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秘한 우리의 ""

피가 몸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데에는 46초가 걸린다.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않으면 맛을 알 수 없다.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갓난아기는 305개의 뼈를 갖고 태어나는데 커 가면서
   여러 개가 합쳐져서 206 개 정도로 된다.

두개의 콧구멍은 3~4 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한다.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

뇌는 몸무게의 2%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뇌가 사용하는
   산소의 양은 전체 사용량의 20%이다.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뀐  다.  우리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이 천연의 완전 방수의 가죽
옷을 한 달에 한 번씩 갈아입는 것이 된다.
한사람이 평생 동안벗어버리는 피부의 무게는
48kg정도로 1,000 번 정도를 새로 갈아입는다.

우리의 키는 저녁때보다 아침때의 키가 0.8 cm 정도 크다.
  낮 동안 우리가 서 있거나 앉아있을 때 척추에 있는 물렁한 디스   크 뼈가 몸무게로 인해 납작해지기 때문이다밤에는 다 시 늘어난다.


우리의 발은 저녁때 가장 커진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모르는 새 발이 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발을 사려면 저녁때 사는 것이 좋다.

인간의 혈관은 한 줄로 이으면 112,000 km로서
지구를 두 번 반이나 감을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가끔 머리가 아픈 것은 뇌를 싸고 있는 근육에서 오는
것이다.

남자의 몸은 무게가 여자보다 많이 나가지만 남자가 60%, 여 자는 54%가 물로 되었기 때문에 대개 여자가 술에 빨리 취한 다그러나 여자는 지방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
이것이 더 아름답게 만든다.

아이들은 깨어 있을 때보다 잘 때 더 많이 자란다.

지문이 같을 가능성은 64.000.000.000 대 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의 지문은 모두 다르다.

근육은 한 단어를 말하는데 650 개중, 72 개가 움직여야 한다


      출처 의학백과



존 라일, 「곧은 길」, 제7장, 성경에서 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김영희강의안6)

 

 

 

7 장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람들은 성경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리는 알지 못하여도, 자신이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늘 자신들이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사랑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수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1. 성경이 사랑에 부여하는 위치를 보여주고자 한다.

성경이 큰 비중을 두고 있는 한 가지가 바로 사랑이다. 명백히 나타나 있는 성경구절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개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4)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1: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13:34-35)

이런 성경구절에 대하여 주석을 달지 않겠다. 성경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진지하게 주의를 요구하며, 사랑을 경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성경에 대해 자신들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랑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있지 않다.(고전13:3) 구제하는 사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이 사랑을 완전히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결코 누구의 품행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흔한 착각으로, 그들은 모든 판단을 피하는 것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판단하지 말라의 교훈을 역이용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은 경솔함과 비판적인 판단을 금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이웃이 주정뱅이, 거짓말쟁이, 난폭한 사람일 수 있는데, 그것은 죄를 덮으려하고, 사태를 옳게 보지 않으려 하며, 사악한 것에 눈을 감으려 하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결코 누구의 신앙에 대한 견해(이단)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선교란 필요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이 나으며 교회의 문을 닫는 것이 낫겠다. 모든 사람이 옳고 아무도 잘못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일 1:10)

사랑은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 중에 첫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5:22)

첫 번째 특성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소망한다. 인간을 향한 사랑은 그 사랑의 두 번째 특성이다.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과 인간을 둘 다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신자의 행실 속에 비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주님과 같이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려하고,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사랑을 행함으로 곧 보상을 갖는다. 사랑은 선을 행함과 같이 악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남들이 성공할 때 시기하지 않으며, 남들의 불행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최악의 순간에도 사랑은 연민과 자비와 동정으로 가득 차게 한다.

이와 같은 사랑의 참된 본보기는 복음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주님의 매일의 삶은 선을 행하기 위한 끊임없는 여행이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벧전 2:23)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주님은 결코 죄인들을 추켜세우지 않았으며, 죄를 너그럽게 보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천국과 영광의 왕국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과 지옥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웃과 교회 지체 사이의 논쟁, 싸움, 시기, 원한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교파들 사이의 경계심과 언쟁은 또 무엇인가? 확실히 인자가 올 때에 그가 이 지상에서 사랑을 보겠느냐? 하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지상위에서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의 절반은 사랑의 부족 때문이다. 만일 인간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인류는 행복을 두 배로 가질 수 있으며 슬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3. 어디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오는 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간에게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도 적절한 훈육이 없으면 자신을 첫째로 생각하고, 자신의 안락함과 이익만을 생각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사랑은 성령으로 준비되어 있는 마음 외에는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한 가지 토양을 제외하고는 결코 성장할 수 없는 연약한 식물이다. 당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을 때 사랑을 구함은 가시 돋친 나무에서 포도를 기대하는 것이 나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기대하는 것이 낫다.

 

사랑이 자라나는 마음은 성령에 의해서 변화되며, 새롭게 되며, 변모된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죄를 증오하며, 매일 죄와 싸우게 된다. 첫 번째 이기심과 사랑의 결핍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거대한 빚을 지고 있음을 깊게 느끼고, 그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그의 발자국을 따르며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맺게 하는 열매와 결과는 좋아하나, 이러한 열매가 자라날 수 있는 뿌리는 없으며, 그들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교리에 대해서도 그 뿌리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칭송하고 있으나, 그들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성령의 내적인 역사하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뿌리가 없이 기독교적 신앙의 열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며, 기독교적 교리를 배우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의 기질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며, 마음속에 은혜를 받지 않고도 사랑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위로부터 내려온다. 참된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 사랑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

 

4. 왜 사랑이 은사 중에 제일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바울만큼 믿음을 높이 찬양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믿음보다 더 숭고한 것을 말한다. 주의를 요하는 것은 사랑이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랑이 믿음과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고 추측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은혜는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1) 사랑은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에 약간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은사 중에 제일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은 믿음과 소망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의 백성들은 더욱 더 사랑할수록 아버지를 잘 닮아갈 것이다.

 

2)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익하므로 은사 중에 제일이라고 불린다. 믿음과 소망은 믿는 자의 사적인 이익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선행과 친절함의 근원이며, 갈등을 가라앉히고 허다한 죄를 덮는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은 감춰질 수 없다.

 

3) 사랑은 오래 남는 것이므로 은사 중에 제일이라 불린다. 믿음, 소망은 심판 날 아침에 소용없게 될 것이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며 천국은 사랑의 처소가 될 것이다.

 

5. 맺는 말

1) 각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당신은 참된 교리와 거짓된 교리의 차이점을 알고 있고, 당신의 견해를 변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이나 기질에 있어서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은 무익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가 모든 것을 알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3)

당신이 안에서 역사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이해하게 될 때, 당신의 인생은 진정 행복하게 될 것이다.

 

2) 사랑에 대해 알고 있으며, 사랑에 대해 더욱 더 느끼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첫 번째 사랑을 부지런히 실천하자. 사랑은 무엇보다도 부단히 연습에 의해 커지는 은사이다. 사랑은 커다란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것에서도 보여야 한다. 두 번째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라.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있다면, 사랑을 강조하자. 만일 아이들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교리를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아이들은 사랑은 이해할 수 있다.

 

 

출처: 청교도의길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주기도문 해설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신학)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 6:9)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올바른 기도의 한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시고 난 후에 그 대안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외식적(外飾的) 기도였다(마 6:50-5). 곧 그들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든지, 사람들이 들으라고 설교하듯이 하는 기도 같은 것은 다 잘못된 외식적 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였다(마 6:7).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렇게 반복해서 기도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이만하면 됐다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의 감정(感情)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처럼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별 생각 없이 “주여 주여”를 반복한다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목소리를 높여서 고함을 지른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시정해야 할 요소들이다.

 

올바른 기도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나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 할지라도 다 듣고 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진실하게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그분 앞에 조심스럽게 아뢰는 진실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초월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내재적(內在的) 신관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적 능력과 기도 응답을 찾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참선이나 요가나 기(氣) 수련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신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서, 여기에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이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언제든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그분과 교통하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곳에 이미 하나님은 임재해 계시며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 6:9)

주기도에서 첫 번째 간구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냥 “이름이 …”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의 이름인지 모호하지만 원문에는 분명하게 “당신의 이름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당신의”라는 말을 빼 버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 어법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며 원어에는 ‘당신의’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단어는 원래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거룩’이란 원래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인데,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성물’(聖物)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드린 날을 ‘성일’(聖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거룩’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 나아가서 원래는 깨끗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된 자들을 가리켜 ‘거룩한 자들’(聖徒)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칭의적 측면에서의 거룩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떨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렇게 된다. 곧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할 때 그렇게 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걸린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구하였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이키시는 궁극적 이유도 곧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겔 36:21-23).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각 교회는 모든 것을 자기 교회 중심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교회가 잘 되고 자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개의치 않는 교회가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성도가 너무나 적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처럼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심지어 자기 나라에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일어서서 외치는 성도들이 아쉽다. 그래서 오늘도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한 기도가 되고 있다.

 

 

3. 나라가 임하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

주기도 중 두 번째 간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원문에는 “당신의”가 들어 있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가 정확한 번역이다. 곧, 불의한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또 다른 나라가 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역적이요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정변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엄청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된다. 이 세상의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근본적인, 아니 전혀 다른 체제와 질서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거기에는 또한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있다. 땅의 요소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눅 17:21). 따라서 현세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땅의 요소를 말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내세에는 분명히 장소로서의 천국(천당 또는 낙원)이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의’(義)이다(벧후 3:13, 롬 14:17). 비록 현세의 하나님 나라는 불완전하고 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현세에서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의 주요한 특성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종국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불의와 고통과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곧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이 기도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기도의 간구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주기도의 의미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말 것이다. 주기도의 간구는 물론 종말에 단번에 임할 사건도 가리키고 있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오늘날 우리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이다. 이는 곧 교회의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좀더 강력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아니하며 늘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 사단의 통치가 물러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마 12:28).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기도에 합당하게 살도록 힘써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4.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앞의 간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간구에는 하늘과 땅의 상태가 분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곧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이 땅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이 세상은 아직도 사단이 상당한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은 어느 정도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눅 4:6), 특히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엡 2:2).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 세상 만물의 주관자로서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세상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 은혜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도리어 헛된 우상을 섬기며 죄와 불의를 행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온전히 이루어졌다. 이는 곧 저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100 퍼센트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죄와 불의가 전혀 없으며 온전한 의가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죄와 악이 횡행하고 있으며, 악한 자가 득세하여 권세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정직하고 진실한 자가 잘 되기보다도 잔꾀와 술수를 부리는 자가 잘 되고 형통한 일들이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단의 세력이 물러가고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죄와 불의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지배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곧 이 세상에 성령의 충만한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마지막 그 날까지 죄와 불의로 관영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기도가 된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영원한 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죄와 불의가 많기 때문에 성도들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은 그만큼 더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그 뜻 이루기를 즐겨 행해야 할 것이다.

