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의 상징은 단연 ‘이스터 버니’, 혹은 ‘이스터 에그’ 라고 할 수 있다. 토끼와 계란이다. 그런데 토끼는 다산의 상징으로 보는 이방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계란도 마찬가지다. 이방종교에서 비롯된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 부활절 계란을 만들고 토끼로 부활절을 장식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라고 험하게 꾸짖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이교도들의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12월 25일은 조로아스터교나 로마인들이 태양신을 맞이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우리가 12월 25일을 예수님 탄생일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지만 동방교회는 그게 아니라고 한다.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이러다보니 정확한 성탄일은 바로 이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에 불과한 셈이다.

부활절도 그렇다. 영어로 Easter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말은 지중해지방의 봄의 여신 에아스트레(Eastre)란 말이 토착화되어 탄생된 말이다. 크리스마스는 고대중근동 지방의 동지축제, 부활절은 춘분축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봐도 기독교가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 시대와 지역의 풍습을 하나 둘씩 흡수하면서 생겨났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해 진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짜가 성경에 적혀 있는가? 아니다. 빈 무덤을 처음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감격의 날 잠들기 전에 자신의 일기장에 날짜를 적어두었으면 얼마나 확실했을까? 그러나 그런 일기장이 존재한다 해도 아마 지금까지 보존되었을리도 없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언제 탄생하셨다는 공인된 출생신고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헤롯대왕의 심술 때문에 불이나케 도망가기 바빴을 숨막히는 순간이 뒤따르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을 없애야 된다고 주장할텐가? 그럼 생각해 보자. 성경에 추수감사절이 존재하는가? 교회절기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추수감사절이 성경엔 존재하지 않는다. 추수감사절은 Made in USA 절기이므로 우리 한국식으로 하면 추석에 맞춰 감사절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성경, 성경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럼 성경에도 없는 추석 명절을 기독교 절기로 지키겠다고?

비록 오리진은 이방종교, 이교도들에게서 비롯되었다할지라도 우리의 것으로 자리 잡은 기독교 전통은 무수하게 많다.

아일랜드의 성자 세인트 패트릭은 당시 원주민 이교도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상징인 동그라미 원을 십자가에 오버랩을 시킨 후 그것을 보여주며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영원성을 설명했다. 그 십자가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켈틱 십자가의 기원이다. 무엄하게 태양신의 상징인 동그라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오염시키느냐고 덤벼들 일인가? 그런 식의 토착화를 통해 아일랜드는 마침내 태양신을 버리고 오히려 기독교 국가로 회개(?)하는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성경에는 예수님 출생의 날짜도, 부활의 날짜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없으면 무조건 폐기해야 한다고 억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형성된 고귀한 문화와 전통을 성경에 없다는 구실 하나로 폐기시켜 마땅하다고 억지 부리는 행위를 마치 진리의 수호 행위인양 착각하지 말자.

성경에 장로 장립식이 있는가? 성경에 교회 창립기념일은 있는가? 성경에 심령부흥회는 있는가? 성경에 없는 것을 빼고 또 빼고 나면 남는 건 아마 문자주의의 앙상한 뼈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까지 오르시는 비아 돌로로사에서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직업은 계란장수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계란이 모두 무지개 빛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말도 있다. 그런 전통마저 소중하게 간직하며 부활절을 맞는 자세가 더 부활절답다.

성경에 없다고 부활절에서 토끼와 계란을 추방시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나 이방종교에서 비롯된 상징이라고 겁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일 필요는 없다.

참으로 중요한 부활절의 에끼스는 주님이 부활하셨으므로 나도 부활이 가능해졌다는 영생 선포식이다. 주님의 부활에서 인류 역사는 터닝포인트를 만난 것이다. 토끼나 계란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래도 우리의 크리스천 조상들이 즐겨온 부활절 상징이었으니 버리지 말고 즐겨보자. 백악관에서도 즐기는 부활절 계란 찾기(Easter Egg Hunt)도 해보고 부활절 계란 바구니도, 계란 콘테스트도 열어보자.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아아! 이 세상에 거칠 것이 무엇인가! 우리 모두 해피 이스터. . . .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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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외우는 목사님들 / 박신 목사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7,38)


