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참 소망 최송연 어느 날 내 삶의 질곡 속에 살며시 찾아오신 당신 흐르는 안개비와 실바람의 향기가 언 땅을 녹여 싹 틔우듯... 차가운 내 마음 녹여 사랑을 싹 틔워 열매 맺으라 권고하시니 당신은 나의 참 소망입니다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농부의 땀흘리는 수고를 배우라 질책하심으로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시며 진실한 친구라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 맘 아파 울고 있을 때면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고 이겨내라 토닥거려주시는 분, 날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 당신이 계시지 않으면 사랑의 열매도 생명도 없으니 당신은 나의 참 소망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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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최송연

 

 

모처럼 맞는 휴일 이른 아침
게을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진한 커피 한 잔으로 다잡고
차를 타고 한 이십분 남짓 외곽지로 나가니
거기 등산하기 안성맞춤인 산이 있습니다.

이른 시간에 찾아온 블청객에 놀랐던지
산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나고
하얀 안개가 띠처럼 둘러쳐진 숲 속은
마치 선녀의 치마폭같이 부드럽습니다.

숲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는바람 결을 타고
내 코 끝을 살살 간지럽히며 파고 듭니다.
달콤한 향에 이끌린 나는 향이 날아 오는 곳을 찾아
우거진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라가 봅니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가파른 곳을 지나니
그곳에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떡갈나무들 사이에 여리디 여린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향나무는 덩치 큰 떡갈나무 그늘에 가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
잎이 노랗고 길쭉길쭉 한 것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어린 잎을 하나 똑 따서 코에 대어 봅니다.
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달콤한 향이 코를 톡 쏘며
말초 신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 행복해 집니다.

향나무는 평소에는 그 향이 약하지만,
어떤 물체에 의해 찍혀지거나,
잎을 하나 똑 따서 맡아 보면,
그 향은 배가 되어 아주 강하면서도 달콤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이
정다운 이의 따스한 미소처럼
아찔하도록 온 몸을 휘감아 옵니다...

달콤한 향을 맡을 때 이렇게 행복해지 듯...
나도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만 하여도 입가에 미소가 도는 사람,
 곁에 있지 않아도 믿음직하며 늘 든든한 사람,
가진 것 없어도 넉넉하여  마음이 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향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억세고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어
향나무가 선 자리는 한 뼘이 채 안 되는 듯 해도
그곳에서도 향나무는 향나무입니다


 

다른 이가 설 자리마저 빼앗는
떡갈나무 같은 사람 되기 보다는
내가 설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고, 찢겨도
불평 대신 향기를 선사하는
향나무 같은 사람 되는 것이 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향기를 따라
숲을 헤치며 먼 곳까지 찾아올 테니까요.

날카로운 창과 대못에 찔린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렇게...,
세기를 거쳐 생명의 향을 전해 주고 있건만... ....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 15-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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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임금님께서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이곳 저곳을 시찰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시골의 넓은 들판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많은 염소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 목동 한 사람이 이끄는 염소떼가 눈에 띄었는데
      이 목동이 얼마나 염소떼를 잘 모는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염소들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임금님께서는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잘 가르치면 좋은 신하가 되겠다 싶어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몇 년 동안의 교육 후에 그에게 작은 일이 맡겨졌는데
      얼마나 일을 지혜롭게 잘 감당하는지 맡기는 일마다
      임금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해 내었습니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나중엔 나라의 모든 재물들을 관리하는
      재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왕궁에 있는 많은 신하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목동 출신 주제에 임금님의 총애를 받더니
      급기야 재무대신의 자리까지 오르다니..."

