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일괄적인 톤으로 한 하나님이 삼위(세 위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분명히 특별계시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라고 말들 하지만, 필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 받는 그때부터 그 사실이 분명한 사실로 믿어졌다. 이것이야말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성령 하나님의 조명 하심이라 믿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혼동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삼위일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신학자, 목회자가 이단으로 지목받아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극심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사랑 안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져야 할 형제 자매가 서로 손가락질 하며 한 치의 양보함 없이 다투기도 하여, 안티와 이단들이 손뼉치며 즐거워하도록 하는, 정말 가슴 아픈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을 바로 세워줄 수가 있을 텐데…늘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오늘 아침, 주께서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이다.” 깨우쳐 주신다. (요 10: 30절 참조)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그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르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object)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란 것이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필자는 아주 오래전(약 6년 전쯤인 것 같다),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과 삼위일체 론에 부딪혀 한 판 설전을 크게 벌렸던 적이 있고, 그때, 아멘넷 운영자 님과 편집위는 필자의 손을 들어준 고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도사님이란 분의 주장인즉슨,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主)시요, 메시아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강하게 우겼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도사님의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 목회자님들의 질문이며,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에 많은 이단들이 정통교단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 종파들이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대로 정립된다면 삼위일체가 그리 어려운 교리적 산물만은 아닌, 성경의 핵심 사상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예수가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단코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 그리고 정통 교단이 인정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는가?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2.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성부, 말씀(성자),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 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 (빌2:5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4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 8절)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 8절) 성경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 13) 천명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고 계신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 증거하신다.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듯, 요1서 5:7절 말씀은 한글 번역판보다 영어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현대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께서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림자, 실체, 그리고 빛의 관계성:
예수님, 그림자, 빛, 이 셋을 따로 떼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예수님 한 분을 신약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실체, 요1:1 ), 빛(요 1: 4), 구약에서 율법(오실 이의 그림자, 골 2: 16- 17)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율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오실분의 그림자인 율법)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그림자 =율법(율법=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 실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빛(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물로서, 바위로서 표현되기도 하나 관계성을 설명하려니까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빛을 연관짓되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 1-9) =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그분은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성경은 증거하신다. 그러나 온전히 다른 위격을 소유 하신 분,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 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번역문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의 그림자(shadow)가 실체(substance))와 따로 떨어져서 일 할 수도 없고 그림자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빛을 통하여 생성되는 그림자와 실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 10: 30절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분의 신비함(mysterious)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숨겨진 비밀이며 주의 영으로 계시(revelation)해 주시고 성령의 조명 하심을 입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비밀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림자에 생명을 입힐 수도 있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실 수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게 된다면, 삼위일체 론(論)이 이해되지 않을 이유 없고,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그 정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이시니,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 물 그리고 피니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요 5: 7-8)
 
위 성구는 KJV 의 같은 구절을 필자가 그대로 직역해 본 것입니다. 삼위 일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어떤 사람이 모함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빛은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곧 실체), 성령님은 그림자(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설파한다고 몰아가며 비방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설명할 때, 그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갖추신 분이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 5)예수님이 빛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시요, 율법으로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아래는:
본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밝히신 독자님의 글을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별이 사모님의 칼럼에 발제자의 영성을 신뢰하기에 +10 추천으로 우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에 벅찼습니다. 처음 대하는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 라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설명 하는 새로운 명제에 걸려 더 이상 읽어 내려 갈수가 없었습니다.

발제자가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전제를 달아 놓았듯이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명제 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설명하는 예가 성경에서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골2:17),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계속 드리는 똑같은 제사로는 예배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율법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예로 성경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으로, “그림자와 실체”로 “삼위일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혀 무리가 있다 할 수 없다.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 합니다.

"삼위일체" 를 설명하는 새로운 대 발견이다.
“휴” 과연 별이 사모님 이시다. 안심 입니다.) - 잠긴동산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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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절대로' 절망할 수 없는 이유
김일성 가문의 재산으로 태어나 버림받던 백성들은 공포와 궁핍과 저주에서 해방케 될 것이다.

1. ‘대한민국은 여기까지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자조적 탄식이 번진다. 절망과 우울을 넘어 희망(希望)과 소망(所望)을 그려본다. 
  
  희망과 소망의 원천은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에 있다. ‘오직 예수’의 믿음을 통해 민족의 사명(使命)과 백성의 비전(vision)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부패(腐敗)와 음란(淫亂)을 넘어 주님이 주신 꿈을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놀랍도록 달콤한 문명의 빛이 가장 참혹한 시절에 잉태되었다. 주님은 그러한 분이다. 칠흑 같은 밤에 부흥의 씨앗이 심겨졌다. 
   
  1910년~1945년 사이 일제(日帝) 통치는 한민족 최악의 시련기였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오죽하면 나라가 망하게 됐을까? 
  
