아올 때까지 금식과 이슬람식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부 후라이라는 “무자헤딘(지하드 전사)에게는 그의 말이 긴 줄에 묶인 채 풀을 뜯어 먹는 동안에 밟는 발자국들에도 보상이 주어진다”고 덧붙였다.(Sahih Bukhari Hadith Volume 4, Book 52, Number 44)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은 기도와 금식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슬람만은 기도와 금식보다도 이교도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지하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다정하게 지내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고 죽이러 가자는 지하드 전쟁에 보통 사람이라면 참여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꾸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선자로 정죄하면서 큰 심판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꾸란9:38-39) 지하드에 참여를 꺼리는 사람은 배신자나 위선자로서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한다.(꾸란9:73) 따라서 진정한 무슬림들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알라의 명령인 지하드를 집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슬람에서 지하드가 최고의 가치라면 이슬람의 윤리는 전쟁윤리라고 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는 일반적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적을 속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지하드 전쟁에서 승리하면 남자들은 다 죽이고 점령지 여인들을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었기 때문에 무슬림 병사들은 불륜이라는 개념 없이 그 여인들과 성욕을 채우곤 했다. 꾸란에는 이런 여인들을 “오른손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과의 동침을 허락하고 있다.(꾸란4:24)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간음죄로 처벌받는 경우가 많은 것은 유럽 여인들을 점령지 여인들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튀니지의 한 이슬람 성직자가 지하드 전사들을 위하여 여인들이 성(性)을 바치는 것은 여인들이 할 수 있는 결혼지하드(지하드 알 니카)라고 파트와(Fatwa:이슬람 칙령)를 선언하자 사우디의 여러 이슬람 학자들이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튀니지 여인들이 시리아에서 고생하는 이슬람 반군들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바치려고 나선 것이다. 그 여인들은 전선에 들어가서 20~30명, 심지어 100명 정도의 지하드 용사들과 관계를 맺고 임신하여 돌아오는 일들이 많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하드를 위해서는 불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슬람의 전쟁윤리이다.

물론 이를 불륜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결혼 계약서를 쓰고 부부로서 성관계를 한다. 단지 그 결혼 계약이 2~3시간 유효한 시한부 계약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성윤리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무슬림들이 이렇게 편법을 이용하여 불륜을 허용하는 이유는 지하드라는 최고 가치 때문에 전쟁윤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일들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슬람의 윤리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슬림들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슬림 형제자매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만석 선교사 (한국이란인교회, 4HIM 대표)

* 이 글은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http://koreairanianchurch.net/)에 게재된 글입니다.)

<초신자를 위한 신앙생활 길잡이> ⑮ 은혜(Grace)  


은혜는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Grace)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된다. 흔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명 받았을 때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초신자들에게는 “은혜 받아야 된다”고 권념한다.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쁘다, 감동되었다, 찔렸다, 깨달았다’는 등의 상태를 은혜 받은 것으로 본다. 또는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은혜스럽게 넘어가자고 말한다. 여기는 ‘이해와 사랑’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령의 은사와 은혜를 혼동하기도 한다. 은혜와 은사를 혼동해 은사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은사는 은혜의 부산물이지 은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은혜는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은총·자비·인자·인애’ 등으로도 표현된다.
구약성경에서 은혜를 의미하는 단어는 ‘헤세드’와 ‘헨’이 있는데, 헤세드는 불변의 사랑(인자), 언약적 사랑을 뜻하고 헨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렘31:2)를 뜻한다. 이중 헤세드는 구약의 은혜 개념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동기를 말한다(시136:1-).
신약성경에서 은혜는 ‘카리스’로 단어적 의미는 ‘매력을 느끼게 된 상태나 기뻐하게 된 상태’에 대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친절한, 예의바른, 관대한 처분’ 등의 사상을 띤 의미로 사용됐다. 신약시대에는 보다 발전하여 구체적으로 ‘은총이나 혜택’을 나타나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카리스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라는 용어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구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의와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구약적 의미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말의 동의어로 나타난다. 즉 신약의 은혜 개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근간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활동(성육신-생애-고난-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계시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은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성육신은 은혜의 최고 절정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로운 언약(은혜 언약)이 시작되었다. 죄 가운데 있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 은혜이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통해 그 깨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의 은혜인 것이다. 거듭남과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상태를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은혜는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할 수 없는 구원과 성화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즉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며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은혜는 찾아오는 자를 향해 주시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베풀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를 받는 통로와 종류


은혜는 특별은혜와 일반은혜로 구분된다.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말하고, 일반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연적 축복을 말한다.
그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교회는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주기 위한 기관이다.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을 읽고 깨달았을 때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과 세례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데 성찬과 세례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일체로 나타나는데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근원으로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부 은혜의 전달통로로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속하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은 은혜를 선포하고 구속받은 성도를 감화 감동케 하여 주신다.

▲ 하나님의 은혜 -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질서 속에 내포된 근원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열리고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한다.