      모든 신하들이 그의 헛점을 잡아 왕궁에서 내 쫓으려고 했지만
      얼마나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지 도무지 허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해 낸 것이 첩자를 붙여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고,
      뭔가 이상한 행동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재무대신에게 무언가 이상한 행동이
      한 가지 발견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매일같이 왕궁의 모든 불이 꺼진 늦은 밤에
      재무대신이 작은 등을 손에 들고 왕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방으로 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후 한참 있다가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방의 열쇠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고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생각하기를
      "그럼 그렇지! 나라의 보물중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보물들만
      몰래 훔쳐다가 그곳에 쌓아두고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고
      바로 임금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임금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재무대신을 잡아 들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그 방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 그 방을 뒤지고 돌아온 신하들이 보고하기를
      "그 방에는 보물은 커녕 동전 한 닢 없었고 작은 책상 위에
      허름한 옷 한 벌과 다 떨어진 짚신 한 켤레만 놓여 있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이 궁금해진 임금님께서 재무대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재무대신이 대답하기를
      임금님 저도 사람인데 왜 저라고 나라의 보물을 만질 때마다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비천한 목동이었을 때
      그리고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때 임금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옷과 신발은 제가 목동이었을 때 입고 신었던 것들입니다.
      그곳에 가서 저의 옛 모습을 기억하면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임금님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그 유혹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무대신의 그 말에 신하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으며
      임금님께서는 재무대신에게 큰 상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 간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유혹을 견디고 신앙적 초석이 될 만한
      그런 초심의 작은 방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오래전에 올렸던 글을 리바이벌 했습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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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소장(목사, 가족관계연구소장,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전 침신대 교수)은 이단대처 사역자 중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는 저술가이자 탁월한 번역가다. 또한 기독교 상담심리학자(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상담심리학 석사)다. 기독교 상담심리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 교수의 번역서를 한번쯤 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다수의 상담 관련 저술을 한국교회에 소개했다. 가족관계연구소를 설립해 기독교인들의 대화와 소통을 위해 30여 년 이상을 가정 사역자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단대처 사역자로서 최삼경·이영호·진용식·박형택 목사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2015년 3월 6일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정 목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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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사역과 이단대처 사역은 정동섭 목사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정 사역은 이단대처 사역의 또 다른 이름”


정 목사에게 있어서 이단 대처는 또 다른 측면의 가정 사역이다. 정 목사가 이단대처 세미나를 할 때 반드시 본문으로 하는 말씀이 있다. 디도서 1:11이다.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더러운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마땅치 아니한 교리들을 가르쳐 집들을, 가정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무너뜨린다는 지적이다.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세뇌되면 가출과 이혼의 열매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성경 본문과 주제는 심각하다. 긴장감도 있다. 하지만 정 목사의 강의에선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 나온다.


강의할 때 그는 진지하게 어떤 개념을 설명한 후 “아는 척 하지 말고 받아 적으세요!” “내 말이 틀렸다는 말입니까?”라며 반문한다. 웃음 포인트는 의외로 이런 데서 터져 나온다. ‘이단’문제라는 매우 딱딱한 주제를 갖고 강연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종 잔잔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그의 생생한 체험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디도서 말씀을 근거로 정 목사는 가정을 세우는 사역과 이단 대처 사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제시한다. 가정을 회복하고 바로 세우는 게 가정 사역인데 이단교주와 추종자들은 모두 역기능가정 출신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의 가정에는 예외없이 불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 사역을 하는 자신은 필연적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이단에 대해 비판하고 경계하며 대처해야 했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배경에 “불안정한 현대 가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증가하는 이혼, 잦은 이사와 전근, 성도덕의 문란으로 외로움과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다가 ‘거짓된 사랑의 공동체’를 만나게 되고 이단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소속감과 즉각적인 해답 그리고 일시적인 돌봄을 제공받기 때문에 이단에 몰입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정 목사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가정을 대화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며 “결혼예비교육, 부부역할 및 부모역할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가족 구성원들이 효과적 대화기술과 문제해결기술을 습득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간다면 이단 교주는 물론 이단단체들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역설한다. 건강한 가정 만들기가 결국 가장 근본적인 이단대처 사역이라는 게 정 목사의 생각인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부부간의 대화에 많은 관심을 둔다. 정 목사가 제시하는 방법론은 ‘A, B, C 대화법’과 반영기술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가정에 필요한 것은 그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심정대화다. 말할 때는 ABC 공식에 맞추어 말한다. “A상황에서 당신이 B를 했을 때 나는 C를 느꼈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낮에 전화를 아무리 해도 당신이 안 받으니까 걱정이 됐어요.” 듣는 사람은 상대의 말을 자세히 듣고, 반영한 후에 반응을 하라는 것이다. 듣는 사람은 들은 내용을 요약해서 반복한다.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걱정했다구. 그 때 회의 중이라 받을 수가 없었어.” 이를 반영 또는 바꾸어 말하기 기술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나누다 보면 정서적 친밀감도 생기고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정 목사의 생각이다.

정 목사는 말한다.