 

 

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주기도 중에서 네 번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도이다. 사람들은 대개 경제 문제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저급하며 저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복적(祈福的)인 태도를 가지고 물질을 구하는 기도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구하고 나서 자기의 경제 문제에 대해 합당하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주기도에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쳐 준다. 사람은 가능하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다. 그래서 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하는 일은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그때서야 할 수 없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런 태도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작은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고 어려운 문제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자기의 힘과 재주만을 믿게 되기 쉽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도 자기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 사소한 경제 문제에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교제를 가질 수 있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만족과 감사를 가르쳐 준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지 ‘평생’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대개는 ‘오늘’ 먹을 양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쌓아 놓으려 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즉, 다음 날 먹을 양식을 위해 미리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을 하루하루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두셨으며 날마다 공급해 주신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준다. 우리에게 육체의 생명을 주는 양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생명도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는 만나를 먹고도 그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므로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고 말았다(요 6:30-32). 그러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이심을 믿게 되는 것이다(요 6:33-35).

 

 

6.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주기도 중에서 이 부분의 간구는 우리에게 상당히 부담을 주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과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 용서 받음이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죄 용서 받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며, 따라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어떠한 선행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사할 만한 능력이나 효력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고 평가하신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면밀히 감찰하시고 평가하시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 사함’을 두 종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를 영원한 저주와 멸망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근본적 죄 사함’이 있다. 이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단 한번 있게 되는 죄 사함이며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자주 죄에 빠지며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도 날마다 회개하며 죄 용서함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일상적 죄 사함’이라 부른다(요일 1:9).

 

 

그러나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함 받아도 또 다시 죄를 지으며, 그래서 또 다시 죄 용서를 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기를 자꾸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가 죄 사함 받은 것인지 받지 못한 것인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못 받은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 ‘구원파’ 이단이다. ‘구원파’에서는 중생한 사람은 영원히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죄 용서함을 비는 것은 잘못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감사만 하며 그들의 일상적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주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기도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 사함의 이치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 죄 용서’만 알고 ‘일상적 죄 용서’를 모른 데서 온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서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셨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죄 없는 천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우리가 실제로는 죄와 허물이 많지만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형벌을 면제해 주셨다”는 법적(法的)인 의미이며, 또한 우리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신분적(身分的)인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도 날마다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용서를 빌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용서를 빌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요 13:10). 그러나 용서를 빌지 않고 지내면 마음이 편치 못하며 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야단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7.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이 여섯 번 째 간구도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늘 사단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죄와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실족하여 넘어지며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런 시험과 유혹이 찾아오는가?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왜 이런 고통이 늘 우리를 따르는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욥 1:7). 사단은 그의 사자(使者)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함 받은 백성이라도 미혹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마 24:24).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한다(눅 22:3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단은 얼마나 광분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신다(시 121:3-8).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셨다(요 17:15). 또한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그러므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사단의 유혹과 간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26:41). 예수님의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사단이 다가와서 그를 유혹하여 시험에 들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가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벌써 사단의 종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 믿음은 떨어지지 않고 겨우 구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험에 드는 그 사람은 불행하다. 죄에 빠져 시험에 들면 자기 자신에게 불행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도 큰 손해를 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된다. 마귀의 유혹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고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궁극 목적은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물론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 들더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에 들면 그만큼 손해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어떤 시험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며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며, 또한 그 유혹의 실상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며 불행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나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頌榮)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몇 고대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지만 대부분의 사본들은 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이 부분의 말씀은 주기도의 마무리 부분으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먼저 ‘나라’(바실레이아)라는 말은 원래 ‘왕’(바실레우스)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라’란 것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 곧 왕국(kingdom)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나라의 소유주이신 동시에 통치자이시며 또한 이 나라의 중심 인물이시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이 있으며 또한 ‘영토’와 ‘통치 원리’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주권에 속한다.

 

다음으로 ‘권세’(뒤나미스)란 다스리는 힘 또는 능력을 뜻한다. 아무리 말이 옳고 훌륭해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빈말에 그치고 만다. 결국은 힘을 가진 자가 이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악령들이나 이방신들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며 섬기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세상과 온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가진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게 힘이 있고 그 분에게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

 

마지막으로 ‘영광’(독싸)이란 말은 원래 ‘빛이 비취는 것’을 뜻한다. 빛이 비취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정의와 생명과 환희가 약동하게 된다. 따라서 ‘영광’이란 모든 좋은 것, 의로운 것, 긍정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것들과, 또한 그의 피조물에게 비춰 주시는 영화, 광휘, 찬란함을 뜻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이 하나님께 속함을 고백한다. 영광은 사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

 

 

이러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대통령은 정해진 임기 동안만 권세를 누리지만, 그리고 이 세상의 왕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권세를 누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권세를 가지시고 영광을 누리신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송영은 그저 주기도를 끝맺는 형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에 나온 모든 간구의 기초를 이루며 근간이 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을 고백하는 말이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부귀와 권세와 영광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가장 고상하고 수준 높은 기도이다. 옛날에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하 29:11)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고백에 합당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참된 의미이다.

 

 

보길예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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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의 회심: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건짐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가까운 해딩턴 (Haddington) 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문법학교를 마치고 글라스고우 (Glasgow) 대학과 세인트 앤드루스 (St. Andrews) 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낙스는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윌리엄 텐데일이 성경 번역에 헌신하고 있을 때 스코트랜드에서는 틴데일의 영성을 이어 받을 존 낙스가 태어난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14살이었을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토마스 길리엄 (Thomas Guylliame)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서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낙스는 개신교 교리를 확산시키고 있었던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낙스는 카톨릭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했다. 낙스는 “하나님이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내기를 기뻐하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지 위샤트였다.

그리고 낙스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면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 그는 “내가 처음 신앙의 닻을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다”라고 말했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분명 낙스를 새로운 믿음으로 불타오르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으며, 3년 동안 성경연구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약 1540경 회심 후 그는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여 부패한 영혼들의 심령을 깨우치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암울한 상태

1) 성직자들의 무지와 부도덕과 타락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들, 수도원장, 수사, 성당 참사회원들은 너무나도 무지했다. 심지어 어떤 사제들은 알파벳도 모를 정도였다. 주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쳐져 있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으며,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재산과 수입과 인력이 풍부했으며, 스코틀랜드 전체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난했지만, 교회는 가장 좋은 건물을 차지했다. 이처럼 교회가 부패하고 비대해져 안일에 빠진 이유는 면죄부, 연옥, 성례전과 같은 것들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순결을 서약하였지만 성적타락이 극심했고 여러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제들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직자들은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매우 세속적이었다. 이처럼 교회는 무지하고 부도덕했고 타락했다.

2) 종교개혁자들이 핍박을 받고 화형 당함
16세기초 쯤 위클리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교회에 의해 심한 핍박을 받거나 처형을 당했다. 예를들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 (George Wishart)는 붙잡혀 세인트 앤드류 성 밖에서 화형 당했다. 이들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될 때 까지 약 30년 동안 20여명의 개신교도들이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임을 알려 준 것이다. 타락한 그 시대가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을 키우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하였다.

존 낙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 -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꿈”

존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를 세워가는 꿈이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스코틀랜드 성시화에 대한 꿈이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으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다시 설교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난 낙스는 영국에서 설교자로 사역을 했다. 먼저 존 낙스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들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적 복음을 계속 전파했다. 낙스는 공기도서의 사용을 거부하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서를 사용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먼저 그는 영국에서 카톨릭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는데 특히 성찬식 때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관습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면서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지시켰고 신자들을 성찬상에 둘러 앉게 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주의 방식으로 성만찬을 집행하였다. 그의 종교개혁적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불과 몇 달 만에 주민들은 로마 카톨릭을 폐기하고 미사 대신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개혁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카톨릭교도 ‘피의 메리 (Bloody Mary)’가 영국 여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 잔학한 여왕은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개신교를 박해했고 수 많은 목회자들을 처형하였다. 낙스는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반 종교 개혁적이어서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목회사역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를 피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칼빈을 만나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 칼빈 강당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 까지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선포하였다.

또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벌어지는 종교탄압과 폭정에 맞서 유명한 글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를 발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들을 ‘괴물’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성경 주석의 집필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판된 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다. 그 후 영국 백성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은 영국을 ‘책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으며 청교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제네바 성경에는 장로교의 교리 문답서가 추가되었고 각주가 들어갔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열렬한 칼빈의 제자가 되어 개신교 신학에 깊이 빠져 들었고 그의 신앙은 상당 부분 칼빈주의화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을 지배했던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들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 원리의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낙스의 기도 -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낙스가 고향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때 했던 감동적인 기도가 있다.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하여 목숨 건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귀족들과 시민들이 돌아오는 존 낙스를 환영했지만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낙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심판하지 마소서. 그리고 주로 세상이 내게 대해 비난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심판하지 마소서.”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하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단 한 사람의 기도로 인해 스코틀랜드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백성들의 심령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교리 설교 -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남”

1559년, 낙스는 12년 동안의 힘든 망명 생활을 끝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을 알리며 카톨릭 색채가 가미된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으며,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진리라고 말하면서 설교 말씀을 적용한 후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전력을 쏟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개혁주의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희망으로 살아 있었고, 개혁주의 운동의 새로운 영적 생동감과 열정을 불어 넣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메리 여왕 앞에서의 낙스의 강력한 설교

