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파트 근처에 있는 세탁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세탁소 전부를 태웠고, 며칠이 지난 후 아파트 벽보에는
    '사과문' 하나가 붙었습니다.

    사과문에는 불이 나 옷이 모두 타서 죄송하다는 이야기와
    옷을 맡기신 분들은 옷 수량을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공고가 붙은 후,
    한 주민이 공고문 아래에 글을 적고 갔습니다.

    당연히 옷 수량을 적어 놓은 글인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아저씨! 저는 양복 한 벌인데 받지 않겠습니다.
    그 많은 옷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기를 내세요'
    라는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그 주민 말 한마디에 아파트 주민들이
    속속 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누군가 금일봉을 전했고,
    금일봉이 전달된 사실이 알려지자
    또 다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얼마 뒤 아파트 벽보에 또 한 장의 종이가 붙었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감사문' 이었습니다.

    '주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월남전에서 벌어온 돈으로 어렵게 일궈 온 삶이었는데,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이 저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저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키는 현상.
    나비효과라고 합니다.

    나비효과처럼 혼자만의 작은 선행과 배려로 시작한 일이,
    세상 전체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만큼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사람도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모든 사람들이
    그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풀이 받은 상처는 향기가 된다/황태영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하거나 화를 낸다.
분노하고 고함지르고 보복하려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러나 풀은 상처를 받았을 때 향기를 내뿜는다.
그 향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쓰러지고 비에 젖고 찬서리에 떨어져야한다.
땅 밑까지 휘어지고 흙탕물에 젖어도 꺾이지 말아야 한다.

보살펴주는 이가 없는 거친 들판에서
억센 발에 짓밟혀도 새로이 솟구쳐야 한다.
고통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오해와 억울함에 변명하지 않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다시 제자리로 일어서야 한다.

풀의 향기에는 살을 에는 아픔이 숨어 있다.
그러나 풀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향기로 미소 지을 뿐이다.

상처는 다 아픔과 독기가 되는 줄안다.
그러나 향기가 되는 상처도 있다.
상처가 향기가 되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이 묻어 난다.
상처받은 풀이 내뿜는 향기는 상대를 감동하게 하고 취하게 한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 향을 묻혀준다.
향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자기를 찍은 도끼는 원수다.
그럼에도 향나무는 자신의 아픔을 뒤로하고
원수의 몸에 아름다운 향을 묻혀준다.
서로 구별이나 원망은 사라지고 관용과 화해만 있을 뿐이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도끼에 찍히는 순간 나타난다.
평소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고통과 고난이 닥치면
진짜는 향기를 뿜어 내지만 가짜는 비명만 지르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재물의 크기가 아니라
내뿜는 향기와 비명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된다.

내가 세상을 향해 매연을 뿜어내면
남들만 상처받는 것만 아니라 내 호흡기도 해를 입게 된다.
결국은 그 독기가 나에게로 온다.

상처와 분노를 향기로 내뿜어야 나도 향기로울 수 있다.
깊은 향, 아름다운 세상은 그렇게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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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

내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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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율법폐기론, 도덕폐기론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그렇다면, 613가지 율법 중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이고, 더 이상 지키지 말아야 할것들은 대표적으로 무엇이며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지킬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혹은 지키지 말야아 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지키지만 구약의 절기는 더 이상 따르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모두 따르지만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또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음식을 먹습니다.

율법 중에서 지켜야할 것과 더 이상 지키지 말아야할 것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답변

구약에 언급된 율법은 편의상 언약법, 의식법, 정결법, 도덕법, 시민법으로 나눕니다. 기본적으로 구약의 율법과 새 언약 성도의 삶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연속적인 것은 이 시대에도 계속 적용되는 것이고, 불연속성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식법과 시민법, 정결법은 폐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모든 의식을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그림자는 실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골 2:17). 옛 언약의 제사에서 그려진 것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원히 가시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정결법과 의식법 그리고 시민법과 관련된 규례, 즉 씨를 섞어서 뿌리는 것이나 실을 섞어서 베를 짜는 것 또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 구분, 안식년, 희년 규정, 이자 규정, 등과 같은 것은 지금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약법과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사숭배, 살인, 도적질, 거짓말, 간음, 동성애와 같은 규정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실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법과 정결법 그리고 시민법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규정의 영적인 의미, 그 정신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희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희년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년의 정신, 즉 이웃 사랑, 평등, 자유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현대인은 이자를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그 기본 정신은 이웃 사랑입니다.

제사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모든 악으로부터 완벽한 대속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이것을 성찬식에서 기념합니다. 구약의 의식적인 제사는 무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산제사로 나타납니다(롬 12:1: 히 13:15-16; 벧전 2:5). 우리는 감사의 산제사를 드리면서 찬양의 제물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고 고백합니다. 은혜의 시대에 우리는 이전의 제사 의식의 연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 후에 준비된 축제의 음식은 가난한 자와 이방인, 과부와 고아에게 혜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감사의 산제사를 드리라고 부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율법의 명령을 처음 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갈 3:29). 이 해석의 중요한 원리는 계시역사의 전진입니다.

고신대학교 구약학
신득일 교수 드림

 

크리스챤 신문

개혁주의 마을/Grace

 

       

       

       

       

      소망은 낙관적인 기질과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질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좀 더 쉽게 기쁨이나 평안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망은 신뢰이며 기대이고 우리의 기쁨이나 평안에 근거하기보다는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서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위기가 닥칠 때면 늘 그렇듯이 문제는 우리가 계속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주장하고 계시느냐의 여부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은 그 일을 주장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소유하기 위해서 굳이 자신감에 차 있을(self-confident)필요가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기만(God-confident) 하면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레베카 피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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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언변이어도  (0) 2015.03.24

기독교 부흥의 유일한 길 / 박신 목사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1-24)



불신자들을 향해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반발만 살 때가 많습니다. 또 궂은일을 도와주고 어려운 형편을 위해 기도해주어도 잠시 고마워할 뿐 복음에 대해선 여전히 마음을 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구원 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내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말하자면 정말 ‘전도의 미련한 것’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가 미련하다는 것은 전도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예정이 되어 있어 전도의 효력이 높지 않다든지, 특별한 테크닉 없이 무조건 교리를 선포하고 밀어붙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부족 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이 있어서 아무리 전해도 미련스럽게 못 알아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율법대로 선하게 살려는 자들입니다. 헬라인은 무신론자이거나 스스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비록 유대인과 헬라인 두 민족을 들었지만 사실은 전체 인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적을 보이면 믿겠다는 자와 스스로 깨우쳐 지혜를 얻으면 믿겠다는 자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두 가지 요구 어디에도 부응하지 못하니까 전함을 받는 자의 입장에선 복음이 좋은 소식은커녕 도리어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가 전한 내용이 불신자들에게 전혀 미련하지 않게 여겨지고 쉽게 수긍하고 좋아하면 잘못된 것으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를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이 구한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이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기들을 구해주었듯이 예수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는 해방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듯이 손쉽게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당장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등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를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즉 “무거운 짐을 진자는 예수께로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에서 형통합니다.”라고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기는커녕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은 어떤 지혜를 구했습니까? “모든 아덴 사람과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철학과 사상에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든지 스스로 깨우쳐서 의롭고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기에 만약 그런 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받아들였습니다.  

헬라인들이라고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온성에 우상이 가득” 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었기에 바울이 그들을 두고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평했습니다. 즉 조금이라도 그럴싸해 보이는 사상, 도덕, 종교는 그 종류를 불문하고 자기들이 수양하고 정진하는데 이용하려고 채택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기독교도 자신이 의로워지며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산상수훈대로 살면 경건하게 되며 기독교의 박애주의 가치관을 실현하면 가장 고급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전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 두 가지 요구를 맞춰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표적 아니면 지혜 둘 중 하나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 수는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들기에 먹고 마시는 문제만 해결되면 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둘 다 인간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그런 요구를 완전히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습니다. 모든 인간이 과거나 현재에 전혀 선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선해질 가능성도 아예 제로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요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아니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 아예 죽은 지 나흘이니 지나 냄새나는 시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가장 경건했던 유대인과 가장 지혜로웠던 헬라인을 구분할 것 없이 말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도 아무리 지성적으로 심오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자들이 더 크게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배척을 당했습니까? 율법사와 공회원들과 제사장들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일반 서민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로마를 물리쳐 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했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 쳤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성인이든 학문이 없든 자유자든 노예든 부자든 거지든 구분 없이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든지 최소한 마음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들이 선하고 얼마든지 더 경건해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더러 회칠한 무덤인지라 속에서 썩는 냄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반발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면, 본문대로 하자면 전도의 미련한 것이 행해지면 사람들이 내보이는 반응도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크게 반발하며 난리를 치든지 아니면 정말로 가슴에 찔려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뒤집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든지 말입니다. 단순히 어떤 새로운 종교의 사상과 교리를 배워 그대로 자기를 고쳐보겠다든지 아니면 절대자에게 빌어서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  예수님의 참 생명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 체계 내지 교리로 바꿔서 전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작금 주로 행해지는 전도 방식은 어떠합니까? 아니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불신자의 요구에 맞추어 주는 방식이자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내용, 즉 환난을 이겨내는 위로나 도덕적 가르침뿐입니다. 이 세대에 만연하는 죄를 지적하려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끌어내려지고 산상에서 지혜를 설교하거나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는 예수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전도해서 일단은 사람을 끌어 모은 후에 나중에 차츰 가르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짓 복음을 소개한 것으로 엄격히 말해 사기입니다. 표적과 지혜를 준다고 해서 교회에 나왔더니 피 묻은 십자가를 꺼내 놓으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갈 것 아닙니까? 처음에 잘못 전한 것을 번복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형통만 주는 도우미나 경건한 도덕선생으로 둔갑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들로 가득 찹니다.  

전도가 미련해지지 않고는 기독교가 다시 부흥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라고 당당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 전도든 강대상에서 선포되든 기독교 진리는 반드시 불신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사야합니다. 교회와 신자를 죽이기까지 핍박하려고 덤빌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선언하라고 해서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든지 혹은 그렇지 않은 양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자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자백을 항상 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은 자기 같은 그런 천하의 죄인에게도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당신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도저히 스스로는 자기 죄를 사죄, 변상할 방법이 이 세상에 없었고 심지어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인생을 살 소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진리를 당당하게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무조건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말고는 자기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임을 본인부터 확신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썩은 시체이자 사단의 노예라고 선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요컨대 전함을 받은 자가 심각한 찔림을 얻거나 크게 반발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여야지, 수긍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26/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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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뚜렷한 사계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세미티는

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봄철의 신록이 있는가 하면

여름의 무성하고 무더운 날이 있고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도 있습니다.


요세미티의 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꽃이 피는데 그것이 바로 dogwoo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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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우드는

우리나라 말로 산딸나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중부 이남지방에서 자라며

6월 경에 꽃을 피우고 9, 10월에 결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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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덕우드는

보통 4월 경에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날씨가 좋아서

3월 말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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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우드는

동부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이지만


서부에서는 요세미티나

샤스타 지역 이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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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의 주화가 파피라면

덕우드는 노쓰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주화(state flower)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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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과 5월에

요세미티를 방문하면

요세미티의 신록과 더불어

산뜻하고 밝은 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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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4월 초에

요세미티에 눈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눈쌓인 덕우드를 볼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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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도 요세미티에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내리자마자 녹는 경우가 많아서

눈덮인 덕우드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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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른 아침에

덕우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눈이 녹기 전에 눈쌓인 덕우드를 촬영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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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봉우리는

쌀쌀한 기온 덕분에

내린 눈이 얼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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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가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봄날에 요세미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이

바로 이 dogwood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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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 꽃의 색은

white, plink, green의 세 종류가 있는데

요세미티에서 피는 이 꽃의 99%는 white입니다.


위의 사진은

pink color의 덕우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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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

pink 색의 dogwood는

단 두 그루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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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두 그루 뿐이지만

이 핑크빛의 dogwood 가

만개했을 때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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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는

한국, 중국, 일본과

유라시아의 북쪽과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건조한 사막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서식하고 있으나

주로 남동부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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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는

숲속의 큰 나무 밑에서 자라기도 하지만


자연산일 경우 

대부분 산 아래쪽과 강이나 물가에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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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산딸나무라고 부르는데

왜 미국에서는 dogwood라 부를까요?


여기에는

유래가 확실하지 않지만

두 가지 설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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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유럽에서 개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데 이 꽃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 사람들은 dogwood 껍질을 다린 물로

진드기가 붙은 개를 ?욕 시키는데 사용하곤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나무가 dogwood로 불리워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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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는

기독교와 관련된

유래와 전설이 있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dogwood 나무에 못박히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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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wood는

부활절 시기에

꽃이 피었기 때문에,


그리고

dogwood 꽃잎 끝에

붉은색 점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이 꽃의 4개의 잎이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기에


dogwood에

그런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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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할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덕우드를 바라 보노라면

웬지 마음과 영혼까지도 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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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통통 붓는 몸, 평소 잘못된 이 습관 때문

조직 내 림프액이나 조직의 삼출물 등의 액체가 과잉 존재하는 상태, 부종. 특정부위나 전신이 붓고 푸석푸석해 진다. 이런 부종의 원인이 잘못된 호흡습관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호흡습관이 부종을 유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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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는 본래 공기가 지나다니는 통로다. 그런데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을 쉬면 코와 목의 안쪽 편도선에 곰팡이가 피듯 세균이 침입해 편도선을 감염시킬 수 있다. 편도선은 우리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을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혈액성분인 백혈구를 만든다. 그런데 이 편도선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세균은 백혈구와 함께 세포에 전달돼 세포가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

침투한 세균과 바이러스는 신장을 위협한다. 혈관과 세뇨관 다발이 잔뜩 모여 있는 신장은 혈액 중의 노폐물과 과다 섭취한 영양소를 걸러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이곳에 세균과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오줌이 만들어지지 않아 노폐물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혈액이 온몸을 돌아다니게 된다.

또한 신장은 우리 몸의 약 60%를 차지하는 수분을 조절한다. 그런데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면 이 양만큼의 혈액을 여과해 오줌으로 만들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수분으로 혈액에 섞여 몸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리고 혈액 중의 수분은 모세혈관의 벽을 통해 혈관과 세포 사이에 있는 간질이라는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렇게 생기는 증상이 바로 ‘부종’이다. 입으로 숨을 쉬는 사소한 습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은 물론 몸을 붓게 만드는 것이다.




갈대는 무엇이며 상함은 무엇인가


 

예언의 영을 날개 삼아 그 자신의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시대로, 시간을 초월하여 옮겨간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의 눈으로,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적 시야에 그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사42:1)

 

이 부분은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소명(召命)

둘째, 소명의 수행

 

1.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마12:20) 그리스도를 그의 의로운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어느 사역보다도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선택되고 발탁되신 종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 모든 일을 수행하고 감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 사역을 그의 가장 위대한 일로 여기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달콤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의와 감탄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본문 초두에 '보라'라고 외치십니다.¹시험의 때에 불안한 마음은 현재 그들이 당면한 목전의 상황만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으로 상처 입은 심령의 안식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하여 특별히 각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의 때에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참된 놋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참 어린 양이십니다(요1:29). 우리가 바라보는 바, 우리를 구원하는 이 대상(object)은 우리 영혼에 위로를 가져다 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을 바라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행하시고 고난당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고후5:19).

우리의 죄로 인해 침해를 당하신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원의 사역을 그처럼 기쁘게 여기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가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듯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자신뿐만 아니라 신비적 그리스도²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랑은 그리스도 전부에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구세주 위에 안전하게 건축합시다. 그분은 너무나 고상한 임무를 지니신 부이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위안을 위한 삼위(三位) 하나님의 달콤한 일치를 봅시다.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임무를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공급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속은 삼위일체의 세 인격 모두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소명의 수행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소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왕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화려한 행차로 요란한 소리와 먼지를 일으키면서 가 아니라 겸손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임이 여기에 규정(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사실 그의 목소리는 들려졌습니다. 어떤 음성이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그는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온유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다루셔야 할 자들의 상태

① 그들은 상한 갈대였습니다.

② 그들은 꺼져 가는 심지였습니다.

 

둘째,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태도.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에는 문자적인 뜻보다 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그분은 그들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분의 이 같은 동정심 있는 돌보심은 '심판하여 이길 대까지' 변치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심령 속에 시작된 이 은혜의 역사는 그것이 완성에 이를 때까지 모든 저항하는 죄의 부패성을 극복할 것입니다.

 

[본문의 첫째 주안점]

 

그리스도께서 다루셔야 할 사람들의 상태는, 그들이 상한 갈대이며, 꺼져 가는 심지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아니라 갈대입니다. 그것도 온전한 갈대가 아니라 상한 갈대입니다. 교회는 약한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즉, 새들 중에서는 비둘기요, 나무 중에서는 포도나무요, 들짐승들 중에서는 양떼요, 사람 중에서는 더 연약한 그릇인 여자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회심하기 이전에 그들은 상한 갈대입니다. 또한 회심한 후에도 종종 그렇습니다.

 

1) 상한 갈대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받고자 나아왔던 사람들처럼 어떤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2) 그는 그 비참함 때문에 그 비참함을 야기시킨 죄를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죄가 아무리 자신을 위장하려고 해도 상함과 부서짐은 죄의 결과로 나타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3) 그는 죄와 비참함으로 상하기까지한 민감한 사람입니다.

4) 그는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음을 알고, 다른 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가 가진 어떤 희망은, 비록 그가 담대하게 자비를 요구하지는 못하지만, 그를 일으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이 희망의 불씨는 타락된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의심과 도루염에 의해 저항을 받으면서 그로 하여금 연기를 내며 타는 불꽃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상한 갈대'와 '연기를 내며 타는 불꽃'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해 주는 것입니다.

 

역자주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으로는 '꺼져 가는 심지'인데 영어로는 smoking flax 즉 '연기를 내며 타고 있는 불꽃'을 의미합니다. 한글 번역은 그 심지가 꺼져 가는 것을 주로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영어로는 비록 연기를 내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불꽃이 아직도 피어 있다는 점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과 영어가 담고 있는 뉘앙스가 반대되고 있어 여기서 한글 그대로의 번역이 곤란합니다. 그러하기에 이하에서 '연기를 내며 타는 불꽃'이라고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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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번째 질문 세속적 인본주의 및 뉴 에이지 운동 
성경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세속적 인본주의는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먹어가는 교활한 그러면서도 극단적으 로 해(害)가되는 암입니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으며 또 한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높이는 점에서 교활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철학은 자신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훌륭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더 높으시고 인간의 행위를 위해 기준을 전하신 창조주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암은 기독교, 전통적인 공교육, 그리고 일반적 도덕의 원리들을 좀 먹어갑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통속적으로 반(反) 성경적인 철학의 기초가 됩니다. 치명적인 이러한 진화적 신념의 중심에는 하나님이나 인격적인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무신론), 인간이 모든 현실의 정점에 있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이념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며(인간의 타락을 묵살하면서) 완전한 창조물로 진화 하는 무제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활하게 호소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어떤 필요성도 완전히 부인하며, 오히려 인간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뉴 에이지 운동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동일한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모든 개인이 지금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진화 해야만 하는 “뉴 에이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인간이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전도자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고 있는 선함은 실제로는 각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하는 신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뉴 dp이지의 목표는 인간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신을 깨우는 일입니다. 

이 거짓된 영적 상태의 인식 하에서는, 인간이 신이며 그러므로 신성하다고 간주하며, 개인과 사회의 세계적인 변화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흥미 있게도,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이라고 불리는 것은 고대 동양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 다른 뉴 에이지의 거짓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힌두교에서 가져온, 일원론적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것은 하나이다.” 라는 이념입니다. 이 범신론적 신앙은 “모든 것이 신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영적 각성(깨달음)과 사람 속에 있는 신의 더 높은 의식을 얻음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또한 힌두교의 환생의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뉴 에이지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인 출생의 반복함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남으로서 죄와 나쁜 업(카르마)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것들과 신적 단일성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그들 은 마음의 힘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이든지 구상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운동의 알려진 목적은 핵에 의한 대학살이나 세계 자원의 고갈로 인한 인류의 멸종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뉴 에이지 운동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지구의 치안을 유지하고 동양과 서양을 함께 조화시킬 새로운 세계 질서의 확립을 지원합니다. 슬프게도, 뉴 에이지 생각은 현대 생활의 거의 모든 양상에 침투했습니다. 

큰 기업은 그들의 정책 입안 매니저를 마음 증진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시킵니다. 치료 전문가들은 내적 반영과 의식의 탐사에 근거한 기술을 채택하여 사용합니다. 마케팅 전문가는 마케팅에 대한 동기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연예인들은 그들에게 인기를 가져 다 줄 내적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부로 향합니다. 예전에는 하찮은 소문화권에 속했던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미국 생활의 주류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진실을 왜곡하는 이러한 모든 표현에 저항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교활하고 부정직한 이러한 속임수를 드러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 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 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뉴 에이지와는 다르게 성경은 내부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위를 바라봄으로서, 사람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진실을 발견한다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17:5,9). 바울의 반문하는 질문은 그것을 가장 잘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린도전서 1:20). 참으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성회는 진실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와 뉴 에이지 이단의 거짓을 배척합니다. 

