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대통령이 찰래를 방문중에 있다죠.

칠레는 남북 약 1,000km. 동서 약 30km.안데스산맥의 전산(前山)과 태평양 연안의 도메이코산맥 사이에 있으며, 세 주(州)에 걸쳐 있다. 강수량이 매우 적으며, 국지적으로 강수량이 전혀 없는 곳도 있다. 완전한 불모지대이며, 소금과 탄산칼슘분이 많은 진흙이 말라붙어 있는 호수와 소금의퇴적층으로 덮인 지역이 많다.

이 지역은 1860년까지 귀속이 결정되지 않았으며, 경계가 불명확하여 분쟁이 계속되었다. 당시 페루의 영역이 넓었으나 칠레 초석이 풍부한 광산은 볼리비아 영토에 속해 있었고, 주로 페루와 칠레의 자본으로 초석이 채굴된 것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79∼1884년에는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으며, 발파라이소 조약(1884)의 체결로 칠레의 영유권이 확정되고 1905년에 정식으로 칠레로의 귀속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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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lasSohn.jpg 근간의 뉴스 중심은 뭐니 해도 성왼종의 자살 사건이다. 성씨는 대체로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새벽빛'을 보면,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갖은 고생 끝에 단돈 천원으로 시작해 2조원 그룹의 기업을 일궜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를 구구절절이 담고 있다. 그러나 성씨는 자살하기 불과 6일 뒤, 그가 경영했던 경남기업은 주식시장에서 명이 끊겨 퇴출당했다. 반세기 역사가 넘는 '국내 최초 해외 진출 건설사'(1965년) '국내 1호 상장 건설사'(1973년)로 꽤 명성 있던 기업이었는데, 그가 인수한 지 12년 만에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결국 망했다. 경제 논리로 본다면 그는 '실패한 기업인'이다.

허나 그는 죽을 때 곱게 죽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경향신문과 50분간 통화한 내용,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현직 총리와 현 정권 실세를 겨냥한 56자 ‘뇌물’ 메모가 정국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9일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을 때, 처음에 언론들은 그를 ‘자수성가 기업인’으로 예우했지만, 그러나 다음날 소위 친박 핵심들에게 돈을 줬다는 생전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는 죽으면서도 정치를 ‘재개(再開)’한 것이다

고인의 측근은 그는 여.야당을 막론하고 “정치인 150여명에게 150억원을 뿌렸다”고 했다. 정가에서는 정권의 시대를 막론하고 “성완종의 ‘로비’정당은 여당”이라고들 했다. 그의 주변들은 첫째, 돈을 받고 도움을 준 사람 둘째, 돈을 받고도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 등 두 종류의 ‘실세’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번에 회자된 인사는 그 두 번째에 해당하는데, 그보다 더욱 나라에 해악을 끼친 첫 번째 인사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까....현 새민련은 과거 성씨의 유례없는 당시 두 번씩의 ‘특사‘에 대해 또 ’오리발‘을 내밀며 자기들은 청렴(?)했다고 할 것인가?

그의 자서전 '새벽빛'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걸으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솔직히 말해 내 손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소소한 관행을 무시하기 힘들었고,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사업을 해나갈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운운.

정말 그의 말대로 '소소한 관행'을 무시하고는 도저히 사업이 안 되는 사회 탓인지, 본업보다는 정치권을 맴돌며 보험 드는 것이 여전히 비용도 적게 들고 이득이 많아서 정경 유착이 습관화된 것인지, 차제에 뿌리부터 파헤쳐 청산하고 고쳐야 나라가 바로 선다.

우리 사회는 죽은 자에게 너그럽다. 하지만 이제는 ‘실체적 진실’을 추궁할 때다. ‘죽는 자가 반드시 진실만 말하는 건 아니다’라는 걸 우리는 안다. 하지만 대개는 망자의 메모를 진실로 믿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우리 정치가 ‘인간관계’라 부르는 ‘비리사슬’로 움직인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덧 칠이 입혀진 인정적인 미화는 우리를 눈 멀게 하고 또한 폄훼 역시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과 관련, "최근에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는 정치개혁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 일이며,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ㅡ“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이런 부패 문제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나라 경제 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나 중단 없이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진실로 지금은 '향후 대한민국이 깨끗한 정치의 길로 나아가느냐' '족쇄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무릎 꿇고 마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혹자는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대충 넘어가야 나라가 편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조 5백년이 그랬다며 '적당히' 합리화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지독한 내우와 외환을 겪었고 근세에는 6.25 전쟁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죽을 똥 싼 사람들은 애매한 백성들 뿐이었던 치욕의 역사를 덮어두고 하는 소리다.

따라서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특+특검도입‘을 해서라도 전·현 정권 모두의 적폐를 낱낱이 파헤쳐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세워야 할 사명이 박대통령에게 있고, 그리고 그 밖에는 맘 먹고 해치울 사람이 없다.

왜냐면 박대통령은 최소한 '도적질'이나 '비리'에는 단호한 사람이었기에 이번 사태도 일어났다고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3년 후면 그는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될 것이기에 이제 결코 망설이거나 야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Texas Dallas에 살고 계시는 손남우님 불로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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