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우호 목사의 방언 검증론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facebook)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실 공개적으로 책은 발간되지 않았지만(회원에게만 판매 됨), 그의 강의가 유투브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책 요약본이 페이스북에 돌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방언은사 부정론이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반대는 주로 은사중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은사중지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본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을 넘어선다. 방언의 은사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잘 몰라 잠시 착각하여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생각했었으나(고린도전서 12-14장)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린도후서 11장)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최근에 그의 책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를 입수해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방언을 검증하자는 그의 주장과 논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면밀히 분석해 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게다가 논리 또한 허점투성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과연 올바른 성서적 근거에 기인했는지 여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그의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그 사람은 체험이 없어서 엉터리 해석을 하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언은사 부정론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 교회에서 행하지는 방언은 100% 가짜다. 자신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의 은사를 검증해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본래 없었고,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였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해 본 결과 외국어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주장에는 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 왜곡된 지식과 편향된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언이 외국어라고?

노우호 목사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순환논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전제와 똑같다. 그는 자신이 전제하는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선언할 뿐, 바울의 편지글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통해 방언을 검증했다. 노 목사는 ‘방언’을 가리키는 ‘글로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지방어’이기 때문에 방언은 실제 언어인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글로사’의 의미를 일반 용법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헬라어에서 ‘글로사’의 기본 뜻은 ‘혀’다(막 7:33). 영어에서 모국어를 ‘mother tongue’이라고 하여 ‘언어’를 의미하듯이, 헬라어 ‘글로사’도 ‘언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행 2:11). 또 환유에 의해 이것이 ‘공통 언어를 쓰는 나라 혹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다(계 5:9). 바울이 ‘방언을 말하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 ‘글로사’는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10). 바울이 열거한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모두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고전 12:1, 7)을 의미한다. 그런데 학습이 가능한 외국어가 성령의 은사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또 바울이 설명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는 구절에서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님을 암시한다. 아울러 방언이 이성이 아닌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언을 통역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잘 아는 통역사가 아닌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어서 바울은 방언이 공적으로 행해졌을 때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고전 14:6-19), 인간의 언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외국인이 된다고 비유하는데(10-11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과 외국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외국어가 인간의 언어라면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방언을 외국어인가로 검증한다고?

위에서 본 대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면 노우호 목사가 방언을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검증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그는 37년 동안 방언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아닌 것으로 검증하느라 헛수고를 한 것이다. 방언의 진위 여부를 그것이 실제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엉뚱한 생각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 통역 은사의 목적이 방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의 은사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배 가운데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하는데, 그 조건은 그것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다(고전 14:5). 만약 통역이 되면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고전 14:13). 예언이 위로, 책망, 권면을 통해 듣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라면(고전 14:3), 방언도 통역을 통해 사람들을 세워 주는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목적은 예언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하라고 한 일이 없다. 만약 있다면,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올바로 신앙고백을 하는가에 해당할 것이다(고전 12:1-3).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9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는 영 분별의 은사다. 영 분별의 은사란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고전 12:7)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은사다. 다른 이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의 출처가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즉시 분별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첫 선교 여행지인 구브로에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자마자 보였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1)고 말했다. 바울이 바예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런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행 13:10). 그래서 혹 어떤 사람의 방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분별해 낼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녹음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 해석이 동일해야만 참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방언통역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의 주장 자체가 방언이 외국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실제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신자의 기도라면 통역의 범주는 그 기도 전체라기보다 그 사람의 위로와 책망과 권면의 필요에 따른 일부분이다. 또 통역의 은사 자체도 그것이 통역자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읽어도 다른 설교가 나오듯이, 같은 방언이라도 통역하는 사람의 언어와 신학으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제시하는 방언 검증의 원리로 제시된 사랑과 교회건덕(96-98)도 검증의 원리로써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따라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는데(고전 12:31), 그 전제는 그 은사가 진짜라는 것이다. 은사의 진위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고전 13:1-3). 바울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지, 사랑이 없이 사용되는 은사가 가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세운다고 했지 교회를 세운다고 하지 않았다(고전 14: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로 방언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또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 대한 분별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예배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이 그 예배 가운데 그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4:29).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노우호 목사의 주장 중 그가 매우 중점을 두는 것 중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실상을 잘 모르고 처음에는 은사로 인정했다가 후에 취소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0-12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 목사는 역사비평적방법론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실상을 알고 은사로 인정한 사실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하는가? 흥미롭게도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방언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구절은 두 절이다. 첫째,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해도 잘 용납한다는 것이요(고후 11:4), 둘째,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는 것이다. 노 목사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일꾼(그는 개역한글번역을 사용하여 “궤휼의 역꾼”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이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는 “궤휼의 역꾼”을 고린도교인 전체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교인 전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바울이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방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대한 그야말로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은 고린도교인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었다(고후 10:12, 18). 바울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이들을 바울의 반대자 혹은 대적자라고 부른다. 최근 발행된 한 신약개론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대적자들은 분명히 당시에 회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방문자들로서, 그들은 회중과 함께하는 바울 사역에 어떤 위협을 초래”했던 자들이다(I. Howard Marshall 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62. ).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자들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신약개론 책이나 고린도후서 주석 책 한 권만 읽어도 해결되는 문제를 노우호 목사는 말도 안 되게 풀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그친 것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에는 그쳤다고 말한다. 그는 표적이 나타날 때의 순간성과, 이 표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 나타날 필요성을 착각한 것 같다. 표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순간적이지만, 그 체험은 다른 곳에서 성령이 임할 때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다. 만일 노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에서 각각의 저자는 이러한 표적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썼다는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또한 성령이 임하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16:9-20) 저자는 예수 믿는 곳에 방언을 비롯한 여러 표적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고, 누가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사람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행 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엉뚱하다. 성서적 근거도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 비약도 심하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그가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얻은 신뢰일 것이다. 둘째, 그는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학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칼빈을 신봉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는 매 은사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투로 칼빈의 주장을 소개한다(70-83). 셋째, 그의 주장이 체험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약 성경 구절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번역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적, 나아가서 비평적 해석까지 곁들여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일정 부분 신뢰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 해석은 초보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c)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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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로 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 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 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 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 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 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 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 (1QpHab) ⑦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1QSa; 공동체의 메시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 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 4600 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 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다. 또한 여러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DJD=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Oxford:Clarendon)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 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 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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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로이드존스 교리강좌 요약)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