그러나 메리여왕의 등극으로 인해 카톨릭 교회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왕 메리는 의회를 설득하여 개신교회라는 이단을 박멸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여왕 메리는 법으로 금지시켰던 미사를 거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 종교개혁에 불탄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 (St Giles' Catheral) 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면서 미사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메리 여왕이 낙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떨었으며 그녀는 잉글랜드가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서 보낸 군대보다도 그의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여왕특사인 토머스 란돌프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시간 안에 귓전에 계속해서 때리는 5백 개의 나팔보다도 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한 청년은 낙스의 다니엘서 본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내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낙스는 곧 메리 여왕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여왕은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은 로마 교회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므로 로마 교회를 수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낙스는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존 낙스를 이기지 못해 자신은 더 이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메리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건드리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복수심에 가득찬 메리 여왕은 낙스를 반역죄로 몰고 가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낙스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회중들이 다시 살아났다. 많은 시민들은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개혁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서민 대중을 개혁의 대열에 동참시켰다. 그의 설교의 권세는 도시를 개혁시켜 버렸다. 스코틀랜드에 말씀을 통한 대각성 운동과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부흥은 낙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낙스를 통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승리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이 찾아왔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활권을 폐지했다. 또한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균형 잡히고 건전한 교리”라고 승인하면서 국가의 신조로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복되고 장로교 형태의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가 합법적으로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기독교 국가로 변하여 갔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계속되는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불굴의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용기있는 설교였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낙스의 삶과 죽음

낙스는 수 많은 환난들과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낙스는 저격을 당하기도 하고 매복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의 목숨은 종종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혹독한 박해가 심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던 낙스의 순례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었다. 낙스의 인생가운데 이 고난의 시기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훈련 기간이었다. 고난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 잘 준비된 낙스를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불과 황무지와 흘리는 피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낙스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지대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해 주었다. 낙스가 생각한 성경적인 교회정치는 장로회주의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개혁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도 튼튼한 개혁교회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낙스의 불굴의 신앙과 확신이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을 낳게 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인생 말년을 맞이한 낙스는 뇌졸중으로 인해 심신이 몹시 약해졌다. 그는 임종 전에 부인에게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후 낙스는 아무런 고통도 움직임도 없이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회심 이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낙스의 인생은 끝이 났다. 제네바 대학 바스티용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국제적 종교개혁 운동가 기욤 파렐, 존 칼빈, 장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낙스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낙스는 칼빈, 파렐, 베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낙스는 교회를 진리의 토대 위에 세운 스코틀랜드 개신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요, 16세기 로마교회의 교권주의가 팽배했던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목할만한 사건들을 일으킨 개혁운동의 아버지이다. 진리를 위해 담대하게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수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귓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존 낙스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용기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1. 그는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적 기류가 악한 길로 갈려고 할 때 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깨웠던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또한 여왕과 시의회가 교회 개혁을 꺽을려고 할 때 마다 방향이 흔들리지 않게 나아갈 길을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셨던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였다. 그는 시대를 분별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성경적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였으며 진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2. 그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삶에서의 중요성은 그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었다. 설교가 그의 생애의 중심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고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설교의 메시지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또한 성령께서 설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굳게 붙들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 복음적 교리, 성령의 조명,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의와 풍성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형벌” 등 이었다.

3. 그는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기도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 낙스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4. 그는 용기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인생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용기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낙스는 왕의 절대 권력과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여왕도, 교황도, 국민들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턴 백작은 낙스의 묘 앞에서 "여기 일평생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건전한 교리와 악을 꾸짖은 담대함에 있어서 모든 참된 목회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며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설교였다. 강단에서 낙스와 같이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고 매우 혼탁하다. 이러한 때에 악한 시대를 잘 분별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진리로 심령을 깨우는 불꽃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낙스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설교자를 그리워 하고 있다. 부흥이 없는 이 때에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에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또 다른 부흥은 낙스와 같이 진리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자, 능력있는 설교자, 기도하는 설교자, 용기있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변화된 언어


    우리가 주님을 우리 삶에 모신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말을 변화시킬 것이다.
    당신의 말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담게 될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영혼의 빛이 흐려질 때 가장 먼저 적신호가 켜지는 곳은 마음이다.
    또한 어두워진 마음은 생각을 바꾸고 잘못된 생각은
    곧 말과 행동을 비뚤어지게 한다.
    가볍고 경박한 말,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악한 말이 터져 나올 때
    먼저 그것이 믿음의 적신호임을 인식하자.

    무의식에서 나온 말이라 할지라도 한 번 뱉어진 말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된다.
    또 반복적으로 부정적인 말에 길들여질 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영혼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악한 말을 버리고 선한 생각에 마음을 쏟자.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리의 선한 말과 행동을 통해
    세상 가운데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새벽종소리-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해는
    내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들이다.

    각종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꽃동산이 되고
    각종 이름 모를 수목이 한데 어우러져야 더욱 풍성한 숲이 된다.

    제 각기 다른 우리의 모습들이 한데 아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주님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나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이를 정죄하려는 생각은 오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스승이 되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 보좌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거듭난 성도들을 가르치시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까지 이끌어 주시며
    성화된 모습으로 견인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변화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내가 믿고 받아 들여 내 생활 속에 적용시킬 때
    우리는 다른 이를 정죄하고 판단하거나 서로 상처주는 말,
    옛사람의 일, 옛 성품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변화된 언어란,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나오는 언어이며,
    다른 이의 영혼 속에 소금처럼 보드랍게 녹아드는 언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글/최송연





      칸쿤은 맥시코 동해안 가브리해의 캘리포니아 반도와 멕시코만 사이에 위치하고있으며, 1970년 이전에 는주민의 수가 100여명도 안되는 모래 해변가의 작은 어촌이었던 곳이었다.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칸쿤은 실제로 메인랜드(다운타운)에 있고, 우리가 알고있는 칸쿤은 바로 Isla Cancun 으로 메인랜드와 2개의 다리로 연결되어있는 23Km 길이의 L자모양의 섬이다.

      관광할만한 곳은 없지만 버스로 3시간정도 이동하면 마야 최대의 유적지인 치첸이사등 마야유적들을 볼수있다. 시에서 남쪽으로 19㎞ 떨어진 곳에 국제공항이 있다. 인구 : 2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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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주일 오후 사도신경 강해(10) “음부 강하에 대하여” 부분 중 발췌


       

      Ⅱ. 음부에 내려가셨으며1)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부분이 한국의 사도신경에 없는 이유


           다음으로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부분인데, ‘음부 강하’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사도신경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고백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굉장히 낯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길교회는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한국교회는 이 내용이 없을까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2) 라틴어 원문에 보면 descendit ad inferna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는 descended to hell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찬송가 앞면에 있는 사도신경의 새번역을 보시면 “장사된 지”라는 말 뒤에 난외주가 붙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장사 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래의 원문에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의 한글 사도신경에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빠지게 됩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반면 1897, 1902, 1905년에 각각 번역된 감리교의 사도신경에는 한결같이 음부강하 구절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1784년 감리교 신조를 작성하면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가 전부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빠지게 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한글 사도신경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없는데, 그렇게 빠진 이유는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면서 이 부분에 대하여 장로교가 ‘양보’(?)를 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찬송가를 발행하려면 찬송가 앞뒤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포함시켜야 하는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이니 상관없지만 사도신경의 경우는 ‘번역’이기에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데, 감리교는 ‘음부 강하’ 부분을 빼기를 원하고, 장로교는 넣기를 원하는데 장로교가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한글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길교회는 사도신경의 원래 내용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넣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의 견해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와 같은 서방교회 전통에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사도신경을 번역하기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3)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볼 때에는 ‘음부 강하’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번역을 할 때에 “저승에 가시어”라고 한 것을 볼 때에 분명해 집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우리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예수님께서 저승(지옥)에 가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교리인 ‘연옥(煉獄, purgatory)교리’와 연관시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옥교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요,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신자라 할지라도 ‘하늘’(heaven)에 갈 만한 완벽한 성인(聖人)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후 곧바로 하늘에 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자’(?)들이 일정한 기간을 다른 곳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소가 ‘연옥’입니다.4) 이렇게 연옥에서 영혼이 깨끗해 져야 비로소 ‘하늘(heaven)’에 가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연옥 외에 또 다른 장소가 있습니다.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는 것인데요,5) 이 림보라는 곳은 지옥의 양쪽 가장자리(limbus)에 있는 곳으로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 영혼이 ‘구원계시의 완성’을 기다리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들이 바로 천국(하늘)에 가지 못하고 대신 ‘림보’로 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선조 림보’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가신 ‘음부’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선조 림보’에 가셔서 그가 십자가에 이루신 구속의 공로로 구약의 성도들을 풀어 해방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하늘’(heaven)로 가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6) 그래서 그들의 번역에는 “저승에 가시어”라고 되어 있습니다.7) 그러나 성경은 ‘선조림보’라는 장소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도 주지 않고, 오히려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민23:10; 시16:10-11; 73:24-25).8) 구약시대에 죽었다고 해서 지금 죽는 것과 다르게 ‘림보’라고 하는 성경이 말하지도 않는 장소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림보’에 가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 불과합니다.

           둘째, 제2의 기회설(second probation)입니다. 이 견해는 천주교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어떤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견해인데요, 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때까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봅니다.9) 앞서 살펴본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차이라면, 로마 가톨릭은 지옥이 아닌 ‘림보’라는 중간 정도의 장소에 가신 것으로 보고, 모든 영혼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 죽었던 영혼만을 본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2 기회설은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예수님이 죽기 이전에 죽었던 모든 지옥의 영혼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 어디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10) 복음은 죽은 자가 아닌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전파됩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9:27).

           셋째, 루터파의 견해입니다. 루터파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그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하신 일이 구약의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신다거나 혹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회개할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고 보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봅니다. 루터파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맞다고 보지만,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회심해서 구원받을 리는 없기 때문에 취한 어중간한 입장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개혁파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루터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승귀의 첫 부분으로 봅니다.11)


      오해의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인 벧전3:18-22의 바른 해석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 잘못된 견해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가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12) 그런데 대부분이 이러한 오해를 하는데, 그 이유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표현을 ‘지옥’에 가신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다고 가르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지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를 찾아봅시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13) 여기에 보면 19절에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이 바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의 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의미가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선포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루터파나 천주교회의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 아닙니다.14)

           이 본문은 조금은 어려운 본문인데, 먼저 18절 하반부를 보아야 합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을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육체는 죽으셨고 영혼은 살아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예수님의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것입니다.15)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령에 의해 일어난 영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cf. 롬1:3,4; 6:10).

