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는 배척해야 한다

황상하 목사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 성경 말씀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죄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지만, 죄 짓기를 좋아하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으니 죄를 미워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죄인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죄는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아닌 다른 피조물은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관계 되지 않는 죄란 있을 수도 없고 미워하거나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언뜻 좋은 말 같이 들리지만 하나님도 인간도 나아가서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말이고, 모호하고 개념 없는 휴머니즘일 뿐이고, 나아가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선이나 악이나 죄는 인격적 존재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전제의 토대에서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을 때도, 인격적 존재인 사람과 관련 없는 악이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악이나 죄를 미워하는 것은 곧 악인과 죄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도 하나님처럼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죄와 악이 인격적 존재와 결부되어 있음을 전제할 때 악을 미워하라고 한 것은 곧 악인을 미워하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아가서 죄를 미워하라는 경계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죄인을 미워하라는 것 임도 자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죄인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성경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신다는 말씀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징계와 영벌로 다스리십니다. 죄인에 대한 영벌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한정 용서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은 징계입니다. 징계란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에 교회의 치리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는 그를 권하여 회개하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마 18:15-20). 물론 죄인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나 교회의 판단도 하나님의 판단처럼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죄인에 대한 치리를 엄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따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태도로 치리를 해야 하되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이방인처럼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런 자는 교회에서(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일반 교인이 죄를 지은 후 교회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는 이방인처럼 여기고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교회에서 내어 쫓는 것의 의미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가 내어 쫓기는 치리를 받고도 계속 교회에 나오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치리는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교회에서 물리력이 동원되는 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자가 일반 교인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이고 지은 죄를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더욱 복잡하고 그 폐해는 일반 교인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범죄 한 지도자의 경우에도 치리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흔히 지도자는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존중하는 태도는 장려할 일이지만 지도자의 죄는 사람이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를 지은 지도자도 가능한 회개할 수 있도록 이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일반 교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하여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지도자는 배척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를 배척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를 배척하는 경우에도 그 방법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치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가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합법적 절차를 따라 치리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교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합법적 절차와 질서를 따라 그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배척하는 마지막 방법은 그가 지도하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 교회 타락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죄를 지은 개인을 치리 하는 책임과 의무가 교회라는 공동체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힘이 되는 행위는 그가 지은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교 시절 신학교와 교단이 어려웠던 때 평소에 존경하던 교수님의 태도와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입학 부정과 교수의 고유 권한까지 무시되는 일이 일어나자 그 교수님은 학교를 떠났습니다. 원로 교수가 그 교수를 찾아가 돌아오기를 간곡히 권하였지만 그분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그 교수님이 학교로 돌아오기를 거절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 제가 타고 있는 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 배가 잘 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안다면 두 지가 선택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는 모든 노력을 다해 배를 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 최종적인 방법은 그 배에서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분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별난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그 태도는 지금까지 나에게 깊은 인상과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그분은 그러한 결정이 신앙양심상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가 주도하는 교회에 나가는 교인이라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기도하며 그 지도자가 회개하게 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지도자를 사임하게 해야 하고, 그것도 용이하지 않다면 그 자신이 그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도자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교인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지도자의 타락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나 나라의 문제나 지도자만 탓할 일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공중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고 그 집단에 소속된 이들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를 합법적이고 질서를 따라 배척하되 배척하는 행위가 폭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교인의 의무요 책임이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가 현저하게 드러났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계속 다니거나 그를 돕는 것은 그 지도자의 행위를 독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도자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28-32 -

출처: USA 아멘넷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 되었고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 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 고 말한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 않는다. 가령 교통사고 현장에 10여명이 함께 도착했다고 하자. 똑같은 현장을 목격하지만 저마다 보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한 남자는 운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한 여자는 사고를 자세히 관찰한 후 휴대전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사고 현장을 설명한다. 한 은퇴한 여교사는 길가에 죽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경악하고 있는 두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한 간호사는 부상이 심한 사람들에게 즉시 응급조치를 취한다. 한 목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한 목격자를 보고 곁에 가서 진정 시킨다. 어떤 사람은 혼란 스러운 상황을 보고 요긴하게 쓸수 있도록 자기 차에서 담요며, 조명기구며, 비상용품을 가져다 놓는다.

같은 사고를 보면서도 저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은 저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의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 기관을 더욱 효율적인 체제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문제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헤비타트 운동 같은 기관에 몸담아 주택문제를 줄여간다.

나는 세상에 잘못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문제가 내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청소년 흡연, 에이즈 확산, 무능한 정부,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높은 문맹률, 난민문제.. 이런 문제들을 알고 해결을 돕고자 가끔 돈도 보내지만, 이런 일로 밤잠을 설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게도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내 눈에는 영적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인다. 기독교 신앙을 실 생활의 경험과 연결시킬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찬 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올라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의식에 이끌려 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 제랄드 싯처, 하나님의 뜻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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