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최선의 길 / 박신 목사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믿음이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니 수시로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집니다. 그 때마다 회개하며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또 닥치면 그것도 이전에 실패했던 똑 같은 상황인데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 같은 예감마저 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차라리 한 길로만 강압적으로 인도해주시면 안 될까하고 실현불가능한 일마저 소원해봅니다.

유혹이란 항상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 보이는 복수 방안을 눈앞에 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나쁜 일이라면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서 퇴근하여 집으로 바로 갈 것인지 동료들과 술집에 들렀다 갈 것인지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둘 다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일찍 귀가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동료들과 한담을 나무며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럴 때는 최종결과를 미리 유추해 보는 것이 죄를 이기는 좋은 방안입니다. 일찍 귀가하는 것은 좋은 결과뿐입니다. 휴식을 취하며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며 이튿날 출근도 상쾌하고 거뜬해집니다. 동료들이 당장 비난할지 몰라도 속으론 사실 부러워하거나 다음날 아침에 잘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동료와 술집에 가면 처음 얼마 동안은 건전하지만 곧바로 건강, 금전, 정신적으로 손해 보는 일만 생깁니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그 모임이 절대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그럴 자신과 의지도 없지 않습니까? 오직 나쁜 결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를 알아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의 종류가 아닌 죄가 불러오는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타락한 본성이 방해하더라도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성경 말씀을 분별하여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죄에서 구원해 주는 길을 밝혀 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위 성도들의 위로와 권면과 도전도 받아야 합니다. 정말 평생을 두고 죄와 피 흘리며 싸워야 합니다. 항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며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할 경우가 생기면,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넓고 쉽습니다. 선을 행함은 우선 당장에는 무료하고, 힘들며, 손해 보고, 아무 열매 없을 것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단 행하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보람과 평강과 위로가 넘칩니다. 그 열매도 반드시 아름답고도 풍성해집니다. 반면에 죄는 처음에는 재미있고 신나며 즐겁고 흥분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아무 유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럽고 추하며 멸망으로 이끌 뿐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싸우는 최선의 방안이 나왔습니다. 죄를 알아서, 죄를 버리되, 선을 행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죄 자체를 이기려 하지 말고 죄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그것에 등을 돌려야 합니다. 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면 그 최종적인 결과를 정말 냉정하게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잘 분별이 안 되면 그 전부에서 일단 돌아서야 합니다. 등 돌리기조차 너무 힘들다면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일단 행하고 봐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신자가 가만히 있는데도 신령하고 거룩해지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선을 행할 소망을 심어주며 그런 여건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려운 이웃을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참모습을 말씀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 철저한 회개를 하게 한 후에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죄를 이기지도 선을 행하지도 못할 만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악은 그냥 버려지지 않고 반드시 선을 행해야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10/1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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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동정녀 탄생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인가?

<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

 

시작하는 말

 

동정녀 탄생교리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왜 필수적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묘사는 명확하고 분명하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잉태 당시 남자를 몰랐으며 마리아의 태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자의 성육신의 요람이 된 것이다(1:20; 1:35).

 

그러나 동정녀 탄생교리는 교회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꾸민 이야기처럼 환상이나 웃음거리로 여겨져 왔다. 문제는 교회 내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동정녀에 대해 오해한 사상들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로 두 논리가 있어왔다.

 

첫째는, 이사야 7:14에서 선지자가 언급한 처녀탄생에 대한 예언은 실제로 젊은 여성을 의미하며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학자들이 이사야의 예언에 관하여 이 주장을 하며 여전히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많은 이들이 이사야의 히브리어는 almah이며 처녀의 전문용어 bethula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왔다. almahbethula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almah가 처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구약에서의 증빙문구는 명백하지 않다.

 

almah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9번 나타나며, 어디서나 전후문맥은 단어의 의미를 명백하게 하는데, 처녀를 나타낸다. 더 중요한 것은 셉튜아진트는 almah를 번역하기를, 이사야 7:14를 인용한 마태복음 1:23에서의 동일한 단어인 희랍어 parthenos라고 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parthenos처녀라는 것에 의견을 일치한 것이다. 만일 70인경 유대 번역자들이 이사야7:14를 젊은 여인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했더라면 그들이 처녀의 명확한 헬라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많은 이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교신화의 대표적 형태로 안 좋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들의 전쟁에 처녀 탄생이 있으며 미트라교에 있으며, 기독교에도 동정녀 탄생이 있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무슨 대수라도 된단 말이냐, 그것들은 모두 우화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동정녀 탄생도 우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주장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2.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는 동정녀 잉태개념

 

1)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으며, 그 분은 남자를 모르는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나시고, 역사적인 무대 위에서 실제로 확실한 기적들을 행했으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했으며 부활하셨다라는 사실을 추정하고 가정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가? 답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러한 실제적인 인물은 기독교의 출현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다.