           그리고 19절에 나오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도 마치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셔서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말이 그렇게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뒤에 나오는 베드로전서 4장 6절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을 보면 “....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본문이 말하는 시점에서의 죽은 자들에게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죽어 있는 자들이 과거에 살아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에 복음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절을 읽어보면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뒤의 그 시점에 옥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가서 ~ 선포하시니라”라는 부분은 과거에 한 것입니다. 19절을 재구성해 보면 “영으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그때에 복음을 선포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의 사역을 말합니다. 19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미 노아시대에도 존재하셔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의를 전파하는 노아를 통하여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전파된 의의 선포를 들었으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홍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의 지금 상태가 바로 옥에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일단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나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의 근거구절이 아닙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말의 개혁주의적 이해


           그렇다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구절의 근거가 되는 성경본문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20절과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문구를 연결시키다보니 계속해서 오해가 생기는데, 이 문구는 사도신경의 다른 문구와 달리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에 기초하지 않습니다.16)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비유적으로 봅니다.17) 실제로 가셨다는 것이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겪으신 ‘영적 고뇌’를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18) 예수님은 실제로 그 영이 지옥에 가신 적이 없지만, 얼마나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가 지옥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개혁파에서는 ‘음부’를 지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창37:35; 42:38; 삼상2:6; 왕상2:6), 나아가 상징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시18:5)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더 심화시키는 표현입니다(cf. 시18:5).19)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 주님께서 지옥으로 걸어내려가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옥의 고통,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낮아지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기보다 영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여주려는 사도신경의 강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고백이 주는 의미


           그렇다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고백은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지옥의 고통과 같은데 그것을 친히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셔서 해결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사망에 의해 장악될 수 없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이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문답이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20)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anguish과 아픔pain과 공포terror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9) 사53:5   10) 시18:5-6; 116:3; 마26:38; 27:46; 히5: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이 실제로 예수님이 어디에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당하신 고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위와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무지


           지금까지 보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구절을 아예 빼버려서 천주교나 루터파,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했던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21) 일종의 ‘행복한 무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22)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아예 모르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고백하여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23)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 혹은 조금이라도 곤란한 내용은 아예 가르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우민화(愚民化)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예 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잘 가르치지 않음으로 성경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경향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어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다룬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에 대한 부분 역시도 잘 알고 잘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동일한 표현이라도 다른 고백일 수 있음


           마지막으로,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도신경을 동일하게 고백해도 그 고백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 내용을 천주교, 루터파 등이 함께 고백하지만 그들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은 외형상 표현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외형이 같다고 해서 그 내면도 같다고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부분을 고백한다고 할 때에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백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모른채로 하게 될 때에 그 고백은 헛된 고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개혁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로 보고,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승귀로 본다. 그 이유는 루터파가 ‘음부강하’를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루터파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가셔서 지옥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본다.

      2) 사본마다 없는 경우도 있다.

      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 기도서』(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11-12.

      4) 2013년에 사임한 교황 베네딕트 16세(Joseph Alois Ratzinger)는 연옥 개념 자체는 중요하지만, 실제로 연옥은 없다고 본다. Nicholas Thomas Wright, Surprised by Hope (London: SPCK, 2007), 양혜원 옮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서울: IVP, 2009), 263-264. 교황 베네딕트 16세(=라칭거)는 고린도전서 3장을 석의하면서 연옥설을 새롭게 개정한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의 불이시며, 그 불이 사후의 인간들을 영광스런 부활체와 같이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에 일시에 이뤄지는 사건이다. 이렇게 연옥의 정화를 기독론화시킴으로써 베네딕트 16세는 기존의 연옥 교리를 중간 상태의 개념에서 분리시켰다. Pope Benedict XVI, Eschatology, Death, and Eternal Life, 2nd ed.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7), 218-233.

      5) 천주교의 원래 교리에는 ‘선조 림보’ 외에 ‘유아 림보’(Limbus Infantum)이 있다. 이곳은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있으나 개인적 죄책은 없는 유아들이 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2008년 이후에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6) 이러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1586년의 Robert Bellarmine이 명확히 제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승구, 『사도신경』, 200.

      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 기도서』, 11-12.

      8) 이승구, 『사도신경』, 200.

      9) 이승구, 『사도신경』, 201.

      10) 제2의 기회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Berkhof, 『조직신학 (하)』, 962-963.

      11) Berkhof, 『조직신학 (하)』, 576.

      12)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9.

      13) Edwin A. Blum, “1 Pet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241.

      14) 이승구, 『사도신경』, 208.

      15) J. Ramsey Michaels, 1 Peter, WBC 49 (Waco: Word, 1988), 204.

      16) Berkhof, 『조직신학 (하)』, 575.

      17) 이승구, 『사도신경』, 197.

      18) 이승구, 『사도신경』, 205;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8.

      19) 이승구, 『사도신경』, 198.

      20) 이러한 것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장 4절)나 소요리문답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장사되셔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기까지 계속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며 제 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다. 이 일을 가리켜 사도신경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시고’라고 표현해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없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사도신경 본문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21) 이승구, 『사도신경』, 197.

      22) 이승구, 『사도신경』, 211.

      23) 이승구, 『사도신경』, 211.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Son jae ik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미국 국립문서 보관청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전쟁 미공개 사진 91장을 공개 합니다.

      다시는 이땅에 동족 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60년 전 낯선 이국에서 숨져간 미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와 함께 주님의 안식을 빕니다....
      (사진 출처:미국립문서 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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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주 가운데 하나는

      오리건(Oregon)주 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이 좋은 오리건에

      국립공원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오리건주에는

      컬럼비아 강과 윌라멧 강,

      맥켄지 강과 엄콰 강이 흐르는 서부와는 달리


      오리건 중부로 갈수록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존 데이 화석공원

      (John Day Fossil Beds National Monumen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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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데이 FBNM는

      크게 Clarno, Sheep Rock,

      그리고 Painted Hills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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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운데서

      사진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은 페인티드 힐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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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건의 페인티드 힐은

      애리조나의 페인티드 힐이나

      유타의 페인티드 힐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대신 칼라풀한 느낌이 강합니다.


      17223912_4.jpg


      이곳의 이름이

      Painted Hills 라고 불리워지는 이유는

      언덕이 마치 페인트 칠을 한 것처럼 칼라풀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17223912_5.jpg


      오리건의 페인티드 언덕은

      LA에서 왕복 약 1,800마일쯤 되니

      LA에서 가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17223912_6.jpg


      크레이터 레익에서도

      왕복으로 7시간이 걸리는 만큼

      사진도 촬영하고 트레일도 걷을라치면

      별도로 하루의 시간을 내어서 다녀오는 것이 좋습니다.


      17223912_7.jpg


      위의 사진은

      크레이터 호수에서

      페인티드 힐스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프린빌(Prineville)의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17223912_8.jpg


      이 지역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사람은

      칸던(Thomas Condon)이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존 데이 FBNM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Sheep Rock에

      칸던의 이름을 딴 Thomas Condon Visitor Center가 있습니다.


      17223912_9.jpg


      Thomas Condon Paleontology Center and Visitor Center의 내부 모습...


      17225346_17.jpg


      페인티드 힐스가

      존 데이 화석공원의 일부인 만큼

      이 지역 주변에서는 고대의 무수한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 가운데

      하나를 말해줍니다.


      17223912_11.jpg


      첫째는

      이곳에 살던 공룡들이

      갑작스런 대격변(Catastrophe)에 의해 매몰되었거나


      혹은 대홍수같은 격변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휩슬려와 이곳에 매몰되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17223912_12.jpg


      일반적으로 동물이나 공룡은

      죽으면 곧바로 화석이 되지않고 서서히 부패됩니다.


      경주의 천마총에 가보면

      왕이라도 천년이 지나면 뼈까지 썩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썩지않고

      화석이 되었다는 것은

      그 생명체가 죽기 전에,


      혹은 죽었더라도 부패하기 전에

      갑작스런 매몰에 의해 그 압력으로 썩지않고 화석이 된 것입니다.


      17223912_13.jpg


      이곳이 왜

      존 데이 FBNM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1812년, 존 데이는

      Pacific Fur Company의 일원이었죠.


      그는 Mah-hah 강이라고 불리우던,

      지금의 존 데이 강(John Day River)인근에서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다른 모피 사냥군에 의해 구출되었죠.


      후에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존 데이가 강도를 만났던 지역을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존 데이가 모든 것을 빼앗겼던 곳이라고 말들했습니다.


      그리하여 Mah-hah 강은

      자연스럽게 존 데이 강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17223912_14.jpg


      사진에서 군데 군데

      검게 보이는 점들은 망간(Mn; 25)에 의한 것들이며


      붉은 색상은

      철에 의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흙 속에

      많은 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죠.


      17223912_15.jpg


      학자들은 붉은 지층 시대보다

      노란 지층 시대의 기후가 더 건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지층의 색상이 red와 yellow가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건조시기와

      습한 시기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인데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7223912_16.jpg


      지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쌓이는 것이 아니라

      헬렌 산의 화산 폭발에서 보듯이 순식간에 쌓입니다.


      만약 오랜 세월에 결쳐 쌓였다면

      절대로 평평하게 혹은 규칙적으로 쌓여질 수 없습니다.


      17223912_17.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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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완성.. / 송영찬 목사

       

      <에클레시아 3.0> 그 스물두번째 이야기

      구원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원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원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부패시킨 죄에 대해서 구속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이 구원의 결과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마침내 새 창조를 완성하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 완성이다. 바로 그 모습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된다. 무너진 원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그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준비하셨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온 인류와 우주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시도록 작정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과 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이 나타나고 있다. 이 안에 우리가 부르심 받아 들어가 있을 때 비로소 복음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① 구원의 완성은 창조 질서의 회복에 있어

      내가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계획안에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부르심을 받은 지체들과 필연적인 관계를 이루어서 그들과 공동으로 이루어가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좀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나에게 임한 구원은 곧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의 완성으로 임한 결정체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위치는 그 결정체를 완성하는 마지막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나아가 다음 시대 교회에게 구원의 결정체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의 최종점에 서 있는 구원의 완성체이며 나아가 계속해서 다음 시대 교회에게 구원을 완수하기 위한 원인자가 되고 마침내 이러한 구원의 연속성의 결정체가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우주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있을 때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인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고 그 복음에 따라 자기의 생명력이 발현될 때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신다. 이 일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시는 정도(正道) 안에 있는 경우에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여러 과정에서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사도는 정하신 성도들을 그 목적지인 영화의 자리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가리켜 ‘선을 이룬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은혜가 되고 자기에게 크나큰 교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그 복음에 따라서 우리의 생명력이 발현될 때 그 사람이 비록 세상에서 어렵게 아니면 편히 살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과는 관계없이 구원을 완성해 내고야 마는 상태,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가리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그 과정을 ‘선’이라고 한다.

