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Knowing Christ

“전체란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것이다.”(A whole is that which has beginning, middle and end.) 라고 이야기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신앙생활을 전체(whole)로 본다면, 이 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일괄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할 이유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부어주신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이어야 할까?

필자는 오래전 이단에 빠진 한 청년이 그 이단 신학교(신학원)를 수료하면서 소감문을 발표한 것을 어느 글에서 관심 있게 읽어본 기억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 교회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군대에 갔을 때는 군종병들이 교회 다니는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병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가려 했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다니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여자 문제로 사모님을 버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단 단체에 속하게 된 동기라고 했고, 이단 신학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이단에 빠진 자)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눈길을 돌렸고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사냥꾼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신앙생활 출발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중간이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중에서,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 잘못되었거나, 우리의 신학이나 교리가 잘못되어서 기독교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 청년은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듯 하다. 즉, 본질보다는, 비본질,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들 삶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는 비본질(거듭나지 못한 장로님들의 부족함, 열심만 있는 군종 상관, 타락한 삯군 목자) 이런 인간의 부족한 부분에 자신의 신앙생활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수할 때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났고 이단이 쳐둔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는 또 이단 신학교 졸업식사 서두에 "천지의 대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들을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주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날 약속의 실체가 되셔서 영적 새 이스라엘 12 지파를 창설하신 우리의 이기신 者, 총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라면서 하나님께가 아닌, 그 단체의 교주에게 영광을, 그리고 찬양을 올렸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어느 정도로 진실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실망하고 좌절하였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때문이란 것이다! 이단으로 넘어가 이단의 교리를 배우고,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인간 이긴 者(그들의 교리에서 '이긴 자'는 복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그 신도들을 가리키며, 단수로 사용될 때는 인간 교주를 그리고 인간 교주를 가리킬 때 '이긴 자'라는 존재는 보혜사, 사도 요한격 목자, 약속의 목자 등으로 일컬어진다고 한다)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그가(이단으로 빠진 청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 정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신관(神觀):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우리 ‘ 주 예수 그리스도’한 분 뿐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 예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이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 참조)

: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이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요즘 각광하고 있는 사이비 자칭 이긴 자(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신관(神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그리스도(Christ)란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살펴보면,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선명한 뜻이 함축돼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이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넷: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심판 主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1) 첫 번째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오실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심을 믿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하늘 어딘가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못할 때는 벌을 내리시는 분,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우리네처럼 변덕스럽거나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정립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 한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관(神觀)을 제대로 정립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처럼 교계의 형편이 바닥을 치는듯하고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반기련이나 이단 사설에 미혹되는 이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적, 지성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이요,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 정확한 개념을 배우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의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소리일까?

현대는 신학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종교 지도자라 칭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지도자 자리에 들기 좋아하여 싸우며 다투기를 즐기지만, 막상,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이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머리로만 아는 예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받아들인 신앙인이 매우 드문 현실이다. 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영의 일이다. ( 요 6: 63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자신 뿐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지옥 백성이 되도록 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무서운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며(롬 11:36),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롬 3:23-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란 것(롬 5:8; 벧전 3:18), 이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코 이단으로 미혹되거나 빠질 이유가 없을텐데....

우리 신앙생활은 출발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야 하고, 가는 길, 중간도 주 예수 그리스만 바라보아야 하며, 신앙생활의 끝(Final)도,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는, 올바른 신관(神觀)을 세워야 한다. 고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돼, 힘써 알고, 분명히 알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2-26)"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사랑의 선택/최송연

짐의 무게야
어떠하든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 

기대감은
실망을 대동하여
지친 어깨를
더욱 짓누르게 하지

감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믿어보는 거야, 끝까지
주님도, 이웃도...

사랑을 하려면
먼저 신뢰부터 배워야 해

신뢰감이 무너지면
사랑도 무너지는 것
사랑의 선택은 신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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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부부의 시간여행 ‘감동의 눈물’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의 시간 여행을 담은 영상이 화제다.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 ‘Field Day’ 채널은 예비부부를 화장을 통해 늙어가는 모습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해당 영상은 지난 5월에 게재된 이후 1억5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 세계 네티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영상은 한 달 뒤 결혼하는 부부, 크리스티와 트래비스의 이야기다. 제작진은 20대에서 90대까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분장을 통해 보여준다. 각 나이대에 맞는 분장 시간은 약 3시간. 하지만 시간여행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50세 분장에 트래비스는 크리스티에게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크리스티도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당신도 여전히 멋지다”며 화답한다. 70대 분장을 한 서로의 모습을 본 둘은 말을 잇지 못한다. 크리스티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제작진이 눈물의 의미를 묻자 크리스티는 “그 긴 시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상상이 된다”고 답한다.

90대에 이르자 트래비스의 눈가도 촉촉해진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제작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라고 묻는다. 크리스티는 트래비스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남편에게 감사하다”며 “나이 든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긴다”고 말한다.

▼100 Years of Beauty: Aging | Cut Has A Field Day

https://youtu.be/X9HlHmY-PsA

☞ 사진으로 천천히 다시보자


























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 박영선 목사

 

 

 

46강 막14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참조:8:31, 9:31, 10:33). ,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함께장사한 바 되고 함께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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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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