2. 구한말.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 부정부패(不正腐敗)는 극에 달했다. ‘썩음’은 향락(享樂)과 음란(淫亂)을 부른다. 지배층인 양반들은 빼앗았고, 피지배층 백성들은 빼앗겼다. 없는 자는 살기 위해 딸들을 팔았고, 가진 자는 축첩(蓄妾)으로 여러 여인을 거느렸다. 개화기 신문·잡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이 문란한 성도덕에 있었다” “음풍(淫風)이 크게 떨쳐 집마다 마을마다 음부(淫婦)가 아닌 여자가 드믈다” 금수강산은 죽음의 비만 내리는 악취 나는 쓰레기장이 되고 만다.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미신(迷信)이 판친다. 감기만 걸려도 굿을 했고 무당이 감기에 걸리면 친구 무당이 또 다시 굿을 했다. 이런 식으로 역병(疫病)이 동네를 휩쓸면 마을은 황량한 폐허로 변했다. 5000년 우상숭배는 구한 말 한민족을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3. 형통(亨通)이 반드시 축복은 아니요, 고난(苦難)이 꼭 저주는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사람을 죽이고 속사람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사도 바울이 어느 날 살 소망까지 끊어져 버렸다. 왜 일까? 왜 이런 고통과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그는 말한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한민족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치욕의 채찍을 맞으며 부르짖을 때,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오직 예수’ 믿음의 씨앗을 심었다. 일제시대 ‘평양대부흥운동’ 조력자 중 하나인 선교사 메티 노블은 자신의 책 ‘조선회상’에서 나라가 망하던 ‘절망적’ 모습을 놀라운 ‘희망적’ 언어로 적었다. 
  
   “1907년 1월2일 성령의 나타나심 : 성령이 강한 권능으로 평양 교회들과 여러 다른 지역에 임하였다. 그 결과 웨일즈 지방의 大부흥에 관해 읽은 내용과 흡사한 위대하고 영광스런 흥분상태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통회하고....우리 선교사들은 이 민족과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메티 노블은 무당, 기생, 과부 등 당시 버려진 자들에게 생명을 전했다. 에스겔의 마른 뼈 같은 조선백성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듣고 생기를 받는다. 피눈물은 신바람이 돼 민족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한일합방이 있던 1910년, 조선교회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시작했다. 그 해 2월23일 메티노블은 “숱한 경이로운 일들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올해 최고의 사건은 백만인 구령운동이다”이라며 무당 출신 한 여성의 간증을 이렇게 적었다. “한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고 있어요. 백만 인이 오고 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이 생에서 제 가장 큰 소망과 염원은 백만 성도를 목도하는 거예요”
   
  저주받던 삶을 살던 무당, 기생 출신 여성들은 돈과 물질을 달라는 세속적 바람을 읊은 게 아니다. 대신 “이 민족과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땅을 진동케 할 부흥, 지옥을 텅 비게 할 부흥을 바랬다. 부흥 아니면 주님의 진노가 또 다시 임하게 될 것임을 알기에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원컨대 주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해 달라(사 64:1)”고 외쳤다.
  
4. 화려한 연꽃은 더러운 진창에서 피어난다. 조선이 그랬다. 복음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신 주님이 이 나라도 살려줄 것임을 믿었다. 그렇게 믿었던 예표(豫表)적 인물이 있었다. 30여 년 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다. 
  
  그는 19세기 말 당시 조정(朝政)에 반대한 대가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성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 그는 선교사가 건네준 성경을 읽었다. 성령이 강하게 임했다. 감옥 안이 빛으로 가득 차는 체험을 하였고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느꼈다. 이때 입술에서 터져 나온 첫 기도가 있었다. ‘save my soul, save my country’ 나의 영혼을 구하신 주님이 민족과 나라를 구해달라는 간구였다.
  
  상황과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건, 주님을 만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깨닫는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니 그 행복을 전하러 나섰다. 이승만은 감옥 안의 양반 출신 청년들을 전도했고 1902년 12월28일 역사 상 감옥 안의 첫 예배를 주님께 올린다. 감옥의 이름도 스스로 복당(福堂. The House of Blessing)으로 바꿔 부른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벋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찬송은 현실이 되었다.
  
  사형수 이승만은 6년 여 감옥 생활 끝에 극적으로 출소한다. 이후 명 연설가, 문장가로 서울과 지방을 누빈다. 
  
  이승만의 열정도 조선의 멸망은 막지 못했다. 1910년, 결국 나라가 망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놀라운 미래를 말한다. 요셉처럼 꿈꾸는 자가 된 이승만은 출소 직후 쓴 ‘독립정신’에서 한민족이 언젠가는 “일류국가(一流國家)”가 될 것이라 적었다. 이승만이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3년에 쓴 ‘한국교회핍박’은 더욱 구체적 형태로 다가올 ‘승리(勝利)’를 말한다. 인용해보자. 
   