“대화는 부부관계의 혈관과도 같은 것이다. 대화가 사실상 일상적인 대화밖에 안하는 경우, 소통은 대화경화증에 걸린다. 집에서 ‘밥 먹으세요’, ‘나, 나갔다 올게’ 등 부부간의 대화가 일상적 대화에서 끝나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대화, 친목(심정)대화의 단계로 나가지 못한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대화를 하지 않고 삶을 나누고 희노애락을 나누는 대화를 하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금방 정서적 이혼상태에 이르게 된다. 설상 부부들이 교회에서 대외적으로는 멋있게 보여도 그건 ‘사이비’ 친밀감에 불과하다. 정서적 친밀감은 오락적 친밀감으로 이는 다시 성적 친밀감으로 이어진다. 정서적 친밀감 없이 성적 친밀감은 불가능하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게 부부관계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이 평생의 반려자와 즐겁고 행복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자신이 목양하는 성도들이나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된다. 정 교수는 “남편은 아내가 ‘당신 최고야’라며 인정할 때 활력 있는 인생을 산다, 아내는 남편이 ‘여보, 사랑해’라고 표현할 때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빠진다”며 “가정에 행복이 넘칠 때, 이단에서 소속감을 찾는 사람들은 줄어 들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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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섭 목사의 사무실에 진열된 책자와 액자들


구원파에서 몰몬교로, 그리고 형제교회로···


가정 사역과 이단대처 사역을 함께 하는 정동섭 목사에게는 언제나 ‘구원파 탈퇴자’라는 이력이 따라다닌다. 그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경희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구원파(권신찬·유병언 씨측)에 미혹돼 8년 동안을 허송했다. 정 목사는 자신이 구원파에 빠지게 된 계기에 대해 “친구가 ‘성경을 통달한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자’는 권유 때문에 유병언 씨를 알게 됐다”며 “성경을 통달했다는 유 씨의 성경이 닳을 대로 닳아 있는 것을 보고 믿음이 갔고 말할 때마다 성경을 인용하는 유 씨의 모습에 압도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유 씨의 통역 비서로 세계 곳곳을 함께 다니며 유 씨의 실체를 옆에서 보고는 너무도 실망해 탈퇴했다”며 “탈퇴한 후 미국 대사관 직원을 만나서 미혹당해서 간 곳이 몰몬교였고, 또 다시 탈퇴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모임인 형제교회와 지방교회까지 방황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국, 미국, 중국계 이단을 국제적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며 “그렇게 이단 단체에서 10여년, 허송세월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단에 빠져 있을 때, 정 목사는 불행했다고 회상한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성도의 교제’를 핑계삼아 구원파 교인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정 목사의 아내, 이영애 사모는 심신이 쉴 수 있는 날이 없었고, 무리한 헌금과 교제비 지출로 말미암아 정해진 월급으로는 생활을 이어나갈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구원파식 ‘시한부 종말론’에 세뇌돼 “예수님이 올해 오실지도 모르는데 집이 뭐 필요하냐?”며 아내가 저축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윽박질렀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무조건 화를 냈고, 언성을 높여 아내위에 군림하려 했다고 한다.

구원파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정 목사의 아내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삭이느라 위계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신경증 환자가 됐다고 한다.


당시 정 목사는 “나는 구원파에 빠졌을 때 늘 독선적이고, ‘나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가족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며 “나중에는 가족들이 ‘너처럼 될까봐 안 믿는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구원파의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사람을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게 만들었다. 정 목사는 “이런 독선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내가 사랑의교회에서 참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나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의 되어 아내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정 목사는 이단에 빠졌던 사람의 방황이 끝나려면 반드시 이단 상담을 해야 한다며 자신도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회심하게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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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 나와 유병언 씨 구원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정동섭 목사