관심사: 

오늘날 교회는 항상 우리 주위의 모든 곳으로 침투하여 영향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철학에 항상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자와 뉴 에이지 사람들이 말하는 달콤한 선언은 공립학교, 대학, 대학교, 정치적 구조, 그리고 모든 사회적 구조를 접수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의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결백해 보이는 개념 뒤에 있는 총체적 철학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사람을 우리들이 믿는 것처럼 믿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진리를 위해 서며,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의심치 않는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끌어내는 사탄의 노력에 저항할 것을 기대합니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뉴 에이지 사람들이 환경을 보호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파국적일 수 있습니다. 개인의 독창성과 선도권(이니셔티브)을 격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독창성과 선도권 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를 위해 투표하 는 것은 재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보에 밝으며,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역자주: 업 (카르마) - 불교 혹은 힌두교의 용어로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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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토종들풀 종자은행" 이야기가 실렸다.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 17년간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들풀 1백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세웠다는 이야기다.

한 사람이 장한 뜻을 세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잡초들의 씨앗을 받으려 청춘을 다 바쳤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기사의 끝에 실린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죠.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오호라!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된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이냐.

사람도 한 가지다.
제가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게면 잡초가 된다.

그가 17년간 산하를 누비며 들풀의 씨를 받는 동안, 마음 속에 스쳐간 깨달음이 이것 하나 뿐이었으랴만, 이 하나의 깨달음도 내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참으로 달고 고마운 말씀이다.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자리를 가리지 못해 뽑히어 버려지는 삶이 너무나 많다.

지금 내 자리는 제 자리인가? 잡초는 없다. 자리를 가리지 못해 잡초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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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거저 주라 사람들은 조건부로 사랑을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사랑스럽거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사랑으로 보답한다. 당신의 삶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갚아야 할 빚이나 뇌물로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는 선물로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즉,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선물로서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데일 버크의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솔루션 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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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을 따지지 말라. / 박신 목사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6-17)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라는 말대로 소는 글을 읽어 주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전도자가 가끔 느끼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부정의문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하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중적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을 인용해 전하는 것을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귀에 경 읽는 것처럼 느껴져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 전도자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간섭하여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전도를 망설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속뿐 아니라 개인 구원도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차피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구태여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바울이 예정을 말해놓고 본문처럼 스스로 믿도록 전하라고 권하면 성경 말씀끼리도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정론을 더 확정지어 주는 내용입니다.

예정을 신학적 논리에 비춰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간단히 접근해 봅시다. 믿을 갖는 것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거나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관심 내지 호감을 갖고 성경과 관련 서적을 연구해 깨달아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주위에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고 또 그 들음이 계기가 되어 믿게 됩니다. 교리적 설명뿐 아니라 신자가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들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믿도록 계기가 되어 준 사람의 입장에서 따지면 그에게도 똑 같이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죽 연결해 가면 전도자들의 고리가 생깁니다. 간단한 예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서양인 선교사가 생명을 걸고 전했기 때문에 신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믿는 자들의 고리는 결국 열두 사도로 모아지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정되어 있기에 전도 안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은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뜻과 같아집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도 개인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열 두 사도는 없었고 또 지금 신자 된 나 자신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15)로 인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했습니다. 택정함을 입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은 다음 세대의 예정된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해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신자가 전할수록 소귀에 경을 읽는 것 같은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정된 사람을 미리 알면 그들만 찾아가 전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세대의 예정자를 전세대의 신자에게 완전한 비밀로 해 놓았습니다.  

만약 구원이 예정된 자를 미리 알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절대 건설 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자꾸 어차피 구원받을 최종 숫자는 변함이 없지 않느냐라는 점에만 주목해 전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민족 전체가 택정함을 받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을 맛보았고 거룩한 율법마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에까지 흘렀지 않습니까?

만약 택정함을 입은 자들을 미리 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선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 유기(遺棄)자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지옥 간다면 선악을 분별해 시행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택함을 입은 자들을 죽이려 들 것 아닙니까? 택함을 입은 자도 어차피 구원 받는데 즐길 것 실컷 즐겨도 된다고 여길 것 아닙니까? 이래저래 죄악만 만연합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어야 할 복음이 거꾸로 죄악에 더 불을 지르는 격입니다. 자기들 자녀 중에도 구원 받을 자와 아닌 자로 나눠지면 부모가 제대로 그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착하게 사는 자를 구원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구원관이 논리적으로도 틀렸다는 이유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만 지금 논하고 있는 관점에서만 봐도 전도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남의 구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합격점에 드느냐 못 드느냐 만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비유컨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고3 들이 무한 경쟁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선하게 살겠다는 노력이 단순히 서로 구원의 가능성을 다투는 문제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길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에게 나쁜 짓만 안 하면 됩니다. 대신에 서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바쁩니다. 지금 불신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정되어 있으니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의심하는 것은 이 땅에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 건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과 통합니다. 전도란 단순히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의 최종 숫자는 하나님이 정하며 구원 자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도를 인간이 구원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대신에 전도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건설하려는 소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 예수님과 동행 하는 은혜와 기쁨이 너무나 귀하고 좋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주저하는 신자는 그런 기쁨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심지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정이지 확정은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로 구원이 예정된 자의 구원을 확정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예정된 자는 죄악과 사단의 사슬에 묶여 괴롭고도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자식도 예정 밖에 있을 수 있으니 전도하지 않고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예정된 자를 구태여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일이 결코 미련한 짓이 아닙니다. 전도란 하나님이 예정된 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미리 맛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숫자를 내 힘으로 늘리는 것이 전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끼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복음을 말로 또는 삶으로 남들이 듣고 보아 분명히 알게끔 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열두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우리 자식 세대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6/7/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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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았던

 "위로 솟구쳐 펴지는 치유"가 저에게도 일어 났습니다.

 

지난 군산광휘교회 김선배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최종천목사님을 모시고 치유전도집회가 있어서 참석하였습니현ㅅ다.

 

마지막날 끝나기전 최종천 목사님께서 "주님께 맡기세요"하시며 선포했습니다.

 

잠시후 제 몸에서 강력한 힘이 솟구치며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몸은 상상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만져주셨다.

 

주님께서 치유해주실때 최종천 목사님께서 "신경쌍과 허리 모든병은 고침받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치유받은 내 몸의 기둥인 허리엔 힘이 꼿꼿. 두다리도 힘. 몸도 가벼워지고 유연해졌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어 제가 알지 못했던 세밀한 병까지

귀하신 최종천 목사님을 통하여 치유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칼빈주의적 성령론의 발전

 

마이클 헤이큰(Michael AG. Haykin)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 전통은 성령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이 성령론적 열정의 주요근원은 바로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계속해서 매우 독특한 관심'을 보였던 존 칼빈 자신이었다. 비범한 미국 장로교 신학자인 워필드는 심지어 칼빈을 탁월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영어권 세계에서 성령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심오한 관심은, 청교도와 그들의 계승자들, 여러 칼빈주의 분파들, 그리고 18,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과 관계된 개혁주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칼빈의 후예들은 성령의 사역을 논하면서 죄인의 모든 구원 사역에 관계하시는 성령의 주권을 강조했다.

 

스튜어트(Stuart) 왕조 시대의 초기 청교도들 중에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영적인 용기와 담대함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유일한 방편이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이 영적인 강력함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부지런하게 사용해야 할 경건의 다양한 방편들도 주장했다. 이런 훈련들 가운데는 말씀을 들음, 성례 참여, 기도, 묵상, 대담, 성도의 교통, 선을 행하려는 특별한 결심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은혜의 방편이나 영적 훈련들이 신자의 영혼을 살찌우고 회중의 삶의 내적 성장을 이루는 데 완전히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만이이 일에 충분하신 분이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영국의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존 서클립(John Sutcliff), “성령의 감화들은 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다. 만일 성령의 감화들이 억제된다면, 성례와 같은 신적인 의식들은 텅 빈 수조와 같고 영적 은혜들은 시든 꽃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표적인 개혁주의 전통들은 역시, 존 프레스톤이 제시한 은혜의 방편들을 제외한 채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17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인 벤자민 키치(Benjamin Keach)1681년에 퀘이커 교도들을 빗대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빛과 권세를 소유했다고 확신 한다. 그러나 실상 이 모든 것들은 망상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자랑하고 자신이 성령을 소유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또한 그들은 주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그분의 말씀 가운데 제시된 하나님의 복된 은혜의 방편들과 기관들을 매도하고 폐기 처분 한다‥‥‥그러나 성령께서는 합당한 경계선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항상 영적인 경로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한 경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공적 예배와 사적 예배이다.”

 

이것이 성령이 원하시는 전통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청교도인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는 항상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한다.

 

앞에서 인용한 프레스톤의 글에 몇 가지 경건의 방편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중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네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들은 바로 성경, 기도, 성례와 영적 교제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영성(성경)

 

종교 개혁은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신학, 즉 영성을 계발시키기 위해 상징과 형상들을 사용하는 그들의 신학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출판 인쇄술을 충실히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영성 계발의 가장 주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월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의 생애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틴데일은, 1520년대 중반부터 1536년에 순교할 때까지 바로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틴데일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믿었다. 그는 1530년에 창세기 번역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을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길을 밝히 보여 주는 빛이다. 또한 성경은 모든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요새이며,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게 하는 위로이며, 번영 가운데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하는 두러기다.”

 

이 종교 개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 중심의 영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인물이 바로 18세기 미국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틴데일과 마찬가지로 에드워즈 역시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사역자들이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 하는 빛이며, 회중들에게 높이 들려 선포해야 할 빛이다. 또한 성경은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마음까지도 타오르게 하는 불과 같다.”

 

따라서 성경 묵상이 그의 경건의 핵심이었음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친한 친구이자 최초로 그의 전기를 썼던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에드워즈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가 아는 한, 그의 비밀은 기도에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묵상하는 데 있었다‥‥‥그에게는 지식에 대한 비범한 목마름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었고, 특별히 신학에 관계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욱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고,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 성경에 대한 그의 비범한 지식은 그의 설교와 모든 저작에 나타나 있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쏟았던 열정은 그의 원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전 생애에 나타난 성경 묵상의 훌륭한 열매는 여백 성경이라고 알려진 에드워즈의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페이지에 한 장의 여백이 삽입된 작은 성경책이다. 그리고 이 여백들은 에드워즈가 인접한 본문에 대한 주석을 기록할 수 있도록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에드워즈의 여백 성경에는 1730년부터 1758년까지 그가 기록한 전 성경에 대한 일만여건 이상의 주석이 담겨 있다.

 

2.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기도)

 

개혁주의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또 다른 방편은 바로 기도이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굿윈이 잘 지적했듯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위대한 요소이다.’ 그린햄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신자의 견인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전투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으로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1662년에 쓴 내가 영으로 기도하리라」』 I Will Pray with the Spirit 라는 소책자를통해서 기도에 대한 그의 분투를 묘사한 바 있다.

 

번연은 오직 성령만이 기도를 시작한 신자를 인내할 수 있게 도우시는 유일한 분임을 강조했다.

 

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해야만 하는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겠다. 가련하고 사리 분별이 없으며 육적인 당신은 나의 이 이상한 생각을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몹시도 싫어했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분과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했으며, 마지못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고 주의 도를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했다(86:11 참고). 그러나 많은 경우에 나는 눈이 멀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너무나 무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직 성령만이(은혜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이다(8:26 참고).

 

, 기도 시간에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은 너무나 많다.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미끄러지게 하는 샛길과 뒷길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언변에 능통하면, 얼마나 많은 교만이 밀려오는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얼마나 위선적으로 기도하게 되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간구하는 심령’(12:10)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사이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적은가!”

 

이 문장은 청교도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를 보여 준다. , 우리는 여기서 투명한 정직함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번연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옛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기도를 통해 인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번연이 앞서 한 말 바로 다음에 아래와 같이 덧붙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붙잡으실 때, 우리 마음은 비로소 기도하게 된다. 진실로 그 전까지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많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도의 훈련을 통해 인내했다는 것을 증거하며, 기도의 의무가 순전한 기쁨으로 바뀔 때에 절묘한 기쁨이 임하게 됨을 알게 해 준다.

 

존 번연의 좋은 친구였던 존 오웬은, 에베소서 2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천상의 평안함과 영혼의 만족스러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며 그 어떤 지성으로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나아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되는가!”

 

3.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으시기를 기뻐하심”(성례)

 

칼빈주의자들이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부분은 주의 만찬이다. 이것은 최근에 주의 만찬을 중요한 영적 훈육으로 생각하지 않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의외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성찬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신자들의 영혼을 먹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18세기 칼빈주의적 고찰의 실례 두 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이 항상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많은 작품을 남긴 듀턴(Anne Button)18세기 주요 복음주의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그는 주의 만찬이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기를 기뻐하시는 식탁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또한 이 은혜의 방편이 너무나 훌륭해서 주의 만찬에서 신자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자아‥‥‥,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임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허락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묘사했다.

 

이 시기의 다른 개혁주의 신자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진술을 약간 지나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듀턴이 성찬을 그들의 설교와 같은 수준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구속자와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방편이 되는 성찬에 대한 듀턴의 견해를 기꺼이 인정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서가 18세기 초반 런던의 칼빈주의 침례교회에서 목회했던 요셉 스텐네트(Joseph Stennett)목사의 찬송시인 복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며(the Sufferings Of Our Blessed Saviour Jesus Christ)’에서도 발견된다. 스텐네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마땅한 '영구한 기념'으로서의 성찬에 대한교회의 찬미를 모사한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합당한 상징들 또는 형상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징들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풍성한 포도주로다.

이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그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요!“

 

스텐네트는 성만찬 자리에서의 식사와 관계되는 것이 믿음임을 명료하게 하면서도, 특별히 그의 언어는 주의 만찬이 신자에게 있어서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방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 하나님의 식탁

오직 유일한 신적인 식탁에 우리의 믿음이 있나니

믿음으로 볼 때,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가장 고상한 포도주로다!“

 

4. “우리의 신앙을 유지시키는 최고의 도움 가운데 하나”(영적교제)

 

신약성경은 고독한 기독교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영적인 힘의 위대한 근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우정과 교제이다. 부당하게도 칼빈은 차갑고 가혹하며 사랑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그는 교제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우정의 풍성한 진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 개혁주의 역사가인 리차드 스토퍼(Richard Stauffer)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디도서 주석의 머리말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기음 파렐(Guillaume Farel)과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와의 우정을 다음과 같이 찬미한 바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목회 사역만큼, 또한 매일의 삶만큼 이렇게 깊은 우정을 나눈 사람은 없었다. 나는 파렐과 비레, 이 두 사람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질투나 시샘이 없었다. 그들과 내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형제 같은 우정은 세 사람의 빈번한 서신 왕래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보낸 서신들을 통해 신학적 쟁점들과 교회의 문제점들을 솔직하게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1552127,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파렐의 지나치게 긴 설교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칼빈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자네는 종종 설교를 지나치도록 길게 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겠다고 고백하였지.” 그리고는 사탄이 설교 시간에 대한 파렐의 실수를 파렐의 사역으로 낳은 많은 선한 일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설교의 시간을 좀 줄이라고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당시 칼빈의 설교는 1시간~1시간 30분 정도였지만 칼빈의 친구 파렐은 3~4시간 정도 설교를 했다)

 

개혁주의 신자들이 우정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하겠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 에드워즈의 8명의 딸들 가운데 셋째 딸로서, 식민 시대에 뉴저지에서 믿음 있는 가정주부로 살았던 에스더 버(Esther Burr)의 일기를 한번 살펴보자. 1750년대 중반에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아주분명하게 선언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제외한다면, 친구들이나 단체의 모임이나 대화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는 것은 없다.”

 

그녀는 훗날 프린스턴 대학의 교장이 된 아론 버(Aaron Burr)의 아내이자 두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바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했다. 그리고 그릴게 함에 있어서 친구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임을 깨달았다.

 

1756123일의 일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친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비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 하나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비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있는 삶은 진정한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에스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복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에스더는 왜 친구와의 우정에 그토록 큰 가치를 부여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대화가 영적 성장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확신은 그녀가 1755420일에 가장 친한 친구인 사라 프린스(Sarah Prince)에게 쓴 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랑하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나는 당신과 같이 속마음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매력적인 친구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스러운 예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담화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 외에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일에 게으른 것은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지요!”

 

여기서 에스더가 말한 종교적 담구와 우정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친구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삶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투명하게 여는 사람들이다. 에스더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서로 아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털어놓은사람들이다.

 

신자는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과 격려를 얻는다. 친구들과의 영적 대화를 가리켜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할 때, 에스더는 분명히 이것을 은혜의 한 방편, 즉 그리스도인들을 구세주와 교제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5. 은혜의 또 다른 방편들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은혜의 방편을 존중해 왔으며, 다른 방편들도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의 칼빈주의자 찰스 스펄전은 1868년 그가 출판한 잡지인 검과 흙손(The Sword and the Trowel)에 기고한 논문에서 침묵과 금식과 기도로 보내는 고독한 시간을 옹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이 네 가지 방편들,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영적 교제를 부지런히 사용하고 이 방편들에 헌신한다면,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의식 있는 존재로서 합당한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방편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를 소원한다!

 

질문:

1. 존 서클립이 성령의 감화들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라고 말한 것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표현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고, 아니라면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2. ‘말씀의 영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 개혁주의 전통은 왜 리차드 그린햄의 표현대로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인가?

 

4. 우정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더 성숙해지게 만드는가?

 

5.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 속에서 유익했던 은혜의 다른 방편들은 무엇인가?

 

마르투스선교회에서 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감리교(監理敎) 교리와 알미니아니즘(Arminianism)


감리교를 얘기할 때 제 생각은 처음 예수를 믿고 자라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어머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를 믿기 시작한 때입니다. 해방(1945년)전에 일본 경찰이 우리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을 감옥에 가두고 교회를 박해하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해방 후 몇년동안 보릿고개를 넘는 어려움을 교회의 단임 전도사와 같이 경험한 일도 생각납니다. 우리 어머님이 교회 관리인으로 계셨기 때문에 한동안 저는 주일 아침마다 종을 치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언덕 위에 있던 교회가 마을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종소리는 마을 끝까지 울려 퍼졌고, 친구들이 "네 종소리가 '천당', '천당' 하며 울린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살던 충청북도 단양(丹陽)은 물에 잠겨 호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교회가 그곳에 지금까지 서 있을리도 없겠지만, 종소리를 들을 마을 사람들도 없겠지요. 내 신앙이 처음 자라게 한 그 언덕에 있는 조그마한 감리교회는 마치 사랑하는 어머님을 두고 시집간 여식(女息)이 친정생각을 하듯 제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짧은 고등학교 시절을 충주(忠州) 감리교회에서 지내면서 저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떼를 지어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같이 애를 쓰던 친구는 내내 감리교회에서 지도자로 성장했고, 마침내 감리사 노릇도 오랫동안 했다고 합니다.


우리 내외는 다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감리사(監理師)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보니 감리교회에 정을 부치고 살다 온것이 30년은 되는가 봅니다.


지금은 감리교를 떠나 있으면서 교리를 공부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라고 물으실 분이 있을 줄 압니다. 하기야 고인이 되신 어머님께서는 평생에 감리교 교리라든가, 칼빈주의라는 것을 공부한 적이 없으시지만, 그 분이야 말로 말년에 성경만 읽으시며 소일을 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교리 공부라고 한다면, 학습과 세례를 받기 위하여 교리문답을 공부한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매일같이 부르시든 찬송을 생각하더라도, "아 하아님의 은혜로 이 쓸 때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늘 눈물을 흘리시며 부르신 것이 그분의 신앙간증이라고 믿어집니다.


