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小考)

- 총신원보 주최 제1회 논문공모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Ⅰ.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강단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는 곧 설교의 문제요,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교리상의 문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으로 개혁 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코필드 주석의 영향과 샌디먼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가 만연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C.C.C. 선교 단체의 사영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구원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원론의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존 머레이(J. Murray)교수는 '확정적 성화' 교리를 통하여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역설하였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청교도들이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이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등의 설교자들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소논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서 재고의 작업 없이 일반화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를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구원의 교리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형 교회 내의 알곡과 가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본 논문을 통하여 작은 문제 제기라고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Ⅱ.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찰스 핫지(C. Hodge), 제임스 보이스(J. M. Boice), 로버트 답니(R. Dabney), 존 번연(J. Bunyan),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조지 휫필드(G. Whitefield)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찰스 스펄전에게 극찬을 받았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프린스턴(The Old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탁월한 조직 신학자였던 A.A.핫지(Hodge)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길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결론

필자가 짧은 이 소논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이 완전주의(Perpectionism)는 물론 아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이 필자도 완전주의를 거부한다. 지상에 있는 성도중 그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화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한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다시 말하여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을 예배당에 출석하고 믿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심각한 구원론에 있어서의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서,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가 구원에 있어서 성도의 열매를 매우 강조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노샘프(Northampton) 목회지에서 그러한 원리를 적용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이러한 실천적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적용이 목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 신자,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3.
존 머레이, 조직신학 선집 Ⅱ,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마틴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1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조엘 비키, 청교도 전도, 김홍만 역, 청교도신앙사, 2002.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7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제프리 윌슨, 뒤틀린 복음,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7.

 

 


개혁주의마을

조직신학회 전국대회서 공헌배 박사 발제… 한·중·일 신학포럼도 진행

 

▲한국조직신학회 전국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조직신학회(회장 배경식)가 9일 오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에서 제9회 전국대회를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했다. 특히 공헌배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 연구교수)가 ‘방언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고찰’을 제목으로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공 박사는 우선 “개혁교회의 교리들은 방언기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고,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기도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제대로 하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지를 구별할 수 없으므로 그 기도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공헌배 박사. ⓒ김진영 기자

이어 그는 “칼빈은 방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외를 두었다. 내적 감정의 힘이 부족해 스스로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감정이 격렬해져서 자연적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경우”라며 “칼빈은 현상적으로 방언이 일어나며 또 방언기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고, 지성과 헌신이 따른,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라는 것이 칼빈의 주문”이라고 말했다.

 

공 박사는 칼 바르트의 견해를 살피며 방언기도에 접근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은 흔히 방언의 성경적 근거로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을 예로 든다”면서 “그런데 칼 바르트는 성령 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대면시킨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사건을 소통으로 이해했다. 즉 성령의 임재를 동시통역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리고 칼 바르트는 고린도전서를 주석하면서 고린도 교회야 말로 바울을 속상하게 한 곳이요, 문제가 많은 교회로서, 인간 혹은 영웅들을 숭배하고 이교적 종교행태와의 혼합을 시도해 은사를 오남용했음을 지적했다”며 “따라서 개혁교회의 기도신학이나 목양의 방식을 따를 때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오남용되지 않도록(망령되게 일컬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방언기도 경험하는가에 더 초점 둬야”

 

그러나 공 박사의 발표를 논평한 김화영 교수(연세대)는 “칼빈의 경우, 상당히 전투적인 그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방언기도를 대면한 태도는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이냐의 식별에 있는 것 같다. 칼빈의 초점은 성령으로 인한 방언과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유사방언의 식별과 구분에 있다”며 “개혁주의 교회가 구더기를 잡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고 성령충만함, 그리고 성령과 청중의 하나됨을 경험하는 진정한 방언기도를 경험하고 있는가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활용에 있어서는 특별히 성경적 식별과 지도가 필요하다”며 “성령이 마음 깊은 곳에서 통회하도록 하여,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성령이 신비의 언어로 말하게 할 때, 소통하여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방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즉 공동체에 덕을 끼치도록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방언기도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이날 한국조직신학회는 전국대회와 함께 한·중·일 신학포럼을 함께 개최했다. 이 포럼의 기조강연은 일본의 코이치 기무라 박사, 중국의 왕친성 교수(푸단대), 한국의 김영복 교수(한일장신대)가 각각 맡았다.

 

 개혁주의마을

그랜드 캐년은

더 이상의 말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천혜의 관광지입니다.

 

그랜드 캐년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라도 덧붙인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사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Marvel Canyon에서 시작되는 그랜드 캐년은

동서의 길이가 약 277마일(약 446km), 협곡의 깊이는 1,800m,

폭은, 좁은 곳이 4마일에서부터 넓은 곳은 18마일쯤 됩니다.(6.4km - 29km)

 

그랜드 캐년은

크게는 7개의 지층으로,

세부적으로는 12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진

지질학적으로도 전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화산, 절리, 융기, 퇴적과 침식, 격변(Cataclysm) 등

지질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그랜드 캐년을 형성하게 되었죠.