      ② 복음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마침내 그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하시려고 구원의 역사를 친히 경영하시고 이끄신다. 그래서 친히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성취하셨고 그 안에서 각각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으시어 구원을 완성해 나가신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시는 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 안에서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명백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 곧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신실한 언약의 시행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가 순일한 복음에 접촉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일에서부터 그 자신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여타의 기기묘묘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자녀들을 순전한 복음에 접촉케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에 접촉한 성도들은 그 복음을 흡수하고 소화시켜 지식이 자라남으로써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신실한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 가게 되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 가게 된다.

      마치 신생아가 처음부터 어머니를 알아보고 어머니를 위해 효도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신생아에게 자기의 신선한 젖을 먹여 자라게 해서 그 장성한 아이가 나중에 어머니를 위해 효도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보존하고 장성케 하기 위해 신령한 젖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그 신령한 젖을 먹고 자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달아 그의 영광을 발현하기 위한 자리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③ 교회는 복음을 순결하게 보수해야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한 자녀들에게 공급하실 신령한 젖을 위탁하신 곳이 바로 교회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개혁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한 자녀들을 위해 공급하시고자 하신 신령한 젖 곧 복음을 순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그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이 복음이 오염되지 않게 파수하고 이단들로부터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나아가 이 복음을 잘 간직하여 다음 시대 교회에게도 전수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순일한 복음이 역사를 타고 우리에게까지 전수된다.

      바로 이러한 전달의 과정에서 곧 우리에게 순수한 복음이 전수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받은 복음은 이미 상당히 훼손되거나 오염되기 쉽다.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만 순수한 복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만일 하나님께서 순일한 복음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 위해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복음을 섭취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복음이 참으로 살아 있고 우리의 생명이 새 생명으로서 분명하다면 그 복음의 능력으로 장성하게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다운 품성이 드러나고 정상적인 생명의 모습이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로운 생명력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등의 종교적 행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구원받은 생명이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정상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정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가 참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이 된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복음이 아닌 것에 반응하고 마음이 끌리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비록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또 어떤 직분을 맡아서 봉사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는 데까지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새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 생명이라 한다면 복음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다. 때문에 이단 사설(邪說)에 빠져 있다거나 복음이 아닌 비진리에 대해서 고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함부로 새 생명을 가졌다든지 중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104-108>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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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가슴 뭉클한 이야기 한토막!

      저는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는 34살의 회사원입니다.

      용인 민속촌 근방의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회사일 때문에
      서울 역삼역 근처 본사에 가게 되었습니다.

      용인 회사에 있을 때에는 자가용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다가
      막상 서울을 가려고 하니까 차도 막힐 것 같고 지하철을 타자니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분당에서 많이 있기에 용인 신갈에서
      오리역까지 완행으로 운행되고 있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가 7시 50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버스는 만원상태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날은 보통 때와 다르게 서 있는 사람은 4명 정도고
      모두 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구성쯤 도착해서 막 출발을 하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양손 가득히 짐을 들고 버스를 간신히 탔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당신의 아들이나 딸에게 주려고
      시골에서 가져온 식료품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10미터 정도 앞으로 나갔을까요?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운전기사가 할아버지에게 차비 없으면  빨리 내리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번만 태워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운전기사에게 어르신한테 너무한다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찰나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가방을 내려놓고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한테 막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큰 소리로)
      "할아버지잖아요 아저씨!!

      앞으로는 이렇게 불쌍하신 분들 타시면 공짜로 10번 태워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만원짜리를 돈통에 넣는게 아니겠어요?
      순간 눈물이 핑~돌 정도의 찡~ 함이 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 모시고  
      가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도 
      창피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거로 생각합니다.
      왠지 모를 무안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어른이라는 자신이 몹시 후회가 되는 하루였습니다.

      오류역에 다 왔을 때쯤인가 저는 만원을 지갑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내리는 문이 열렸을 때 그 꼬마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얼른 찔러 넣고는 도망치듯 뛰어내렸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성하는 하루를 살게 해준 그 꼬마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옮겨온 글> 


      https://youtu.be/0mvgRmfp8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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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있는 캘리포니아는

      별칭이 골든 스테이트(The Golden State)입니다.


      캘리와 이웃한 네바다 주는

      Silver State 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리조나는 Grand Canyon State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워싱턴 주의 닉네임은

      늘 푸른 주(Evergreen State)입니다.


      워싱턴 주는

      그 닉네임이 말해 주듯이

      주의 약 3분의 2가 숲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숲과 나무가 많은 만큼

      당연히 강과 계곡도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워싱턴 주에서

      가장 유명한 숲과 계곡은 어디일까요?



      12065353_1.jpg


      전문가들은

      워싱턴 주 최고의 숲과 계곡으로

      솔 덕(Sol Duc)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12065353_2.jpg


      솔 덕(Sol Duc)은

      올림픽 국립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숲과 계곡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12065353_3.jpg


      솔 덕은

      soleduck 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1992년 이후 Sol Duc 이라는 말로 공식 통일 되었습니다.


      12065353_4.jpg


      Soleduck 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던

      퀼리?(Quileute) 원주민의 말로

      sparkling waters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2065353_5.jpg


      솔 덕은

      솔 덕 강과 계곡, 폭포,

      그리고 솔 덕 온천을 품고있는 아주 유명한 곳이죠.


      12065353_6.jpg


      솔 덕에 들어서면

      이곳이 얼마나 울창한 숲인지

      누구나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12065353_7.jpg


      솔 덕 계곡은

      호 레인 포리스트와 더불어

      올림픽 국립공원에서 가장 울창한 숲으로 알려져 있지요.


      12065353_8.jpg


      솔 덕 계곡에 들어서면

      태고적부터 있었을 법한

      두텁고 진한 이끼들로 가득 덮여있습니다.


      12065353_9.jpg


      나무 뿐 만 아니라

      계곡 사이에 있는 돌들도

      양탄자같은 이끼들로 가득 덮여 있습니다.


      12065353_10.jpg


      솔 덕 계곡으로

      솔 덕 강이 흐르는데

      솔 덕 폭포는 이 가운데서도 가장 볼만합니다.


      12065353_11.jpg


      가을에는

      연어가 올라오는 이곳은

      세 줄기의 폭포로 떨어집니다.


      12065353_12.jpg


      폭포 주변에도

      이끼가 무성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않는

      원시림 그 자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2065353_13.jpg


      아침 햇살이 비취는

      솔 덕 숲을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힐링될 것입니다.


      12065353_14.jpg


      촉촉한 숲길을 걷는 기쁨,

      이보다 더 좋은 기쁨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12070749_18.jpg


      워싱턴 주에서

      가장 멋진 숲을 보고 싶으세요?


      12065353_16.jpg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솔 덕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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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보지못한

      멋지고 놀라운 숲과 계곡을 보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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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웨슬레의 예정

      1. 하나님의 예정 (불변) - 구원받을 수 있는 예정권
      2. 선택된 자 - 성령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3. 구원받지 못한 자 - 자유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자.
      4. 구원의 예정권 밖으로 나갈 수도 있고 안으로 들어 올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
      5. 일단 구원받았던 사람도, 자유의지의 잘 못된 선택으로 구원권 밖으로 상실될 수도 있음.
      6. 복음을 거절하고 믿음을 버렸던 자도, 다시 구원을 회복할 수 있음.


      칼빈주의적 예정

      1. 하나님의 절대 예정 (불변)
      영원한 선고(eternal decree)
      영원한 구원 보장(eternal security)
      2.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 선택 자.
      크리스챤이 되는 동시에 영원 구원 보장된 자
      3.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된 자 - 버림받은 자(遺棄)
      4. 일단 선택된 자기 구원을 상실하는 자유의지는 용납되지 않음.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가 말하는 구원은 지정의를 통한 중생을 말합니다, 입으로만 말하는 구원파적 구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생한자는 성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정도 작정도 없이 일을 하신다는것은 오히려 말이 안됩니다,
      예정은 구원받은후 돌이켜보면 이해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웨슬레는 구원이 취소되는것은 복음을 거절한것으로 보고 있음에 비해서 한동안 문제가 되었던 (이단적이라 결론남)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행위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 칼빈 교리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온전한 회심으로 구원을 확증받은 자는 주님의 은혜로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심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5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All that the Father gives me will come to me, and whoever comes to me I will never drive away.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한교연 조사받은 신옥주 목사 “이단 의혹, 모두 거짓말” 반발



      지난 해 예장합신 이단대책위원회(이대위)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 교단과 이대위 관계자들을 찾아가 폭행하는 등 물의를 빚은 은혜로교회 신옥주 목사가 한교연에서 이단성 의혹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은혜로교회 신옥주 목사가 2시간에 걸친 검증 후 한교연 사무실을 빠져나오고 있다.ⓒ뉴스미션

      신옥주 목사, 방언 등 신학적 문제 답변해

      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한교연 바수위)는 19일 오후 2시 한교연 사무실에 신옥주 목사를 불러, 그간 불거진 이단적 의혹들에 대해 질의했다.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자리에 은혜로교회 관계자 두 명과 동행한 신옥주 목사는 예장합신 이대위 측이 주장한 의혹들이 ‘모두 사실과 다른 거짓말’이었다고 주장하며 억울한 심경을 전했다. 간간히 회의실 안에서는 논쟁 가운데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한교연 관계자는 이날 바수위 위원들이 방언과 종말론 등 신학적 문제에 대해 질의했고 이에 대한 신 목사의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간 제기된 문제 가운데,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에 입각해 피지로 교인들을 보내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 신 목사는 피지에 10만평의 땅을 구입했고 신앙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가서 쉬도록 한 것은 맞지만 강제로 보낸 것은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단 규정 이후 교계 인사와 단체들을 상대로 은혜로교회 교인들이 폭력 사태를 일으킨 것과 관련해선, 억울한 마음에 그랬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신 목사는 또한 한교연 바수위 측이 ‘표현의 문제가 있을 경우 수정을 요청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질문한 데 암 대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바수위는 이날 들은 해명 내용을 참고로, 빠른 시일 내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서 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2시간여 걸친 바수위 모임을 끝내고 나온 신 목사는 기자들에게 “한 번쯤은 와서 의혹들에 대해 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주어진 질의에 다 대답했다”며 “그동안 수많은 의혹들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오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공개 공청회를 하고 싶었는데 비공개로 진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윤화미 ⓒ 뉴스미션

      USA 아멘넷

          아인슈타인의 '인간성공 방정식'

           

           

          아인슈타인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성공 방정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L=G+L+E"입니다. 기자들이 해설을 요구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L은 Life(인생)이고, G는 God(하나님), J는 Job(일) E는 Enjoy(즐기는 것)입니다." #내안에 커져 가는 하나님의 자리/교회성장연구소편 삶은 일도 있어야 하며 즐기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근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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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현대 복음의 오류


      아더 핑크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나의 전 존재와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기꺼이 영접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에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혹 어떤 사람은 그러면 왜 로마서 12:1과 같은 권면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며

      반대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 반대에 대해 우리는 모든 권면은

      그들이 시작한 그대로 계속 행하라고 그들에게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서 '영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 오늘날 은혜를 구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의 표준에 비춰볼 때 얼마나 저급한가.