제가 감리교 교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시대를 더 잘 알자는 목적이 있으며, 이 시대(기독교)의 흐름은 교단의 교리가 그 주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과 나는 무슨 배를 타고 어떤 조류를 따라 흘러 가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위급한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여건이 되어, 말세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내 자신을 되돌아 보자는 것입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으니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말한다면 약 3년전에 제가 소개한 적이 있는 거스너(John H. Gerstner)박사의 정의를 참고로 합니다. 그 분은 기독교 교리를 복음주의와 칼빈주의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 두 주의는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칭 기독교인들이나, 군소 사이비(似而非)한 이단 종교는 고려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둘중 한 교리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의 다른 이름은 세대(世代)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 등이며, 칼빈주의의 다른 이름은 개혁주의 혹은 은혜주의 등이 있습니다. 교회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교리도 천태만상이니 누구의 교리는 어디에 속해 있다고 지적할 수는 없고, 다만 위에서 말한 두 교리가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교단의 창시자(創始者)로 알려져 있는 역사상 어느 누가와도 비교 할 수 없이 정력에 넘치는 전도자, 요한 웨슬레(John Wesley:1703-1791)의 생애와, 남겨둔 업적을 살펴보게 됩니다. 감리교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교 활동이며, 이 활동에는 웨슬레 형제 촬스와, 죤(요한)과, 또 죠지 윗트휠드(George Whitfield)의 업적을 지적합니다. 현재의 감리교 단의 교세는 세계적으로 3,800만 이상이며, 그 중에 가장 큰 교파는 미국의 연합 감리교(The united Methodist Church)로서 약 1,000만의 회원이 있다고 합니다. 1738년 영국 Oxford대학에서 성경연구와, 기도회와 설교강연으로 시작한 조그마한 집단, Moravian형제 교회의 영향을 받고 시작한 것이 감리교의 초대(初代)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교리는 39개 조항의 엘리자베스 교리를 알미니안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25개 조항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감리교의 교리는 거듭난 경험, 구원의 확신, 그리스도인의 성결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요한 웨슬레는 수없이 많은 전도여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완전한데에 이른다는 감명 깊은 교리의 설교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약 25만 마일을 말을 타고 전도 여행을 하였으며, 4만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고, 88세가 된 17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감리교활동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기록은 요한 웨슬레의 동생 촬스이며, 동역자 였으며, 그는 6000편 이상의 찬송을 작사 작곡하였으며, 지금 그 찬송을 모든 교파의 교인들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편집하도록 유도한 본래의 교리 엘리자베스 교리 39개 조항과(1571), 이 조항을 만들도록 유도한 알미니안교리(1560-1609)와, 이 알미니안 교리를 대항하여 나오게된 Synod of Dort(1618-1619)를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미니안 교리(1560-1609): 종교개혁이 구라파를 휩쓸고 난 다음, 종교개혁의 근본 교리가 된 Calvin의 교리가 마침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화란(和蘭)에서도 온 교회가 칼빈 개혁주의를 받아 드렸습니다. 개혁교리의 본 고장인 Geneva에 유학을 온 화란인 알미니어스(Arminius)는 Calvin이 죽은 후 후계가된 Beza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였고, 마침내 1588년에는 화란 Amsterdam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었고, 나아가서 Leyden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1603). 칼빈주의자 였던 그는 갑자기 다음과 같은 칼빈 신앙과 반대되는 5개항의 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알미니안 교리의 항의서(Arminian Articles of Remonstrance)


Arminius가 죽은 후 그의 제자 두 사람(Simon Episcopius 와 Jan Uytenbogaert)이 알미니안 교리의 항의서 5개조항을 발간하므로서 알미니안 교리를 분명하게 세상에 선포(1610)했습니다. 그 5개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墮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救)하시기로 정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영접할 때)돌이킬 수 없는 죄와 믿지 않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것을 미리 알고는 계셨지만,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다는 조건에서 오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만 인류를 위하여 (선택을 받은 사람뿐만이 아니라)죽으셨고, 다만 믿는 자만이 죄사함을 받게된다.


3. 사람은 자기 자신과 혹은 그의 의지로서 선을 행할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나고 성령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진다. (알미니어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Pelagian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음).


4. 모든 선행과 거듭난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이 거절 할 수 있다.


5.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의 믿음을 보전하기 위하여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서 떠날 수 있다.


이러한 알미니안 5개조항(條項)을 거절한 칼빈주의 자들의 5개 조항을 The National Synod of Dort가 발표하였고(1619),이 5개항이 바로 잘 알려진 TULIP입니다.


1. Total Depravity: 인간의 완전 타락


2. Unconditional Election: 조건이 붙지 않는 선택


3. Limited Attornment: 제한(制限)된 구속(救贖)


4. Irresistible GRACE: 거절할 수 없는 은혜


5. Perseverance of Saint: 상실(喪失)될 수 없는 성도의 구원


감리교의 교리는 TULIP과 정 반대가 되는 알미니안 교리를 웨슬레 자신이 제창(提唱)하여 도입하였고, 39개조항의 엘리자베스 교리에서 선택하고 개정한 다음 25개조항의 감리교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차이점 몇까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삭제된 조항: 제 17장, 예정하신 구원, 이 장은 우리의 구원이 조건이 붙지 않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됨을 가르치며, 한번 받은 구원을 상실 할 수 없다는 교리임.


제 13장: 의롭다하심을 받기 이전의 행함(of Works before Justification), 이 장은 인간의 완전 타락을 가르치는 교리임.


개정한 조항들: 제2장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에서 "영생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구절이 삭제됨.


제 9장(감리교 교리 7장) 원죄, "인간이 거듭난 후 원죄가 계속 남아 있다"는 구절이 삭제되었고, 이 장은 "거듭난 생활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든다"는 웨슬레의 신앙을 반영하였음.


역사적인 사실: 종교개혁이 시작하면서 백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교리가 칼빈의 교리로 토대를 삼았고, 화란에서 이에 반대되는 알미니안 교리를 제창한 교역자들이 교직을 잃거나, 국외로 추방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사형까지 당한 바 있어 온 구라파가 극소수의 무리를 제외하고는 다(90%이상?) 칼빈의 교리를 따라 갔다고 하는데, 지금의 기독교는 이 두 교리를 믿는 사람들의 인구 분포가 전도(顚倒) 되었습니다.


화란을 여행한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옛날 화란의 벨직 신앙고백(칼빈교리)의 교회를 찾아 볼 수 없고, 사회는 극도로 문란해 졌다고 합니다. 화란 뿐 아니라 온 구라파의 칼빈교리는 참으로 희귀한 옛날 얘기이며, 참 신앙을 찾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아직도 기독교가 살아 남아 있는 미국을 살펴 볼 때, 지난 300년간에 알미니안의 영향력은 파죽지세이며, 거의 모든 교회와 교파의 교리는 (90%이상?) 알미니안의 영향아래 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 와 칼빈주의의 비교: 오늘은 이 두 교리를 비교하는 것으로 편지를 마감하고 다음 편지에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바로 알미니안 주의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성경 말씀에서 찾아 볼 계획입니다.


알미니안 주의


자유주의: 인간성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크게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영적으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시며,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으신다. 죄인은 각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장래는 어떻게 이것을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영적인 일에 선악을 구분할 만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결코 인간 본성에 의하여 좌절되지 않는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하여 중생(重生)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 타락한 죄인이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하여 거듭나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이란 인간이 새로 중생 하는 첫 과정이다. 믿는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인간의 봉헌(奉獻)이다.


조건이 붙은 선택: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선택하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창세(創世) 전부터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자유롭게 믿게 될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그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조건이 붙는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행동을 미리 아신 것에 근거를 두고 선택을 하시지만, 그 선택을 죄인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며(믿음이 성령의 역사로 거듭났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님),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믿고 또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은 완전히 인간에게 달려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행사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을 선택하신다. 그러므로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의 결과가 아니고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되는 결과이다.


온 세계적인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역사(役事)는 세상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도록 하셨으나, 그 역사가 어떠한 사람의 구원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위하여 죽었음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죄 사하심을 받을 길을 열어 놓으시고, 믿는다는 조건하에 사하심을 받지만, 그 사람의 죄를 완전히 없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받아들임으로 그 효과를 발생한다.


성령의 역사를 거절할 수 있음: 성령께서 복음의 소식을 귀로 듣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열어 또한 복음을 마음으로 듣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 하신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령의 부르심을 거절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죄인이 믿게 되기 이전에는 거듭나게 할 수 없고, 믿음(인간의 공로로 오는)이 새로 거듭남을 만들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의 사역을 성령의 역사로 적용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제한이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도를 마음에 믿는 사람들만을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끔 인간은 이 은혜를 거절하고 방해한다.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감: 믿음을 얻고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도 그의 신앙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일부분의 신도들은 일단 거듭난 후는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믿는다.


칼빈주의


인간의 완전타락: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를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서 죄인은 죽어 있고,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고 돌이킬 수 없게 타락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가 없고, 악한 본성에 노예가 된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생활에서 선과 악을 가려 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태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오게 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 이상의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은 성령께서 죄인을 살아나게 하시고, 새로운 본성(本性)을 넣어 주는 중생(重生)하는 과정이 있은 후에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인간이 무엇을 받친 것이 아니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이라는 선물의 일부 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 선택: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 전에 특정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자신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홀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가 특정한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은 믿음이나, 회개와 같은 인간의 행동으로 순종한 결과에서 오는 것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가 선택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믿음과 또 회개할 마음을 주신다. 죄인이 믿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오는 결과이며,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의 훌륭한 인격이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권한에 의하여 선택한 죄인은 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것이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제한된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救贖)하시는 역사는 그가 선택한 사람만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그의 죽음은 특정한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에게 속한 백성들의 죄를 다 소말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 즉 그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을 주시여 구원을 보장하신다. 선물로 주시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구속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틀림없는 약속이다.


거절할 수 없는 은혜: 복음을 듣고 모일 때 성령께서 특별히 선택한자의 마음을 감동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인간이 그 마음에 부르심을 입을 때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 그 마음의 부르심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있게되며, 틀림없이 거듭나는 과정이 된다.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에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사역(使役)을 거절할 수 없게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으로 구원을 인간의 의지에다 심어 줄 뿐 아니라, 그의 인간 구원사역이 성공할 것을 인간의 협조에 의존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은혜로 선택된 죄인은 성령의 역사에 협조하게 인도하며, 믿게되고, 회개하고, 자유롭게 기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거절할 수 없고, 실수가 있을 수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잃어버릴 수 없는 성도의 구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받은 모든자들은 믿음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게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믿음이 보장된다.

 

 http://www.alittlemaid.org/html/Essays/MethArm1.htm

2008.02.05날 이곳에서 자료를 가져오다!!~~

 

출처: http://cafe.daum.net/jesus330/7OpE/11025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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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

 [출처]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 |작성자 kingmaker
 
기독교 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17)


1534년 칼빈은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이 문제가 되어 방랑 길에 올라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1535 1월에 바젤로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케도릭으로부터 잔인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유명한 기독교 강요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를 본 많은 학자들이 그를 '복음주의 신앙의 최상 위에 있는 개혁파 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라 하면서 극찬을 했다. 
케도릭에서는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하고 말살하려 했지만 복음 주의자들은 이 책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진리의 변호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의 첫 출판으로부터 23년 동안 끝임 없이 수정 개정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출판은 1536년에 시작이 되고 그의 마지막 출판은 1559년에 마쳣는데, 그 두 사이에 사상적인 변화와 차이가 전혀 없었다. 즉 성경에 관한 지식은 점점 깊어졌으나, 처음의 사상과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그가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학식을 가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성경에 입각하여 추호도 틀림이 없는 상태에서 첫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칼빈의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심원한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저자의 특징이 되는 충실한 해석과 조직화를 위한 세심한 관심" 등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저서가 없었다면 루터가 죽은 후 신교는 극심한 신학적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말씀 위에 바르게 선 교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1. 기독교 강요의 역사 
초판은 1536 1월에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Christian Religions Institutio)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초판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 전으로 되어 있고(루터의 요리 문답 순서에 의해 배열)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기술 법으로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기록을 했다. 
5장에서 그는 이제까지 성례 전이라고 불리는 케도릭의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등이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말했다.

1년이 못되어 라틴어로 쓰여져 소수의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초판이 매진되고 1539년 새로운 라틴어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 때 그는 책이름을 바꾸어 (Institutio Christian Religions )라고 했고,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재판에서 칼빈은 그 서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삼위일체론을 상당히 확대해서 해석했다. 
1541년 재판이 나온지 2년 후에 기독교 강요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번역 출판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의 고전이 되었다. 
1543년 그는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다시 출판했다. 그리고 1545년에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다. 세 번째 판은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 증보판에서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을 논했다. 
프랑스 판이 나온지 5년 후에 즉 1550년에 또 증보된 라틴어판이 나왔으며, 1551년에 프랑스 번역판이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 해 다시 재판을 만들었다. 1550년과 1557년 사이에 이 책은 무려 7판을 출판해야 했다. 
1550년 판에서 그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의 형상 예배, 양심에 관한 설명을 했다. 그는 새로운 판을 낼 때마다 새로운 인용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고대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은 1559년 라틴어판과, 1560년 프랑스어 판이다. 이 때 칼빈은 四日熱이라는 병에 걸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의 저서를 계속 精査하여 증보하므로 21장에서 배가되는 80장이 되도록 하여 증보판을 냈다.

 

2. 기독교 강요의 목적. 
앞에서도 말했듯이 케도릭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급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된 또 다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1534 7 17일 밤에 일어 난 벽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느카텔(Neuchatel)교회 목사인 '앙트완느 마르코르트'(Antoine Marcourt)에 의해 벌어진 일이 였다. 그는 미사의 남용을 비판하는 벽보를 사방에 부착했는데, 그 내용은 "유일하신 증보 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라는 것이 였다. 그의 논조는 매우 날카롭고 실랄 했다. 로마 케도릭은 이 일을 빌미로 여러 명의 복음 주의자들을 체포 화형을 시켰고 그 첫 번째 순교자는 '바델르미 밀론'이였다. 
이 사실이 유럽 전역에 전해지자 독일 교회는 크게 개탄하고 폭군들의 폭력을 성토했다, 그러자 케도릭에서는 자기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로 가득한 야비하기 그지없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야비한 폭력이 제세례파에 의해 감행되었으며 그 폭도들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을 가지므로 자행된 것이라는 모략이 였다. 독일과의 관계를 중하게 여겼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독일 교회와 국민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정당화 하는 선언을 1535 2 1일에 공포했다. 그는 이 잔인하기 짝이 엇는 살인은 제세례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했으며,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거짓 말에 대해 칼빈은 크게 분노해서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글'을 이 저서의 첫머리에 기록했다.

여기서 그의 기독교 강요 강요를 기록한 두 가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쉽게 기록하고 조직화하므로 써, 그리스도교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으나, 라틴어로만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질 수 없었으며 
둘째는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3. 그가 죽기 전 5년까지 줄기차게 저술을 계속했는데, 그의 이런 저술은 그의 독창적인 특징이 있지만, 그가 다른 개혁자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개혁자들은 어거스틴, 루터, 쭈빙글리, 멜란히톤, 부처 등이 였으며 칼빈은 그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고 해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신학자들의 저술이나 사상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제일 되는 신학적 원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했고, 구약에 대한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깨달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사상적으로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고전들을 많이 인용했다.

칼빈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곡해한 잘못된 생각이다. (신복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생략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75)

: 하나님의 존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우리 가진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먼저 자기 자존적인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 ( 17:28)하고 있게 된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바르게 살펴 볼 수가 없으며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은사 중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의 존재 자체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 축복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올라감을 얻게 된다. 
실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빈곤은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들어낸다. 특히 아담의 타락은 더욱 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들의 영적 굶주림과 결함으로 인한 공포는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찾게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알도록 자극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라도 얻게 된다. 우리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관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한,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며, 잊어버리고 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해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즉 우리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한 깨달음 들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빈곤, 또는 어리석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지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가 있다.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이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은 인간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런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위선으로 기우려 져 있으며,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허한 의의 형상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부패해져서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신이 인간 부패 내에서만 모든 것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속과 주위가 마치 깨끗한 것처럼 느껴져,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검은 것밖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에 히끄무례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보았을 때, 완전한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과대 망상증에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더욱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 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본다면 아마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들어 태양을 처다 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후에 우리가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이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을 영적 은사를 생각할 때도 적용된다. 우리가 이 지상 넘어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산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半神的적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의 절대 완전함을 생각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모든 것들이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던 것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들은 가장 비참한 무력 자로 증명될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를 당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서(인간의 부패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완전하며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다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실의 사례들을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 13:22; 6:5, 1:28;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함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함과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된다.( 38:1 이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18:27)에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곁 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13) (모세, 이사야, 사도 요한 등에게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되었거늘( 6:2), 하물며 부패하고( 13:28), 버러지에 지내지 않는( 7:5;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 24:23) 
곧 주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나타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먼저는 전자에 대하여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의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 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전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연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기초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현재와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 증보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시지 아니하는 한, 하늘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들에게 체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자신을 창조주 나타내신 하나님)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신 하나님)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한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성결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믿지 않은 한)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 , 권능, 공의, 참된 진리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기대하며, 그에게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바르게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을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누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은 헛된 생각의 장난질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내자가 되고, 교사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일체의 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음으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받쳐지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음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로써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무서운 것이지만, 그런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사람을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신자에게 여생의 상급을 주시고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몸서리쳐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고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되 아무 끝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허식으로 흐르고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 박혀 있었다. 
본 문 : 1:8-15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셨다. 이것은 아무도 무지를 핑개삼아 하나님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는 이 하나님를 아는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칼빈은 그의 주석 요 1:5에서 "부패한 인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두가지 빛의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씨앗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를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를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들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 사람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는 많다. 특히 문명인들 보다 원시적인 사람들에게 그 증거가 많이 있다. 짐승과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는 미개인들은 그들 속에 종교적인 씨앗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없는 곳은 없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좋은 실례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좋은 증거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하는 종교적 행위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를 아는 인식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타고난 천성적인 버릇을 고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와같은 전재 아래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우매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이 만든 하나님를 믿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같은 종교적 사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를 찾는 본성 속에 씨앗이 새 봄에 굳은 땅을 뚫고 움을 돋듯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없었다면 오늘의 하나님를 믿는 기독교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속여 사교 집단으로 만드는 거짓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기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종교를 부인하고 하나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오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 속에도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있어서 가이우스 칼리쿨라(Gaius Caligula)-로마 황제, AD 37-41까지 로마를 다스린 Tiberius Caesar의 증손-는 방자하게 하나님를 부인하고 기독교도를 핍박한 사람이였지만 천둥만 처도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우수꽝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피해 보고자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하나님를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온 갖 구실을 찾지만 그럴 수록 더 하나님의 두러움이 떨게된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의 두러움에서 잠시 놓임을 받는 것은 술이 취했을 때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다.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에 쫒기는 자의 두러움에서 피할 수 없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의식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람이 나면서 부터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인간의 골수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처도 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것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종교는 점점 개량되고 왕성해 진다. 이 세계를 주장하는 사단은 될 수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지식을 몰아 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를 부패하게 하려 온갖 짓을 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왕성하고, 하나님를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학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모태에서 부터 터득한 하나님를 부인하는 지식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살아 가는 목적이 하나님를 인식하고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본연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을 거스려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그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플라톤(Plato)의 말을 아주 잘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악을 피하고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라고 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낳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끝임없는 불안과 혼란과 불안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를 경배하는 것 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영생을 동경하게 된다.

 

4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에 의해 질식 부패되었다


1. 迷信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것은 인간 경험이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소중한 씨앗을 자리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 정도도 안된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하여 때 가되면 열매를 거두도록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1:3 참조) 게다가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버렸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으며 그 맹목은 항상 거만한 허영으로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수준 이상의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을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던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1:22)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 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준 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 졌다고 부언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 뿐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14:1, 53:1)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 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끄며,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들에 대한 말이다.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生來的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 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시의 본질을 아직 제거하시지 않으셨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개으름뱅이로 가두어 둠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 역시 운명에 마끼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 ( 13:14-15; 6:9-10; 17:10 참조) 다윗은 자기의 사상을 가장 잘 해석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36:1)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했다( 10:11).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하는 신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한다. 바울이 증거 한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딤후 2:13)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잇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슬려 싸우며, 하나님을 그 의식에서 몰아 내고, 천상에서 파멸되기를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 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미신에 애한 변명과 공허한 변호가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부니 없는 것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시하시다 는 것,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亡靈 혹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얼마나 조롱하려 하고 있다는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들을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마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강퍅한 그들의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4:8)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 였다고 했다( 2:12).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던, 다신을 생각하던,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음이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은 우상이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다고 단정해야 한다.


