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간증은 실제 인물이며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독자님 중, '질문'(Watchman)님의 체험 간증과 일치하여서 올려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이영미(가명)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나의 간증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께 사단이 어떻게 성령님의 가면을 쓰고 왔는지 나의 체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7년, 저는 모 장로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또 나름 열심히 우리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 딸 민아(가명)를 만져주시기를 바랐고 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딸 민아가 병이 다 낫게 되어 말도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어면 하는 나의 간절함과 소망이었습니다. 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서 기도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것이 되풀이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난 친구를 통해서 믿음이 참 좋으신 집사님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믿음도 좋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도 많이 하신 분이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분도 아픈 상처가 있어서 나에게 더욱더 신경을 써주셨고 우리 민아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많이 의지했었지요. 난 그분을 너무 좋아하였기에, 그분이 나가는 교회를 자진해서 따라갔고, 그 교회로 옮겨서 열심히 함께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 민아도 데리고 매주 주일 성수를 지키면서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해왔었지요. 그런데 난 그분처럼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질투도 나고 속도 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께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그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다가 응답받았고 많은 체험과 기도할 때면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것을 매 기도시간마다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 말씀처럼 밤마다 사사기 6장 37-40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기를 시작했고 난 주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같이 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진동이 왔습니다. 어느 날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몸에 진동이 오면서 떨리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뛰는 듯 공중에 뜨는 듯, 도저히 절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다 빠지는 듯했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난 점점 신비주의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집사님을 따라서 외국 분이 인도하는 “치유 집회, 신유 집회도” 서슴없이 따라다녔습니다. 난 사실 오랫동안 신유 집회라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아 1살 때 유명하다는 흑인 치유강사가 왔다기에 한 번 가봤었는데 그때 우리 아이 아빠랑 저는 너무 실망을 해서 그 후 10년 동안 그런 집회라면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치유, 신유 집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성령 충만한 집회라면 우리 딸 민아를 데리고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집회 때 방언도 받고, 수많은 외국 목사님들로부터 안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점점 이상하게 뭔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할 때면 환상도 보이고, 기도하다가 내 입을 통해서 예언도 하고, 서울 어느 큰 교회 C 목사님의 DVD 설교집을 틀어놓고 찬양을 드리다 보면 내 손과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기도할 때면 내 몸을 가지고 어떤 힘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매일같이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자다가도 내 몸을 막 흔들어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 민아 방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놀라서 급하게 민아에게 가다가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또 내 입을 통해서 민아가 6월 20일 날 말을 한다고 하는 예언도 주었고 8월 22일 날이면 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달력의 날짜까지 짚어주면서 예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좋아서 우리 남편이랑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라고 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많이 읽어라. 금식해라. 찬양 드려라. 기도 많이 해라. 교회 열심히 다녀라.”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열심히 하라고 하니까( 만약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한다던지 성경을 멀리하라고 했더라면 의심했겠지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다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금식도 하루 한 끼만 먹고 30일 씩 3번을 연달아서 금식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금식할 때면 더 역사를 심하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하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토하고 토할 때 이물질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서 창자를 다 뒤틀어서 토하게 합니다. 그때 난 너무 힘들어서 거울을 보면 핏줄이 내 얼굴에 가득했고 얼굴이 너무 심하게 상해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참고 기도할 때면 쓰레기통을 준비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담임 목사님께 의논하면 마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귓가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듯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 귀신하고 노는 거야. 너 지금 귀신을 부르는 것이야.”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 방언이 또 마귀를 야단치는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무섭게 야단을 치고 그 방언이 나올 때면 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내 몸을 뒤틀듯이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내 입에서 흉측하고 괴상한 소리가 내 입으로 나오는 것이었어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머리끝, 털끝이 다 쭈빗쭈빗 섰고 소름도 끼치고 나의 혼이 다 나가는 듯했고 난 그 순간 “예수님 도와주세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의 소리가 끝나면 내 손이 움직여서 귀신이 다 나갔다고 신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 밤 똑같이 귀신한테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성령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면, “네 왼쪽에 서 계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화한다는 것은 귀로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말로 또는 내 입으로(육성으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때는 내 몸을 흔들어서 대답을 주는데 꼭 우리가 사람하고 대화를 하듯, “응, 그래. 그래 맞아.” 하는 듯 탁탁! 제 몸을 쳐줍니다.