      만일 당신이 성구사전을 찾아본다면,

      주와 구주 이 두 단어가 함께 들어 있는 모든 성경구절들 속에는

      언제나 '주와 구주'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코 '구주와 주', 즉 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6,47, 벧후 1:11, 2:20, 3:18 등을 한 번 찾아보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1:11),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2:20)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3:18)]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만족과 고집대로 사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악한 삶에 대해 애통해 하며 참회할 때까지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자비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

      시끄러운 촐싹거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그들의 말은 단지 모욕적인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최고로 무시무시한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며,

      또한 끔찍스럽게도 사함이 없는 죄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은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마치 추악한 기형아와 같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심지어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구원받는 것은 굉장히 간단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3:16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하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면'

      그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했다고 평해진다.

      사람이 은행을 신뢰하듯, 혹은 아내가 남편을 의지하듯

      죄인이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향하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들 한다.

      이런 생각이 아주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생각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기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 생각이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로부터 나온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인간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자연적인 신앙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신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초자연적인 신앙이 요구된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과 '개인전도자'들이 채택한 전도방법들을 조사해볼 때

      그들이 생각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접해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님께서 사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항복시키려고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실 때

      완성하시는 그 은혜스런 이적에 대한 개념을

      그들은 최고로 약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 슬프다.

      이 타락한 세대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초자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지에서 나온 행위보다 우월한 것은 못되며,

      단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잘 묘사했거나

      '믿음'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 구절 몇 개를 피전도자 앞에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오늘날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평안 속에 잠재우는 사단의 마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은 정말 두렵다.


      죄인이 마음을 성결케 하는 일을(약 4:8)

      마치 손을 깨끗이 씻는 일만큼이나 간단한 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약화시키는 신적 진리의 빛이 영혼을 탐색하도록 허용하는 일을,

      커튼을 열어젖힘으로써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취게 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며,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 죄로부터 거룩으로 돌아서는 일을

      배가 키의 도움으로 선회하여 방향을 바르게 잡는 일 만큼이나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오 독자들이여,

      이 생명에 관한 일에 대해 절대 이렇게 속지 말라.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 세상에 대해 못 박히는 것,

      사단을 이기는 것,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고 의에 대하여 날마다 사는 것,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게 되는 것,

      그리고 신뢰와 순종, 경건과 인내, 신실과 강직, 사랑과 친절의 사람이 되는 것 등,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저히 이루지 못할 과업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간주하는 이유는

      현 세대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참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성격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여서

      위에 언급한 망상이 아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이기에

      오늘날 복음이 '인기있는 상품'(?)으로 아주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믿음 그 이상의 것이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나의 마음과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지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와 인간의 뜻, 그리고 자기만족으로부터이다.

      이쯤 되고 보면 그토록 어려운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더더욱 극소수이리라.

      주 예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간단한 것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님은 영혼구원이 간단한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말씀하셨다.



      젊은 관원이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4,25)고 하셨다.

      목사나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내리는 신학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그들의 평가는 전혀 타당치가 않은 것 같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백만장자의 구원은 극빈자의 구원만큼이나 손쉬운 일인데

      그 이유는 백만장자나 극빈자 모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재물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구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곁에 있었다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어느 누구라도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확신시키지 않으시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부연하셨다(막 10:27).

      타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또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특별히 변호하기 위해 신청하는 모든 재판을 각하시켜 버린다.

      성령님의 은혜스러운 이적 외에는 아무것도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면 자연인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그 젊은 관원의 경우에서 이끌어내 보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갔다.

      그는 재물에 빠져 있었다. 재물이 그의 우상이었다.

      그의 마음은 땅의 것에 얽매여 있었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혈과 육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독자들이여, 당신의 우상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그 젊은 관원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조의 요구에 대한 복종, 즉 하나님께 대한 항복심의 결여였다.

      이 지상의 찌끼들로 영혼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하늘의 감동을 받을 여유가 없다.

      사람은 육적인 부에 만족을 느낄 때 영적인 부를 향한 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한 진리가 그리스도의 큰 잔치 비유에서 다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는 널리 공고되었고 복음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다 일률적으로 사양하였다.'(눅 14:18).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온갖 다른 일에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밭과(18절) 소와(19절) 가정의 행복(20절) 등에 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는 조건 아래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건 아래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모시려고'한다.

      그리스도의 조건이 무엇인가는 같은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중한 분으로 마음속에 모시는 것(26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27절), 모든 우상을 내던지는 것(33절) 등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하늘의 것에 애정을 품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계산에 넣고)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여기 '영광'이란 말은 칭찬이나, 혹 찬양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요목표를 서로에게서 칭찬 듣는 일에다가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관심했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려는 열망과 결심을 가지며)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 4:4).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과, 불경건한 (또는 종교적인) 친구들의 존경받는 일을 멀리하는 것과

      그리고 경멸과 거절당하신 그 분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일,

      또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항복하는 일,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 등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이 구절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영생 얻는 일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구원받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의 인기 있는 이론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그가 결심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육체중심주의와 피조물 찬양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그 까닭은 자연인은 죄의 종이며(요 8:34) 각색 정욕에 종노릇을 하며(딛 3:3),

      마귀의 포로이기 때문에(딤후 2:26),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끄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따라서 자연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깨뜨리고 감옥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존본능 때문에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사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은 "그의 길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사 55:7).

      그리고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는(살전 1:9)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눅 14:33)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찬미를 빙자하여

      그리스도를 죄의 사역자로, 즉 그의 속죄 제사로써

      육적이고 세상적인 정욕들을 습관적으로 즐기는 인간들의 사면을 획득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대속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공언을 하면, 그의 매일의 삶이

      신앙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불신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마귀는 바로 이 착각 작용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취시킨 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고 말씀하시며

      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다.



      영광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의 용서를 획득키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며,

      또 우리 마음이 여전히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있는데도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요 10:4,14, 히 10:20-22, 벧전 2:21),

      또 그 길로 사람들을 불러들이시려고 오신 것이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0-2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그리고 그의 교훈과 약속,

      또 그의 선례와 정신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영화된 상태로 재구성하시려고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화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목적으로 사시다가 죽으신 후에

      그의 성령께서 오셔서 죽은 죄인들을 생명의 새로움으로 소생시키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들로 재창조하시며,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또한 마음이 이미 세상과는 절연된 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체류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심령의 변화나 회개, 개인적인 성결, 하나님께 대한 지고한 사랑,

      그리고 주저함이 없는 순종 등,

      즉 인간 없이도 가능하나 인간에게 전혀 무익한 구원을 연출하시려 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가!


      우리는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입술로 주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말의 소리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마 7:22-23).

      만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옥의 공포가 죄인으로 하여금 주를 부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나무정령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능자는 공포를 느껴 자비를 간청하는 어떤 반항자가 하라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 중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는 경우는

      상한 심령과 온유한 마음,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성결을 목말라 하는 마음에서 부르짖을 때 뿐이다.

      동일한 원리가 사도행전 16:31과 다른 모든 유사구절,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구절들에게도 적용된다.

      무관심한 독자들은 한번 힐끗 봐선 잘 모를 깊은 의미를 찾아내리라.

      사도가 빌립보 간수에게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라"거나

      "그의 속죄제사를 의지하라"고 하지 않은 점에 주의하라.

      그 대신에 그 간수 앞에 그는 한 인격을 들이댔다.

      그것은 단순히 "구주에 대하여 믿으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2은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과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시기도 한 분을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렇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리스도는 구주가 되기 전에 '주님'으로서 영접되어야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골 2:6) 받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우리 자신의 죄 된 주인의식을 포기하는 일과

      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내려놓는 일,

      그리고 그의 멍에와 율법을 복종하는 일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어떤 인간이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스런 이적이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역사해야만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인간 심성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전달된 영적인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골 2:12)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의 산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1:12),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죄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므로

      그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듯이 스스로 회생할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죽음의 의복과 육체의 정욕으로 꽉 조여 있기 때문에

      오직 전능자만이 그의 마음을 소생시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할 수 있다.

      만일 이 완악한 세대의 형식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자연인의 실제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른 개념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은혜의 이적만이 구원받고자 하여 믿는 어떤 죄인에게나

      진정한 권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덜 빈정거리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가장 세련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마음의 태도가

      가장 비천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갖는 그 태도와 과히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동료 피조물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많이 갈망하고

      반대로 가장 이기적이고 야수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덜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오직 신적인 능력만이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리라.


      오늘날 '정통주의' 서클 내에 아주 널리 파급된 심각한 잘못이 하나 있다.

      외관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교리인 듯하나 실상은 많은 영혼들을 속이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한다'는 교리가 그것이다.

      아, 사단은 매우 교활하다.

      사단은 각각의 낚시터에서 가장 효과있는 미끼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세례와 성만찬은 영혼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이라고 설교자가 전하면

      몹시 분개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은

      쉽게 받아들인다.

      이 말은 하나님 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사람 편에서는 틀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디도서 3:5 전체를 주의깊게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구원은 양면성이 있다. 법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이 그것이다.

      또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된다.

      나는 성자에게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 모두에게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

      아, 슬프다.

      오늘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 사실을 설교하는 사람 또한 적도다.

      나는 첫째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께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디도서 3:4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고 계신 분은 바로 성부이시다.

      두 번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가치 있는 순종에 희생에 빚지고 있다.

      성자께서는 나의 구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행하셨고,

      또한 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셋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거듭나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시며,

      끝까지 보존하시는 성령님의 효력있는 역사에 빚지고 있다.