4. 僞善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강요를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지 전까지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의 말은 이런 종류의 무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은 잘 부함이 되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심판대가 없어지기를 열심히 염원한다. 그런 심정으로 심판하시지 않고는 참으실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하는데 열심이며, 악에 악을 더하여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체 위장하여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않고 자기로 만족하며,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에 빠지길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런 혼란한 지식과 정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로지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런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심이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 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데 팽개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더 신뢰한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이런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들을 얽어맴으로써 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였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꺼져 버리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씨앗이 매우 부패해 있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하는 나의 주장은 더욱 명백해 진다. 이는 遺棄者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온한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회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 속에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형식적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들이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5 :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지식은 우주의 창조와 섭리에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본문 : 139:15

 

1. 하나님의 自己 顯現은 명백하여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의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서 제외시키시지 않기 위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이 알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창조물에 너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104:2 "주께서 옷을 입은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는 말씀은 이런 하나님을 잘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하시던 사람에게 보여 주신다. 
시편 기자는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104:3]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104:4]"라고 말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지혜를 더욱 찬란히 나타내시기 때문에 흔히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 기자가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상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울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2]"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시인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2]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3]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19:4]"라고 말씀하시므로 온 우주에 하나님의 언어가 통하고 있음을 말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히 밝혔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1:1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0]"

 

2. 하나님의 지혜가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천문학, 의학, 기타의 자연 과학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많고,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눈을 똑바로 뜨면 반드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천문학이나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기술에 감탄을 한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도 우주의 신비한 현상을 알면 감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우주와 만물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갈렌이라는 고대 헬라의 최고의 의학자요 철학자며 해부학의 권위자였던 그는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을 기록한 그의 저서에서 "인체의 관절, 균형, , 효용성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3. 사람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다. 
옛날의 철학자는 사람을 가르쳐 소우주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사람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 17:27]"라고 하셨다. 
다윗도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8:4]"라 하시고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 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나이다[ 8:2]"라고 하셨다. 다윗의 말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우주에 가득찬 섭리와 은혜를 안다는 말이다. 
바울도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17:28]"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탁월하신 재능과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의 자녀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고로 하여 아름답고 복된 모든 삶의 은총들을 무수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들을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마구 파괴하고 남용하면서 교만을 떨었다. 만일 사람이 이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탐욕이나 더 가지기 위한 싸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빌미로 오히려 더 하나님을 대적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구실로 하여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 탁월한 기능과 은혜들은 자연의 한 법칙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불신한다.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돈. 
어떤 사람은 영혼이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육체를 돕는 기능만 가지고 있지 안다. 우주의 신비를 캐고, 인간의 신비를 캐는데 육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천문학의 경이로운 발견들은 사실 육체적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활동에 있는 것이다. 천체를 관찰하여 별의 신비를 캐며,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알고,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과 斜行의 정도를 아는 것이 어찌 육체의 힘이겠는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즐거운 것을 즐거워하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감탄을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고, 훌륭한 판단과 그릇된 판단을 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어찌 육체에 속한 일인가?사람이 잠자는 시간에도 여기 저기를 배회하고 신기한 일을 행하며, 심지어 좋은 발명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람이 어찌 육체 밖에 없다 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를 인정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인가? 잠자는 중에도 우리의 신비한 모과 정신은 움직이고 있듯이 하나님은 잠시도 수시지 아니하시고 일하시며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신다.

바젤의 詩 
"최초에 한 영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 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태양과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한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제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여 날 때 실날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민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도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만은 하늘 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6. 하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며, 자연계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며, 예배드리게 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 신호로 만으로도 우주를 놀라게 하시며 격동하게 하셨다가 잠잠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들어내시기 위함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다스릴 때 경건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한 사람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은혜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보호자요 변호사요, 선한 사람을 벅 주셔서 축복하시고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재난에서 피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게 보이는 점이 있으나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한가지 범죄에 대하여 엄격한 심판을 하심은 모든 죄에 대하여 엄격한 다스림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여러 가지 죄를 즉시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장차 올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활을 주관하신 다는 증거는 많다. 선지자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기적적으로,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강조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107:4]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107:5]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107:6]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107:7]" 궁핍하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07:8]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107:9]" 사로잡힌 자들을 침침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게 놓아주시고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07:10]"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 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교만한 자들을 그들의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

이런 사건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분명하고 찬란한 섭리에 대하여 깨달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편견과 오만과 뻔뻔스러움이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걸음 무더기에서 드셔서[ 113: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간교한 자로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 5:13]"하셨을 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9.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숙고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명백히 이 온 세상에 들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더 상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상고는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과 생활에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해 더욱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이 아닌 다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공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지나친 사색에 의해 하나님을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 17:2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17:28]"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고, 자기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했다.(145:3; 145:5-6).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를 당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도록 하며, 내세의 소망을 가지게 하며, 삶의 용기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이제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치 않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것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히 사는 사람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주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살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의 선하심과, , 자비, 겸손을 보여 주셨는지를 자세히 살펴 그 분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은 죄와 자신의 육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빠져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특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는 어리석은 철학자들과 미신에 의해 더욱 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생략)

 

13. 성령님은 인간이 고안한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자는 사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기의 종교에 만족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교적인 행동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2:13]"라 하셨다. 근본적으로 죄를 짖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1]"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 드리는 방법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몰라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할 때 비록 무지로 말미암은 죄라 해도 그 죄가 가벼워 사죄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7:23]" 
또한 마땅히 섬기고 예배 드려야 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 자도 죄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어떤 세상적 전통이나 습관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그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14. 이런 점에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매우 미급하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려 줄 수는 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4:17]"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섬기는 일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 점이 자연 계시의 한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이다.

 

15.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 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 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말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 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주는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 볼 수 없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용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우리가 방랑자요 방황자로 길을 잃고 헤메이고 있다면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긴 하나님에 대한 지시의 씨앗을 부패시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태만에 그 원인을 돌려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神知識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추겨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아가야 할 의, 지혜, ,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에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그 역사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다.

 

6 장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온 만물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 일체의 변명의 여지를 없앤다. 그것은 하나님 실존의 생생한 증거를 피조물의 자연 세계 속에서 너무 명백히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연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 울타리 안에 둘러 싸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눈이 나뿐 사람이 좋은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신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족장들이 자신들과 불신자들을 구별하게 한 명백한 지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적인 교리로서가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말씀으로 들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 주로서도 믿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원적 믿음을 가진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한 지식이다. 이 구원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지식에서부터 오게 된다. 이 지식이 있고 나서 구원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원적인 믿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모든 지능과 지혜를 초월한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 율법이 공포되고, 이 율법의 해석자로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 1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계시하신 이외에도 거짓된 一群의 神들과, 그들의 명백한 특징들을 말씀하여 참 하나님과 혼돈 되지 않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아야 건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증거를 경건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3. 성경에서 떠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에 빠지고 날조된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고, 세속적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며 인간의 잘못된 감정과 종교적 오류가 얼마나 그릇되고 방자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지 않았고, 자연 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를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한 구원의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미혹하는 미신은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다윗은 말했다.( 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권능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1-2]"이라고 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께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19:7]"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 29편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이 우주의 우뢰, 바람, 소나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고"라고 말하고 나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말씀을 맺고 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19:8]"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하도다[ 93:1]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2]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93:3]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93:4]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93:5]"라고 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2]"라고 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다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공허와 오류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7 : 성경의 권위는 성령에 의해 확증되며, 교회의 판단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지 교회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성은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복종 하시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5:3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어야 말씀의 신성한 권위가 살게 된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그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다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가공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케도릭 교회의 주장을 말한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은 바울의 말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2:20]" 이 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기 전에 사도들이 있었고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말씀이 교회를 세운 것이지, 교회가 말씀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성경을 진리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하신 말씀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 세울 수는 없다. (생략)

 

4. 성경의 증거는 모든 다른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적 증거를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최고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에서 보다 언제나 최고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순결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논쟁을 해서 성경 말씀을 판단하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좀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도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면 권위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적 증거를 가지게하고, 사람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능력을 나타내신다.

 

5. 성경은 자증한다. 
참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이성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과 지기를 성경에 예속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 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43:10]"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오류도 없는 진리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 54: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에게(신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30:12]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30:13]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30:14]"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들만 안다"( 53:1)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1]"라고 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상고하여 은혜를 받자.


8 :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이는 성경을 보호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 성경은 어떤 다른 외부적인 지원을 받아서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 권위가 세워진다면 성경의 권위는 늘 다른 것에 의해 흔들릴 것이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그 지혜의 배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완전한 말씀인지, 그리고 그 위엄을 스스로 지키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극히 평범한 언어로 기록이 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소박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의 기교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라고 하였고 그의 설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이라고 했다. 
사람의 저서가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 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만큼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더욱이 죄인을 회개케 하여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저서가 어디에 있겠는가?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어떤 선지자의 글은 그 문자체가 화려하고 명쾌한 어떤 사람의 글에도 손색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기록을 하셨지만, 이런 선지자들을 통해 얼마든지 멋있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누구든지 보고 알고, 믿어 구원 얻도록 쉽게 기록을 한 것이다. 
사단은 복잡하고 교묘한 언어를 써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고상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나, 그들의 이런 사기극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로 자기를 과시한다.

 

3. 성경의 고전성 (-:문서설에 대한 반론. 문서설이란 성경이 고대의 어떤 문서에 영향을 맏아 기록되었다는 학설을 말함) 
성경의 고전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애급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급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화를 주장하는 문서들도 사실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며, 모세 이전에 있었던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가 고대의 문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이전에 있었고, 애급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나라와 문화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하신 것에 그 기초를 둔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17:7)" 
만일 모세가 알아 듣지도 못한 것을 그 백성들에게 전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모세의 전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음으며,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5: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에 거주한지 사백삼십년이라[ 12:40].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7]" 
즉 모세는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다른 여타의 민족들이 주장하는 시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른 어떤 문화권의 문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 사람들은 애급의 기원을 창조 이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믿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터부니 없는 말을 세속적인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이 다른 문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런 사악한 자들 주장을 봉쇄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신다. 
야곱은 모세 보다 300년 사람이다. 야곱은 그가 죽을 때 그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 49:5-6)" 
여기서 레위족은 모세의 가문이고,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 가문과 자기 선조에게 치욕적인 이런 예언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상들이 잘못한 일을 숨김없이 말하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전혀 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불쾌한 일들도 낱낱이 기록을 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12:1]" 
이런 모세의 기록이 어찌 사람의 말이겠는가? 그리고 그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낯은 자리에 머물게 했는가. 이 모든 것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일들이다.

 

5. 이적은 하나님의 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모세는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그 이적들은 모세가 말한 율법과 공포된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모세의 40일간의 하나님과의 교제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24: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5:1].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4:29].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6].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4].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 16:24].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20:10-11].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6].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11:9].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있더니[ 16-1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 10:3]" 
이 모든 이적들은 모세가 진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6. 모세의 이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모세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이 모세를 반박하고 반대하여 군중들을 동원하므로 떠들썩한 분위기와 불유쾌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어떤 가증한 사람들은 모세의 이적은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모략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 7:11]"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에 설 수 없었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 9:11]" 
모세는 박수나 술객들을 아주 싫어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추방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20:6]" 
그런 그가 어떻게 공공연히 많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므로서 일체의 비난들을 일축해 버렸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16:7]" 
그리고 어떻게 마술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신선한 음식을 백성들이 먹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16:19-20]" 백성 중에는 날마다 모세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서 모의를 하고 작당을 해서 모세를 제거 시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마술로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마술로 그 백성을 기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3번씩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7. 예언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성취되는 일이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 
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0]"라는 예언이 있다. 
이 말씀은 야곱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하기 300년에 말씀된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엄격한 말씀은 400년 후에도 이루워 지고, 2,400년 되는 지금도 이루워 지고 영원히 이루워지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 유다의 왕권이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 이월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5]" 그러나 사울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그 사람은 백성들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때를 써서 세운 백성들의 왕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즉시 이세의 집을 찾아가 유다 왕을 따로 기름 부어 세운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이렇게 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0]"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히 이루워 진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이와같은 예언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확실히 증거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바벨론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는 그들의 나라와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공공연히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39:6-7]" 
그들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사건의 예언이었는데, 그 예언이 사실로 그들에게 닫친다. 이사야는 그들의 멸망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레스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 얻을 것도 예언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45:1-2]"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레스라는 메데 왕은 이사야 사후 100년에 세상에 나타나 이사야가 말한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여기서 고레스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쓰인데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예레미아는 그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이 되면 고향 에 돌아 오게 될 것을 예언하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25:1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29:10]"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사실로 이루워 진다.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선지자들이 예언 한 것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42:9]" 선지자들은 600년에 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그 후에 있을 일들도 이렇게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9. 율법의 전승 
어떤 사악한 자들은 모세나 이사야의 글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의 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모세가 실제 인물이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어리석고 미련한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개을리 하여 한때 하나님의 말씀이 유실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왕 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어 내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대하 34:15]" 
이렇게 발견된 성경은 대대로 게승되어 내려 왔다. 요시아는 그 성경의 원본을 성전에 보관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7:18-1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허락하셨다.

 

10. 하나님은 말씀을 기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마카비 일로 로마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 했는데 어떻게 성경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오늘의 성경은 모조품이요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본들은 박해가 가라않자 즉시로 사람들에게 전해 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개편되지 않은 성경이 경건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믿어 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독한 핍박을 당했고 그들이 쓰는 히브리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하 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계승 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을 통해 매시아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성경책을 보존 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의 말씀을 죽도록 믿고 사는 유대인들을 통해 해 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말씀-믿지 않으므로-을 생명을 걸고 지킨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書籍商"이라고 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구약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히 서 있는지를 알게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 평범한 문체에 경멸과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문체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구원의 진리를 볼 수만 있다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아주 쉽게 기록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할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은 눅 1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교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이 간단히 기록한 그리스도의 강화는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을 치듯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트집장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 끌어 내어 요한 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구경하자.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각성시키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회개하여 옳바른 사람이 되게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접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저작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 있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사로잡는다. 원래 마테는 이전에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 배를 몰아 고기를 잡던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7:15]"했다 
그들이 말한 글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 등등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그가 반대하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성경이 공포된 후 장구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 자라뜻 점점 더 자나라서 감히 공격할 수도 말살 할 수도 없는 탁월한 위취를 차지하며 자랐다. 사실 탁월한 괴변가나, 웅변가나 사상가들 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생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이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무장했으나, 그런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들의 보호에만 의존되었다면 어떻게 사방으로부터 오는 그 강력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성경은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우려 학대하고 말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 들이고 포용하는데 일치한 것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면에서는 전혀 공통성이 없는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을 크게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 적지않는 중요성이 이에 더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되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사람을 변회시키는가? 사람을 용감하게, 대담하게, 심지어 큰 정렬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대한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순교를 했는가?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킬 때 광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게, 가장이 진실하게, 가장 탁월한 믿음으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보존되여 내려 온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존 되여 내려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더 확실하개 작용을 하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확실히 보존하도록 사람들을 사로 잡으신 것이다. 그럼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9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우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들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6-9). 그 이유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히 우리들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이 가련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하셔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투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또는 다른 어떤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님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다. 즉 노예 상태로 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겋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림하려고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너 사턴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산대로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자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거ㅏ 다를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타락시키는 것이 명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성경을 경시 한데 대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바울이 고후 3:16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 31: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으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가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효과적으로 세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는"( 19: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 2: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8).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말은,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서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잇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신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이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눈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말씀을 패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를 위해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워 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 24:27, 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지혜를 믿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했다. 
이에 대하여 거만한 광신자들은 무엇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결솔하게 버리며 그 말씀에 걀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 나는 몽상들을 확고히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와는 훨신 다른 절제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된다고 생까하는 사라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워 주시는 도구로 알고 잇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10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정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에서 당신에 대한 계시를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시어 더욱 생생하고 상세히 계시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목록과 같은 정도를 마련해 주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인도하는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원수로 행하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맞아들일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미 구속 주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것과 같이----"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 17:4]"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천지의 주제이신 친히 세우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 가를 연구하기로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부성적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엄격하신 분임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징벌을 주시는 가도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계시할 때 간결히, 그러나 확실히 묘사하려 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34:6]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34:7]" 여기서 우리는 그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이 선언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성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공허한 사색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 열거되고 있는바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는 그 이름을 사용한다. 그 예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2]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145:3]"에서 볼 수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총체적으로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145:5]" 이 시편에는 피조물이 볼 수 없는 것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예레미아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9:24]"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1). 인애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이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2). 공평한 심판 : 행악자들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고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3). 정직 또는 의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고 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을 터득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거룩하심, 권세 등을 정확히 말씀하시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시리로다[ 25:8]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25:9]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25:10]"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말씀했다. 
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세겨져 있는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이 없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3. 이러한 하나님의 유일성이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이교도들의 모든 우상을 배격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다른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서도 알려 졌으며 존경받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일아 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이 사람의 마음에 세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도 이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허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어 그 지각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신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음에도 어리석게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는 스스로를 속이고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를 뼈아프게 경험할 것이다.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신"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2: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산 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11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 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떤 노력도 금하신다. (예배에 있어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참되신 신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상과 대립하신다. 그것은 어떤 철학자나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인간이 만든 신을 무로 돌린다. 
인간은 그들이 신을 만들 때 언제나 물질로 신을 조형화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수한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게 되면 그 불 경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4]"라고 하셨다. 그리고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을 거짓 것으로 바꾸고 있음을 경고하셨다.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과 별들을 형상화하여 신으로 섬기고, 애급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신으로 섬기고 희랍인들은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전능한 신이라 했다. 이런 많은 우상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모두 나쁜 것으로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은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4:15]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4:16]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4:17]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4:18]"라고 하였고 이사야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다."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40:18]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40:19]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40:20]: (41:7,29, 45:9, 46:5-7) 
바울은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17:29]"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인간이 만든 조상과 화상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네카는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천한 물건들을 사용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사람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물건에게 짐승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야수와 괴물의 형상을 새겼으며, 어떤 것은 남녀의 추잡한 모습을, 어떤 것들은 몇 개의 다른 몸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생기라도 가져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아무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말씀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33:11]" 인간들을 어떤 목적에 의해 적절히 교훈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엄의 임재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임재를 사람에게 명백히 말해 주는 것들이 있다. "구름과 연기와 화염"( 4:11)은 비록 이것들이 천적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고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33:20]"라는 말씀만 받았다. 
신약에서 성령님은 한번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6]" 그러나 그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이 이렇게 임재 하신 것은 성령님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능력으로 만족할 것이요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서곡일 뿐이다. 
구약의 제단에 속죄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속죄 소를 덮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그곳은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다 볼 수 없이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 25:17-21).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소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하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2]"라고 해서 스랍들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4. 형상과 화상은 다 같이 성경에 반대된다.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요 신아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막연히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열 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 135:1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 115:4]" 이와 못지 않게 나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갈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44:12] 목공은 줄을 느려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44:13]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44:14]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 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44:15]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44:16]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 도다[ 44:17]"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115:8]" 
우상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화상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희랍인들은 화상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5. 우상에 대한 성경적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 라는 말은 그레고리우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졌다. 예레미아는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 10:8]"이라고 했고, 하박국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18]"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임을 들어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 우상을 보고 하나님을 배운다는 억지 주장이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언자들이 그렇게 꾸준히 우상을 버리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했겠는가? 
그러나 교황 주의자들은 확실한 원리로 우상이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한 결정은 예언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정죄 되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위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 않았을 거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된 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다시 예언자들이 가르친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형상으로 보이는것은 모두 可死的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 예배드리는 것 뿐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에빌라 교회 회의에서 제정된 것이 였다. 그 중 36장에서 "교회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예배를 받던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라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했다"라는 말이다. 한 이방인이 이 말을 한 것으로 끝이 났다면 그 말은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이 말, 즉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류를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형상)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형사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지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이 아닌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 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 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하나님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서 명백히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해서 그런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안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의 화상, 혹은 彫像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을 받아야 한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彫像)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 주의자, 우상을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적당히 징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일 교회가 의무를 다했다면 무식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스러운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분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와 성례 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하여 마음과 주의를 성실히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해서 다만 우상 이외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교황 주의자 말하는 그 신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로 인정한 자들이며, 하늘 나라의 철학의 계시로 광명의 옷을 입은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은 교육하기에 적합한 교리를 탈취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직무를 우상에게 넘겨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지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3: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며( 1:5)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셨다는 것을( 5:10), 충분히 또는 진실히 배웠다고 한다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 세웠겠는가? 이 한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개의 십자가상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저들의 마음과 눈을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8. 형상의 기원: 유형적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교회의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원인이 된다) 
우상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천박한 갈망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한 우상 숭배의 최초의 원인은 아니다.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死者像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로부터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비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이라고 바랬다( 31:19). 이 사실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工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수 이후에 세계는 새롭게 재생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무서운 심판으로 정화시킨 땅에 우상이 득실거리는 것을 노아는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 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 였다( 24:2)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로 완전히 젖어 버리기 때문에 그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 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해 버린다. 
이런 악에는 또 다른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手工으로 표현하려 애를 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우상의 기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일들이 증명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애급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32:1)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 그러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 에서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故國 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자기들과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부분별 하게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그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 물들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여러 종류의 공상(우상 숭배)에는 즉시 예배가 따르게 마련이다. 인간이 형상에서 하나님을 보냈고 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서 마치 거기에 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완전히 감탄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하게 되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 들어 가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 주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여,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끓어 엎드릴 때에는,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떤 것도 금하신 것이다( 20:25). 
같은 이유에서 제 2 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 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 그것에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단순한 우상만을 예배하던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던 지의 차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를 받기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라. 그들은 (케도릭)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 32:4), 하나님[서 친히 그들 손으로 그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 26:13). 그러나 금송아지가 바로 그들은 애급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동의하여(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굼송아지에게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하다고 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나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동일한 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많은 형상들의 신이 각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하는 것들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속에 보이지 않게 내 주 하시는 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즉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해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에 대한 記號를 바라본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형상물을 통해 더욱 확실하고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만들고 나서 끊임없는 새로운 계교에 미혹이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우상을 통해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제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오 같은 형상으로 예배해도 된다고 확신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했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이런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찌해서 우상 앞에 부복하는가?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우상을 향해 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워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 어떤 것은 무시를 당하고, 어떤 것은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존영을 받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상들에게 이처럼 차별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을 보기 위하여 서원(誓願)을 위한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제단과 火床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름 쓰고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떠날 수가 있는가? 그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자신들의 결백을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주장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목석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27; 6:4이하; 40:19-20; 2:18-19; 32:37). 그런데 이런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 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감추어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언굽하기로 한다. 그들은 형상물에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께 아무련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彫像이나 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련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심고 있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 "예배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련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두움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샘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고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하여 디른 별명을 붙인다고 해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부니 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그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순수한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아름답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익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4]" 건실한 예술가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 이외에는 무엇이나 만들거나 그려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흉측한 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가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요,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전자는 교육에 있어 필요하나 후자는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것 외에 아무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 케도릭 교회에서 발견되는 형상물들은 후자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다.