그러다가 신나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제 남편이 절더러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꼭 미친 사람같다고. 난 그 말도 듣지 않고, 성령님과 대화한다고 확신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난 대화를 했고 방언으로 찬양도 드리고 난 그때 내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1월부터 5월까지 성령님인 줄만 알고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치유 은사 집회가 있었는데 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열심히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유명한 강사들이 왔었는데 난 그곳에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서울의 한 대형교회 H목사님도 병낫기를 구하면서 그곳에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에 금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사람,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신한 사람, 이빨이 변해서 금이빨이 되는 것도, 또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이 보인다는 사람, 또 안수 받고 쓰러져서 울다가 이유 없이 한없이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웃는데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집회 시간에는 뜨거웠는데 집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맹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난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나의 현상에 관해서 의논했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을 주는 것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속지 말고 믿고 계속 의지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5월에 LA에서 유명한 ‘치유 은사’를 가졌다는 C.S라는 여자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도 하신 분이고 그 CD가 나한테 한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CD를 듣는 순간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물며 그분과 전화 통화를 하기만 해도 내 몸이 쓰러지며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남이 부축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나는 그분이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사는 지역으로 오시게 되어서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난 그분께 나의 모든 현상을 의논했고 그분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일 수도 있고 내 영, 내 자아일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서 속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의 예언도 거짓이니까 믿지 말라고, 다 잊어버리고 주님만 믿으라고 하더군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고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방언도 물어보았지만, 통역을 해보시더니 방언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딸 민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믿고 기도하라고, 예언을 해주시고는 LA로 돌아가셨습니다. 역시나 그분의 예언도 날짜가 지나도 예언대로 우리 딸 민아가 일어나지 않았고 난 너무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난 다시금 치유집회를 찾게되었고 그곳에서 외국 사람 한 분을 만났는데 당신의 친구분 간증을 해주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기도하라고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를 주면서 꼭 승리하라고 하더군요. 난 말씀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말씀 선포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여러 날을 반복해서 기도하다가 어느 날은 정말 영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 드렸슨데 정말 너무나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아주 깊은 곳이라고 해야겠는데,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아주 아주 깊은 곳, 마음 어디에선가 아주 속 저 깊은 곳에서, “성령이 아니다!”라고 하는 큰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난 너무도 놀라서 한동안 아주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것에 화가 났고 성령님인 줄만 알았던 것이 마귀, 사단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난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멈추었고, 방언도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방언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아주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놀랐고, 하나님께 다시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난 하나님이 너무도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늘 생각하고 믿었는데 그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너무 크고 두려워서 어디로든 숨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꼭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대로 귀신과 놀고 있다가는 지옥으로 가겠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성경 말씀만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와 닿기 시작하고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내가 나갈 교회를 잃었고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3, 4개월 방황하며 주님께 계속 좋은 교회를 찾게 해주십사 기도로 여쭈다가 별똥별 사모님(그땐 누군지 전혀 몰랐음)께서 부군 목사님과 함께 섬기시는 지금의 교회를 이 교회의 장로님을 통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이 나와 맞는 시간이고 해서 한 번 방문해보기나 하자고 왔던 것이 지금까지 4년 째 출석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 참석하는 때가 12월 마지막 때였는데 주일 대예배 설교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예배 시간마다 찬송에서도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 주보에 인쇄된 찬송을 펴는 순간 주보에 있는 찬송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빠져나와 내 얼굴로 다가오면서 내 눈으로 내 입으로 들어가는 듯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주보를 덮었다가 다시 펴는 순간 하나님 말씀 한 말씀이 한 말씀이 또 다시 빠져나오는 듯, 내 얼굴로 다가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온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자꾸 쏟아졌습니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뜨거운 눈물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 속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끌려다닌 지난 세월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가 내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자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게 접근한 것을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사단의 장난질을 통해서 더욱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간증을 읽으시는 여러분,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아니, 치유강사들에게 안수받지 말고, 또 방언 받지 마세요. 그 방언은 마귀로부터 왔음을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그 예언들도 틀린 것은 모두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성경 말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별사모님이 말씀해 주셨고 정리해 두신 글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보았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내 앞에서 방언을 받을 때 그분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것을, 나 역시 방언이 바뀌면서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방언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는 마귀가 방해를 하는구나 했었는데 아닙니다. 그 방언의 실체는 괴물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저는 두 번 다시 방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방언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체험을 했으니까요.