  “청년 애국운동가들이 삼삼오오 경향(京鄕)에 나타나고 소리 높여 전도하는 말이 ‘우리는 나라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천국(天國)을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이 다 따라 생기리라’였다. 태극기 사용이 금지된 후로 매 경축일에는 적십자기를 교회당에 높이 달았으며 애국가 부르는 것이 금지된 후로는 찬송가를 대신 사용해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가 가자!’는 곡조를 높은 소리로 기운차게 불렀다. 이에 순검, 병정과 비밀요원들이 틈틈이 찾아들어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게 되었다” 
   
  교회는 불 속에서 크는 법이다. 일제 핍박 속에서 한국 교회는 애국가 대신 찬송가를 불렀고 ‘땅의 나라’가 없어진 상태니 ‘하늘의 나라’를 구했다. ‘오직 주님만 믿으면, 아니 주님만 믿어야 살 길이 생긴다’ 그렇게 믿었다. 절대적 신앙, 절대적 믿음, 절대적 예수의 세대가 지옥의 불에서 생겨난 셈이다. 
   
5. 20세기 초 이승만은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예측했다. 이승만은 ‘한국교회핍박’에서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 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 처음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긴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벌써 제주도와 북간도,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와 북경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활발히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국인들을 택하사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의 기초를 잡게 하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이 “교회의 일에만 전력하면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을 모두 기독교로 인도할 것”이라고도 썼다. 일본이 칼로 일어나 동양을 집어삼킬 때 이승만은 기독교로 동양을 발전시킬 구상을 한 것이다. 또 “이대로 얼마동안만 계속하면 한국 백성의 장래 문명, 자유, 복락을 손꼽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승만과 같은 선각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보며, 무덤 속에서 부활을 꿈꿨다. 지옥의 비가 그친 뒤 새롭게 태어날 민족의 미래는, 중국은 물론 자신을 침략한 일본마저 기독교로 인도할 것이라 말했다. 아시아 전역에 기독교 문명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적은 셈이다.
  
6. 이승만 혼자만이 아니었다. 광복 직후 정동제일교회에 모인 김구와 김규식 선생도 각각 “경찰서 10개를 만드는 것 보다 교회 하나를 세워야 한다” “성경 위에 나라를 만들어야 침략 받지 않는 강대국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음을 체험한 탓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너며 야훼만 믿게 되었던 것처럼, 동방의 이스라엘로 불리던 한민족 지도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한다는 이들이 나왔다. 피와 땀과 눈물은 가슴 저민 고통이었지만 그 가운데 숨겨진 주님의 사랑은 신비로웠다. 
  
7. 이승만처럼 ‘제사장 나라’의 꿈을 꾸던 이들의 믿음은 1948년 건국으로 열매를 맺었다. 35년 쌓인 기도는 같은 해 5월31일 기도를 하면서 나라를 여는 힘이 되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바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으로 국회속기록 맨 앞에 실리게 된다. 당시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이 10%도 안 되는 척박한 상황이었지만, 198명의 초대의원 모두 순전한 핍박의 신앙에 경의를 표하며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35년 고난 속에서 잉태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민족이 탄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 ‘잘 못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땅의 나라 없던 시절 하늘의 나라를 구했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 어린 기도의 결과다.
   
  새것이 된 백성과 주님의 언약(言約)관계도 시작됐다. 하나님께 바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에 실린 “민생복락(民生福樂)” “남북통일(南北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달라는 간구는 35년 죽음을 오가며 외쳤던 기도의 제목이었다. 주님이 민생의 복락을 주시면, 통일된 한국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평화를 이루어 내겠다는 담대한 ‘제사장 나라’의 선언이었다. 
  
8. 주님은 이 언약을 현실로 만들어 주셨다. 우선 민생복락을 주시어 세계에서 성장스피드 최고인 나라를 만들게 하셨다.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이다. 일제(日帝) 핍박 속에서 “살려 달라” 부르짖던 선조들의 기도와 6·25, 4·19, 5·16, 유신과 5·18, 6·29 등으로 이어진 격랑 속에서도 “민족복음화”를 외치며 산기도와 철야기도, 여의도 광장을 메웠던 기도의 힘이다. 
  
  풍요(豊饒)는 그 어머니 경건(敬虔)을 잡아먹는다 했던가? 정작 ‘민생의 복락’을 선물 받은 뒤 우리는 영안(靈眼)이 닫혀져 버렸다. 
  
  남북통일의 사명도, 세계평화의 비전도 희미해졌다. 80년대 이후 현세적 욕망과 이기(利己)의 기도가 판치며 제단의 불도 쇠잔해졌다. ‘민생의 복락’은 선교한국의 조건부 축복일 뿐인데, 꿈을 잊어버리니 백성은 부패와 음란에 빠져 갔다. 썩어간 사회에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끔찍한 재앙이 터졌다. 모두 우리 탓이다. 꿈을 잊은 우리 교회 탓이다. 
  
9. 세상이 어둡다. 조국에 혼란이 덮친다. 교회는 피 묻지 않은 검을 든 채 잠에 빠져 버렸다. 
  