 

13. 건전한 교리를 가진 교회는 형상물을 예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기독교의 아주 순수한 교리가 왕성했던 500년 동안은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형상물이 없어 던 때 보다 형상물을 가질 때 교회는 타락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형상물은 높고 숭고한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해도 생명이 있는 지체와 감각이 있는 생명체와 비슷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것들이 살아 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우상이 수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으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을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우상은 눈과 입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많은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우상은 말하거나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상을 섬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14. 니케아 회의(787)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생각을 했지만, 니케아 회의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간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780-802년까지 동방 제국의 여왕. 칼빈은 그 녀를 "Irene"라고 하는 사악한 Proserpine(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이라고 하였다).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 안에 형상물을 설치할 뿐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했다. 이 회의는 우리들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을 가진 자들의 발광이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말하는 욕망 만큼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는 있다. 오늘 날 형상물 사용을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은 형상물 사용을 허용하는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룰마뉴 대제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문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서다. 여기에 당시에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여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2: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형상물을 마땅히 제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나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형상물을 우러러 보는 일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라는 말씀은 印證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했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26:8)이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靜觀함으로써 알게된다는 것이다. 
데오도루스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67: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16: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요컨데 그들의 어리석음이야 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誤用 
우상 숭배자들은 성경을 오용하여 우상 숭배를 옹호한다. "야곱이 바로 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47:10]" "야곱이 그 지팡이에 머리를 의지한 것( 47:31; 11:21). 야곱이 세운 돌 비에 기름을 부은 것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28:18]"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 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99:9]"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45:12]" 같은 말씀들을 우상 숭배를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미라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이 마치 하늘에게 내려온 것처럼 신성시하기도 했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 예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들은 황제의 상에 분향을 하는 사람들은 성자의 상에는 더욱 분향을 해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고 강요했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 감독 콘스탄티누스는 형상물을 경건히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똑 같은 예배와 영예를 그 형상물에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나 마르키온파와 동류로 정죄를 했다. 동방 교회의 요한 사절은 "그리스도의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배라는 말인 "라트리아"와 봉사란 말인 '둘리아'를 동일시하고 있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12 : 하나님은 우상과 달리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강의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수반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할 때 하나님의 어떤 속성도 다른 곳에 귀속시켜서는 안된다. 종교라는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예배를 뜻하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외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에 대한 확실한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우상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셨는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20: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율법에 다음 두가지를 첨가하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유일하신 분으로 역사하시고, 둘째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람들이 당연히 영광을 돌리도록 규범을 정하신 것이다. 즉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신성하시고 고유하신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귀속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간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고적 위취를 지키면서도 다른 신들은 하나님만 못하지만 섬긴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신이시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2. 차이 점이 없는 구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천사를 섬기는 것이나 아무 구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성자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것에게는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봉사라는 말이 예배라는 말이고 그 말은 어떤 경우에 더 광범위한 섬기는 말로도 쓰이는 말이다.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까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4:8]"라고 했다. 여기서 '종노릇하다'라는 말은 '둘리아'라는 말로서 우상 숭배자들이 성자 숭배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예배 해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0]"라 하신 말씀에서 경배라는 말에 '라트리아'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사단이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9]"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경배'라는 말을 '둘리아'라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천사 앞에 무릅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19:10]"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22:8]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22:9]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0]"라고 했다. 
사도 요한 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 한 것은 그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대신으로 '(프로스쿠네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사람에게 절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윤리적인, 세속적인 존경을 의하는 것이지 종교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행위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종교가 일단 예배와 결합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에게서 볼 수 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10:25]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10:26]" 
고넬료의 인격과 신앙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보고 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라 하고 바나바를 쓰스라 하여 경배하려 했다. 이 때 두 사도는 기겁을 하여 말하기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4:11]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4:12]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13]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4:14]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4:15]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게 하셨느니라 하고[ 14:17]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4:18]"라고 하여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죄가 되는 것인가를 너무 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14:9]"라고 분명히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를 다른 것에도 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도 좋으시고 다른 신들이나 사람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적극적인 영광의 훼손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미신은 처음에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태양, , 우상을 위해 고안했다. 그러나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최고의 신을 섬기는 원리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저급한 신들, 수호신들,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련 차별없이 제물을 바치는 일반적인 행위를 하고 결국 하나님도 그런 신들 중의 하나로 취급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가지신 특별한 은총과 영광을 수 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13: 성경은 하나님은 한 본체 시나 본체 안에 3위가 존재함을 가르치신다.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축하시고 교묘하게 꾸민 이론들을 말살하시기 위해서다. 고대의 세네카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하나님일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염려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나타내시지 않았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계시를 하셨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실로 우리들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또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드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하늘 나라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셔서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이 마니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 졌으며 이 파의 교주는 주후 372년에 사망한 아우디우스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손, , 눈이 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유모가 어린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 발들의 말들이 신인동성동형적인 표현일 뿐인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 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5:25]"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0:30]"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40:12]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40:13]"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눈이 있고 팔이 있으되 사람의 그것과 같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2. 하나님 안에는 삼위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상과 구별하시기 위해 아주 독특한 특징을 사람에게 보이셨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그것이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그러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라는 다신 적인 사상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세 분으로 분활 되었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위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를 인용 예수 님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시고 밀초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은 파생 체라고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예수 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일하시며 분할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모든 완전을 포함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본체를 예수 님을 통해 세상에 들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그림자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 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본체는 예수 님에게 나타나셨으나 예수 님 자신의 본체도 있어서 예수 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성령 님에 대한 것도 결론 지을 수 있다. 성령 님도 본질은 하나님이시나 성령 님의 본체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본질은 하나이시지만 본체로서는 세 분이시다. 이것은 위라고 말한다. 이 본체를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 쉽게 '실재' 또는 '실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3. '삼위일체' ''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준다.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실체 하시는 완전한 분이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 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잘된 표현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쓰지 못할 말로 말하는데, 성경 자체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 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민일 이와 같이 불러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 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자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부패한 교의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광설을 늘여 놓는 불경 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리우스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 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것을 당연한 일이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하였기 때문에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이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아리우스 파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을 들어내었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 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더라면, 저들은 까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잇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 파와의 구별지은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은 구별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구별하는 데 불과하며, 이런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순서나 구별이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이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함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 때문에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한 이 문제를 다룬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 일괄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 예로, 힐라리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條文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런 문제를 다루었던가?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했다. 
제롬은 역시 다마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을 독자들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毒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안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성실히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 였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그는 보았는데 이런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6권에서 "휘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히 공언했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로운 용어를 제시 한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저들이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하여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지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해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 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 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혹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던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성부와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까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다고 주장해 보라. 그리면 그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 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세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해 보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런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그 말이 본체가 하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 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리 간계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저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더 낳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실재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며 교통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 다른 뜻을 가진다. 만일 '말씀'이 다만 하나님일 뿐 아무 특징도 없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하다. 그는 즉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첨가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킨다. 즉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실재의 관념이 분명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히 본질과 밀접히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 없지만, 그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삼위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님이 대조될 때 삼위의 두드러진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위는 서로 잘 전달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성부에 대한 독특한 구별의 표시가 성자에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는 없다.

 

7. 말씀의 신격 (성자의 영원한 신격) 
이 장에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발전시킨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쪽에서부터 나온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소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덧없는 소리가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영원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 1:11]"과 같이 사도들이나 전대의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이 말씀의 영이라 한다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매개자로 제시하시므로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것이 있으라' '저것이 있으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성자라고 증거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8: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괄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시적이며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당신의 계획을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모세가 말한 것보다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세 분의 실제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시고 게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3]"이라고 선언을 했다.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본질을 말씀하시고 특수하신 실재 즉 위를 귀속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가도 보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어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게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이 말씀은 불변하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8. 말씀의 영원성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거시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즉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없었던 무엇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외부적인 사역에 대한 명칭들은 창조 사역 이후에 그에게 적용된다. (: 창조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없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17)"이라고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즉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셨을 때 말씀의 능력이 세상에 뚜렷하게 들어 난 것이지 없던 말씀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오래 전은 시작이 없는 오래 전이다. 주님은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시므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백히 하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분명히 못을 밖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서 주님의 영원하신 참된 본질, 주님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45:6]"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여기 쓰인 엘로힘이라는 말씀은 천사라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 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23:5]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3:6]"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42:8]"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격이 성자에게만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자신을 영원한 하나님으로 불렀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느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6:11]"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 도다[ 6:12]"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6:20]"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6:21]"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 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6:22]"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7:5]"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7:9]"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 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 13:16]"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리니라[ 13:20]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13:22]"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13:23]"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13:18]" 야곱의 경우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2:30]"
주님은 창조된 천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2:9]"하셨고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2:3]"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 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2: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 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25:9]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 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25:10]"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3:1]"하셨다.

 

11. 신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증거가 많다. 그 수많은 증거들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추려 말한다.

1)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증거된 신성이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신성이다. 로마서에서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9:23]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4]"은 이사야의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8:14]"의 예언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즉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4:10]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4: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 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45:23]"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것도 주님은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이 영광을 자신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또 바울이 적용한 시편에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68:18]"하신 말씀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4:8]"를 인용하시므로 그 하나님이 바로 주님이심을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2:4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1]" 이 말씀에서도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한다. 
히브리 서에서 사도들이 성자에게 드린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0]"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01:26]"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돌린 영광이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96:7]"라고 하신 말씀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1:6]"에서 예수 님에게 돌려지고 있다. 
주님은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102:14]"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97:1]"의 은혜를 베푸신 분이심을 스스로 말씀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바울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5]"이라고 하셨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이다 아멘[딤전 1:17]"의 말씀과 같이 영광을 세세히 받으실 분이시다. 
또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시기 위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7]"를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라고 하셨다.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하셨으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하셨다. 
그렇게 의심이 많은 도마도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20:28]"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겠으며, 하나님의 제 이의 위인 신임을 부인하겠는가?

 

12. 사역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주님은 태초에 성부와 함께 일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주님의 말씀에 극도로 무관심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큰 자극을 받아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5:19]"라고 기록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신성에 대해 이토록 어리석게 판단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주님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적을 통해서도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9:6]" 또한 그리스도는 만물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을 소유하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9:4]"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2:25]"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증명된다. 
선지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적을 행한바 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적은 주님 자신이 행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가끔 기도를 하셨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1]" 그러나 대부분 주님 자신이 직접 이적을 행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권위로 사도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8. 3:15. 6:7]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의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3:6]"말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5:36]""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10:3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4: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얻을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구원 그 자체가 되신다. 
주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9:17]"이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역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1]"라 하신 말씀을 믿고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28:16]"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분에게 영원한 소망을 둔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10]"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도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구세주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32]"하셨고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18:32]"라고 하셨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마지막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59]"라고 기도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 하셨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9:24]"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성자의 이름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자랑인데 누가 감히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 첫머리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영광을 성자에게도 동일하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1:7; 고전 1:3; 고후 1:2; 1:3 )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주님이 성부의 모든 일에 동일하게 참여하심으로서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경건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성령 님의 신격도 그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모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1:2]"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성령 님에 의해 보존되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기 전에 성령 님은 혼돈 된 세계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 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은밀히 말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48:16]"의 말씀은 아무도 교묘하게 다른 말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은 파송하실 때 그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님은 온 우주에 편제하셔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을 성장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시며 이 우주와 자연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나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대하여 확실히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 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신다. 이 중생은 어디서 빌려 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 자신이 영생의 창시자로서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 님에게는 성자에게 속한 모든 속성들이 있으시다. 피조물들 중에 누구도 성령 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11:34]" 성령 님은 스스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이라 하셨다. 또한 성령 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고전 12:10]"를 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런 일들은 하나님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4:11]" 즉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성령 님이 하신다는 것은 성령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고 의롭다 함을 받고 진리, 구원, 사랑, 은혜, 성화가 모두 성령 님의 하시는 구원 사역이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성령 님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 아니라 창시자이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라고 하셨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 님의 명칭에 대해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3:16-17; 6:19; 고후 6:16).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말씀은 성령 님으로 내주 하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만일 우리가 나무나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 님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성령 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 하시지 않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 
사도들은 성도들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이라고 부르셨다. 
성령 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시면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4]"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바울은 그 만군의 주가 성령 님이시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9]"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8:25]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28:26]"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 님이야말로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사야는 그 백성들의 완고함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말을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63:10]"라고 하시므로 성령 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 
주님은 성령 님에 대한 범죄에 대하여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0]"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므로 성령 님의 신적 위엄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 시인은 우주 만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임을 말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6]"이라고 하셨다.

 

16. 하나님의 하나 되심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욱 명백히 계시하셨다. 삼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알리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증거들 중에 탁월한 증거가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을 시켜 놓았다. 그는 믿음이 하나요 주도 하나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삼위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8:19]"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여기 저기를 두루 다녀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만일 참 신앙이 여럿이라면 그 신앙을 위한 신도 여럿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례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님에게 기초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서는 세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 님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삼위 하나님을 함께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님이 한 분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 삼위 
한편, 성경은 성부의 말씀,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구별이지 분활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13:7]" 이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이지 말씀이신 성자와 성부가 다른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5:32]"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8:16]"이라고 하셨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3]"이라고 하셔서 만물을 함께 창조하셨다고 하셨다. 
성부는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 죽으려 오시지 않으셨다. 성자 되신 예수 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님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8]"셨으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5]"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부와 상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16]" 라 하심으로 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셨다.

 

18. 성자, 성령의 차이점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민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 님께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으시고, 또한 영원에 있어서 '먼저'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성은 동일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구태여 순서를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모든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그 다음은 지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는 것이 편해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성자는 성부에게 발생되고 성령 님은 성부와 상자에게서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의 말씀에 나타나 있고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 말씀하셨다.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이 구별은 하나님의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부와 상자와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제 안에서 이해되고 각자가 자신의 독특한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님이 전적으로 피차의 안에 거하신다. 이 사실을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0]"이라 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라 불린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는 성부라 불린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부가 아니며,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 불리우신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 불리우신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20, 삼위 일체 하나님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고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이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들을 구별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각 위의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또는 상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 이와 같이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신해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 갈 필요가 잇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르쳐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떤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도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 말에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여기서의 ''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인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랍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신들메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21; 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했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 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고 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全 本質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반 삼위 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부터 뒤집어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위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했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음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의 그 왜곡된 광란을 반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냉정하고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사상과 우리들의 언어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작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 자신에게 아끼기로 하자.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하신 충분한 증거 자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에게 마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이 아노모에오스파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다섯 편이나 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이 그 건방진 쾌변론 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보다 더 신중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그런 경솔한 행동의 불행한 결과로, 우리가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이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하지 아니할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의 이해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한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天來 神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하는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은 야수와 같이 광란하며,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훼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신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하던 분파가 많은 분파로 갈라졌으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찟어 놓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위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미 성경에서 입증이 되었듯이,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아니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하여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령도 성자와 구별되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견지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들을 주장한 자들에 대해서도 문은 굳게 닫쳐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세르베투스나 그의 동료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저들의 허위를 논하는 게 필요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모든 삼위일체론 자들을 향하여 보통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상치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도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에 따라 그로 인하여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자기의 불합리한 주장을 비유로 말했는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들 안에와 나무와 돌 가운데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그는 실로 ""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설에 대하여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였다고 하면(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제이시다 는 결론이 나온다.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자들은 세르베투스의 불 경건한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와 비슷한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가공스러운 말을 삼가지 않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하신 "본질의 수여자"이시며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다고 했다. 
저들의 그 가시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 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저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때때로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저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를 한 位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7,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증보 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욱이 명료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데 ,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일 성부 이외에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할 바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한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 되여서는 안된다. 분명히 이사야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 6:1), 이 하나님을 가르쳐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전하였기 때문이다( 12: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고 증거하신 분도( 8: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9:38).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을 끓겠고-----"( 45:23)라고 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14: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위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0; 102: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1:6; 97: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므로( 1: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진다고 하는 쾌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라는 명칭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44:6). 
예레미아의 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로다"( 10: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이후에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물을 존귀케 하신 창조주가 자존하지 아니하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他者로부터 빌려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상부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만일 전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던가 아니면 성자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Rlelfr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던가 또는 전체에서 인출된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저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고( 8:9)고 바울의 증거에 의해서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 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상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 저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한다면 성부가 이 본질을 상자와 공유하였는가 아니면 공유하지 않았는가를 우리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실로 이 대답은 부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자가 절반만 신이라고 하는 말이 되는 것이고 이런 말은 가증스러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저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고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 같이 전적으로 완전히 공통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한다면, 본질에 관한 한 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저들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조건이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저들은 말한다.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반박할 수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을 들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相關的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位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라고 저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이런 반대는 한마디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칼뱅)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히 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 였다는 이유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증보 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저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19: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저들이 반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저들의 불 경건은 저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말씀이 선하다고 한다면, 저들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시지 않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들의 주장을 한층 더 확실하게 해 준다. 
사실은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17), 지혜로우시며( 16:27), 참되시다고( 3: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되는가 묻고 싶다. 
태초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 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운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다는 말인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당연히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todrr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끓기를 요구하셨다고 한다면( 2: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20:3). 
만일 저들이,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44:6)고 말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 저들의 잘못된 이론을 반박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이라는 묘한 구별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나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중보자의 전 인격에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히 마무리 지어 놓았다( 2:6-7). 
실로 그는 여호와로 불리시고, 구릅들을 타시며(참조, 18:10, 80:1, 99:1), 온 땅의 왕이시며( 47: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 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 
이사야는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25: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는 말이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에까지 회복시키시는 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 이였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동작 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다양하게 되던가 아니면 저들이 다만 그리스도를 이름뿐인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다음 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 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으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 자들이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한 하나님 안에 여럿의 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세의 이 말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창조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적으로 속하다 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 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기지 반론을 쉬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4: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라는 명칭이 성부에게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정용 된다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4:23).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은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그러나 저들은 이 문제에 있어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 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라는 점에서는 발생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저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삼위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은 저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들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저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가 아니라 諸神의 삼위일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했는가 안했는가를 묻는 그들의 무익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 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곳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의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이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하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그가 성부로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옛날의 전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위에만 적용시켰다. 그것은 본질을 그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 아니라 가장 큰 불 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와 성령의 본질을 변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돈 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한다면, 성부는 어떤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격하시키는 것이 불과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다.

 

26. 성육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들은 반대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적인 근원이신 상부에게 한정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물른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인격으로 말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증간 위치를 취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었다고는 하지만( 2:7) 성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추어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 보다 못한 자 였다고 하였으나( 2: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1: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인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하나님께로 가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14:28; 참조 16:7, 20: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나는 그 광채의 완전함이, 육신을 입은 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하여 훨씬 더 뛰어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고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니라(고잔 15:24, 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시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 1:1; 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2- 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새 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다른 참되신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도한 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에게서 많은 구절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미지를 들어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 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 할 경우, 옛날 종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로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사실상 성부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 3 6장을 일고 보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 2권 제 46장에서 밝힌대도,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에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3권 제 9).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시며 왕이시오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 3권 제 12).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 주시며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 였다고 터부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 에서부터 오시며(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 3권 제 18, 23). 4권 제 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잇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동권 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 자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저들이 터툴리안을 저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 방법이 거칠고 모호 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에메하게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사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라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만 위를 적응할 때만 이라고 했다. 그는 어디선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는 바로 말씀이 되신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가 성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일괄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된다고는 한,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위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이외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 일체의 교리를 인정했다.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불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들을 지지한다. 져스틴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힐라리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예리하게 역설했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 그와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연결이 안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저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들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 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저들의 파렴치함에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이전 학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악한 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 들었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생기면 그 달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에메하거나 모호한 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異論도 없이 받아 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 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라는 저서 제 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어거스틴이 그 때 자신을 망각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해병하며,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쾌변으로 오늘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제까지의 고찰로 인해 사탄의 일체의 쾌변을 물리쳤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한 내용들은 무분별한 사변들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별로 유익 되지 않는 일이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 실로 성부의 발생이 계속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인격과 관련하여, 칼빈은 성령은 창조주와 섭리주 구속주 하나님의 신성과 자존성을 소유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삼위일체의 3위격이시며, 자신의 고유성으로서 힘과 능력을 가지고 힘과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창조주와 섭리주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영이시며, 성육신하신 구속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의 영이시다.