여러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하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며 끝까지 간증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간증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참고:
내 사랑하는 딸 아이의 병명은 aicardi syndrome 이라고합니다, 아주 희귀병이고 전 세계에서는 300명, 미국 전역에서 50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주에서도 단 한 명 우리 딸 '민아'뿐이랍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을 할 수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으며 눈도 제대로 뜰 수도 없습니다. 특수 제작된 침대에 누워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민아가, 그래도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올해 16살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들(치유 은사) 집회 장소에서 나타난다는 하얀 안개
그들은 이 현상을 "Dust Angel"(먼지 천사)라 부른다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최송연
언제나
눈부시게 푸른 날 아니어도 
당신의 향기로 가득한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오늘이게 하소서

날마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어도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오색 무지개 피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하소서

맨 처음
당신이 나를 찾아주신 그 순간부터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내 앞길
설령, 눈부시게 푸른 날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불평도 불만도 없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영원이게 하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최송연

언제나
눈부시게 푸른 날 아니어도
당신의 향기로 가득한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오늘이게 하소서

날마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어도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오색 무지개 피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하소서

맨 처음
당신이 나를 찾아주신 그 순간부터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내 앞길
설령, 눈부시게 푸른 날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불평도 불만도 없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영원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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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비결 / 박신 목사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77:7-11)



미국에 이민 와서 노년이 되도록 고생을 많이 한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가지만 은퇴 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 일을 하려면 건강이 따라가 주지 않아 너무 힘드시지 않느냐?”라고 물어봤습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몸이 고달픈 것은 견딜 만한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일을 마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습求? 문을 열기가 마치 지옥문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였습니다. 종일 힘들었으니까 샤워하고 쉴 것을 생각하며 기쁘게 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 정반대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의 타격이 더 커다는 증거입니다. 본능에 따라 생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게 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남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참 의미와 행복을 느끼게끔 창조되어졌기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결핍되면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는 경우가 생겨도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사랑은 오직 그분께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면 그 때야말로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인 여자 연예인들이 우울증이 도져서 연달아 자살을 한 것이 예사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나아질 조짐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토로했습니다. 인생사란 희비가 교차하게 마련이고 비록 환난 중에라도 다른 좋은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의심하고 불만을 가질 리는 없습니다. 좋은 일은 전혀 생기지 않고 환난만 겹쳐진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기자의 심경에 극적인 변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환난이 끝나고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혹시 그동안 비관적, 부정적이었던 자기 생각을 낙관적, 긍정적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습니까? 아니면 아예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버렸습니까? 그래서 자족하여 마음이라도 편하게 된 것입니까? 그도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습니까? 우리의 흔한 생각과는 다릅니다. 즉 그 연약함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인간이 불완전하고 무능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구원을 애절하게 기도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자기를 잊어버린 것 같이 여겨진 바로 그 생각이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한 것이 실제로는 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따져보았더니 주께서 그럴 리는 결코 없다는 부정의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내가 옛날 곧 ‘이전 해(old days, years)’를 생각하였아오며”(5절)라고 했듯이 그분께 받았던 은혜를 회상해 보았더니 잘못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버리신 것은 아닐까?”라고 하면 의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는 일시적은 몰라도 영원히 버리실 리 없다는 생각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묵상해보아도,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겠는가? 인자하심이 길이 다할 수 있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잊을 리 있겠는가? 노하심이 긍휼을 막을 정도로 그 긍휼에 한도가 있을 리 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은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 ‘다시는’ 베풀지 않는다는 것, 인자가  ‘길이 다한다는’ 것, 은혜 베푸심을 ‘잊는다는’ 것, 긍휼이 ‘막힌다는’ 것 등은 하나님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비록 신자가 아무리 위급한 환난 중에 있어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the years of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에서 체험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해 내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인정해야 할 부분은 능력의 측면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능하고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사실이자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다 해 주시옵소서!”가 믿음의 출발이자 기도의 본질인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나 기도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매번 “아빠! 내가 힘이 없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나는 너무 연약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라고 아빠에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웃기는 일 아닙니까? 아기는 단순히 아빠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만 하면 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대신에 아이는 “아빠가 왜 빨리 한 해주지?”라는 불평과 의심은 끊임없이 합니다.  