동네 어린이들이 모이면 매번 싸우는 논제가 있습니다. 누구 아버지가 더 세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 상상력의 범위 안에서 아빠들이 다들 갑자기 슈퍼맨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 아빠는 나에게 장난감 권총을 사줄 수 있다고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이 게임기, 컴퓨터, 자전거, 식으로 더 큰 것으로 올라가다가 마지막에는 자동차, 즉 최고 큰 것을 말한 자가 이깁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럼 실제로 증명해 보라고 물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러겠다고 큰 소리 치고는 집으로 돌아와 아빠를 조릅니다. 그러나 아빠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어떻게 해 줄 생각을 전혀 않습니다. 아이 생각에는 분명히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데도 안 그러니 이해가 안 되면서 화도 치밉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고 수태고지를 했습니다. 정혼만 했지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 마리아로선 당연히 당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가 성령의 권능이 네게 임할 것이며 또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불임의 몸이지만 같은 권능으로 아들을 가진 것을 보고 믿으라고 권면하자 그녀는 수긍하고 그 고지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마리아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중에 좀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은 것은 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식 아니 상식으로 불신자마저 압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불신자가 신자보다 더 믿음이 나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온갖 차지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 빌어봐야 다 주지는, 특별히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잘 주지 않는다고 이미 알고 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무엇이든 해주지 않으면 당장 하나님을 의심하고 짜증내며 원망마저 합니다. 아버지가 해줄 수는 있지만 당신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 안 해주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동네에서 폼이나 잡으려는 아이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마리아도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분명 이뤄질 줄 믿었지 말씀하지 않은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구세주를 자기 몸에서 태어나게 해야지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상상 임신하듯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지목하였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분명한 뜻을 확신하여 그 뜻에 자기를 바쳤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뤄준다는 것이 신자는 그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말 한마디로 도깨비 방망이 뚝딱하듯 해치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선 손 안대고 코 풀려고 무조건 믿고 보자는 맹신이나, 자기 소원을 삼십 배 육십 배 대박으로 키워서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는 사행심을 두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전부를 걸고 믿으라고 하니까 간혹 죽기 살기로 믿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전부를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는 데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키우는 것에만 겁니다. 그래서 잘 안 믿어지는데도 억지로 믿어 보려고 용쓰고 기도할 때도 “믿~?~니다!”만 연발합니다. 떡 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 스스로 정한 꿈이 이뤄질 때까지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동원해 목숨 걸고 믿어보려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것을 믿~?~니다!”라는 단순한 뜻이 결코 아닙니다. 처녀에게 동정녀 임신을 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심지어 남편과 부모마저 의심할 일이 이제 곧 일어날 것이라는 통보였습니다. 수태 기간 십 개월을 세상의 의심과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며 심하면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또 만약 큰 일이 없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남편 요셉과 그 일로 서로 의심하거나 다투지 않고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두고 “주의 계집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말로 그런 힘든 일들이, 최악의 경우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내게” 일어날지라도 담담히 받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생명을 맞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 내게 일어나서 세상에서 왕따가 되던 나아가 죽게 될지라도 하나님이 꼭 이루셔야 할 일이고 또 그 일에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다면 그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그 일에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기쁨이며 죽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그럼에도 그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우리 산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빌3:8,9 고후4:11)고 담대하게 선포했지 않습니까?  


신자는 자기 믿음에 전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에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직접 받은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이뤄지는 일에 자기의 모두를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받은 말씀도 없으면서 하나님은 무엇이든 이뤄주신다는 믿음만 어떻게 하든 키우는 종교적 수행만 평생에 걸쳐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안 믿어지거나 하나님도 안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불신자의 생각과 사실 같지 않습니까? 아니 불신자는 현명하게 미리 포기라도 했으니 신자가 더 못한 것 아닙니까?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외쳐야할 신앙상의 모토는 오직 하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가 아닙니다.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왜 신자가 마치 주문이나 염불 외우듯이 외워야 합니까? 그것도 대 예배 시간에 믿음이 좋다는 대표 기도하는 분들로부터 목사님까지 말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여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완전히 바보 병신이 되는 것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에게 어떻게 주문했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래도 따르겠느냐?)”(마8:20) 그런데 아기 예수는 어디에서 탄생했습니까?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예수님은 날 때부터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당신이 하실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 엄마도 세상에서 왕따가 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그 아들 예수는 아예 인류 역사상 최고 왕따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따르는 신자는 동네 아이들 중에서 최고 슈퍼맨을 아버지로 모신 골목대장처럼 되려고만 합니다.


아기 때부터 왕따였던 예수님을 그래도 동방박사와 들판의 목동들은 찾아와서 경배했습니다. 왜 그들만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이루신 것을 보기 원했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최초의 성탄절을 참 기쁨과 평강으로 누린 최초의 영광스런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적 신세 또한 슈퍼맨이 아니라 별로 볼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 존재, 삶, 일생 더 정확하게는 생명을 걸만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 있습니까? 모두 다 이방의 오지에 가서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의사는 의술로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고 가난한 사람을 고쳐주고, 사업가는 정당하게 돈을 벌어 풍성한 자비로 쓰며, 학자는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는 연구를 하고 또 그럴 후진을 올바르게 양성하며, 구멍가게 주인은 신용과 친절로 동네 사람을 섬기며 팔다 남은 빵으로 걸인과 노인들을 구제하며, 심지어 병실에만 누워 있는 중환자라도 주위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예수님이 아기 때부터 왕따로 와서 머리 둘 곳이 없이 33년을 지내다 마지막도 십자가에서 천하의 왕따로 죽으신 뜻을 증거하라는 말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왕따가 되어 심지어 목숨이 날아가도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 아니 헌신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죽자 살자 믿어서 안락하고 편하게 머리 둘 곳을 찾고 있습니까? 제대로 머리 둘 곳조차 없어도 예수의 생명만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면 평강하고 안락해집니까?

 

http://www.nosuchjesus.com


 

12/22/2006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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