 

 


원래 폴리네시아는 중앙 및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1000개 이상 섬들의 집단을 가리키는데 이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소시에테, 투아모투, 갬비어, 마르키즈, 투부아이 제도 등의 5개 군도로 나누어지고 전체섬은 약 130여개 정도 됩니다.

이중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타히티 섬(1,042㎢)이 가장 큰 섬입니다. 지상낙원이라는 보라보라섬도 소시에테제도에 속하여 이곳 폴리네시아의 일부입니다. 이곳의 수도는 타히티 섬에 있는 파페에테이고 전체 인구는 약 244,000명 정도입니다.

열대성 기후로서 5∼10월은 평균 21℃이고, 따뜻한 우기인 11∼4월의 평균기온은 33℃로 올라갑니다. 오래전 프랑스 선교단이 이곳에 와서 원주민들을 설교하고 개종시킴으로서 그들은 프랑스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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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대통령이 찰래를 방문중에 있다죠.

칠레는 남북 약 1,000km. 동서 약 30km.안데스산맥의 전산(前山)과 태평양 연안의 도메이코산맥 사이에 있으며, 세 주(州)에 걸쳐 있다. 강수량이 매우 적으며, 국지적으로 강수량이 전혀 없는 곳도 있다. 완전한 불모지대이며, 소금과 탄산칼슘분이 많은 진흙이 말라붙어 있는 호수와 소금의퇴적층으로 덮인 지역이 많다.

이 지역은 1860년까지 귀속이 결정되지 않았으며, 경계가 불명확하여 분쟁이 계속되었다. 당시 페루의 영역이 넓었으나 칠레 초석이 풍부한 광산은 볼리비아 영토에 속해 있었고, 주로 페루와 칠레의 자본으로 초석이 채굴된 것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79∼1884년에는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으며, 발파라이소 조약(1884)의 체결로 칠레의 영유권이 확정되고 1905년에 정식으로 칠레로의 귀속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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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lasSohn.jpg 근간의 뉴스 중심은 뭐니 해도 성왼종의 자살 사건이다. 성씨는 대체로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새벽빛'을 보면,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갖은 고생 끝에 단돈 천원으로 시작해 2조원 그룹의 기업을 일궜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를 구구절절이 담고 있다. 그러나 성씨는 자살하기 불과 6일 뒤, 그가 경영했던 경남기업은 주식시장에서 명이 끊겨 퇴출당했다. 반세기 역사가 넘는 '국내 최초 해외 진출 건설사'(1965년) '국내 1호 상장 건설사'(1973년)로 꽤 명성 있던 기업이었는데, 그가 인수한 지 12년 만에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결국 망했다. 경제 논리로 본다면 그는 '실패한 기업인'이다.

허나 그는 죽을 때 곱게 죽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경향신문과 50분간 통화한 내용,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현직 총리와 현 정권 실세를 겨냥한 56자 ‘뇌물’ 메모가 정국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9일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을 때, 처음에 언론들은 그를 ‘자수성가 기업인’으로 예우했지만, 그러나 다음날 소위 친박 핵심들에게 돈을 줬다는 생전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는 죽으면서도 정치를 ‘재개(再開)’한 것이다

고인의 측근은 그는 여.야당을 막론하고 “정치인 150여명에게 150억원을 뿌렸다”고 했다. 정가에서는 정권의 시대를 막론하고 “성완종의 ‘로비’정당은 여당”이라고들 했다. 그의 주변들은 첫째, 돈을 받고 도움을 준 사람 둘째, 돈을 받고도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 등 두 종류의 ‘실세’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번에 회자된 인사는 그 두 번째에 해당하는데, 그보다 더욱 나라에 해악을 끼친 첫 번째 인사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까....현 새민련은 과거 성씨의 유례없는 당시 두 번씩의 ‘특사‘에 대해 또 ’오리발‘을 내밀며 자기들은 청렴(?)했다고 할 것인가?

그의 자서전 '새벽빛'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걸으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솔직히 말해 내 손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소소한 관행을 무시하기 힘들었고,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사업을 해나갈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운운.

정말 그의 말대로 '소소한 관행'을 무시하고는 도저히 사업이 안 되는 사회 탓인지, 본업보다는 정치권을 맴돌며 보험 드는 것이 여전히 비용도 적게 들고 이득이 많아서 정경 유착이 습관화된 것인지, 차제에 뿌리부터 파헤쳐 청산하고 고쳐야 나라가 바로 선다.

우리 사회는 죽은 자에게 너그럽다. 하지만 이제는 ‘실체적 진실’을 추궁할 때다. ‘죽는 자가 반드시 진실만 말하는 건 아니다’라는 걸 우리는 안다. 하지만 대개는 망자의 메모를 진실로 믿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우리 정치가 ‘인간관계’라 부르는 ‘비리사슬’로 움직인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덧 칠이 입혀진 인정적인 미화는 우리를 눈 멀게 하고 또한 폄훼 역시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과 관련, "최근에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는 정치개혁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 일이며,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ㅡ“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이런 부패 문제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나라 경제 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나 중단 없이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로 지금은 '향후 대한민국이 깨끗한 정치의 길로 나아가느냐' '족쇄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무릎 꿇고 마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혹자는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대충 넘어가야 나라가 편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조 5백년이 그랬다며 '적당히' 합리화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지독한 내우와 외환을 겪었고 근세에는 6.25 전쟁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죽을 똥 싼 사람들은 애매한 백성들 뿐이었던 치욕의 역사를 덮어두고 하는 소리다.

따라서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특+특검도입‘을 해서라도 전·현 정권 모두의 적폐를 낱낱이 파헤쳐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세워야 할 사명이 박대통령에게 있고, 그리고 그 밖에는 맘 먹고 해치울 사람이 없다.

왜냐면 박대통령은 최소한 '도적질'이나 '비리'에는 단호한 사람이었기에 이번 사태도 일어났다고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3년 후면 그는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될 것이기에 이제 결코 망설이거나 야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Texas Dallas에 살고 계시는 손남우님 불로거에서



열 여섯 번째 질문 비밀 결사 
기독교인은 왜 메이슨과 같은 비밀 결사의 회원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하는가?  

비밀 결사의 성격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완전히 반대됩니다. 성경은 원하는 사람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에 오도록 초청하는 열린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연구하고, 질문하고, 영감 된 책(성경)을 읽고, 그러한 행동에 대한 대가와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비밀 결사는 오직 제한된 숫자 만이 회원으로, 비밀 맹세와 의식으 로, 그리고 그 사회의 활동으로 환영을 합니다. 비밀 결사의 회원들은 흔히 그들의 조직을 지역 교회에 속해 있는 신자들의 모임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비밀 결사는 성격상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뜨주의자들의 조직이라는 점에서 교회와는 아주 다릅니다. 

교회와는 다르게, 비밀 조직은 그 조직, 원리, 및 행사에 있어서 같은 회원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비밀 결사에 대한 회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회 조례 9조 전체는 비밀 결사에 회원이 되는 것을 금하는 항목을 포함 하고 있습니다. 교역자가 비밀 결사에 속하는 것을 금하고 또 평신도들이 그러한 결사에 참가하는 것을 피하라고 권하는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1. 비밀 결사의 활동은 지상 대 명령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으로부터 주님의 종의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키도록 강요합니다. 
2. 비밀 결사의 동료 회원들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는 것은 --- 대부분의 회원들은 예 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역사를 믿는 동료 신자가 아닌 --- 신자가 비신자와 함께하는 가치 없는 결속입니다. 
3. 비밀 결사의 정신, 철학, 및 비밀 명령의 일반적인 영향은 영적인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대신에 오직 인간의 자연적 부분에 대한 발전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이끌어갑니다. 
4. 비밀 결사와 그들의 가르침을 신뢰하면 선한 행위와 향상된 사회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합니다. 

비밀 결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회만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는 메이슨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메이슨 조직에 참여하는 것이 죄라고 선언합니다. 이 입장은 메이슨과 교회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충돌에서 기인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메이슨은 흔히 그들 조직의 맹세나 의무가 하나님, 국가,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를 훼방하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입증해 줍니 다. 어떤 충성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 사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기독교인은 
(1)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거룩하지 못한 충성을 통해 결연하여 멍에를 함께 나누거나 (고린도후서 6:14-18), 
(2)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거나 헛되게 사용하므로 비성서적인 맹세에 서약할 것을 요구하거 나 (출애굽기 20:7; 레위기 5:4-6; 마태복음 5:34-37; 야고보서 5:12), 
(3)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같지 않거나 (베드로후서 3:16), 
(4) 종교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일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제공하고, 동시에 유일한 참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요 한복음 17:3; 디모데전서 2:3-6; 골로새서 2:8-10; 에베소서 2:8,9) 그 어떤 조직과도 연 계를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도록" (로마서 12:17) 주의해야 합니 다. 동료 회원들의 유익을 위해서 흔히 경제적, 사회적, 혹은 정치적 유익을 위하여, 비밀 망토를 쓰고 모든 활동이 행해지는 “밀실”에서 문을 닫고 가지는 비밀스러운 회합은 모든 사람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고린도후서 6:17). 이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 의 권면의 말씀이며, 또 비밀 결사에 관해 확실하게 적용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관심사: 
비밀 결사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조례의 선언이 어떤 조직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메이슨 조직에 관련하는 것이 이 선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과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작성한 선언문은 주로 프리 메이슨 조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쓰여 졌습니다. 그러나 이 공식 선언과 위에서 재확인한 사항은 한 조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비밀과 맹세를 그들의 활동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모든 조직에 적용이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 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회 조례, 9조, B, 4항에 기록되어 있다.



개신교 (改新敎, Protestantism) 개요
- 정진홍 -


16세기초 북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교파.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종교전쟁을 거친 이후,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전세계에 다양한 형태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개신교 운동의 역사>

개신교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계열의 독일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함께 3년 전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허락하였던 관용정책의 대부분을 무효화하였다. 1529 4 19일에는 독일의 14개 자유도시와 6명의 루터파 제후들이 대표가 된 이 결정에 대한 항의서가 발표되었다. 이 항의서는 자신들이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결정이 자신들을 구속할 수 없으며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황제에 대한 복종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온 그리스도교를 포괄하는 공의회나 전독일민족의 총회를 개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항의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에 의해 채택되었고 점차 종교개혁의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신봉자들은 복음파(Evangelicals)라는 이름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t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루터(1483~1546)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울리히츠 빙글리(1484~1531)의 제자들, 나중에는 장 칼뱅(1509~64)의 제자들도 일컫게 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특히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추종자들은 개혁파(Reformed)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16세기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주로 종교개혁시대에 나타난 2개의 큰 사상, 즉 루터파 및 개혁파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나 17세기초 잉글랜드에서는 영국국교도들이 비정통으로 간주한 사람들, 곧 침례교도들이나 퀘이커교도들과 대비되는 '정통 프로테스탄트'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인임을 주장하나 가톨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단 동방교회는 제외), 즉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가톨릭 성향의 영국국교도 모두를 포괄하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썼다. 유니테리언파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이같이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00년 이전이었다. 예를 들어 1689년의 영국 관용조례는 '영국국교회를 반대하는 폐하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의 의무를 면제하는 조례'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례는 잉글랜드에서 '정통 국교반대자'로 알려진 견해들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였을 뿐, 유니테리언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 내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여전히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논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 당시의 사전들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의 사전(1755)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종교개혁 초기에 로마 교회의 오류에 항거한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세 후기 교회의 상황>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중세 후기 세계 내의 오랜 발전과 수많은 소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를 개관하기는 쉽지 않다. 가톨릭 사가(史家)들은 16세기의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이전에 또한 그들과 전혀 무관하게 얼마나 많은 개혁이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반면,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은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밝히기 위해 중세 후기 교회를 극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 결국 종교개혁을 타락한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새 시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15세기에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전기(前期) 종교개혁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개신교의 선구자가 아니었으며, 후에 나타난 종교개혁 때문에 그들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건들은 '전기 종교개혁'적인 사건들이 아니었으며, 그 나름의 정체성(正體性)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부터 북으로 독일·프랑스·영국 전역에 걸쳐 15세기 교회 내부에 개혁의 발전과 소요가 있었다는 데 대해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여왔다. 이와 같은 개혁과 소요의 일부는 교황·성직자·수사(修士)·수녀 등의 권력남용을 겨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8(1484~92 재위)가 바티칸에서 자신의 사생아들의 결혼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해서 그를 증오하였다. 그들은 또한 타락했던 교황 알렉산데르 6(1492~1503)를 멸시하였다. 대중은 교황이 엄청난 재원을 끌어들여 사치스러운 건물들을 짓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하였다. 교황에 대한 혐오감은 민족주의 정신이 고개를 들면서 더욱 커졌다. 독일·프랑스·영국 정치에 오랫동안 개입하였던 교황들은 각국의 전제군주들이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자 권력약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주들은 교황과, 대부분의 경우 지역 교회의 성직자 대표들에 대해 이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고개를 든 이때에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맥락 안에 완전히 남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 참여하였던 새 세대의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오컴의 윌리엄(1349? 죽음)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안에서 종교개혁자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수도회가 대부분 포기했던 청빈의 이상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의 일부로서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이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권과 제국이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 관계가 있는 정부 혹은 영역으로 보았다. 교회가 이단의 위험에 처할 경우, 평신도들은(제후와 평민 모두)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하므로 당면한 개혁에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권력과 중세 교회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던 이와 유사한 투쟁에 가담하였다. 위클리프 역시 민족의식을 교회개혁에 이용하였다. 그의 도구는 성서의 도덕률이었다. 위클리프는 이의 번역을 추진하였으며 1380년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모두 이 번역본을 볼 수 있도록 조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의 귀중한 영적 권위는 계속 인정하였다.

보헤미아에서는 프라하대학의 강사가 되었던 얀 후스가 바로 이 대학을 사치에 물든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기지로 삼았다. 그 역시 민족감정을 이용하였으며 교황은 세속의 칼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고 논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대담한 고발 때문에 결국 그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도덕적 반발과 민족감정을 결합시킨 경건 이외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도 중세 후기 교회에 나타난 또 하나 소요의 징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렌초 발라(1407~57)가 자신의 정교한 역사탐구 기술을 이용하여 교황에게 막대한 권력과 넓은 관할지역을 준 문서들이 상당수가 위조임을 폭로하였다. 독일에서는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이 성서에 쓰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하였으며, 학자들이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69~1536)가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대한 지식과 풍자적인 필봉을 통하여 교회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중세 후기 교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요인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27/28 죽음)나 요한 타울러(1361 죽음)의 정신을 통해 꽃핀 신비주의였다. 심오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교회의 제의와 관행들 대부분을 도외시하고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하고자 했고 또한 그것을 주장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헌신주의자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저술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고위층 사람들을 공격하였지만, 평민들의 가톨릭주의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헌신이 미신적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희생시킨다고 보았다. 순례자들이 성자의 유골을 모신 사당을 찾고 교구민들이 성자의 유골을 경외하는 관례들은 일종의 이교(異敎)가 그리스도교로 치장하고 침투한 것으로 여겼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평민들로 하여금 사실상 구원을 팔아먹고 있었던 교회에 착취당하도록 만들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는 그러한 개혁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할 수 없었고 그것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


<독일·스위스·프랑스의 종교개혁>

Protestant Reformer Martin Luther 루터의 역할

루터는 이전의 개혁자들이 교회의 생활을 공격하였다면 자신은 교회의 교의를 공격하였고 이 점이 서로를 구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은 성직자들의 죄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지만, 그는 구원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도식에 환멸을 느꼈다. 스콜라 신학은 사람들이 고백과 고해성사에 의한 사면을 통해 죄를 하나하나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인지(認知)할 수도 없음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상처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천연두를 치유하려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성 전체가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반면, 교회는 인간이 병들어 있기는 하나 각 개인의 선행으로 악행을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솔직하였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칼로 나무를 베듯이 저주받은 자를 지옥으로 가도록 선고하리라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가득채웠다. 그는 수도원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산 이상의 공덕(功德)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사가 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죄많은 난쟁이와 같은 자신이 하느님의 가차없는 정의와 위엄 앞에 설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다. 끊임없이 고해실에 의존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을 깨닫게 하였을 뿐이다. 그후 그는 인간을 그토록 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스스로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인간을 저주하는 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구원은〈시편〉 연구를 통해서 왔다. 그는〈시편〉22장이 특별한 것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시편〉22장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구절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바로 그때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많은 인간과 일치시켰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었던 심판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버림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거기서 하느님의 진노와 하느님의 은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였고, 하느님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표어가 된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의 교의였다.

루터는 1517년 모든 성인의 날에 95개조를 내걸었다. 여기서 그는 3가지 주요논점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재정 오용에 관한 것으로, 그는 만일 교황이 독일 민중의 빈곤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치는 양들의 피와 가죽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고 재 속에 그냥 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교의적 오용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은 연옥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있더라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가없이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종교적 오용을 공격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보물은 복음이므로 성인들의 공로를 기리는 보물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인데, 교황권이 루터의 입장을 이단으로 선고하였을 때 루터는 이에 맞서 교황들의 무류성과 공의회들의 결정을 부정하고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선언하였다.

루터는 여러 지역에서 후원을 받았다. 이미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의 복음중심적 개혁은 성직자들의 축첩, 부당한 재물 취득, 성직 겸임(한 사람이 영국·독일·프랑스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몇 개의 성직을 차지하는 행위) 등의 도덕적 오용을 바로잡으려 했고, 성자와 그 유물에 대한 숭배, 종교적 순례 등과 연관된 대중의 미신을 조롱하였다. 개혁운동의 대표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직의 종교적 측면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루터는 급속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1520년까지 루터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연기하였다. 교황권의 세속화가 루터를 구해준 셈이다. 그리고 루터는 세속화된 교황권을 무너뜨렸다.

1520년 여름 그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언문 일부를 공표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은 루터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던 황제를 포함한 독일의 지배계급에게 사도의 청빈과 소박함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하자고 호소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해 시민 권력을 향해 외친 이 호소는 황제들이 부적격한 교황들을 폐위하고 대체시켰던 중세 초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권이 불과 400년의 연륜을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1073~85 재위)의 교회개혁이 교회에게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가장 저열한 사제도 가장 훌륭한 왕보다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가 행정 영역에 간섭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인 행정장관들을 포함해 모든 신자들이 다 사제라는 교의를 가지고 이에 대처하였다. 평신도는 직업상 교구 사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누구나 사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통치자는 그 자신이 사제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가 그를 영적으로 파문하더라도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가들은 교황권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이 교의에 동의를 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일시에서는 중세기 종파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사(聖事)를 다루는 또다른 1편의 논문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를 썼다. 이 제목은 성사가 교회에 포로로 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루터는 성사의 수효를 7개에서 2개로 줄였다. 7개의 성사는 성세성사(세례)·성체성사(성만찬)·고해성사·견진성사·신품성사·혼인성사·병자성사였다. 루터는 성사를 그리스도가 제정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이 엄격하게 성사로 인정되었고 고해는 고백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루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성만찬에서 사제의 기원 때 빵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고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물체와 "함께, 그 안에, 그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곳에 있다면 왜 특별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여 하느님이 말씀의 선포와 성사의 거행을 자기계시의 두 방식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신자들의 눈이 열린다.

1520 12 10일 루터는 교황에게 굴복하기는커녕 교회법 사본 1부와 그의 굴복을 요구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즉각 파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후견자였던 작센의 제후인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공정한 자기변호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의회로 끌려갔으며 자신의 책들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만일 그가 성사를 다룬 책을 부인하였다면, 다른 논점들은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의 정당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책들에서 펼친 교설들 가운데 일부라도 부인하는지, 또 오랫동안 전해온 가톨릭 교설들을 감히 거부한 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루터는 우쭐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또 악의를 가지지도 않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서와 명석한 이성에 의해 유죄평결을 받지 않는 한(물론 저는 교황과 공의회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만) 나의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가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후 황제는 루터를 황제의 금령 아래 두었고 공식적인 파문칙서가 공표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곧 루터를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1년 동안 은신하였다. 이 강요된 은둔 기간에 그는 〈신약성서〉 전체를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토착적이면서 날카롭고 힘찬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독일어는 관용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번역본의 반포만큼 그의 가르침에 대중이 추종하도록 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자들은 루터의 역설에, 자신의 성서 해석이 옳다는 루터의 확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사람이 한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주하는 폭군으로 만드는 예정론을 루터가 수용한 것에 대해서 주춤하였다. 독일 민족운동이 붕괴되자 루터의 측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이 개신교의 형태들은 전체적으로 '종교개혁 좌파' '급진적 종교개혁'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떤 용어로도 명확한 분류는 가능하지 않다.