  영적 지각변동을 준비할 때이다. 우선 지난 60년 성장의 그림자, 부패와 음란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우리가 이 땅의 부패와 음란을 회개할 때 미쁘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다. 
  
10. 회개만큼 중요한 것은 정체성(正體性)의 회복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주님이 왜 이 나라를 만들고, 자라게 해 주셨는지 깨닫는 것이다. 
  
  주님이 세상의 끝에서 민족을 살리신 이유는 사명 탓이다. 공포의 심연에 빠져 헤매던 백성을 구하신 이유는 비전 탓이다. 그것은 이승만의 100년 전 기도처럼 일본, 중국을 너머 온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통일한국(統一韓國), 선교한국(宣敎韓國)의 꿈이다. 
  
  내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위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사명과 비전의 성취다. 한국의 현재는 어두워 보여도 그리고 시련이 있어 보여도 사명과 비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심치 말고 낙망도 말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운 것(고후4:16)”이다. 죄에서 돌이킨 우리는 낙심과 낙망이 아니요 사명과 비전을 깨닫는 길로 가자.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통일한국(統一韓國), 선교한국(宣敎韓國)의 꿈을 향해 전진하자. 
  
11. 사명과 비전을 향해 기도하자. 지난 100년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망국(亡國)과 가난(家難)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듯,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분단과 불안과 갈등의 시련을 이겨낼 것이다. 자기를 의뢰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될 때, 기도의 영성을 회복할 때, 바로 그때 지난 60년 이 나라에 임했던 기적은 통일한국에 몇 곱절 강력히 임하게 될 것이다. 
  
  평양, 남포, 원산, 의주, 갑산, 영변, 장진 모든 산골짜기 자유(自由). 自由. 自由가 퍼지게 날 까지 부르짖고 기도하자. 自由가 모든 계곡을 메우는 날, 절망의 산(山)은 깎여 희망의 돌이 만들어 질 것이다. 김일성 가문의 재산으로 태어나 버림받던 백성들은 공포와 궁핍과 저주에서 해방케 될 것이다. 기회, 희망, 꿈이 없다 투덜대던 청년들도 소망을 꿈꾸며 초원과 대륙을 달려갈 것이다. 남북의 백성, 영남과 호남,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산산이 갈라진 7천만은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함께 싸우며 영혼의 자유를 땅 끝까지 전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나오는 그 날을 꿈꾼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건 세대, 거룩·성결·사랑·용기의 성령으로 가득 찬 그 세대가 나올 때 북한도 살고 남한도 살아날 것이다. 세상은 어두워 보여도 주님이 이 땅에 남기신 남은 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때가 차면 이들이 일어나 나팔을 불 것이고 교회는 깨어나 미스바로 모여들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이때라! 잠에서 깨어나 나팔을 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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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의 새로운 계산법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에 따르면 100에서 97을 뺀 3과 100에서 96을 뺀 4를 더한 7을 다시 100에서 뺀 93이 앞 두 자리에, 3과 4를 곱한 12가 뒤 두 자리에 자리합니다.
 
90단위의 곱셈 계산은 암산으로 하기 어려운데 인도의 수학법으로 하면 암산으로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인수분해를 응용한 것이라 합니다. 과연 인도에서는 실제로 이렇게 계산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다른 사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도 원래 인도에서 쓰던 숫자를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으로 전하면서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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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어린이들은 구구단이 아닌 19단을 외우고 다닌다 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수학이 인도를 IT 강국으로 이끄는 밑바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출처 :  blog.naver.com/hairgo01/1012292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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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YouTube : Supertramp - The Logical Song)


제15장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

하나님의 성회는 그의 초기부터 믿음생활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성경이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생활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믿음은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 (히11:6)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구원(행16:31), 성령세례(행11:15-17), 하나님의 보호(벧전1:5), 자유와 물질적인 공급을 포함한 약속들의 기업(히6:12) 및 증거의 동기(고후4:13) 등은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가운데 있는 것들이다.

모든 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자들이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모범에 유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롬4:20-24) 그들은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눅17:5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믿음을 키워야 한다. (롬10:17) 믿음의 생활은 곧 승리의 생활이다. (요일5:4)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가끔 교사들은 이러한 극단주의들을 옹호하였다. 어떤 때는 추종자들이 이러한 가르침들에서 더욱 벗어나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로 나타났다. 적극적 및 부정적 고백은 최근에 어떤 집단 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 들여진 표현들이다. 이에 관한 책이나 사용 형태에서 나타나는 정의는 이러한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극단들은 표면화 시킨다는 사실이 곧 고백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1:9) 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마10:32, 롬10:9,10) 그들은 선한 고백을 유지해야 한다. (히4:14, 10:23)

