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수 없는 빚


오래전 미국의 보스톤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

했습니다.그러나 바턴씨는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는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 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 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멋진 것이었습니다.

 

"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 합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은덕과 사랑은 영원이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




사도행전 2장 42절에 대한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것들은 기도에 대하여 성경에서 언급된 표현들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감”, “하나님께 나아감”, “그의 존전에 들어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이유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바로 그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1750~1850년 어간의 웨일즈 장로교 설교자들이 한 기도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회중들에게 기도할 것을 격려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자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인에게 새 삶을 주시며, 하나님만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2)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을 축복하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절대 군림하시지만 말씀, 설교, 기도, 경건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시어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제시한 실례들

 

① 웨일스 부흥(1736-1790)에서 다니엘 롤란드(Daniel Rowlands) : 설교하기 이전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였다.
② 존 엘리아스(John Elias)는 그 자신의 설교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몇 날이던지 몇 주이던지 계속 기도하였다.
③ 존 웰쉬(John Welsh)는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의 사위로서 기도하면서 여러 날 밤을 지샜던 것으로 유명했다.

 

로이드 존스 그 자신도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이 사실을 그의 부인이 증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마을/아나니아 

 

 

지인에게서 받은 것임.^^

빛이 있으라

 

빛이 무엇일까요?
빛은 파동일까요, 입자일까요?
빛이 파동이라면 수많은 빛들이 충돌과 간섭을 일으켜 엉망이 될 것이고
빛이 입자라면 입자의 수에는 제한이 있을 테니 어디에서나 보이고 아무리 멀어도 보일 턱이 없겠지요.
그래서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다 가졌다 하여 "Duality"로 정의를 합니다.
그러나 "Duality"라는 정의로 빛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들도 빛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못 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직진하는 빛.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라 질량이 무한대로 치솟아 물질세계의 어떠한 것도 넘을 수 없는 벽,
가시광선, 400 옹스트롬으로부터 750 옹스트롬 사이의 파장대에서 무지개 일곱색깔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빛은 신비입니다.
피조세계의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성역입니다.

아무튼 그 빛이 왜 있을까요?
빛이 있어야 우주의 천체들이 운행하고 빛이 없으면 별들이 "아, 어두워. 보여야 가지." 하고 멈추나요?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 우주의 모든 천체에게는 빛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빛은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광활한 우주가 있으면 뭣 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존재, 곧 생명체가 없다면 우주 또한 아무 존재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는 그 존재를 의식하는 주체가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다는 사실은 우주만유가 의식을 가진 생명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광활한 우주공간에 하나님 혼자 계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이라고 인정해주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위대한 창조사역을 하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홀로 지으시고 하나님 홀로 보신다면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습니까?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이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그 분의 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래서 하나님은 빛부터 만드셨을 것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드러나고 나타나며, 창조주이든 피조물이든 서로의 존재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우주만유를 우리와 함께 바라보며 나누기 위한 것일 겁니다.
“우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걸 다 만드셨어요? 굉장하다, 멋지다. 우리 하나님 최고다!” 우리의 이런 감탄에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창조사역일 것입니다.

빛을 지으신 하나님은 빛을 기뻐하시고,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니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 나누어 가시며 나누신 다음 창조사역을 행하십니다.
왜 굳이 나누시는 것일까요?

좋은 것을 나쁜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더러운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빛 가운데서만 창조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베소서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어둠 가운데서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에서는, 혼합되고 뒤섞인 상태에서는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택하신 자로 불러내어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셔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 나오셨습니까?
빛 가운데 행하고 계십니까?
빛 되신 예수 안에 속해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 하던 때, 그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아름답게 시작될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당신께 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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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 박신 목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독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양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과 연결해도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맞으려면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것이 복을 받는 전제가 되기에 하나님도 차별하는 분이 됩니다. 돈 많고 권세 있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역차별을 받는 셈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우선 사람들의 기대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힘든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면 고난을 해결 받는 경우가 자주 있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더 좋아한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아예 그런 기대까지 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진리가 되려면 백이면 백 그렇게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항상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근거는 빈곤과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이뤄지니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보살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현실적 복을 더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었는데 또 다시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쉽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을 더 주는 것이 진실이 되려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구원 후에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본문의 결론도 “이는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복을 더 주시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
자랑이란 반드시 자기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남이 한 것보다 우월할 때에 하는 법입니다. 단지 자기가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재벌 회장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랑한다면 바보입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두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랑은 소유, 자질, 권세의 많음보다는 그것을 이뤄낸 주체의 형편에 달렸습니다. 예컨대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아무 자랑거리가 안 돼지만 돌을 몇 달이나 앞둔 아기가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인간이 자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이유도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빤한 이치를 왜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가 하면 교회 안의 약한 자로 세상의 강한 자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의 강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신자의 자랑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부하고 권세 있게 만들어 세상에서 큰소리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거룩하고 신령한 자로 바꿔주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나 지혜 있는 것이나,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귀한 것이나, 멸시 받는 것이나 멸시하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주셨거나 허락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끼리의 평가, 그것도 상대적 일시적 비교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신자가 자랑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준거를 세상 사람의 잣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 따르기에 세상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아니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데도 세상에 자랑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 그것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면 신자로서 엄청난 자가당착이지 않습니까? 신자와 불신자는 이미 그 인생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정반대로 나뉘어졌기에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자랑할 사이가 아예 아닙니다.

나아가 본문의 근본 주제는 전도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데 있어서 세상에서의 지혜와 문벌이 아무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풍족하다고 느끼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도 자기들의 소유, 신분, 능력만 믿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너무나 허망하고 실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와 평강과 위로가 넘쳐서 그 인생이 거룩하고 의롭게 변하기 때문에 죄악과 사단에 묶여 있는 그들로선 부러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이루시고 또 변화시키는 그분의 사역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혹시라도 구원에 자기 쪽의 원인과 조건이 있었다고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자랑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유일한 기준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확고한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 자랑거리로 삼을 것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뿐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자랑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오직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인간 세상의 경계선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거룩한 영역 안으로 이미 옮겨진 자입니다. 신자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능력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세상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 멸시 받는 신자라도 오히려 그들로 부끄럽게 만들 만큼 거룩하고 신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서있기만 하면, 아니 더 이상 인생으로 자랑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분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자랑하려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소원합니까? 자신을 살찌우기를 간구합니까?

7/6/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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