가장 급진적인 스위스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그는 음악을 비롯한 여러 감성적 효과들을 종교의식에서 추방하였으며, 주의 만찬을 기념적·선언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칼뱅의 역할

칼빈개신교의 또 하나의 형태는 칼뱅주의로, 이는 프랑스인 장 칼뱅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인문학과 법학 교육을 받았으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전향한 결과 프랑스를 떠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젤에서 27세의 나이로 〈기독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발표하였다. 계속 이 책은 증보되어 수세기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성서의 유일 권위에 대해서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스위스 급진파와 루터파 견해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은 보편적이며 부활한 주와의 진정한 합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칼뱅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회중의 시편 찬송을 좋아했는데, 바로 이 점은 프랑스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와 신대륙 장로교의 특징이 되었다. 예술에 관해서는 성인들의 상()과 십자가상(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십자가는 허용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칼뱅주의가 종교의식에서 음악과 예술에 소원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반면 칼뱅은 하느님의 심판의 공포를 보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택받을 자들에게는 닥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일생 내내 신앙과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근사치에 가깝고 입수가능한 시금석들을 갖고 있었다. 칼뱅은 지극히 내적이고 또 무행인 거듭남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후에 칼뱅주의는 원래 칼뱅의 입장에서 벗어나 선택의 표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칼뱅에게는 3가지의 시금석이 있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츠빙글리와 견해가 같다. 둘째는 엄격하게 훈련된 그리스도교적 품행이며, 이것은 재세례파와 같은 견해이다. 셋째는 성례전에 대한 사랑이다. 유아세례는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말한 성례전은 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이 3가지 시금석을 갖추었다면, 그는 선민(選民)임이 분명하므로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주로 헨리 8세의 정치적 의지에 의해 영국에 퍼졌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곤경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1534년 그 자신이 국교회 수장(首長)이라고 선언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성격과 지위, 로마 가톨릭과의 경쟁이 정치적인 쟁점이었던 300여 년 동안 보다 근본적인 발전은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일어났다. 청교도 혹은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와 비국교도들은 장로교 및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조직과 예배를 발전시키고 이를 확립하였다.

예배의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한 영국 청교도는 경건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경건주의는 수많은 종파들과 운동이 생겨나게 했으며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종교', 곧 하느님의 은혜를 신자들이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결국 형제단(Unitas Fratrum) 또는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로 불리는 경건주의 집단은 영국 사람 존 웨슬리에게 영감을 주어 감리교 운동을 창시하게 하였다. 이 감리교 운동은 복음주의로 알려진 보다 일반적인 현상의 주요표현이었다.

옥스퍼드의 링컨 칼리지 학생시절에 웨슬리는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단체를 결성하였고, 선교를 위해 그루지야를 여행했으며, 모라비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일생을 영국에서 복음주의적 설교를 하는 데 바쳤다. 그는 분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교구체계는 자유로운 복음설교와 평신도 설교자에 관한 웨슬리의 계획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1744년 웨슬리는 제1차 설교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감리교협회의 치리기관인 연례 대회가 되었고, 1784년에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감리교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가 조금은 소홀히 여기는 감정과 양심을 중시하였다. 감리교 운동은 은혜의 교의에 새롭고도 헌신적인 자극을 주었으며, 한때 경건주의에서 나타났으나 17세기 중반 이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을 때 일시적으로 쇠퇴한 바 있던 도덕적 진지함을 중시하는 전통에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은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사가들, 즉 필립 도드리지(1702~51)와 찰스 웨슬리(1707~88)를 낳았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구사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한 개신교 운동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한 미국 헌법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었던 자유로운 교회가입의 정신, 유럽에서 끊임없이 도래한 이민자들의 종교적 혼합, 영국에서 지배했던 '교회와 왕'의 동맹에 대한 반작용, 계몽주의의 세속 정신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과 더불어 세속의 국가이념은 수많은 유럽 자유주의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반성직주의자들의 이상이 되었다. 미국의 유형은 나폴레옹의 유형보다 유럽 개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국교화된 개신교 교회에 익숙했던 독일·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스위스·영국·스코틀랜드의 세속국가들에서는 한동안 국교 폐지의 강력한 요구가 없었다. 이 모든 나라에서 독립교회 혹은 비국교도 교회의 교인들은 19세기 동안 완전한 관용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19세기 동안 국가와 국교회 사이의 형식적 연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영국국교회가 소수파로 존재하였던 아일랜드(1871)와 웨일스(1914~19)뿐이었다. 그러나 국교회는 최소한 외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 영국·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 등 3국에 남아 있었다.


재통합을 위한 운동

종교개혁 이후 재통합을 향한 가장 중요한 법령이 제정된 것은 19세기초였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국가들은 한 교파 이상을 허용하면서 서서히 만인에 대한 관용 쪽으로 움직여 그들이 훌륭한 시민인 한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특히 새로운 합리주의 학파, 혹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 학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도들을 서로 분리시켜온 교리들이 그들이 동의한 진리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개신교 팽창의 시대

이런 형태로 세속국가는 개신교(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팽창과 다양성을 지원한 셈이지만 동시에 모든 교회들과 긴급한 새 문제들을 놓고 대결하게 되었다. 헌법으로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킨 미국의 유형은 과거의 회중교회 전통과 계몽주의의 이념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의도가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유형은 보다 역사가 깊은 유럽 교회들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래로 국가와 교회가 동맹관계에 있었던 개신교 국가들에서 그 효과는 이중적으로 나타났다. 첫째, 국가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파들에 대해 더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둘째, 국가교회는 모든 형태의 국가 통제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해 더 강력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루터교가 지배적인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에 독립을 향한 강력한 운동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의 복음파 운동은 목회자들을 교구에 임명하는 것과 관련하여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안을 왕실과 정부가 거부하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스코틀랜드 교회는 토머스 찰머(1780~1847)의 지도 아래 국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독립교회를 창설하였다(1843). 이 두 교단은(1929년 최종적으로 재통합될 때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스위스에서는 개혁파 신학자 알렉상드르로돌프 비네(1797~1847)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위해서 압력을 가했으며 1845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창설하였다.


세계에서 미국 개신교 영향력의 향상

16세기 이래 개신교 정치권력의 두 중심은 독일과 영국이었다.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독일이 통일되고 영국이 세계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19세기에는 개신교의 정치적 역량이 종교개혁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했다. 그러나 1860년경 제3의 세력이 미국에서 출현하였다. 1820년 이후 미국의 개척 상황은 다양한 개신교 세력을 확장시켰고, 1832년 부흥운동집단들로부터 형성된 그리스도의 제자회와 같은 교파들이 등장하였다. 이와 때를 맞추어 개신교 교파들은 미국의 경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미국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며, 따라서 한동안 미국에서 가장 큰 단일 교파는 로마 가톨릭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도력과 문화의 기조는 앵글로색슨적·자유주의적·개신교적인 것으로 유지되었다. 대체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미국 루터교가 확장되었으며 마침내 루터교의 본산지인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닌, 루터교적 생활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터교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유럽의 경건주의 집단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미국의 루터파 교회는 독일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과 계율을 갖게 되었다. 미국 그리스도교의 부흥운동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으며, 개인적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개념이 미국적인 생활방식에 깊이 침투하게 하였다.


선교의 확산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세력, 미국 세력의 증가, 유럽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오랫동안의 평화 등으로 인해 개신교 교회들은 가장 위대한 팽창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새로 생겨나는 도시들에서 개신교 교회들은 전례없는 규모로 사회봉사를 전개하였다. 병원, 고아원, 금주운동, 노인보호, 젊은이들과 성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확대, 교회학교, 도시 빈민지역에서 청소년 및 성인 클럽 운영, 19세기 새로운 도시생활이 필요로 하는 무수한 조직체들의 설립이 그것이다. 개신교 교회들은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개신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는 반투족이 주로 개신교 교인들의 동맹체가 되었다. 인도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신생 인도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힘을 끊임없이 증가시켰다. 중국의 그리스도교는 항구도시와 17세기 로마 가톨릭 선교의 잔류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었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재정 지원과 중국내지선교회 설립의 재정 지원을 받았던 다양한 복음파 집단들은 중국 내지(內地) 깊숙히 들어가 회중을 만들었다. 일본은 1630년 이래 그리스도교에 대해 폐쇄적이었으나, 1859년 재개방 이후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일본 그리스도 교회들을 창설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중앙·남아메리카에 개신교를 소개하였다. 주요한 개신교 교파들(루터교·장로교·성공회·회중교회·침례교·감리교)은 모두 세계적 규모의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들의 조직체를 여러 나라의 극히 새로운 요구들을 충족시키도록 조정하는 데 상당한 긴장을 겪었다.


19세기 개신교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

19세기(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 비판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知的)인 것이다. 급속한 도시성장과 공업발전은 종교생활과 소원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였고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특히 유럽에서), 교회는 노동계급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사회질서의 보루라고 주장하였다.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의 일부는 무신론적이거나 최소한 이신론적이었으며, 교권과 왕권 사이의 동맹을 의심하는 만큼 독립교회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1818~83)와 같은 사회·경제 사상가들은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며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만족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그리스도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적어도 이론적으로) 노동자들이 사회적·경제적 정의를 누릴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들을 향해 양심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견해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관점과 이념은 정치적·신학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달랐다. 베를린의 왕실 설교자였던 아돌프 슈퇴커(1835~1909)는 반유대인적인 급진적 정치가였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킹슬리(1819~75)는 노동계급을 깊이 동정하고 이해했던 온정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인물은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1805~72)였다. 그는 1853년 추방당할 때까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신학자였으며, 그후 런던의 목회자로 있다가, 말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소수의 성공회 신학자들의 지적인 지도력 못지않게 노동자들의 종교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한 것은 개신교급진파, 특히 침례교와 원시감리교였다. 어떤 경우에는 이들의 노력으로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실제로 사회주의 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더라도 복지국가로 이끌어가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하였고,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 많이 의식하도록 교육하였다. 미국에서 사회복음은 19세기말에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회복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는 침례교회 월터 라우셴부쉬(1861~1918)였다.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자신의 이름에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많은 정당들이 나타난 데 반해,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세속적임을 표방한 정당들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의 개신교>

개신교의 흐름

1914~18년의 전쟁은 유럽이 자신의 문명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이미 쇠잔해진 자기만족의 환상을 깨뜨렸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약화시켰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한 정부가 1917년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리스도 교권 세계에는 새로운 부정적 압력이 가해졌으며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노동계급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개신교 교회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 하였다.

1933~4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은 유럽을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나치는 초기에 많은 독일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멸이 그 뒤를 이었다. 1933년 가을부터 교회문제(특히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아리안 조항)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고자 한 교인들과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서 교회문제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려던 교인들 사이에 당파적 분열이 일어났다. 국가의 보조를 받는 남부(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루터교 교회들의 지원에 힘입어 니묄러 그룹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형성할 수 있었다. 고백교회가 1934 5~6월에 바르멘 노회(老會)를 소집하면서 교단의 분열은 분명해졌다. 한동안 고백교회는 독일 전역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교회성 장관 한스 케를 휘하에 공리공론적인 성격이 적었던 교회 정부를 수립하자 고백교회는 이 정부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교회 정부는 나치 정부가 강제로 세운 것이므로 협력할 수 없다는 니묄러파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바트 왼하우젠 노회(1936. 2)에서 고백교회는 다시 분열되었으며 다시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후 특히 극단적 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확고히 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교회들은 점증하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말기에 일부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주교 테오필 부름은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한 지도자였다. 하인리히 그뤼버 목사는 체포될 때까지 유대인들을 피난시키고 보호하는 뷔로 그뤼버(Büro Grüber)를 운영하였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 특히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군대는 동유럽을 장악하였으며 독일은 분단되었고 이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억압을 받았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발트3(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에서 소개(疏開)되거나 추방당했다. 루터교 공동체들은 그곳에 남아 있었으나 스탈린 통치하에서 특히 심한 박해를 받았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의 루터교도들과 헝가리의 개혁파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덜 받았지만, 그 수효는 크게 줄었다.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트카의 지도를 받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개신교도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더 많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신교에 가장 큰 손실은 독일 분단이었다.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예전에 독일어권이었고 대부분 루터교가 성했던 넓은 지역이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독일인 약 800만 명이 추방당했다. 1945년에 구성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 비텐베르크와 개신교의 고향이 되는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동독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대부분 개신교도들(70%)인 주민들을 통치한 유일한 국가였다. 한동안 루터 교회는 동독과 서독 사이의 주요연결고리였다. 루터 교회의 연례모임인 '교회의 날'(Kirchentag)은 잃어버린 독일 통일의 유일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으로써 동독 교회들은 고립되었다. 자금·교육·교회건축 등과 관련된 정부의 압력, 민족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형태의 청년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개신교도들은 용감하게 활동하였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1967 1031일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식은 개신교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 이전만 해도 철저한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혁명 이후 40년 동안 침례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침례교 조직의 유연성과 단순성은 대처하기 어려운 법적 조건 아래서도 적절히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침례교 공동체들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몇 년 동안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60년 이후 다시 예전과 같은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물질적 손실과 1947년 이후 영국의 종말은 과거 영국이 지배하던 지역들의 개신교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더 이상 해외 교회들에 과거와 똑같은 규모로 자금과 인적 자원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교회 정부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에서는 영국의 지위가 변화됨으로써 그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던 지도력의 변화과정이 촉진되었다. 부족한 재정 및 인력자원의 일부는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보충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더 이상 유럽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과거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비롯된 조급함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는 이른바 젊은 교회들이 세계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점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기술발전 시대의 세속화 추세는 낡은 유럽 교회들을 공격하였으며, 젊은 교회들이 목회활동을 펼치는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개신교, 이를테면 서남아프리카나 나미비아의 루터교와 남아프리카의 성공회를 비롯해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손실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지역의 개종자와 인구 성장은 개신교 교회의 범위와 기질을 변화시켰고 그 규모도 증가하였다.

개신교의 종말이 예견되었던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도 개신교는 놀랍게도 살아 남아 다시 등장하였다. 1948~49년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결정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1년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유럽인 선교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국 교회는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교회는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으며,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른바 문화혁명 시기에 더 심했다. 중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고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 중국이 서방을 향해 부분적으로 다시 개방하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는 신중한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 개신교도들과 서방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개신교도들과 그밖의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 20년 동안 가혹한 억압과 박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계 교회들 가운데서 생동적인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운동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토대도 부분적으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 운동들에 가담한 모든 구성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진보적이고 왕성한 신앙표현은 보다 급진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가운데 3가지 주요운동들은 보통 오순절운동·근본주의·복음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오순절운동은 개신교가 역사적 본거지인 유럽을 넘어서서 확산하는 데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순절운동

이 운동은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서 웨슬리파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1년 캔자스의 토피카와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 운동을 특징짓는 다양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운동의 핵심은 '방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억제없이 하는 말의 형태이다. 그들이 말하거나 노래하는 음절들은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첫 오순절 때의 예수의 제자들처럼 인식가능한 외국어로 말한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이 운동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오순절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2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도 하며 예언도 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적적인 치유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치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오순절운동은 '성서의 띠'인 남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촌의 가난한 백인들이나 도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느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등 급속하게 성장한 교파들을 통하여 가장 가시적인 형태의 개신교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점차 중간계층에게로 수용되었다. 1960년 이후 오순절운동은 성공회·루터교·장로교와 같은 그리스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회로 확산되었으며, 이 교회들에서 오순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은사운동'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오순절운동은 카리브 연안, 남아메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지역에서는 수많은 예언 운동들이 분출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은 감성적 형태의 예배와 치유활동을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오순절운동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이 지역국가들에서 민중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다.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룬 토대 위에 집을 지은 오순절운동가들은 일부 해방운동들과는 달리 반미적이거나 반유럽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고 '피안'(彼岸)을 강조하여 정치를 회피하거나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

2번째 주요운동인 근본주의는 19세기 후반 '전천년왕국설'(前千年王國說)과 성서무류성을 다소 합리주의적으로 변호한 사상을 서로 결합시켰다. 이 운동의 이름은 191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소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미국에 있던 교파간의 분쟁 때 형식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9~20년에 공식인정을 받았다.

근본주의가 발흥하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되어 보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에 수용된 일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두 운동이 침례교와 장로교 북부 지회의 신학교와 사무국, 선교부, 설교단들을 전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본주의의 대가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설을 부인하고〈창세기〉의 기사가 과학적이라고 옹호하였던 1925년 스코프스 재판은 침례교와 장로교 간의 교파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투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성서학교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판사업은 살아 남았다. 1940년대 초반에 그들은 재결집하여 서로 경쟁력 있는 몇 개의 근본주의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체들은 추종자들을 얻었고, 남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사기도 드높아지면서 분명한 자기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수동적이던 정치적 태도를 버리고 개방적 참여로 특히 1980년과 1984년에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유세를 지원하여 방향을 바꾸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적 복음전도자 제리 폴웰이 창설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같은 집단들은 텔레비전 전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 역량을 모아 낙태반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을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이상과 강력한 국방예산을 지지하였다.

복음주의

수십 년 동안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인물들의 목회와 〈크리스천 투데이〉 등의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이 집단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예수의 육체부활 등의 주요교리에서는 근본주의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서 무류설을 주장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점차 그것이 과연 성서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근본주의가 강조하는 전천년왕국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보다 온건했다. 그들은 그 본질상으로는 고전적인 형태의 근본주의자들과 같았지만 그 스타일은 달랐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종파화되었으며 무례하고 남을 몰아세우며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942년 복음주의자들이 전국복음주의협의회를 세웠을 때, 그들은 그들이 중도파와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했던 것만큼 근본주의 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좋은 태도를 지닌 근본주의자들로 보기보다는 19세기 개신교의 주류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보기를 더 좋아했다.

이를 위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점차 문화·사회·정치 세계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교를 짓는 대신 자유로운 인문대학을 지원하였고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심지어 급진적인 정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보수적인 개신교가 군국주의 및 자유 분방한 자본주의와 스스로를 지나치게 일치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또한 미국과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경향을 띠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 지도자들과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강단에 서는 것을 환영하였으며, 근본주의자들이 기피했던 여러 종파의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운동가들이 제3세계에서 동반자를 구했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국제 운동들을 형성하고 많은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들 자신의 교회에 칩거하는 데 반해, 수백만 복음주의자들은 주류를 이루는 교파들과 지속적인 연관을 맺으며 점차 완전한 주류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독특한 교리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하는 열정을 생동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신교 내의 신학운동

개신교 신학 전통 안에는 모종의 반작용도 관찰된다. 이러한 반동은 부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에 대해 전반적인 의문이 제기된 데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후대의 발전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사회관을 정립하고자 했던 나치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인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한계로 축소시키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감정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맹렬히 비판한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운동의 최초 회원들, 전통 복음파, 성서의 무류한 말씀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근본주의자들로 지칭된 많은 사람 등을 포함한 모든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똑같은 이유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진영 안에서도 반작용이 일어났다. 1918년부터 바젤의 카를 바르트와 취리히의 에밀 브루너는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모든 신학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이 신학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사유(思惟)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성서의 참된 지상권(至上權)을 재주창하고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리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에서 라인홀드 니부어는 사회와 인간에게 적용된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철학만큼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옛 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마르부르크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미친 영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핵심 진리를 드러내고 신앙에 대한 〈신약성서〉의 의의를 보다 완벽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를 시도하였다.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파울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들은 유럽의 사태 발전을 미국인들에게 해석해주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발언한 위대한 신학자들의 세대를 넘어서 지속되지 못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개신교 신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위르겐 몰트만 같은 몇몇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요소들을 취하여 이들을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혹은 '해방신학 ' 등 다양한 운동과 결합시키기는 하였지만, 이제 유럽은 새로운 신학운동의 주도권을 잃었고, 하느님이 억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는 사실의 증언을 강조하는 제3세계 신학자들과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미국의 여성·흑인 신학자들은 과거의 강단신학에 내장되어 있었던 가부장주의·엘리트주의·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해방신학을 채택하고 있는 운동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운동들은 개신교 사상을 특수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접근법은 문화적 상황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는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신학·흑인신학을 등장시켰다. 이들 신학에서는 성서해석이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집단이 갖고 있는 '전이해'(preunderstanding)에 의해 착색된다고 생각되었다. 또 하나의 접근법은 '이야기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추상적인 신학에서 사람 중심의 구체적 이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오순절운동과 근본주의의 발흥은 개신교 전반에 걸쳐 성령론과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다.