      그의 사역은 누가복음 15:8-10에서 탁월하게 나타나 있고

      4-7절에 있는 목자의 사역과 동일하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8-10),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4-7)]

      디도서 3: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단호히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활에 구원의 직접 증거를 보여주는 성령님의 '열매'의 출현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존재증거를 발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조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마음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라고 말한다(행 15:9).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렘 4:14).

      믿음에 의하여 깨끗해진 마음은(벧전 1:22) 지순한 대상께 고정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그 마음은 순수한 샘으로부터 마시며, 순전한 율법(롬 7:22)을 즐거워하며,

      순결한 구주(요일 3:3)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예견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7:22),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고 그 마음은 영적인 더러움 못지않게 도덕적인 더러움도 혐오한다.

      그렇다. 그것은 육체로 더럽혀진 의복을 싫어한다(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1:23)]

      반대로 그 마음은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비록 현자라 할지라도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계 21:27)을 행한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천국에 우리가 거하려면 마음의 청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마 좀 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리라.

      믿음에 의한 마음의 청결은

      첫째, 신적 빛의 조명에 의한 지식의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은 오류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둘째는 양심의 청결이며, 양심은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셋째는 의지의 청결이며 의지는 고집과 자기추구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넷째는 감정의 청결이다. 이제 감정은 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화한다.

      성경에 의하면 "마음"은 이 네 가지 기능 모두를 포함한다.

      구속의 목적은 동일한 죄를 계속 짓지 못하도록 하려 함이라는 점에서

      청결한 마음과 일치한다.

      한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에 의하여 입증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불로 연단된 정금(벧전 1:7)과 같아서 매우 소중하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 그분께 기꺼이 시험받으려고 한다.

      그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이 그의 신앙을 시험하도록 기꺼이 허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시금석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는 자기자신을 시험한다.

      왜냐하면 평안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태로울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좋은 상태 못지않게 최악의 상태도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설교는 자기자신을 낱낱이 파헤치는 설교이다.

      그는 헛된 소망으로 망상에 빠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근거없는 영적자만에 빠져 우쭐거리지 않는다.

      시험이 왔을 때 고린도후서 13:5에 기록된 사도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바로 여기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형식주의자들과 구분된다.

      건방진 신앙고백자는 교만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으며,

      자기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탐색하는 시험은 경멸하고,

      신앙에 해롭고 신앙을 파괴하는 자기반성은 중시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설교는 자기와 거리가 멀고 양심을 찌르지 않으며,

      자기 마음을 정밀검사하지 않는 설교이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그를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보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

      그의 거짓된 평안은 더욱 넘쳐 나게 되고, 그의 인간적인 확신은 더욱 견고하여진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그의 소망은 환상이고 그의 확신은 거짓이라고 확신시키려 들면,

      그는 그 하나님의 종을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대는 원수 사단으로 간주한다.

      자신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구원받은 살인자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또 다른 특성은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헛되고 괴로운 이 세상의 것들과 싸워 승리케 한다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실재임을 주의하라.

      이 점에서 성도는 그의 머리와 일치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백성들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눈을 열어서

      이 세상이 제공하는 최상의 것의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영적인 것들로 만족케 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떼어놓는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대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를 그리워한다.

      아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일들에 관해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에 의해 속고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이 논문을 기쁘게 사용하셔서

      몇몇 미혹된 영혼들의 거짓확신을 분쇄함으로써,

      그들이 절박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습득방법을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하라고 대답하겠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하나님 자신의 방식으로 주시리라.

      우리가 그 믿음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전달하실 때 항상 사용하시는 방식 속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자신이 제공하신 수단의 채널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제정된 수단들은 그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들린 유용한 도구들에 불과하다.

      하나님 자신은 그 수단들에 묶여 있지 않으나 우리들은 제한받는다.

      또 하나님은 자유하시나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하다.



      첫 번째 수단은 기도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

      이것은 참 소중한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경에 귀를 기울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새 마음, 새 영, 그리고 선물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는 보편적인 의무이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불신자들이 범죄한다 하더라도

      (그 밖의 모든 경우에서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다.



      두 번째 수단은 말씀을 듣고(요 17:20, 고전 3:5) 읽는 것이다.(딤후 3:15)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다윗은 말한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지한 마음으로 생명과 능력과 구속, 그리고 평안을 간구하면서 성경을 읽으라.

      주께서 그의 축복을 더하시기를.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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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카제국의 유산, 살리나스(Salinas) 염전

      페루의 꾸스꼬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마라스(Maras) 마을의 계곡속에 위치한 살리나스(Salinas)염전입니다. 15,16세기에 번성하였던 잉카문명이 후대에 남긴 놀라운 유물 살리나스(Salinas)는 백두산 보다 높은곳에 자리한 해발 3000m의 고지대 산속에 자리한 계곡 염전입니다.

      이 거대한 염전이 산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래 안데스 산맥은 수만년전에 해저가 융기하여 이루워졌고 그 지층에는 암염이 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암염지층을 통과하면서 바닷물과 같은 염천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잉카인들은 이 염천수를 이용하여, 위에서부터 차래로 물을 흘러보내서, 좁은 계곡에 계단밭 형태의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는 아직도 잉카시대와 똑같은 방법을 이용해 소금을 채취하고 있고 소금 채취와 더불어 요즈음은 관광 명소로까지 각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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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tarishum Guambritos (하늘을 난다) / Si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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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말씀에 대한 풍요로운 지식 / 송영찬목사

       

       

       

      <에클레시아 3.0> 그 열아홉번째 이야기

      성신께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풍요로운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야만 성신께서 우리를 능력 있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신다. 우리에게 절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그 말씀을 풍성하게 담는 일이다. 그것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실패한다. ‘내가 과연 말씀에 대하여 풍요로운가? 내 인생을 진행시킬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확인이 되어있지 않다면 함부로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여긴다든지 나서는 일이 없어야 하며 사물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거나 그것으로 자신의 길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득적 욕구 있어야

      이제 우리는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을 어떻게 경영해 나갈 것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원칙적이고 초보적인 지식을 얻게 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면 그의 모든 삶을 철저하게 어머니에게 위탁하는 것과 같다. 오직 어머니의 손에 의지해 살아갈 뿐이다.

      갓난아이가 자기가 알아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자신의 생존권을 보존하며 보호하기 위해 방어력을 키우는 일은 없다. 갓난아이는 그런 능력을 가지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어머니에게서 버림을 받아 내던져짐을 당하면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이다. 이것이 갓난아이의 처지요 형편이다.

      곧 갓난아이는 그저 젖을 먹고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그 아이가 유일하게 할 일이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머니의 젖이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거기에 생사를 걸고 젖을 빨아야 한다. 여유 자적해 가면서 쉬엄쉬엄 젖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자기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그 아이의 생명력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서는 젖을 먹는 일에서 그 생명력이 발휘되는 것이고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생명의 능력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갓난아이가 자기의 전 삶을 다해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단지 기독교적인 지식을 채워나가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참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남으로써 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 이것이 성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원칙적인 모습이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욕구를 일으키게 하신다. 그리고 섭취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양육시켜 나가게 하시는 것이 성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편이다.

      2)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하여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삶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풍요롭고 충일했을 때 성신께서 우리를 가장 능력 있게 인도하신다. 그 상태가 바로 성신님의 충만한 상태가 되며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신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인격의 발휘가 그때부터 나타난다.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이런 상태가 바로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신령한 사람’이다. “신령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나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와 같은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신님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인 모습이 바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현실 위치는 바로 이 자리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단계에 지금 서 있다. 내 인생에 대하여 내 장래에 대하여 또는 미래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지탱할 아무런 힘도 얻을 수 없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유아적이며 피동적인 삶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서기보다 그리고 뭐라도 한번 들추어 내보겠다고 하거나 굉장한 일을 세워 보겠다고 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풍요로울 때 우리가 장성해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더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곧 우리 삶의 능력이다.

      이보다 더 큰 구원의 역사는 없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95-98.>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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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콥 교류금지 결의…동성결혼도 반대키로
      제34차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정기총회서 안건 처리
      2015년 06월 18일 (목) 11:05:51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 제34차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가 열려 ‘인터콥 교류금지’를 결의했다. ⓒCKSBCA

      인터콥에 대한 ‘교류금지’ 결의가 나왔다. 최근 월간<현대종교>가 ‘인터콥, 과연 변했나’라는 기사로 의문을 제기한 가운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최바울 선교사와 인터콥에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교류금지’ 결의를 한 교단은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CKSBCA)다. CKSBCA는 제34차 정기총회(CKSBCA)를 북가주 산호세 소재 뉴비전교회(담임목사 이진수)에서 6월 15일에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영적 축제’라는 주제로 개회해 신임 총회장으로 김상민 목사를 선출하는 등 임원을 개선하고 회무를 처리하고 있다.

      인터콥 문제는 미국 현지 시간으로 17일(수) 오전에 상정되어 ‘교류금지’를 결의했다. 오후에는 인터콥 참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논의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CKSBCA는 ‘동성결혼’에 대해 반대하기로 결의했으며 이번 총회는 18일까지 열린다.


      이런 곳도 있었나?

      드넓은 지구촌 곳곳에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신기하고 특별한
      모습을 가진 장소가 있다.
      예전에는 사진과 영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다.

      1. 투르크메니스탄 지옥 문 (The Door To Hell, Turkmen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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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크메니스탄 더웨즈(Derweze)는 천연가스가 풍부한 지역이다.
      1974년 천연가스 채취용 구멍을 뚫다 붕괴돼
      직경 70m 구멍이 생겼다.
      붕괴 된 구멍으로 유독가스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가스를
      태우려 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타고 있다.
      주민들은 이 구덩이를 지옥의 문이라고 부른다.
      2010년 4월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해
      불을 끄라고 지시했지만 여전히 타고 있다.

      2. 프랑스 파일라 모래언덕(The Great Dune of Pyla,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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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아르카숑 보르도에서 60㎞에 위치한 파일라 모래언덕은 마치
      해안가에 대형 모래 해일이 덮친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모래언덕은 길이 3㎞, 폭 500m, 높이는 해발 107m에 달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사구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매년 동쪽으로4m씩 이동하고 있다.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로 꼽힌다.



      3. 브라질, 베네수엘라 가이안의 경계 로라이마산
      (Mount Roraima, Venezuela, Brazil and Gu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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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깎아내 평평하게 만든 듯한 로라이마산은
      남미의 고원에 있다.
      1596년 영국탐험가 월터롤리의 저서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가이아나 3국이 만나는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다.
      2억년 전에 형성된 지층으로, 길이 31㎞, 해발 2810m,
      절벽높이는 400m다.
      독특한 환경 덕에 고원에는 희귀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올라가는데 하루가
      걸릴 정도로 산이 험하다.


