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연인의 고백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통통 튀는 젊음과
      활기찬 사랑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모든 이벤트들이
      자신들의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웃으며 거리를 걸어다녔고,
      세상에서 자신들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에
      빠져 있다는 환상적인 착각을 즐겼답니다.

      그런 그들이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한 노년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아무 대화도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답니다.

      젊은 연인은 나이가 들면 사랑하는 사이에도
      할 말이 없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부부의 모습이 약간
      가여워 보이기까지 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젊다는 것과 열정적으로
      사랑 한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이 식탁을 떠나면서
      노년 부부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둘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무런 대화도, 관심도 없는것처럼
      묵묵히 앉아 있다고 여겼던 두사람이
      식탁 밑으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던 거지요.

      단지 손을 마주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왔기에
      아무 대화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연인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부부의 모습을
      불쌍하게 생각한 자신들이 부끄러워졌죠.

      사랑은 젊고 열정적이 않아도 좋습니다
      화려하고 상큼한 사랑은
      물론 보기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켰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지켜준 사랑만큼
      빛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순간에 불타오르는 열정보다는
      상대방을 말없이 비추어주는
      은은한 등불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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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박영돈 교수


김세윤 교수님의 책, “칭의와 성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어, 뒤늦게나마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 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유익과 통찰을 얻었던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도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1. 가장 아쉬운 점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김 교수님의 비판이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이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같은 구조와 특성을 띠고 있다. 그는 성화를 “의인됨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또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 감독(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김 교수님이 주장하듯이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르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으려는 김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그마저 선진들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 속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500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탱해온 핵심교리를 뒤집는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이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성경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주관이나 신학적인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성경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님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의 해석의 관점은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논하고 싶은 점이 많아 “칭의와 성화”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다시 전해야 할 칭의의 복음”이 어떨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축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 재 발굴하여 바르게 전파해야한다. 복음 사역자들이여,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여러 도전 앞에 주저하며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시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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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당신은 진짜 부활을 믿는가? / 박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마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얼마 전 작고한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부활절만 되면 괴로웠다”라고 고백한 것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설교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어서야 부활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지옥에 가는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 천국으로 가게 될 영원한 운명을 살아서부터 미리 보장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행한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 초점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모여졌듯이 기독교는 한 마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의 목사님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면, 목사라는 직분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인 동행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이 동행해 주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을 한 교인일 수는, 그것도 스스로 칭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잘못을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더러 잘못한다고 야단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는 부활을 믿는 데도 잘못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재림과 부활의 시기와 모습, 휴거, 대 환난, 적그리스도, 천년왕국 등에 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면 실제 삶이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왕자로 태어난 자는 장차 왕이 될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될 때까지 두 가지 유형의 생활양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것이니까 그저 편하게 놀고먹으려는, 심지어 왕이 되면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하지 못할 온갖 쾌락을 미리 맛보려는 왕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왕이 될 것에 대비해 열심히 배우고 훈련을 쌓는 왕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망나니 왕자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보장되다보니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지거나 어차피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쾌락을 더 즐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망나니 왕자는 왕이 된다는 궁극적 운명이 그 전의 왕자로서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오히려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부활이 신자에게 그 이전의 삶 즉 이 땅에서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론 싸이더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기에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인생관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물질로 이뤄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부활이 있으면 이 땅과는 별도로 비물질로 이뤄진 눈에 안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 물질에만 의존하는 인생관을 가짐에 반하여 믿는 자의 그것은 다음 세상을 대비해 물질이 아닌 것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죽은 후의 하나님 심판에 대비해 미리부터 선행을 많이 하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면제된 신자로선 그런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영생이 있다면 이 땅의 삶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갈 찰나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진짜 시민권과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신자의 진짜 인생은 천국에서 시작하기에 이 땅은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의 이 땅의 삶은 왕자로서 사는 것이라면 천국에 가서야 왕으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아니 본격적인 인생은 죽음 이후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왕이 될 것을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보상으로 천국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에 갖고 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에 관한 인식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이 끝나면 천국의 보상이 기다린다는 차원에만 머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경우를 겪더라도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최후의 도피성에 불과해졌습니다. 마치 “결국 나중에 누가 잘 되나 두고 보자. 너희는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간다!” 식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그런 복수 심리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천국에서 마음껏 한을 풀겠다는 기대 심리는 있습니다. 부활이 이 땅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없고 부활로 이 땅의 삶을 보완시키리라 작정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천국 삶의 훈련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고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천국은 죄만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천국은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물질이 무한정으로 많아서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가능하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아예 없고 전혀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죄를 멀리하는 훈련뿐 아니라 물질 없이 사는 법도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 자체를 아예 소유하지 말라든지 돈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선 물질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 자체를 좌우할 만큼 우선적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추하고 더러운 것 하나 없이 진선미가 완벽하게 구현되며 참 사랑으로 섬기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런 삶을 장래 일로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방식대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천국 보화를 평생토록 갈고 닦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가치를 자기가 속한 곳곳마다 심어서 천국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려준 불씨를 어떻게 하든 끄지 않고 천국까지 갖고 가는 것만이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작은 불씨를 천국의 불과 연결시켜 이 땅에 활활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신자는 물질만 목표로 사는, 즉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이 땅에서 물질을 다루는 면에선 당연히 뒤처지며 그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이미 소유했기에 물질에 의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게 됩니다. 고달픈 현실이 육신적 불편은 될지언정 결코 영적인 고통으로 연장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이 땅의 고달픈 삶 자체가 천국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더욱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으면 오히려 불신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동안의 필요만 공급할 뿐입니다. 죽을 때 남는 것은 집, 자동차, 현찰, 본인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눈에 안 보이는 영혼뿐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남지도 않을 것들에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만큼 헛된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소유한 자처럼, 이미 부활을 입은 자처럼 살지 않는 한 세상 사람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미 확보된 부활이 이 땅의 인생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고하는 중심, 바라보는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영원과 이어진, 아니 이미 영원한 존재가 된 자가 일시적인 가치에 영향 받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단지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실현하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물질에 좌우되는 인생들이, 사실은 때로는 그러는 내 자신이 진정 불쌍하게 보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의 노목사님처럼 교인은 되었어도 아직 부활을 진짜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3/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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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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