말하자면 아기는 능력이 부족해 아빠에게 의존하는 측면에선 전혀 연약하지 않고 너무나 잘합니다. 반면에 아빠의 진정성과 성의에 대해선 자주 의심합니다. 대부분의 신자의 믿음도 이와 똑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 또한 정작 연약하다고 고백할 부분도 하나님의 긍휼을 의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날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는 것조차 신자의 연약함이 아닙니다. 이 또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기가 약하고 무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듯이 신자가 하나님을 잊는 것은 거의 본성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자에게 정작 연약한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잊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환난 중에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난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이전에 자신의 이 연약함부터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긍휼을 그칠 리가 없다는 진리를 지난 세월의 은혜에 비춰서라도 확고하게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긍휼은 그분의 나를 향한 분노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므로 그 긍휼을 막을 것은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연약함을 없애면 강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들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어떤 노력들을 합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신자들은 기도나 말씀에 약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기도나 말씀에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믿음 자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연약한 부분을 개선시키면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생기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 약해짐은 그분의 긍휼에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하지 기도나 말씀을 덜 보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착각은 지금 닥친 환난에만 신경이 팔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기도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묵상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외면당하는 일이란, 특별히 신자에겐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다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들 때마저도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 아닙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환난은 잠시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6,17)

지금 혹시 환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당신을 잊겠습니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겠습니까?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겠습니까?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겠습니까? 은혜 베푸심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 중에 하나라도 답이 ‘예스’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불평해도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잠잠히 주만 바라보십시오. 혹시라도 그렇게 하기 힘드시면 하나님과 교통했던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한도 예수님의 십자가라도 바라보십시오. 과연 신자를 향한 그분의 긍휼에 끝이 있겠는가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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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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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 곳곳에서 발견되는 금덩어리 같은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바울 사도와 같이 이처럼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씀의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 곧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직시하려면 그런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두 구절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가리는 일종의 질산 테스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질산 태스트는 가장 민감하고도 정교한 테스트이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에 그치는 정통성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질산 테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진정한 척도는 아니다. 또한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성은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또한 경험, 거듭나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은 질산 테스트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도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척도는 이 구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본문은 그 세 가지 척도, 정통성, 도덕성, 경험을 보증한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척도는 삶에 대한 반응이다. 곧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진정한 척도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 주변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번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척도란 궁극적인 것, 곧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의 관점에 빗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심각한 유행성 질환이나 질병이 발생해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척도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삶이 가장 암울하고 모질게 보이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도는 행위와 도덕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지성으로만 믿는 것은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척도는 경험적인 요소, 곧 삶과 그 능력과 활력을 보증한다. 진리를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바울처럼 반응할 수가 없다.

 

바울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박해를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4:8-11).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렇게 고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용기와 담력의 철학을 견지했다. 매우 유능하고 지성적인 그들은 인생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원한다면, 어깨를 당차게 펴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제력을 키우고, 엄격히 훈련하여 의지를 철석 같이 다지고, 절대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와 정반대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 스토아철학은 체념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는 상황을 견디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단지 버티고 서서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상황을 견디거나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넉넉히 이기는자들이다(8:37).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도 이전에는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을 믿었다. 오직 이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라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또한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나는 때때로 기독교 신앙을 마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거나 높은 산 위로 데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세상은 우리를 짓누르고 버겁게 하여 그 안에 파묻혀 길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그런 세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우리가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인 됨으로써 시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잠시라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덧붙인다. 바울은 시간을 영원이라는 방대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한한 시간, 백만 년이 거듭되는 장구한 세월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영원이다. 시간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어떻게 보일까? 찰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나 삶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마치 그것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지금,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2:6). 기독교인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영원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은 환난이라는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을 언급하고 나서 그는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고난은 그를 완전히 짓뭉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 자체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가볍다고 말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중한 것에 비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가볍고 잠시의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기독교인이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영원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그는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모든 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끝난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 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의 가정, 자동차, 재산 등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라고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허리케인이 연이어 몰아닥친다 하더라도, 하늘에 간직된 것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폭탄을 한데 모아 동시에 터뜨린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업은 영원히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단 이 영광을 보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낙심하거나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세상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의 환난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본 영광,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의 비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로이드 존스, 영광을 바라보라, 1, pp 10-43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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