 

그랜드 캐년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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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or Center 부근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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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 Trail에서 바라 본 Mather Point의 모습....

 

Mather Point(7120ft/2170m)는

그랜드 캐년에서 가장 유명한 포인트이며 가장 넓은 파킹랏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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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쪽에 보이는 파란 숲이 있는 곳이

 Bright Angel Campground와 Phantom Ranch가 있는 곳입니다.

 

가운데 사선의 골짜기는

편도 14.5마일(콜로라도 강까지)의 North Kaibab Trai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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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Trailhead에서 바라 본 Bright Angel Trail의 모습과 첫 번째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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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Yavapai 쪽의 오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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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Yavapai 쪽의 일출 전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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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South Kaibab Trail 쪽의 일몰 전후의 모습입니다.

석양 빛이 O'neill Butte 부근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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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i Point(6800ft/2073m)에서 바라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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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vapai Point에서 바라 본 일몰의 모습입니다.

해가 꼴까닥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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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는 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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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넘어갔지만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운 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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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Mather Point에서 바라 본 일출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뾰족하게 보이는 부분은

Vishnu Temple(7,829ft/2,386m)입니다.

왼쪽의 평평한 부분은 Wotan Throne(7,633ft/2327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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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Rim 방향에서 아침 해가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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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 Trail에서 바라 본 Mather Point 부근의 일출 직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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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출 직후에 본 그랜드 캐년의 아래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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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aibab Trailhead 부근에서 본 일출 직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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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aibab Trail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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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쪽에 길게 이어진 Trail이 Plateau Trai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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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e Creek Vista에서 바라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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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7399ft/2256m)에서 바라 본 서북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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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에서 바라 본 북동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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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에서 만난 여자 레인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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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뷰 포인트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는 글...

 

 

1898년,

그랜드 캐년의 Grandview Point는

그랜드 캐년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97년 당시 이곳에는

2층짜리 통나무 건물의 호텔이 들어섰고

1901년에 그랜드 캐년에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빌리지에서 서쪽으로

11마일 떨어진 이곳에도 철도가 들어설 정도로 인기있는 곳이었죠.

물론 지금은 그 잔해만이 남아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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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ert View Point(7438ft/2267m)의 Watch Tower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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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ch Tower 전망대에서 바라 본 콜로라도 강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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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Tower의 스토어의 창문을 통해 바라 본 Cedar Mountain(7034ft)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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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ed 평원위에 우뚝 솟아 있는 Cedar Mountain(7034ft)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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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Tower내에 있는 스토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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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서

 오른쪽에 앞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Comanche Point(7073ft/2156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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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power21)

 


 

 

 

 

 

 

 

 

 



 

..

 

로이드존스

 

 

징계를 받을 때

  

 

(히 12:5-11)

 

서론 : 영적침체의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결의 과정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에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이다(살전 4:3; 엡 1:4).

 

 

1.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


1.1 구원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1.2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시는 데 몇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그 하나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교리와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1.3 만일 순종치 않거나 말씀의 교훈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다른 방법 - 징계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이기도 하다(약 1:2; 계 3:19).

 

 

2. 징계의 의미, 방법


2.1
징계의 의미 : 징계는 연단을 의미하며, 교정, 교훈, 견책을 내포한다. 징계의 본질적인 목적은 성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연단시키는 것이다.

 

2.2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과 환경을 통해서 징계하신다. 그것이 즐겁든 즐겁지 않든 모두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2.3 징계의 방법 : 물질의 형편, 건강의 문제(고후 12:7-9), 핍박, 우리에게서 자신을 숨기심(호 5:15) 등이 있다.

 

 

3. 징계의 이유


3.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5-15).

 

3.2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참는 것은 우리의 성장이요, 연단이요, 발전이요, 성화이다.

 

3.3 슬프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완전한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 남아 있으며, 옛 사람 그대로이다.

 

3.4 영적인 자신감, 즉 영적 교만 때문이다(고후 12:7-9)

 

3.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다. 그 재능만을 믿고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의식을 가지는 자만심 때문이다.

 

3.6 세상과 그 세상의 여러 모습들과 그 풍조에 매혹당하는 위험이 있다.

 

3.7 우리가 자신의 귀를 의뢰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미 도달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뽐내는 위험이다. 해가 바뀌면 우리의 신앙도 성장해야 할터인데 실제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보다는 천국에 마음을 두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아는가?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시 119:71)

 

3.8 우리가 만일 항상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썼다면, 모든 일이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3.9 만일 늘 성공한다면 낮아지게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아져서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때때로 우리를 연단시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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