The Eternal Decrees of God

 

1. 작정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생각하시고, 결심하셨으며,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혹은 방법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흔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The Eternal Decrees of God)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1)성경이 작정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작정의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하지만 삼위일체교리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단지 그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리는 참으로 어려운데, 영원하신 분의 마음, 즉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보잘것없고 왜소한 지성이 파악할 수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교리를 우리가 살피는 이유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며, 성경에 계시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고찰하고 연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9)

2)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더 위대하고 더 웅대한 개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에 있어 진정한 난점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은 더 많이 예배할 것입니다.

3) 작정의 교리는 우리를 많은 오류로터 구해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하게 깨닫는다면 지금까지의 많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작정의 교리는 커다란 위로를 준다.

유한한 세상에 잠시 자나가는 미미한 피조물일 뿐인 나의 배후에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이라고 하는 교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작정의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당파심을 버리고 접근해야 한다.

즉 편견들과 모든 종류의 당파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당파심(party spirit)'이란 말은 우리 모든 사람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발견하는 일보다는 이미 믿어왔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2) 철학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저주입니다. 철학은 정의상 언제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다르고 있는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그 안에 우리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겸손함과 경외심,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며 언제든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추구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이 교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나와야 하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성경의 계시를 넘어서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성경의 울타리)

믿음은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즉각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이 계시되어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3. 작정 교리의 기본 명제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변치 않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창세전에”(1:4을 보십시오.)와 같은 문구를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주님의 나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때가차매”(4:4)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의 마지막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그분이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으며, 절대적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정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계획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시점에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특정한 시점에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로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다시 말해 종말이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면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도 역시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일들,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자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들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0-11) 이 말씀은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전체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제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성경의 증거가 있습니다. 잠언에는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에는 주님이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30). 아주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하나님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잠언 21 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 왕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마치 물을 통제하듯 그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 10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2 13절에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3). 사도행전 4 27-28절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 사람들의 끔찍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따러 미리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돈을 벌려고, 그리고 질투심에 가득 차서 비열하고 매우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즉 그들의 악한 행동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작정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우리가 이미 인정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유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며, 그분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하십니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죄를 금하고 벌하는 도덕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죄의 발생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에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악이 벗어나지 못할 정확한 궤도와 이루게 될 결과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도록 지배하십니다. 50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심지어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바 사람들이 앞으로 취할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하나님의 작정들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 11 25-26 :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셨다.

- 9 11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바울의 논증은 어느 하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 한다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적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는 일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5~18)

 

4) 하나님의 작정은 효력있는 작정이다.하나님의 작정은 유효적(efficacious)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하시고 뜻하시는 것은 틀림없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꺾을 수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 자신의 최고로 지혜롭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하박국 1 13절에는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고 말합니다.

둘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 및 행동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비록 우리가 조화시킬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9:20-23)

 

6)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을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십니다.(11:25-26), 요한복음 6 37에도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44절에서 우리 주님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3 38절에는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 13절에는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1 9절에서는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7)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모든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저것은 왜 그런가? 왜 하나님은 바로를 일으키셨는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는 로마서를 기억합시다. 하나님과 맞붙어 싸우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우리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 된 존재가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궁극적인 이해를 보류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이 곳,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일관성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결정하신 일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그 누구도 당신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거나, 당신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그만 두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그분은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여러분이나, 다른 누구도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굽혀 경배합시다.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겸손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그 계시에 우리를 복종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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