      4. 뉴질랜드 로터루아(Rotorua,New Ze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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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끓는 진흙 연못으로 유명하다.
      진흙에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기괴하면서도 신기하다.
      단 가까이서 보려면 각오가 필요하다.
      유황 때문에 달걀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5. 예멘 소코트라(Socotra, Republic of Y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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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로부터 가장 폐쇄적인 섬이다.
      아라비아 반도 예멘본토에서 남쪽으로 380㎞ 떨어져있다.
      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육지와 오랫동안
      격리되어있다 보니 자생
      식물이 외계식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양이 독특하다.

      버섯모양을 하고 있는 용혈수(붉은 수액),
      사막의 장미로 불리는 아데니움(Adenium) 등 다양한
      식물군이 자생한다.
      825종의 식물 중 307종이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출처: 안산회복교회:전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가져온 곳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 로이드존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4:13)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1. 여러분의 관심을 어디다 두고 사십니까?

      자기 영혼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영원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까? 이것들이 여러분을 흥미롭게 합니까? 확신하건대,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빌립보 3:19)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이란 육욕적이고 육신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는 살인 사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왕실가족이나 소위 상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화려한 허식 그리고 인생의 각종 구경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그것은 동일한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서 그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관심은 영적입니까? 여러분은 영혼불멸과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는 죄의식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특정한 일들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와 악한 생각이 있으며 또한 무가치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하게 하는 근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르시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8-24)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관해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제시한 방법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또 만일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미워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그분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믿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8,10)


      이 세상의 관원들, 세상의 위인들, 힘 있고 지혜로우며 귀족에 속하는 자들마저도 나사렛 예수를 보고서 한 사람, 목수, 그리고 기술자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를 일종의 특출한 종교적 천재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가 영광의 주이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르기를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2:13)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한일서 4: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지성과 이해력과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곧 건전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비천하고 무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인들이 그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기뻐함과 아울러 그것으로 인해 변화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설명하기를, 성령께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또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


      4.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육신과 성령간의 투쟁과 싸움이 진행됨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라디아서 5:17)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음을 자각합니까? 그것은 단지 여러분이 때때로 나쁜 일을 저지르기 원하며 그래서 마음속으로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각합니까? 여러분 안에는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을 원하는 새로운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처럼 대조적인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다툼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옛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새 사람과 옛 사람간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면, 성령께서 사실상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역사하고 계심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이르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 2:12-13)라고 합니다. 이는 크고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하려고 결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도덕가들과 종교적 의무를 복종하는 자들은 그 모든 일을 행하며, 그 때문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침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일어나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고자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조절하며, 그런 후에는 자신의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우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얼마나 근사해 보입니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달리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인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합니다.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나는 나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려졌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며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인도하고 설득하며, 또한 고무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자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 안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6.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는지 혹은 그런 증거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이 입증됩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 개씩 짝을 이룬 9개의 열매들은-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될 그분에 관한 가장 완벽한 묘사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희락은 모든 상황에도 아량곳하지 않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 양선, 온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사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7.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며, “양자의 양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하나님은 더 이상 영원 가운데 멀리 계시는 어떤 막연한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분께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 곧 탕자의 아버지께로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로 갑니다. 이 점을 가리켜 요한은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봅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만일 여러분이 이 은사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이 값 없는 선물을 얻기를 바란다면, 지체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파탄 상태를 인정하며 자신의 공허함을 자백하고서, 은총을 내려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 자신의 역속에 호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받을 때까지 계속 간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너무도 확실하며, 우리는 그분의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그분께 간구하십시오. 만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여러분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얻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 D. M. 로이드존스, ‘요한일서 강해’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º 넓게 더 아름답게 유익한 만남 º♡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남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자기 실속만 차리려는
      경향에 빠져드는 자신을 볼 때
      얼른 '넓게 더 아름답게!' 하고 속으로 외칩니다.

      늘 함께 지내는 이의
      행동이 못마땅하고

      그를 향한 이해의 폭이 자꾸만 좁아지려 할 때,
      '넓게 더 아름답게!' 하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큰 일들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골몰해 있을 때,
      '넓게 더 아름답게!' 를 조용히 외칩니다.

      남의 호의를 무시하고
      의심하는 옹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넓게 더 아름답게!' 를 외웁니다.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편견과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넓게 더 아름답게!' 를 반복합니다.

      남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가 안 돼 속을 끓일 때도,
      '넓게 더 아름답게!' 를 읊조립니다.

      모든 일에 '넓게 더 아름답게!'를
      기도처럼 끊임없이 외우고 실천하면서

      봄여름 가을 겨울
      삶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야겠지요?

      어느 새 봄이 오는 바닷가에서
      나는 오늘 이렇게 고백해봅니다.

      큰 하늘을 담은 바다처럼
      내 마음도 한없이 넓어지고 싶습니다.

      늘 부서질 준비가 되어 있는 파도처럼
      내 마음도 더 낮아지고 깨지고 싶습니다.

      그래야 넓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가르치는 바다여 파도여 사랑이여... .'


      -이해인<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중에서-



       

       

      출처: 사모님사모님/민들레홀씨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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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서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부분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다섯째, 민감한 부분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여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일곱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설교를 하려 들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 것, 

      여덟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그리스도와 하신 사역을 높이고 있는가?)

      아홉째, 사실을 말할 것, 

      열번째,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준비 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부분을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부분과 관련 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비전에도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비전이 아니라 하늘의 비전이 이야깁니다. 하늘의 것을 좇으며 평생을 지낸 사람은 거룩한 성이 시야에 들어오면 발걸음을 서두르게 마련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그의 작업실에서 제자에게 보내는 글이 적힌 쪽지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만년의 손 글씨로 거장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리고 또 그리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음이 바빴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갑니다. 하루가 지나가고, 일년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맡기신 그 일은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모두 마쳐야 합니다. 형통한 날의 은혜/맥스 루케이도

      “신사도운동은 반교회적, 교회 직분 제대로 이해 못한 탓”
      심창섭 교수, 합동 개혁주의 신학대회서 신사도운동 문제점 지적

      2015/06/15 (월) 08:02 ㆍ추천: 0      

      “피터 와그너의 주장에 현혹된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생들이 사도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사도의 권세를 회복하여 기적, 예언, 축사, 귀신 몰아내기 등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은사운동의 재현에 심취해 교회를 혼란케 하는 행위는 반(反)교회적이고 이단적인 행위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오늘날에도 재현된다고 주장하는 신사도운동. 심창섭 교수(전 총신 신대원)는 15일 오전 합동총회 신학부가 주최한 개혁주의 신학대회에서 신사도운동이 지닌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15일 사랑의교회에서 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주최 ‘2015 총회 개혁주의 신학대회’가 열렸다.ⓒ뉴스미션

      사도들의 재현?…교회 직분 제대로 이해 못한 탓

      신약시대 사도들의 직임과 예언이 오늘날에도 재현된다고 믿는 신사도운동에 대해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간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교회의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은사지속론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한국의 유명 목회자들과도 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리더십을 연구하는 와그너리더십연구소도 국내에 설립돼 활동 중이다.

      심 교수는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이란 관점에서 은사지속론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견해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피터 와그너와 같이 사도들이나 예언자들이 초대교회처럼 다시 나타난다는 주장은 곤란하다”고 일축했다.

      그에 따르면, 피터 와그너의 견해가 전통적인 교회가 주장하는 ‘사도 직분의 단회성’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12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지나면 사도들의 임무가 종결됐고, 더 이상 동일한 사도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사도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의 직분들을 문자적으로 해석, 적용해 현재에도 사도나 선지자들이 나타난다면 오늘날에도 다윗이나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재현되어 나타나야 할 것”이라며 “신사도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사도와 선지자의 재현은 교회 직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신사도운동의 사도협의체, 초대교회엔 없었다”

      계속된 발제에서 심 교수는 사도들의 권세, 이적, 세계관 등에 대한 평가를 통해 신사도운동의 문제점을 짚어냈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의 재현을 주장하는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들에게 특이한 권위를 부여한다”며 “전통교회에서 교회의 권위가 공동의회나 제직회와 같은 교회의 구조에 있다고 보는 반면 신사도운동은 자신들의 사도 개인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새로운 권위 구조를 주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도가 지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목사들을 총괄하는 권력과 권세를 갖게 된다. 즉 사도들은 목사의 영적 아버지로 군림하여 목사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며 “그러나 성경에 목사가 사도를 공궤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한 군데도 없다”고 강조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신사도운동처럼 사도협의체를 구성해 통치한 적이 없으며, 사도 개인들이 모든 것을 지도하고 관장한 것이 아니라 말씀 전파에 전념하기 위해 재정적인 책무를 집사들에게 위임하면서 권력의 분할 정책을 시도했다는 것이 심 교수의 견해다.

      신사도운동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세계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해석한 것이 가장 큰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사도운동은 역사를 사탄과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의 구도로 해석한다”며 “지역의 영들을 타파하기 위해 통찰력이 있는 25명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영적 전쟁 네트워크(SWN)’를 결성했다. 귀신을 쫓아내며 어둠의 정사들과 싸워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심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물리치는 영적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죽은 자 살려냈다는’ 김기동 목사도 치유 사례?

      그런가 하면 신사도운동의 치유 사역은 객관성이 결여돼 있다는 게 심 교수의 입장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된 환자들이 즉석에 완전한 치유가 이뤄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치유됐다는 것은 성경의 치유 사건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

      한국의 김기동 목사를 치유 사례에 포함시킨 것도 문제삼았다. 와그너의 보고에 의하면 김기동 목사는 10명의 죽은 자를 살려내었고 수천의 귀신들을 쫓아내었으며 59명의 완전한 절름발이를 걷게 했다.

      심 교수는 “다른 이적은 차제하고 10명의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사실로 인정하고 서술하는 것을 보면 그가 보고하는 치유의 은사들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은사주의 중심의 성령체험이 신사도운동을 낳았고 신사도운동은 교회관은 물론이고 기독교세계관까지 뒤흔들어 놓았다”며 “교회는 은사중심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에 의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 중심의 인격적 목회와 교훈을 통해 올바른 교회로 자리매김할 때 건강한 성장이 이뤄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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