그러나 사람들이 교리를 강조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거나 위배할 때는 그들은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주의 일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극단들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떻게 배치되는지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고백하다”라는 단어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정하다, 혹은 자인하다, 믿음을 인정하다” 등이다. 고백은 또한 믿게 된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이나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과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관점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고백을 적극적인 관점과 부정적인 관점으로 나눈다. 부정적인 것은 죄, 아픔, 가난 혹은 다른 원치 않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고백은 바람직한 상황을 인정하거나 자인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과 강조가 있겠으나 결론은 기분나쁜 일이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해질 수 있으며 좋은 일이 적극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같다. 여러 책에 표현된 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가 부정적 자세를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를 계속 긍정할 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는 가난, 질병 그리고 아픔 따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아프게 될것이다. 어떤 사람은 질병 자체와 질병의 증상을 인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은 신자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가장 좋은 것들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신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그들의 돈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 필요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재정적이든 관계없이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받으며,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와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백하기를 시작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가질수 있다고 가르침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입 밖으로 나간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말을 충분히 반복하면 입 밖으로 나간 말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축복을 야기시키는 믿음을 낳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이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문제가 없는 인생을 약속하고 있으며 이것의 옹호자들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문맥에서 떼어 생각하거나,그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시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극단주의는 진리를 왜곡시키며 궁극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상처주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장에 해를 끼친다. 신자들이 믿음의 생활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신 승리에 대하여 연구할 때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균형잡힌 성경의 강조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신자들을 돕기보다는 당황하게 하는 극단주의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서해석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고전2:13) 이 원리의 기본적인 적용은 확립된 교리 안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조명에 근거를 둔 교리만이 이 성경적인 해석법칙을 확인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이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곧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시인하는 것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질병을 시인하는 것이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성경의 조화와 반대되며, 이미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은 적군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다.(역대하20장)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였으며,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져서 강하게 되었다.(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놀랍게 공급하신 것은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시인한 후에 있었던 일이다.(눅9:12,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수고할 수 있게 지도하신 것은 그들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시인한 후의 일이었다.(요21:3-6)

이 사람들은 부정적인 고백을 사실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고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가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을 말하였다. 비록 그들이 부정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하나님은 놀라웁게 간섭하셨다.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해 보면 적극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해진다. 바울, 스데반, 드로비모와 같은 초대교회ㅡ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풍부하고 건강한 상태로 살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교리는 성서의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개발될 때만이 건전하게 될 것이다.

“고백하다”에 대한 헬라어는 “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할 때 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의 어떤 약속을 고백할 때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약속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관하여 적절하게 말하였다. “당신이 복음 안에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싫어하는 것을 배척한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적절하게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교리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고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된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소원을 비쳤을 때 그는 가장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대상17:4) 다윗은 재료를 모으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성전건축은 솔로몬이 할 일이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는 대신에 바울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후12:9)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의 소원이 항상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정욕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타락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으로는 정욕이라는 말보다 기쁨이라고 번역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그 잔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다.(눅22:42)
성경은 신자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는 바울이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당황하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고후4:8) 그때에 단순히 마음의 소원에 근거한 적극적인 고백을 하기 보다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롬8:26,27)
하나님의 뜻은 항상 신자의 계획이나 욕망보다 우선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신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적극적인 고백을 반복하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분좋은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을 수도 있다. 신자들은 바울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난이 없는 삶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신자는 강청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게 만든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적, 육체적 및 영적인 축복의 영역 안에 있으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고백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식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지만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1:5)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셨으나(눅24:49), 또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가르치셨다.(눅11:13)

홍해에서 모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출14:15) 신자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깨우쳐 주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다.(롬12:12, 빌4:6, 살전5:17) 예수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강청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자기의 손님에게 줄 빵을 구하려고 밤중에 찾아온 강청하는 친구에 대한 묘사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본원리가 되었다.(눅11:5-10)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주님이 기도에서 강청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이다.(눅18:1-18) 이 사람들에게 기도없는 적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강청함을 권유하셨다.

하나님은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아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명령들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기도에 기름을 부으셨음을 안다. 강청하는 기도는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표시일 수도 있다.

신자들은 이생에서 고난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자가 환경에서 지배당하기 보다는 환경을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난과 질병은 신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되는 환경들 가운데 들어있다.


만일 신자들이 이 세상의 임금들을 본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고난이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들조차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성장보다는 물질적 육체적 번영에 더욱 관심이 많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본으로 왕중의 왕을 택한다면 그들의 욕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서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에 대하여 기록한 롬8:17이 진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감추기 보다는 그 약함 안에 있는 영광에 대하여 자랑하기까지 하였다.(고후12:5-10)


그리스도는 부요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8:20)

하나님이 그의 예비하신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축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만일에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필요할 때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중요한 것이 비극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을 그만 두신 적이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는 고난 가운데 계셨다. 그는 장로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16:21, 17:12)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다.(눅22:15)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그의 고난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인정했다.(눅24:25,26,32)

신자들이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왕의 모델로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고난당할 수 있음과 때로는 모든 환경을 기분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기분 좋지않은 환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다 왕다운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고난당할 것을 보았다.(행9:16). 후에 그는 골로새인들을 위하여 당한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보았다.(골1:24) 하나님은 신자들의 필요를 공급한다고 약속하시고, 경건한 자를 유혹에서 어떻게 건지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또한 고난을 포함을 하고 있다. 자신을 주님께 맡긴 신자는 이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만일에 인생이 기준 좋은 경험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환멸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며, 그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눅9:23)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들은 항상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믿음에 대한 자랑거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히11:32-40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레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자들은 실재적인 시험을 적용해야 한다.