▲ 그리스도의 은혜 -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화 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성육신과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의 최고 표현이다.

▲ 성령의 은혜 - 성령의 은혜는 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태의 직책(은사)으로 나타나며, 그 은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교회공동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혹은 믿음을 받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말씀을 전하는 능력, 방언의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르심을 입었으며(갈1:15), 의롭다 하심을 입고(롬3:24), 거룩함을 입는 것이다(롬6:14). 또한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살후2:16),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딤후2:1).


Part 2. 율법과 은혜의 관계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율법은 행위를 강조하여 선행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은혜는 인간의 공적 없이 값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표준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이다. 은혜는 어떠한 기준이나 노력 없이도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해주며 죄에서 구원해 준다. 즉 은혜는 어떤 일체의 공로를 배제하며,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분에 넘치게 받는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율법이 구약의 중심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의 중심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구약시대를 율법시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시대 곧 '교회시대를 은혜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은혜는 신약시대부터 생겨났다고 봐야 되는가에 대해 성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및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어졌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거절하였을 때에 ‘더하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출15:13, 18:9), ‘주께서 행하심대로 다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함으로서 은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었다(출19, 24장).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는 전혀 다른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단지 외형상 다른 형태를 취할 뿐 율법의 중심사상도 사실상 은혜와 같이 사랑, 긍휼이지만 영적 지적 성숙도가 낮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엄격한 형태의 금기식 율법을 주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본질적 방편이 아니었다. 율법이 다스렸던 구약시대에도 은혜는 존재했다.
한편 ‘은혜’를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은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약적 은혜의 개념은 은혜의 실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보다는 신약적 은혜의 그림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창조에서부터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안타까워 하와를 주신 것도 은혜에 속한다. 인류 구원을 위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힌 은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애굽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나뭇가지 옷을 대신에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창3:21). 거친 환경 속에 살아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인 동시에 예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나타낸다.


② 가인에게 보호 표를 주신 은혜
제사 문제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 대해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가인에게 보호의 징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창4:15). 이것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악된 인간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밧줄을 던지시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


③ 에녹에게 주신 승천의 은혜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은 당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 경건한 생활을 했다(창5:21-24).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회복되는 곳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에녹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고 변화 승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④ 노아 홍수심판과 구원의 은혜
노아 때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온전히 살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방주를 지을 수 있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창6:8-22). 구원의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대홍수 심판을 모면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⑤ 아브라함을 찾으신 소명의 은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 부르시고, 열국의 아비로서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약2:23).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⑥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율법 은혜
모세를 부르셔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맡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인도하고 구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은혜를 선택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은혜 대신 율법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은혜 아래 있었다.


⑦ 죄악된 백성을 성결케 하는 성막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의 장막인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피의 제사를 통해 죄악된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케 하는 곳을 주셨다. 만일 성막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속죄할 방법은 없었다. 또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⑧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은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통치자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인해 이방민족의 지배를 당하게 됐고,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보내주셨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되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을 요구했다(삼상8장).


⑨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은혜
말씀이 육신 되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화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었다.




Part 3. 은혜의 사역 - 구원·성화·소명

은혜의 중요한 사역은 성도의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위한 소명을 불어넣는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만 역사로 나타날 때는 인간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다. 은혜의 능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인간 영혼의 파멸을 회복시킨다.


1) 구원의 사역 - 죄악된 인간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사하게 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며 구원을 이루게 하는 역사를 한다. 즉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실체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기만 하면 죄악된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딛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 성화의 사역 -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도는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은혜는 구원 사역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때를 따라 돕는 역사를 계속한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3) 소명의 사역 - 특별한 직무를 맡기고 능력을 공급한다
은혜는 성도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특별한 직무를 맡긴다. 바울도 사도로 임명을 받고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록 복음을 전파에 부적합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은혜는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영적 도덕적 능력을 공급한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닌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재능인 은사가 주어진다.
고전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견해>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을 기복적인 신앙이나 그릇된 생각에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나님의 은혜는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붙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닌 모든 인류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란 선물이다. 또한 은혜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무법을 허용하는 것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는데 본인은 동일한 사업에서 특별한 이익을 얻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만족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것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고 힘들다고 해서 은혜가 떠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 은혜 받으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무관하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짓도록 허용하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소명을 짓밟도록 허용하는 허가증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구원)는 선한 일을 하거나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등 공로에 따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롬11:6, 딛3:5).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롬4:4, 엡2:8-9).

▲ 은혜 받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은 은혜가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은혜가 역사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뿐 아무 일(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책임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명분으로 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신앙적 책임까지 부정되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은혜 받아도 율법은 철저히 지켜야 된다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많이 나타난 잘못된 생각으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출처: 성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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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유머ㅡ


60 동갑부부의 환갑 잔치날 요정이 나타나
소원 하나씩 말해 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영감이랑 같이 크루즈 여행 한번 가고 싶어."
금방 할머니 손에 티켓이 쥐어졌다. 할아버지는 ...