 

2) 유대인이 그들의 복음적 이야기에 이단적 요소들을 삽입해서 자기들의 종교로 귀의하거나 새로운 회심자를 얻으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혹 능한 유대인이 구약의 예언 성취를 위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했을 것이라고 가정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단의 사상을 첨가하거나 혼합하는 것이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받기 쉬었겠는가. 그런 가정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심히 어렵고 혐오스런 것이다.

 

3) 세상 역사 가운데는 그 어디에도 성경과 같은 예언과 성취로서의 실제적 동정녀 탄생은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대제, 디오니수스, 미트라 그리고 석가모니들의 탄생 설화를 보면 그들이 죽은 후 여러 세기가 지나서 고대 전기작가들이 만든 이야기이지, 성경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역사성과 내용을 언급한 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떠도는 그 이야기들은 비정상적 잉태설이며 동정녀 탄생이 아니다.

 

알렉산더의 부모들은 이미 결혼했다. Dionysus는 제우스신이 자신을 인간으로 변장하여 왕자를 수태해서 태어났다. 이것은 동정녀 탄생이 아니며,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신()Mithra는 한 반석에서 태어났다. 동정녀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경우, 그의 어머니는 부처가 하얀 코끼리 형태로 그녀 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의 사후 5세기까지도 없었던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자였다. 소위 이런 우화는 불확실한 이야기로서 모두가 사후에 생겨났으며. 어찌됐든지 세상 역사상 실제 동정녀 잉태 사건은 아니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중요성

 

문제는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인 사실이란 것과 그 교리를 믿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이다. 응답은 완전히 그렇다.

 

1)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로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전기 작가들이 허구로 만든 설화가 아니다. 동정녀 탄생은 오랜 구약교회의 역사동안 선지자들이 성령으로 감동하여 예언한 것이며, 이 사실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교회 보편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초대 교회때부터 보잘 것 없거나 하찮은 것처럼 치부하지 않고, 그리스도 교회에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신앙에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 역사상 동서고금을 통하여 참 교회는 그 교리를 경시하거나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묵살하지 않았다.

 

2)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것 외에 마리아의 태에 어떻게 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모른다(1:20). 마리아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묻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내게 있으리이까”(1:34)라고 하였다.

 

복음서들은 동정녀 탄생을 증인들로부터 실제 역사에 대한 자세한 보도”an orderly account, 1:1-4)라고 표현하였다. 만약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라면 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이 심각하게 손상된다.

 

3) 이러한 사실을 요리문답이 잘 요약해 준다.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참으로 인간이셨고 참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해준다.

 

하이델베르그 제14주일은 이렇게 성경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스스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친히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창세전에 성부의 본질로 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시간 안에 자기 어머니의 본질로부터 나신 사람이시다....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신실하게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14주일에 보면 왜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이 되셨는가? 14주일 제36문답의 답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 되시고 그 분의 무흠하고 완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있었던 나의 죄를 가려주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가려질수 없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라고 했다. 여기서 다윗이 말씀하는 것은 자신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에게서 탄생이 아니라면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충분한 인간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탄생이 여느 사람의 출생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에 의해서 탄생하였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해야 하는 그의 충만한 신성을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참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지니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타락한 아담성의 부패의 저주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동정녀 탄생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나 죄는 없으시다(4:15; 7:26, 27).

 

모든 인간 아버지는 죄성을 가진 자녀를 낳는다. 죄인들은 죄인들을 낳는다(51:5).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이것이 타락후의 세상의 방식이다.

 

만약 요셉이 예수님의 참 아버지이거나 마리아와 동침하였다면 예수님은 흠이 없지도 무죄하지도 완전히 거룩치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중재자도 없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도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위한 전가할 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우리의 신앙의 필수적인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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