이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사해 보면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기존의 크리스찬들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데 그것이 당신들과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부추긴다.

믿음에 대한 실재적인 시험은 그것이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가르침이 풍족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가? 혹은 그것이 세상의 난민 가운데서도 역사하는가? 그 가르침이 믿음을 위하여 무신론자의 정권에 의해서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의 손에 순교를 당하거나 가혹한 육체적 상처를 입은 신자들은 자격미달의 신자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우주적인 적용을 지닌다. 그것은 부유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빈민굴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정글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 똑같이 효과가 있다. 그 열매를 시험하는 것은 여전히 교사 혹은 가르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결정하는 한 방법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신자들은 레마라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헬라어 “레마”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으므로 구두 전달(Oral communication)에서 사용된 그대로 그것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짓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레마는 현재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감을 받은 것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이 구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구분은 헬라어 신약에서나 혹은 70인역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두 단어는 헬라어 신약이나 70인역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 70인역의 경우에 레마와 로고스는 둘다 대화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바르”라는 단어(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는 예레미야 1:1과 2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레마와 로고스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23과 25 절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23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로고스”라고 썼고, 25절에서는 “주의 레마는 세세토록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엡5:26에서 신자들은 “물로 씻어 레마로” 깨끗이 되었다고 했다. 요15:3 에서 신자들이 “내가 일러준 로고스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한다.

로고스와 레마 사이의 차이는 성경적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로 말해졌든지 레마로 표현되었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영감된 것이며, 영원하고 힘이 있는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든지 말해졌든지 그 기본적인 특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다. 성경구절은 믿음의 유추나 문맥에 관계없이 선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레마 원리라고 하는 이런 작용에서 사람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그 말씀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몇가지 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 신자들이 성경의 구절을 문맥에서 따로 떼어 놓거나, 어떤 구절은 영원하고, 다른 구절은 현재의 것으로 하는 크리스찬 실존주의의 형태를 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론

어느 교리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이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진리의 전체적인 견해 이하에 근거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에 해를 끼칠 뿐이다. 그것은 때로 성경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견해보다 더 해롭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다면 그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원리와 모순되거나 극단적인 강조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료, 필요에 대한 공급, 믿음 및 신자의 권위 등과 같은 위대한 진리를 가르친다. 성경은 절제된 마음이 승리하는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

잘못 사용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서 물러서려고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과장된 강조가 그들의 기대를 항상 만족시키지도 못하며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하나님까지도 등질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탈선들이 발전되어 가는 사실이 그것들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아니다. 의견차이의 존재가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해야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이 충실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이유이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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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좋은지 알아.

결혼한 지 2년이 넘도록 사랑한다는 말도예쁘(?)다는 말도 전혀 해 주지 않는 무뚝뚝한 남편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새내기 어린 사모에게 던져준 남편의 말이었다.

“...  … ... ?

내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그 쟁쟁한 경쟁자(?) 들을 다 제쳐 놓고 이 남자와 결혼을 했더란 말인가?  성경이 좋아서 언제나 성경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껌벅거리고 앉아 있던 한 가난한 신학생의 무뚝뚝한 그 점에 영적인 매력이 숨겨져 있다고 착각(?) 하고
결혼을 결심한 자신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다.


여자는 듣는 데 민감하고, 남자는 보는 것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좋은 줄 알라니?

그 말 한마디만 믿고 살아가자니 때로는 외롭기도 했고때로는 슬프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어쩌면 무뚝뚝한 자신을 커버하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던졌을 남편의 그 말소리가 꽤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게 되는 것은 또 어쩐 일인가?  내가 그만큼 무디어진 걸까? 아니면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는가?

나는 그 후자라고 믿는다. 세월은 내게 진실이 없는 달콤한 언어보다는 진실을 수반한 침묵의 언어가 가져다주는 깊은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행함은 없이 말만 번드레한 정치인들, 목회자들, 직분자들, 남편들, 아내들, 친구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결혼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좋은 것임을 내가 좀 더 일찍이 배웠더라면...,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원망하며 슬퍼하며 목마르게 지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안 그런가?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요한복음 10:25절下반절 참조 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말보다는 행함에 그 무게를 더 실어주고 계심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때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것 같아도그분이 사랑이심을 의심치 말자. 오늘 당장 내 귀에 들리는 소리도 없고 내 눈에 보이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하여도 그분의 그 침묵하심이 곧 나를 위하심인 줄 믿는다면…,  내 믿음의 여정이 그렇게 목마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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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5년째 극심한 가뭄을 맞고 있습니다.