에큐메니컬 운동

이 운동은(비록 동방정교회가 곧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본래 개신교의 운동이었으며, 초기에는 개신교 사고가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주로 ① 세계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발전과 인구이동으로 여러 교파들이 전례없이 뒤섞이게 된 점, ② 전통적인 교파들의 세계적 확산, ③ 미국 내 종교의 다양성과 이와 같은 다양성에서 비롯된 문제점, ④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교회들과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사가 아닌 유럽 역사의 사건에서 비롯된 장벽들에 대한 경멸 등에서 비롯되었다. 선교활동들은 항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의 감리교 선교지도자 존 R. 모트는 선교여행을 통해 다양하고 전반적인 노력들을 단일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선교를 향한 열정과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소망을 대표한 사람이었다. 1910년 에든버러 대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효시인 세계선교대회였다. 이 대회로부터 구체적인 생활태도와 사업문제를 다루는 협의회(스웨덴 루터교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이 지도),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차이를 호의적인 태도로 검토하는 신앙과 직제(職制) 협의회가 발기되었다. 초창기에 로마 가톨릭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고 동방정교회도 서방 디아스포라 유배 이후에야 참여하였다. 나치 정권은 독일인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를 계속 허용하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새로운 분위기가 나타났고 194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대부분의 자금과 상당부분의 추진력을 미국 사람들에게 의존했으나 본부는 제네바에 두었고 초대 총무인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행정가 W.A. 비서트 호프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이 성공하려면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하도록 이끌었다. 1958년 요한네스 23세가 교황이 된 후 마침내 로마 가톨릭교도들도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규정들이 대부분 개신교도들에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규정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으며, 16세기에 쌓여진 가장 높은 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던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신교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교의·예배·조직 : 종교 개혁자들과 그 후계자들의 공통된 원리와 관행>

신앙의인(信仰義認)

개신교 지도자들은'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즉 신앙의인)는 개신교의 가르침이 개신교를 당시 로마 가톨릭과 구별해준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은 개신교 역사 전반에 걸쳐서 개신교의 핵심이 되어왔다. 교단들마다 약간의 변용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은 쉽게 분간할 수 있다.

개혁자들 눈에 새로운 상황은 자유의 상황이었다. 가톨릭교도들은 스스로 충분한 공로를 쌓고 선행을 하였는지, 또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를 기쁘게 했는지를 두려워한 데 반해, 개혁자들의 견해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 귀찮은 질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죄와 죽음,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였다거나 최소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했다는 믿음과 짝을 이루는 교만, 곧 사람을 노예화하는 교만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개혁자들에게 그들의 적인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항상 지적하는 심각한 문제를 남겨주었다. , 의인(義認)과 자유에 대해 그렇게 가르친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성서의 가르침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공관복음서(마태·마가·루가)에 따르면, 예수 자신은 언제나 사람들을 더 선하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바울로 조차도 이러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운동은 인간 존재를 공로와 선행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선행에 대한 관심을 경솔히 취급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개신교 문헌들은 많다.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사실상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선행은 하느님의 위로나 구원의 위로를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용서받은 마음에서 나오고 항상 의롭다 인정받는 사람의 삶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존재가 걸어가는 구원의 길이나 하느님에게 이르는 일종의 장애물 또는 도로 표시로 이용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모자람을 재고 그것을 심판한다. 복음을 통해 활동하는 은혜로운 하느님은 인간 존재를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을 주장하면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평등함을 인정했지만, 그들이 평신도의 역할을 명확히 밝히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평신도들은 공중 예배에서 설교자가 될 수 없으며, 성사의 집행도 성직자들의 수중에 맡겨져 있다. 설교자가 성서해석에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함으로써 개신교도들은 평신도들의 완전한 참여를 희생시키고 목회자 안수를 받으려면 일정과목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정했다. 그렇지만 개신교도들의 이러한 견해는 중세 가톨릭과 비교해볼 때 평신도들의 신학적인 지위와 실제적인 지위를 크게 드높였다.

말씀의 권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가르침과 모든 신자가 곧 사제라는 가르침은 권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들은 누구도 은혜의 체계 안에서 위계질서를 독점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권위적인 체계가 무너짐으로써 개신교에는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개신교는 이를 서둘러 채워야 했다. 개신교 운동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여기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곧 무정부상태나 훈련부재를 선호했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자들은 즉각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에서 행사되어야 할 권위의 범위를 정하는 일과 교회구축을 시작했다. 그들은 최종적인 권위가 하느님의 말씀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성서와 나란히 두는 경향이 있었다. 개신교 운동을 위해 권위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필요는 성서에 관한 이해를 높였으며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재발견은 개신교 운동의 일차적인 동인(動因)으로 간주된다.

교회의 계속적인 개혁

개신교 교회는 교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규범이 되는 성서에 의해 심판받고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에 근거하며 교회 교부들과 공의회들을 비판적으로 긍정하고 전통적인 교회법의 법전들을 거부한다는 점, 그리고 계속 개혁의 원리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주의와는 크게 달랐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일단 종교개혁을 완수한 다음에는 그들의 지위와 규정을 위태롭게 하는 종교개혁의 확산을 거부하였지만,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은,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고 언제나 계속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생각을 강조해왔다.


<개신교가 근대세계에 미친 영향>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

마침내 개신교는 북서 유럽과 영국, 아메리카 대륙 영어권에서 주류가 되는 신조가 되었다. 19세기의 거대한 개신교 선교운동을 통하여 개신교는 이 지역들로부터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개신교는 소수파로 존재했던 로마 가톨릭과 만났으며 이와 동시에 가톨릭이 주류인 남아메리카에도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개신교를 북대서양 국가들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국가들에서는 '독립'교회들이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이후의 개신교 자유교회들이 수세기 동안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가 근대 민족주의에 공헌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미 종교개혁 시대에 해체되고 있다가 1806년에 최종적으로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종식을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세력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낡은 그리스도교 세계(corpus Christianum)는 생존할 수 없었고 개신교의 존재는 하나의 수장(首長) 아래 있는 국제적이고 초지역적인 통합된 그리스도교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문맹을 퇴치하고 각국어에 대한 존중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개신교는 라틴어를 매개로 한 낡은 그리스도교의 언어적 유대를 없애고 나라마다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급진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현존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개신교도들은 자기의식에 도달한 각각의 새로운 국가들에게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제공할 때가 많았는데, 프로이센과 미국의 경우가 그 예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관심

20세기에는 지난 3세기 반의 세월에서보다 합의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이 많았다. 오늘날 에큐매니컬 운동은 철저하게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가톨릭을 망라한 외양을 띠고 있지만, 처음에는 교회의 선교가 경쟁과 분열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개신교 토대 위에서 탄생하였다. 널리 알려진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폭풍우에 휩싸인 양떼처럼 포위당하고 서로 엉켜 있었던 그들은 서로간의 교제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현대의 교통 및 통신 기술은 세계의 거리를 좁혔고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합을 가능하게 했다. 신학의 재발견은 에큐메니컬 시대에 공동선언과 때로는 공동행동을 위해 개신교의 열정을 창출하여야한다는 새로운 인식과 융합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파적인 노선과 초교파적인 노선 모두에서 교파 연합과 공의회적 조직을 결성하게 하였다.

그동안 교황 요한네스 23(1881~1963)의 경우가 예시하는 바와 같은 로마 가톨릭의 개방은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친교와 일치를 가져왔다. 16세기의 적대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은 채 갈등관계에 있던 두 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들의 경계를 넘어서서 만남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의 가톨릭 성서 주석가들은 개신교가 은혜와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또한 개신교는 교회의 구성요소가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가톨릭의 견해를 새로운 각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개신교도들은 성서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전통은 성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에 새삼스러운 공감을 표하고 있다. 개신교도들과 동방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은 대체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세계교회협의회 같은 기구와 조직체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하반기에 이르러 개신교의 상속자들, 특히 철학적 신학자인 파울 틸리히는 '개신교 시대의 종언' 혹은 '개신교 이후' 시대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물론 그들 모두가 개신교의 일반적인 증언에 대한 신념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틸리히는 예언자적 비판의 '개신교 원리'가 교회생활을 참되게 표현하는 모든 것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세속의 참된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상가들은 개신교가 그 역사적 뿌리를 두는 유럽에서 문화를 지배하는 경향은 쇠퇴하고 있다고 믿었다.

개신교 신봉자들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줄곧, 그리고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그들의 사상 세계가 여러 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공업주의와 도시화가 발흥하였던 19세기에, 급변하는 세계는 전통적인 개신교에 의해 형성되었던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편, 개신교의 영토에서 성장한 특정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개신교의 근본적인 신념들에 도전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스스로 '신을 죽인 사람들'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3명의 예를 들어 본다면, 경제이론가 카를 마르크스, 진화론자 찰스 다윈, 철학적 허무주의자 프리드리히 니체 등이다. 개신교 경험에 정통했던 이들은 이를 무기로 사용하여 그들의 견해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개신교는 탈식민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세계에서 '외국 선교'에 근거한 팽창을 도모할 수 있는가에 대해 불확실성에 빠져들었다. ()그리스도교 종교들의 가치에 대한 현대적 평가로 인해 많은 개신교도들은 팽창 위주의 개신교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을 멸절시키거나 배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이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전체주의 세력들 특히 나치 독일은 개신교가 강조하는 내용 일부를 흡수하여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이를 변화시켰거나 억압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하였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현대생활의 매력, 세속화, 신앙의 위기는 개신교를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만들었고 교인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현상은 19세기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에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영국에서 나타났다. 그결과 스칸디나비아와 영국에서처럼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개신교 공교회의 세례 교인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극소수가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계율과 명령에 응답을 보일 뿐이었다. 교회 출석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지를 개신교의 재산으로 보는 사람들도 개신교의 교의가 더이상 신앙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과 연합하고 있다. 개신교의 분열은 더이상 서구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않으며, 개신교시대의 종언을 공표할 뿐이다.

한편 개신교는 서구 문화의 많은 요소들과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개신교는 주기적으로 밀물과 썰물, 재생과 쇠퇴를 경험해왔으며 지금은 보다 오랜 기간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서구적인 지방주의를 무심코 드러내 전반적인 흐름을 잘못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개신교의 쇠퇴를 예견하게 하는 모든 현상에도 불구하고 다음 2가지 긍정적인 세력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세력이다. 오순절운동·복음주의·근본주의가 그것이다. 이 운동들의 선조들은 세상을 부정하고 종파적이며 은둔적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주변문화를 나름대로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형태로 일을 하고 있고 또 일을 시작하고 있다.

개신교의 쇠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세력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개신교의 성장이다. 이 새로운 개신교 교회들의 일부는 주로 선교사들이 소개한 형태와 거의 무관한 토착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개신교의 판에 박힌 서구적 토대를 훨씬 뛰어넘는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J. C. Godbey | 姜元敦 참조집필

한국의 개신교

한국 개신교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K.F.A.귀츨라프, A. 윌리엄슨, R.J. 토머스와 같은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들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번역과 배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 개신교의 한국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에 왔던 J. 로스는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예수강셰일쳔 십칠년〉이 번역되었고, 1887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발간되었다. 이들 성서 번역자를 권서인(勸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활동과 한글 성서를 통한 한국인들의 개신교 수용으로 인하여 1884년 봄에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지금의 소래)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성서의 한글 번역에 공헌한 또다른 사람은 개화파 지식인인 이수정(李樹廷)이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883년 입교한 후, 성서 번역을 시작하여 1885년 요코하마[橫浜]에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출간하였다. 바로 이〈마가의 복음서〉를 가지고 H.G. 언더우드는 H.G. 아펜젤러와 함께 1885 4 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에 온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여 각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장로교의 경우 미국의 남장로회와 북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등 4개 선교부에서, 감리교의 경우 미국의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2개 선교부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침례교는1889, 성공회는 1891, 안식교회는 1904, 성결교는 1907,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정책은 각각의 선교부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감리교는 주로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으며, 장로교는 교회의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수행했다. 장로교의 선교정책은 '네비어스 선교정책'(Nevius Method)으로 알려졌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 등의 3대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구세군은 자선과 사회사업에 치중하였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에 관심을 쏟았다. 교파에 따른 독특한 선교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부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앞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선교활동의 초기 단계에서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개신교가 천주교(天主敎)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천주교가 전교 초기부터 심한 교난(敎難)을 겪었음을 감안하여 처음부터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선교사들이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성장에 끼친 공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기록 속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언급되고 있는 수많은 전도인·권서인·전도부인 등 초기 개척자들의 영향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초기 개척자들에 의하여 그 기틀이 형성되어간 초기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과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목표를 가지고 입교하였으며,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또한 1895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1896 9월 고종탄신일 축하예배 등을 통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제는 한국 개신교를 침략의 걸림돌로 지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탄압을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국가의 비운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물리적인 힘의 저항보다는 신앙적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07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해 1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행한 사경회(査經會) 기간 중 절정에 달한 이 운동은 1903년 이후 계속되어 온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운동은 원산의 전계은(全啓殷), 정춘수(鄭春洙), R.A. 하디,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등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 개신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한국 개신교가 신앙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공동체의식이 구체화되었다. 특히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간의 이해가 크게 증진되었다. 셋째, 부흥사경회를 통해 개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은 한국 개신교와 교인의 도덕성 회복에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성서공부와 기도가 더욱 고양되어 이와 같은 운동은 교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05년에는 321개였던 교회가 1907년에는 642개로 늘어났으며, 9,761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 또한 1 8,964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대부흥운동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운동이 끼친 가장 큰 역기능으로는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非政治化)와 몰역사성의 문제로 당시 한민족의 아픔을 종교적 차원에서 희석시켰다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한국 개신교의 비정치화 경향과는 달리 일부 한국 개신교인들은 초기부터 계속되어온 민족운동의 전통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 시기의 한국 개신교의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105인 사건'이었는데 이로 인해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薰) 등 개신교계와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시적으로 교세가 위축되기도 했지만, 많은 일반 개신교인이 고초를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교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개신교인의 민족의식 고양은 때로 무장투쟁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안중근(安重根)·이재명(李在明)·장인환(張仁煥)·안명근(安明根)·이동휘(李東輝)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개신교의 독립운동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해외에서도 전개되었다.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다른 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에 있어서 한국의 종교계가 차지했던 비중은 상당했다. 그중에서도 천도교와 그리스도교가 보다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말까지의 3·1운동 관계 피검자 1 9,523명 가운데 2,297명이 천도교인이었으며. 3,426명이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교인의 참여 비율이 높았던 만큼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또한 극심했다. 일제의 물리적 탄압이 교회의 양적인 피해와 기능의 마비를 가져왔다면, 일제의 회유책은 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정신적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3·1운동 이후 한국 개신교의 신앙형태는 크게 2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김익두(金益斗)·길선주·이용도(李龍道)와 같은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 초월적·신비주의적 신앙형태와,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강화한다는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형태가 그것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사회참여 전통은 사회와 농촌운동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5년 장감연합협의회(長監聯合協議會)는 협의회 안에 사회부를 설치하여 사회운동에 착수했다. 농촌운동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9년 이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YMCA·YWCA의 연합으로 27개 지역에 농촌강습소가 개설되었다. 이밖에도 1923년 결성된 기독교여자절제회는 금주단연운동(禁酒斷煙運動)과 폐창운동(廢娼運動)을 벌였으며, 구세군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1920년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 개신교의 연합운동 필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대응 다변화를 가져와 교회 안에서 분파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교신(金敎臣)을 중심으로 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이용도를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 최태용(崔泰瑢)을 중심으로 한 복음교회 등이었다.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표면적으로나마 완화된 정책을 보였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강압적 통치정책으로 선회했다.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은 한국 개신교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한국 개신교는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의 형식이라는 명분 아래 각 교단별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교단적 차원의 이러한 굴복과는 달리 몇몇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벌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로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있었다. 그가 시무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결과 신학교가 폐쇄되고 수많은 교인들이 투옥되었으며, 50여 명의 교역자들이 순교했다. 일제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1942년 언더우드를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조선예수연합공의회가 해산당했다. 1940년에는 침례교가, 19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가 폐쇄되는 등 한국 개신교는 실질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마침내 한국 개신교는 1945 7 19일 일제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8·15해방 직후 한국 개신교는 일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교회의 재건을 도모했다.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6·25전쟁으로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민족분열의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교회분열이라는 한계를 노출했다. 6·25전쟁중인 1951년 장로교의 고려파(高麗派), 1953년에는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감리교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총리원파와 호헌파가 분립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분열은 전통교회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켜 소종파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박태선(朴泰善)이 주도한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로 개칭)와 문선명(文善明)이 주도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나운몽(羅運夢)의 용문산기도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분열과 소종파운동,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직면한 한국 개신교는 심각한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한국 개신교는 분열극복의 신학을 정립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벌였다. 에큐메니컬 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1966 3 8일 장로교의 초동교회(草洞敎會)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합동예배가 있었다. 1971년 부활절을 기하여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신약성서〉가 출간되었으며, 1977년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신학교육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1964 4월 연합기관의 성격을 띤 연합신학대학원이 연세대학교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일치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 개신교는 또 한번의 분열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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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미국인 사업가가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어부 한 명을 만나 말을 걸었다.

      "이것들을 잡는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많이 안 걸렸소."

      "그럼 더 많이 잡았을 수도 있었겠군요.
      더 많이 잡으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지 않아요?"

      "뭐, 가족들 먹을 정도랑 친구들 나눠줄 정도만 있으면 되는걸."

      "그럼 남는 시간에는 뭐 하시는데요?"

      "낮잠 좀 자고, 아이들과도 좀 놀고,
      아내와 얘기도 하고, 뭐 그런다오.
      저녁에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포도주도 한 잔 하고, 기타도 치고, 뭐 그러고 보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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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을 듣자 미국인 사업가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미국의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제가 아저씨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저씨가 잡은 물고기를 소비자에게 직접 팔아서 나중에
      통조림 공장을 열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저씨는 생산에서 가공, 유통까지 이르는
      모든 과정을 손에 넣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멕시코 전 지역은 물론 전세계로 수출도 할 수도 있지요."

      "음... 그렇게 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한 10년에서 15년 정도면 됩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우?"

      그러자 미국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매년 수백만 달러를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겁니다."

      "수백만 달러?
      수백만 달러를 갖게 되면 그 다음에는 뭘 하면 되우?"

      "그 다음에는 은퇴해서 작은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지은 다음
      낮잠 좀 자고, 아이들과도 좀 놀고,
      아내와도 얘기하고, 뭐 그러다가
      저녁에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포도주도 한 잔 하고, 기타도 치고, 뭐 그러고 보내는 거죠."

      마지막으로 어부가 사업가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잖소!"



2015년 현재 미국에는

모두 59개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의 수는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국립공원이 가장 많은 주는 어디일까요?

그곳은 바로 아웃도어의 천국인 캘리포니아입니다.


캘리포니아에는

모두 9개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유타에는 5개

애리조나엔 3개 뿐인 것을 감안한다면

캘리에 9개가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숫자이지요.


캘리의 국립공원 가운데

천의 얼굴을 가진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데쓰 밸리일 것입니다.


캘리에 사는

여행 좀 한다는 사람 치고

데쓰 밸리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쓰 밸리의

국립공원 지역에 속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인근에 있는 특이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트로나 피너클스(Trona Pinnacle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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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트로나 피너클스는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피너클스 국립공원과는 다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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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름의 유사성에 알 수 있듯이

두 곳은 서로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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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이 있다면

피너클스 국립공원은

피너클(뾰족한 봉우리)이 산에 있는 반면에


트로나 피너클스의 피너클은

평원 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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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나 피너클스는

캘리에서 데쓰 밸리와 더불어

지질학적, 혹은 지형학적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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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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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지구가 아닌 화성이나

다른 행성같은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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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정한 부분은

마치 모뉴먼트 밸리와 닮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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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나 피너클스는

지구가 처음 생겨나던 때부터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라면, 언제부터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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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학문에

다양한 주장과 견해가 있듯이


지질학도 예외는 아니라서

모든 지층과 지형의 형성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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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느 견해가

다른 견해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다수가 따랐던 학설이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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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까지

다수에 의해서 틀렸다고 여겨진 견해가

다시금 득세하는 일들이 지질학계에서 자주 벌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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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트로나 피너클스의 형성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위해 그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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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쓰 밸리의

Bad Water가 그랬듯이

이곳도 한 때는 거대한 호수지역이었습니다.


모하비 사막 일원의

거대한 호수였던 Searles Lake의 일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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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les Lake은

Endorheic Lake 이었습니다.


Endorheic 호수란,

분지처럼 지역 자체가 낮거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곳이라서


흘러 들어온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호수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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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예전에 호수였을 때,


땅 아래는

지금의 Salton Sea와 같이

부글 부글 끓는 Hot Springs 지역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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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les Lake은

탄산염으로 축적되어 있었는데


땅아래의 끓는 물들이

호수 아래층의 갈라진 틈을 통하여

위로 올라오면서 칼슘과 결합하여 Tufa를 만들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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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Tufa 들은

이곳이 아직 호수였을 때

물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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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지구의 기후가 변화되기 시작했고,


거대한 호수였던

Searles Lake은


데쓰 밸리의

Lake Manly처럼

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Tufa가 드러나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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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fa의 형성과정이

모노 레익(Mono Lake)의 그것과 비슷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모노 레익은 지금도

여전히 물이 있는 호수인 반면에


트로나 피너클스가 있는

Searles Lake은 물이 완전히 말라버린 dry lake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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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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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사막과도 같은 이곳에

이런 야생화가 핀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위의 사진은

트로나 피너클스에서 만난

five spot 이라는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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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오묘한 솜씨가 아니라면


화성같이 삭막한 이곳에

이처럼 아름다운 야생화를 피워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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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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