정 목사는 “1980년, 사랑의교회 개척 2주년 여름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옥 목사의 강연을 들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처음으로 일깨워 주셨다”며 “그동안 나는 구원파에서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깨달았으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구원파를 탈퇴해 정통신앙을 갖게 된 후 정 목사는 구원파 ‘저격수’로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구원파측과의 소송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필자와 만나던 날도 그는 오후 3시에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을 방문하기 위해 분주했다. 세월호 사건 후 그는 TV조선을 비롯해 종편채널에 200회 이상 출연해 유병언과 구원파의 실체에 대해 증언했다. 방송 중 발언으로 인해 구원파와 천부교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총 20회 이상 고소를 당했다. 그의 구원파와 이단을 향한 대처 사역은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구원파 뿐 아니라 정 목사의 이단대처 사역은 정통교회에 기반을 둔 ‘회색분자들’을 향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정 목사는 말한다. 한국교회 이단 문제의 현실에 대해 ‘색깔’로 비유해 설명했다. 정통교회가 하얀색이라면 이단·사이비 단체를 검정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정통교회와 이단·사이비 단체를 오가는 회색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이단대처 사역자들을 가장 괴롭히고 한국교회의 이단대처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은 ‘이단·사이비’가 아니라 오히려 회색분자 이단브로커들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이 이단대처 사역자들을 ‘이단 감별사, 이단사냥꾼’으로 몰며 한국교회의 이단연구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 목사는 “구원파와의 보이지 않는 커넥션을 맺으며 이단연구가들을 죽이기 위한 전략을 시도하는 인사들로 인해 이단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며 “<하나 되는 기쁨>이라는 책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음란성과 이단성이 있는 책으로 매도돼 이단옹호단체로 변질된 기관에 의해 사이비로 몰린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어두움의 공격에 <부부연합의 축복>(요단)이라는 책으로 응수했다. 이단 구원파에서도 정 목사를 음란한 가정사역자라고 그를 매도했으나 30명의 넘는 신학자와 교수들이 그의 책을 아주 건전한 성생활 지침서라고 추천했다.

정 목사는 이단은 이단이니까 이해가 되는데 이단 편을 드는 정통교회내의 이단 브로커, 회색분자들이 더 무섭다며 그들은 정통교회 목사, 장로의 직분을 갖고 이단과 결탁해 대변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분별이 필요하고 이들에 대해서도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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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섭 목사의 대표적 저술


정동섭 목사는 1947년 충북 음성군 장호원에서 6남 4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동녘 ‘동’(東)에 불꽃 ‘섭’(燮)을 쓴다. 정 목사는 이단의 특징에 대해 첫째는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준다고 말한다. 우리만 선택받고 들림받는다,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인데, 이단은 자기들의 교리를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며 거짓된 확신을 심어준다.

 

둘째 이단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가정파괴세력이라고 한다. 정 목사는 이단에 빠지면 가족간이라도 상호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너희 집안에 원수가 있다’는 성경말씀을 잘못 해석해 가족 관계를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셋째는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한다.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교회로 들어가 교회를 파괴하며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정통교회는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주며 성도들이 풍성하고 행복하고 거룩한 (가정·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돕지만 이단들은 거짓된 확신으로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린다”며 “이단대처 사역자들이 이단을 막는 것은 물론 이단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혼을 막는 지름길은 행복한 결혼률을 높이는 것이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이단들이 끼어들 틈을 못 찾는다”며 “행복한 가정 만들기가 이단대처의 지름길이다”고 강조하는 이단대처 사역자이자 가정 사역자이다.

 

그의 대표적 저술에는 <자존감 세우기>(요단),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베다니), 박옥수 이요한 유병언의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JOY), <부부연합의 축복>(요단), 역서로는 <강자와 약자>(폴투르니에, IVP),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폴투르니에, IVP), <모험으로 사는 인생>(폴투르니에, IVP),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찰스쉘, 두란노) 등 다수가 있다.


호주 <크리스찬리뷰>(권순형 발행인)와 공동기획한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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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어느할머니의 소지품중 유품으로 단하나 남겨진 이 시가 양로원 간호원들에 의해 읽혀지면서 간호원들의 가슴과 전세계 노인들을 울린 감동적인 글 입니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원 아가씨들. 제가 어떤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대체 무슨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 마저도 흐리멍텅한 할망구 일테지요. 먹을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기나하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할줄도 모르는것같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나'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 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 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넘기는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 줄게요. 저는 열살짜리 어린 소녀였답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언니,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스무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정다운 남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되어 아이를 품에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았답니다. 마흔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있어 아이들의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살이 되자 다시금 제 무릎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 입니다. 암울한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에 저를 떨게하고 있네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뚜렸이 난 기억 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 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 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잡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도 짧았고 너무도 빨리 가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때가 온것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 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의 참 모습을 말예요." 누구나 다 똑같이 늙어 갑니다 나이가 든다는것,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게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날인지 어렸을때 어른들은 우리에게 참 좋은때다 라고 말했지요 지금의 저를 보고 더 연세가 있으신분들은 지금도 좋은 때다라고 제게 말하곤 합니다 이 좋은때에 정열을 불태워 뭔가를 할수 있다는건 정말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사랑의 표현을 실천해보세요. 아름다운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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