2014년의 겨울은

기상 관측을 한 이래로

약 150년 만의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그러나 올 겨울은

지난해보다 더욱 가물었습니다.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는 씨에라 네바다는

3월 말에 이미 대부분 지역의 눈이 녹았습니다.


급기야 지난 4월1일,

캘리의 제리 브라운 주지사는

2013년 대비 25% 강제 절수라는

최후의 카드를 빼들었습니다.


국립 기상대에서는

5단계의 가뭄을 규정하고 있는데

2단계(D2)를 Severe Drought으로 규정합니다.


Severe Drought보다

더 심각한 가뭄이 D3인데

D3는 극심한 가뭄(Extreme Drought)을 말합니다.


D3보다 더 극심한 가뭄은

Exceptional Drought(D4) 라고 해서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유례없는 가뭄을 말합니다.


2015년 3월의 경우

캘리의 D3지역이 70%

D4지역이 무려 50%가 넘습니다.


이 수치는

캘리의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심하면

당연히 일자리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가주 농산물의

대다수를 수확하는 센트럴 밸리 곳곳에서

No Water No Job이란 팻말과 현수막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뭄이 계속되어 강수량이 줄면

캘리의 대명사 가운데 하나인 야생화도 피지 않습니다.


※ 아래의 야생화 사진은

   모두 2015년에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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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의 개화에는

날씨와 강우량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비가 내리는 양보다는

비록 비가 적게 오더라도

얼마나 자주 왔느냐가 더 큰 영향을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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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작년처럼

캘리는 최악의 가뭄을 맞았지만


그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멋진 야생화를 피워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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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야생화가 발아할 무렵과

꽃을 피우는 시기에 맞추어

절묘하게 비가 와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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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근 3-4년 동안

꽃을 보기 힘들었던 카리조 평원에도

많은 꽃을 피워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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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캐스터를 포함한

앤털롭 밸리의 지역은


꽃이 핀 지역과

피지 않은 지역이

극명하게 갈리워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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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경우

파피 보호 구역 주변에서

그나마 꽃을 볼 수 있었지만


올해의 경우

파피 보호구역의 야생화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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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건너편에는

그런대로 꽃들이 피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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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올해 야생화가 가장 잘 핀 곳은

바로 야생화 삼각지역 주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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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삼각지역은

골든 밸리, Little Oak Valley와

138번을 이어주는 지역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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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하차피의 블루릿지와

앤젤레스 국유림의 Mt. Liebre와

Mt. Sawmill 사이의 골짜기를 앤털롭 밸리라고 부르는데


야생화 삼각지역은

바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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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야생화 삼각지역을 잘 모르는 이유는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또한

파피보호 구역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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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말하면

야생화 삼각 지역은

발품을 팔아야 접근이 가능하며


때로는

비포장 길도 가야 하기 때문에

일반 차량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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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장소를 알고 싶어서 가는 길을 묻는 이들이 있는데


산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같이 가지 않는 이상 알려줘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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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갔던 작가들은

이곳 삼각지역의 야생화가

올해 최고의 야생화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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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야생화 길은

그야말로 숨막힐 정도로

환상적인 야생화 길이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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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도

이곳에 야생화가 핀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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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캘리의 계속된 가뭄으로


야생화는 점점 더

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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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중순 경에

비가 한 번만 더 내렸더라면

남가주 대다수 지역의 야생화는 절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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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대하던 비는

끝내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피어나던 야생화는

절정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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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극심한 가뭄 중에도 

그나마 좋은 야생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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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상학자들은

가주 뿐 아니라 미국의 남서부에

메가 가뭄(Mega Drought)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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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년 동안 이어지는

메가 가뭄이 실제로 닥친다면


미국 남서부의

아나사지 인디언들이

가뭄으로 그들의 정든 집을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캘리를 버리고 떠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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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 속에서

야생화를 찾는다는 것은

사치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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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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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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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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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a4.bmp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a5.bmp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a6.bmp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a7.bmp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열 네 번째 
질문 기독교인의 소송

