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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맺으며)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3-15]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둘째, 왜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냐는 거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세례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여 그들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 이었고
그 표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를 예수님은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도 세례요한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태어나서부터 나실인 이었던 세례요한 같이, 우리를 선택하여 예비하신 길은
서원하여 작정하여 마치 나실인이 된 것처럼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은 은혜의 언약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가졌기에, 주의 길을
내 삶의 자리에, 이 땅에, 예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똑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의 삶에 찾아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대한 메시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죄인 인 우리를 찾아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며 긍휼이고 자비이며 인자(Great kindness)이며
이 모든 뜻이 소망이신 하나님의 의(공의)이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19-22]

둘째, 왜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을까?
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표현했고
KJV 에서는 ‘Then he suffered him. ’ 이라 표현했을까...
세례요한은 의로우시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례 베풀기 힘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 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셨다.
[And Jesus answering said unto him,
Suffer it to be so now: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Then he suffered him. :15]
이와 같이 하여 우리로 모든 의(공의)를 완벽하게 이루는,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로
예수님의 통하여 알려주신 복음(Gospel)인 기쁜 소식
이를 알려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내주(來住)까지 하시는 성령님
이 모든 의(복음)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에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물에서 올라오실 쌔
나타난 표적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합당함을 보여주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마태복음 3: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 가지 표적이 일어났다.
1.하늘이 열리고(the heavens were opened)
2.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님 위에 임하였고(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3.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있었다.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성령으로 인(印)쳐서 말씀으로 각인(刻印)된 성도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는 우리의 소망인 천국이 열렸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 복음이 되었다.
세례요한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메시아 되신 증거인 표적이 되셨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 이니이다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히브리서 1:8]

맺으며:
교만이 무엇일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자랑, 그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성경의 교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자랑으로 눈이 멀어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도,
알면서도 어떠한 이유로 침묵하는 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교만한 자 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으로 거울을 삼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
내 자신의 교만이 보이며
또 공동체를 바라보면 공동체의 어그러진 신앙의 길이 세속화된 종교의 길이라
교만의 길이라,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말라기 3:15]
반복되어온 자신의 교만 된 길에서
반복되어온 공동체의 교만 된 길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하나님의 의(공의)로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듯이(말라기 4:2) 굳어져 화석처럼 변한 종교적인 의식에서 순수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한 자들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하나님의 의(공의)를 일주일에 한 편씩 쓰겠다고 시작했으나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에 무리하다는 판단에
자신은 글을 쓰는 속도 보다 글을 올리는 속도가 늦어졌다.
첫 번째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와 교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 간증과 곁들어 주장하는 글로 시작하여
몇 가지 소제목으로 전개하고 이를 한 단으로
두 번째 단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세례까지
세 번째 단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네 번째 사도들의 사역
다섯 번째 계시에 대하여 자신이 바라본 성경을 가감 없이 써서 논의하고
자신은 공감된 동의든 신랄한 비판이든,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의 신앙으로
근본 된 믿음을 바탕으로 토론이나 논의를 같이 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분별력으로 믿음이 더 굳건히 터를 잡고
분별력만큼 낮아져서 믿음의 영역이 넓어지는,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각인된 가슴으로
안목이 넓어져서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그런 계기가 글이 되었으면 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꿈이 있었기에 글을 시작을
2013년 10월16일에 시작하였고 10월16일은 주님을 사랑하시던 육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라 더 의미 있는 시작이었는데 이제 1년 반 만에 걸쳐 쓰던 글을 마치려 하니
아쉬움도 많고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나타낸 부족한 글이 되었지만
내게는 올바른 글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경전체를 읽으며 자율 성경공부 한 기간 이라
신학과 교회사를 여러 권 읽으며 나름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라 감사했고
그간 시험과 고통의 참을 수 없는 시간도 있어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지만
어려움 중에서 성경을 읽는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이 넘쳤던 날들도 많았고,
이 짧은 시간이나마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브레싯 바라 엘로힘 하 샤마임 브엣 하 에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성경의 서두에 선포되는 첫 말씀이며, 여호와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히브리어 “브레싯”은 “처음에, 시작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n the beginning,’ 헬라어로는 “엔 아르케”입니다.
“바라”는 “창조하다. 무에서 유를 짓다”라는 뜻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임’이 끝에 붙어서 복수(複數, plural)입니다.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럿이신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럿?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이게 말이 돼?” 이런 의문이 들었을 텐데 유일신사상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기록하고 필사할 때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 하지 않고 복수명사인 “엘로힘”을 그대로 기록하고 또 필사한 것입니다.