"난 30살 차이나는 젊은 여자랑 살아보고 싶어."
바로 뿅~~하고 90세가 되어 버렸다.
ㅋㅋㅋㅋㅋ.

 

 


웃음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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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 그 권위를 두고 있고 교회사에서 강력한 증거를 얻는다. 모든 시대에 복음주의 신앙이 강력하고 활기를 띠었던 곳에서 죄의 자각의 필요성에 대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는 죄의 자각이 있느냐를 그 신앙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영혼이 진정 구원을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영적 절망과 하나님으로 인한 거듭남과 죽음, 지옥을 경험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만일 모든 것(그들의 경험)이 즐겁고 조용하며 열렬하며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들이 설사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들을 인정하지 말라. 크리스천의 유일한 시금석이자 확실한 영분별인 인자의 표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기를 통해 이런 믿음이 널리 퍼졌다. 대표적 청교도 설교자 로버트 볼턴은 단언했다.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 율법으로 상처받은 후 복음으로 치유받는 과정을 걸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먼저 겸손해야 한다.”

 

17세기 후반 복음주의 신앙과 영성이 다시 쇠퇴하고 있을 때 존 오웬은 1674년에 죄를 깨닫게 하는 설교가 학식 높은 신학자와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의 주된 특징이었던 시대를 회고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회심시키는 데 유용하고 열매 맺는 사역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은 비난받고 거부당하고 있다--- 죄에 대한 자각, 죄의식과 그에 대한 통한,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저주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번민은 어리석은 상상이고 육체적 질병의 영향이며 인간의 무질서한 죄에서 일어나는 광적인 관념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교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설교가 세상에서 사라져 갈 무렵그것은 복음주의 부흥 속에서 다시 강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휫필드는 깊은 상처에서 치유받은 새로운 설교자 세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죄를 자각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위로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점에 대해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자주 너무 급하게 위로하려고 했다. 주님이 그런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더 옳게 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구한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두 번째 각성을 일으킨 부흥이 있고 난 뒤 1844년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썼다. “내가 아는 한 율법에 의한 죄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일반적으로 근대 부흥에서 우세했다.” 그것은 1859년에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번 죄의 자각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흥은 수시로 죄의 자각을 모르는 자들이 결단하는 통로가 되었다. 1882년에 스펄전은 썼다.

 

때로 우리는 현대 부흥 운동의 많은 부분이 축복보다는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수천 명을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도 전에 평안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가 결코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방식의 죄의식을 멸시한다. --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 속으로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뛰어나가고 만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에 왔고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 안에 머물다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스펄전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영적 쇠퇴가 뒤를 따랐다. 복음이 율법 없이 선포될 때, 믿음이 회개 없이, 천국이 지옥 없이 선포될 때 부주의한 영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복음주의의 본질은 율법을 설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복음주의의 일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심리학도, 이단 종교도 한다. 복음이 다른 모든 가르침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문제,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법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다.”

 

이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반응은 로이드 존스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회심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가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이안 머리, 오래된 복음주의-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한, pp 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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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랑 이야기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주세요.
      부디 미소 때문에, 미모 때문에,
      다정한 말씨 때문에,
      또한 재치 있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그런 날엔
      내게 편안한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저 여인을 사랑한다고는
      정말이지 말하지 마세요.


      이런 것들은, 님이여!
      그 자체가 변하거나
      당신을 위해 변하기도 해요.
      그처럼 묶인 사랑은
      그처럼 풀리기도 해요.
      내 뺨의 눈물을 닦아주는
      당신의 사랑 어린 연민으로도
      날 사랑하진 마세요.

      당신의 위안을 오래 받으면
      울음을 잊게 되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을 잃을지도 몰라요.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주세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사랑을 누리도록,
      사랑의 영원을 통해.”


      영국의 여류시인 브라우닝은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이란 제목 아래
      조건적 사랑이 주는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 속에서 우리는
      '때문에'의 사랑이 주는 허무함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며
      조건적인 사랑은
      그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퇴색되고 마는 사랑입니다.
       
      세상에서의 사랑도 그러하거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한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사랑마저
      조건적 사랑으로 변질하여 가는
      가슴 시린 현실 앞에
      종종 부딪히게 되는 것은 또 어쩐일까요...
       
      우리 주님의 아카페적인 사랑이
      더 없이 귀한 것은
      그 사랑은 변질하지 않고
      퇴색하지도 않으며
       나의 아픔도, 슬픔도
      나의 모자람까지라도...
      감싸 안아주시는 사랑...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
      불멸하는 사랑이기에... ...

       

      그 뜨거운 사랑이 그 분을

      십자가의 죽음마저 자원하게 하셨고

      사망은 삼일 삼야 죽음의 터널 속에

      우리 주님을 가두었으나 그 사랑은

      끝내 '부활'의 아침을 연 것입니다!!


      오늘도 이 아카페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부활의 사랑,

      우리 주님의 사랑 이야기로
      나의 빈 가슴에 가득하게 채울 수 있기를....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

       

      글: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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