기독교인은 소송에 연관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원칙이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다른 신자들을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권면(고린도전서 6:1-8)하면서 바울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는 그러한 행위가 교회의 평판과 그리스도에 미치는 불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해하면서, 언제 법적 행동이 적절하고 언제 적절하지 않은가를 질문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행위에 대한 권위있는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일 그것이 그러한 행동을 허락하는지 아니면 금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은 상해나 손실에 대해서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 니다. 복수에 관한 모세의 율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 출애굽기 21:23,24)은, 오늘날의 공의에 대한 서구세계의 표준으로는 잔인하고 미개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복수하는 일을 제한하고 가족의 불화를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생명 은 생명으로 혹은 눈에는 눈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형벌은 없습니다. 덜 심각한 경우에는 유죄 당사자가 가해자가 받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금전을 지불할 수 있 었습니다 (비고. 출애굽기 22:12 - 23:9). 사울과 그의 후계자의 왕정시대 전에는 재판은 흔히 그 도시의 장로들이 행했습니다 (룻기 4:1-12). 왕정시대에는 시민 사이의 잘못과 범죄에 대한 징벌은 왕과 그의 행정관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열왕기상 3:16-2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표준의 행위를 가르쳤습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며, 겉옷까지 내어주고, 그리고 십리를 동행하라고 지시했 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8-48, 6:14,15). 그러한 행위는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만들었으며, 잘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를 개심(改心)하게 만드는 의도된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로마서 12:17-21). 이러한 “새로운 의로움”은 상해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상해한 것 에 대해 벌을 주며, 혹은 손해에 대해서 배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속 마음 가짐과 그의 “원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가해 한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보상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 하 는 행위가 개인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삼자인 기독교인에게 그들 사이를 중재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었습 니다. 만일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를 전체 교회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기를 거절할 때에는 그를 이교도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18:15-20). 

고린도전서 6:1-8에는 사도 바울이 신자가 다른 신자에 대해 세상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으며 (고린 도전서 1:26-31), 그 소송은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에 대한 것을 취급했었기 때문에, 그 소송은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이름있는 부자 두 사람이 포함되었을 것 같습 니다. 그 소송에 대한 원고(原告)는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거나 (마태복음 5:38-48)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를 포함시키는 대신에 (마태복음 18:15-20), 소송을 제기한 것처 럼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원 앞에서 두 신자들이 투쟁하는 것이 알려짐으로서 기독교 지역 사회가 추문을 빚어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 로 소문났던 교회(고린도후서 11:19)에 그러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고린도전서 6:5)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치욕을 안겨주는 것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뻔하였다고 (고린도전서 6:1-7) 그 원고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피고가 불의를 행하고 속였다고 (고린도전서 6:8)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2-6). 바울은 만일 죄를 범한 사람이 “이방인과 세리”라고 교회가 선언하면 그 소송이 적당 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7). 아마도 그러한 소송은 세상의 정부가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며,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고 하는 로마서 13:1-5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 피해를 입은 신자는 그 문제 를 하나님의 판단에만 맡기고 단순히 잊어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 신자가 기도하고 또 주의 깊게 고려한 후에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에는 먼저 당사자와 직접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그것 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믿는 사람인 중재인을 찾아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교회 앞으로 (담임 목사, 인정받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중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때때로 법적 충돌은 신자와 신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바울 자신은 로마 법 아래서 자신을 방어하는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6:37-40. 18:12-17, 22:15-29, 25:10- 22). 

명백히 바울은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시민에게 관계된 모든 법적 권리의 상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정부의 기능이 정의를 구현하고 잘못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령님께서 주신 총명함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 대한 질문은 절대로 “어떻게 내가 개인적인 복수를 할것인가?” 가 아닙니다. 대신에, 적절한 질문은 “내가 어떤 행동을 (소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해야 사회의 정의를 가장 잘 구현하며,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고,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향을 가장 적게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소진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잘못된 일을 고치기를 거절한다면, 그 때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마태복음 5:38-48, 6:14,15의 말씀과 로마서 13:1-5의 말씀의 균형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개인의 동기부여를 검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1. 상해의 배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속 법원의 힘에 호소하려는 것인가? 
2. 고린도 사회가 아닌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만일 내가 세상 법원에 소송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인가? 
3. 나는 나의 청구(혹은 방어)에 완전히 정직한가? 아니면 자기기만을 통하여 상해금 액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보상을 받기 위하여 (혹은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 고 있는가? 
4. 성령님은 절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에 반하는 권면을 하지 않으시기 때 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기도한 후에, 어떻게 하는 행동이 “성령님에게 좋게 보이는가?” 
5. 추가적인 보호의 일환으로,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 직분의 위치에 있는 다른 신자들의 권면은 무엇인가? 

관심사: 
미국 사회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배상 책임 보험 (liability)과 다른 형태의 보험이 그것입니다. 공중을 위한 정책은 여러 가지 상해에 대한 개인 보상의 방법으로 보험을 제정했습니다. 여러 경우에 소송 관계자는 법적으로 피고일 지는 모르지만 그 상해에 대한 실제적인 지불인은 보험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기독교인이 다른 신자의 나쁜 운전 때문에 심하게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두 당사자 사이의 법적 소송은 개인적인 악한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보험자의 자동차 배상 책임 보험이 보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신자는 (고린도의 경우와 같이) 세상의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기 전에 교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지는 않으며, 공중의 정책에 의해서, 피해자가 단지 법적 체계를 이용하도록 함으로서 그 상해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 지역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신자인 변호사들이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한 조정 혹은 중재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그러한 그룹으로부터 중재를 받는 것에 대한 법적인 이점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적절한 합의서를 통하여, 기독교 중재 그룹이 내린 결정이 세상 법정에서의 결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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