“엘로힘”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대인들은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단순한 유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샤마임”도 끝에 ‘임’이 붙은 복수명사 “하늘들”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heavens, 복수로 써져 있습니다. 궁창, 하늘, 삼층천을 의미할 수도 있고, 끝없는 우주공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에레츠”는 땅입니다. 땅은 단수(單數, singular)입니다. 지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이 말씀이 성경의 기초입니다.
어떤 거대한 빌딩도 기초 없이 세워질 수 없듯, 성경도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공중누각(空中樓閣; 공중에 지은 집)이 되고 맙니다.
아니,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기꾼, 도적으로 여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건물의 기초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뒤덮이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끄떡없는 건축물이 그 기초를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믿지 않거나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창조주이심은 그 지으신 피조세계,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엄위가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창세기 기록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시비하고 부정하려 합니다.
말씀으로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기록을 근거로 우주와 지구의 탄생이 6천 년 전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6천년전이라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굳세게 6천년전 6일창조를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무오설을 내세우고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틀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첫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사역을 보여주시려고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1절 다음에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라고 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1절과 2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긴 시간과 엄청난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간격이론(間隔理論, Gap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1절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과 2절 사이에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중에 루시퍼를 위시한 천사들의 3분의 1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서 패배한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마귀가 되었고 그 하늘전쟁의 결과로 땅이 망가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격이론” 역시 하나의 설(說)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지 아니한 사실을 억지로 추리해내거나 상상해서 믿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만유를 어떻게 만드셨는가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비밀에 두신 것을 억지로 풀다가 실족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요.
그보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실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의 말씀)

요한복음 1장을 읽어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창세기와 매우 흡사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우주만유를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 아들 하나님이 빛으로, 그 안에 생명을 담아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살리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지 못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같아서 성령의 깨우치심 없이는 눈앞에 오신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그래서 빛이 있기 전에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두움에 갇힌 죄인의 마음 위를 운행하실 성령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성령님이 죄인의 마음을 여시는 것으로 시작되며 창세기에서 창조사역은 성령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첫머리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의 마음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실 때 마음을 여십시오.
당신에게도 생명의 빛, 예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 풍성하신 역사, 창세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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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제발! 한국교회 vs 헤르만 바빙크]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고 서로 싸움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벌어지는 양상은 좀 다릅니다. 예전에는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판을 벌였다면, 오늘날은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모호하게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칭의에 성화를 뒤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릇되게 칭의만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그저 천국가는 티켓 하나 확보하는 것 정도의 싸디 싼 복음으로 만들었는데, 최근 이것에 대해 맞짱뜨기 위해 등장한 신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책임있는 삶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에다 행위를 섞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래저래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이쪽 저쪽에서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에 대하여 바빙크는 노, 노우!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도 결정적인, 아니 전부라고 말합니다. 칭의도 성화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 그분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칭의와 성화에 대해 바빙크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 ^^

헤르만 바빙크는 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에서는 우리가, 우리 바깥에 있고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근거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이 선언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우리 편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지극히 분명하게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우리 속에 부어지는 은혜를 거론할 때에, 우리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다만, 이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선포되는 근거가 되는 그 의의 일부로 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과 죄의 오염의 제거가, 서로 혼동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의의 완전함이 제거될 것이고,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위로와 확신을 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무조건 예수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합니다. 일종의 복음 세일즈죠. 정작은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저 천국'가는 기차티켓으로 확보하려는 한국교회. 예수믿는 것은 이 땅에서의 공의와 형평, 그리고 인애를 행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대해 잘 말하지 않고 있어요. 칭의론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바르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왜곡된 칭의론을 두고 또 다른 신율주의적 언약론으로 칭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허수아비 논쟁인 거죠.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칭의를 이해한다면, 정말 개혁자들이 말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의 구원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과 행위가 따로 놀고 칭의와 성화가 싸움하게 할까요?

그런 차제에 등장한 그릇된 신율법주의적 칭의론도 저희는 경계합니다. 율법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율법적 순종을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아 최종적 칭의의 근거로 삼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심각한 오류니까요. 우리의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를 배제하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의 실체, 곧 황금사슬임을 못보니까 그래요. 칭의와 성화 등,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사건'인 거 거든요. 거듭난 자에게는 참된 믿음의 고백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귀결되니까요. 이것은 모두가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하심에 기초되었고 그리스도의 십가가의 공로의 효력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이기 때문인 거죠.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대해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취하신 이 성화는 우리의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 우리에게 부어지는 바 은혜라는 것이 실제로 있으며,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도 있으며, 의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것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모든 은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칭의도 성화도 하나님의 큰 일인 거죠. 결국 우리가 자랑할 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베푸심과 구원의 유일한 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오늘도 고백할 뿐이에요. ^^::

출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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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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