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럼의 마녀사냥 재판

내가 뉴 잉글랜드를 여행하며 돌아본 도시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곳은 세일럼이었다. 할로윈이 가까워서인지 곳곳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작은 시가지는 평일인데도 몹시 출렁거리고 있었다. 위치 하우스 건너편인 더비 거리에는 위치트라일 연극이 1 시부터 열린다고 배우들이 그 시절의 복장을 하고 관객들을 모우고 있었다.

세일럼은 미국 메사추세츠주 에섹스 카운티에 있는 조그만 도시다. 2010 년의 인구조사로는 41,130 명이 살고 있다. 세일럼 대학(Salem University), 세일럼 윌로우 공원(Salem Willow Park), 피바디 박물관(Peabody Museum)이 있다. 세일럼은 주택가와 관광지, 세일럼의 네이버후드(the neighborhoods of Salem Neck), South Salem and North Salem, Witchcraft Heights, Pickering Wharf, and the McIntire Historic District (named after Salem's famous architect and carver, Samuel McIntire) 등이 혼합돼 있는 곳이다. 세일럼은 미국 이민 초기의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세일럼은 종교적으로 주로 퓨리턴(청교도)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세일럼은 히브리어로 평화(shalom) 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수십명의 죄없는 목숨을 뺏은 악명 높은 마녀 재판이 벌어졌던 곳이다.

미국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기 전 17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692년 세일럼에서는 마녀재판으로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명은 돌에 눌려 압사하고 다른 5명은 감옥에서 죽었다. 이외에도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금되었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또는 원고의 고개질 한번의 부인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비단 세일럼에서만 그친게 아니라 주변의 코넷티컷, 로드 아일랜드 주도 영향을 미쳐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었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는 아니라도 깨끗한 이미지에 검은 오점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왜 마녀사냥이 일어났는가하는데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지금도 많은 법대에서 그시절의 이 사건을 짚어본다고한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의 수출 통로가 되면서 새로운 부와 세력이 창출되기 시작했다. 10 % 정도의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도시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정치 참여자들도 농부가 아니라 점점 상인들로 채워져갔다. 청교도 이상주의를 따르던 전통의 주민들이 점점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는 반면 새로 부상하는 상인들은 세를 넓혀갔다. 전통의 청교도들은 여기에 일종의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물질주의가 전통적인 농업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데에서도 편치 않았음을 알수있다. 거기다 새로 부임한 사무엘 패리스 목사의 고압적인 태도에 이곳의 교회는 두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쪽에 거주하는 상업을 대표하는 존 포터 가족이 이끄는 그룹과 서쪽에 거주하는 농업에 종사하는 존 푸트남 가문이었다. 특히 프트남파는 물질 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상업주도형 파에게 책임을 묻고 교회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위해단단히 결속을 했다. 이 과정에서 패리스 목사가 오기전에 근무했던 여러명의 목사가 견디지 못하고 쫓겨났다. 패리스 목사는 푸트남파와 연합 해 물질주의와 세속에 물든 악마들과 싸워 이겨야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녀사냥은 이런 분쟁의 중심에 있던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시작이됐다. 1692 년 2 월 어느날 9 살 짜리 패리스 목사의 딸 엘리자벳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헛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며칠 뒤에는 그녀의 사촌 애비게일이 발작을 일으켯다. 이 발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마을의 소녀 두서너명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고통을 호소햇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교구들은 다른 지역의 목사들을 초빙해 기도회를 열고 열심히 기도를했으나 증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케 했으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들은 이것은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라 지금의 어느의사가 병을 사탄의 짓으로 돌리겟는가. 그러나 행깅저지(Hanging Judge)로 알려진 존 호손(John Harthone) 은 그때 17 세기 사람들은 마법(witchcraft)을 진실로 믿었으며 사탄이 위치를 통해 저주를 부른다는 것 믿었다고 했다. 사태는 급진전해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해코지를 한다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있는 서인도 출신의 티투바, 거렁뱅이로 집시처럼 또도는 사라 굿, 그리고 행실이 좋지않아 늘 마을 사람들 입 방아에 오르내리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되었다. 세 소녀는 이들 세 사람 (티투바, 사라 굿 그리고 사라 오스본)과 대질을 하자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고 광기를 부려 세 여자는 마녀로 지목돼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투옥시킨 뒤에도 증세가 가라앉지 않고 점점 새로운 자가 늘어나자 다시 소녀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되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레벡카 너스였다.

신문관들이 소녀들과 이들 두 여자를 대질시키자 소녀들이 발작을 일으키고 소리를 질러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되고 말았다. 언니를 변호한 레벡카의 두 여동생,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스 코리, 심지어 4 살 밖에 안된 사라 굿의 딸 도카스도 마녀로 지목돼 감옥으로 끌려갔다. 또한 강직한 성격으로 굳굳하게 자리를 지켰던 존 포터의 아내 에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되고 그녀를 변호한 남편 존 포터 (푸트남의 반대파) 도 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되었다.

이런 도미노 식의 지목으로 5 월 말 까지 무려 100 여명이 투옥됐으며 그 여파는 세일럼을 넘어 동부 마사츄세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692 년 5월 중순 영국에서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암 핍스가 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고에 접한 핍스는 부지사 윌리암 스타우턴을 중심한 7인 재판부를 직각구성 곧 재판이 전개되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 년대에 마녀 혐으로 체포된 브리짓 비숍이었는데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돼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후 갤로우스 힐에서 처형되었다.

6 월 30 일에는 다시 5 섯명이 선고를 받아 처형되고 8 월에 6 명, 9월에 8 명이 처형되었다. 9월에 처형된 마사코리의 남편 자일스 코리의 죽음은 정말 처참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80 세사 된 노인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체 심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의 몸 위에 널판지를 올리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고 자백을 받아내려했으나 끝까지 대답을 않고 돌려눌려 사망했다.

9 월로 들어서면서 점점 마녀재판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부지사가 주최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에재판관을 사임하기도하고 너무 빠른 재판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때려잡는 재판 과정도 문제를 삼았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하는 소녀들의 자백,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유무와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는지의 여부 등등 희박한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을 했기 때문에 재판에 대한 공정성이 크게 문제가 됐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명망있는 목사였던 인그리스 매터 목사도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풀릿을 돌려 박약한 증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마녀들이 체포 되고 죽었는데도 소녀들의 증세 또한 변화가 없었고 신앙심이 두터운 청교도 부인들이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까지 이르자 비난이 계속됐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령했다. 1693 년 1월 새로운 재판부가 형성돼 재판을 속개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죄로 풀려났다. 1693 년 5 월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같혔던 모든 사람들을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시겼다.

1 년 남짓 걸린 마녀사냥 재판에 모두 185 명이 체포됐으며 59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31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19 명은 처형되고 1 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5명은 재판을 기다리는 도중 사망했다.

이 마녀 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으로 되돌아오자 주민들과 재판관들은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 년 재판관의 한사람인 사뮤엘 씨월(Samuel Sewall)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를 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 뒤를 이어 공적으로 사과를했다. 1711 년 식민지 정부는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시켰다. 1992 년 세일럼 시민들은 이 오욕의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새웠다. 세일럼 제1 교회도 1992 년 9월 20일자로 레벡카 너스와, 자일스 코리를 정식 교인으로 복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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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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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의 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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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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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니엘 호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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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시대 세일럼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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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가드 세일럼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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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피바디 하우스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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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umkeag steam cotton company Salem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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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ering house 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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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x street Salem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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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m witc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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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c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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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ch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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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s of Salem-Rob Zom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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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로리얼 팍 기념비 a17.jpg
gunted footst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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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안방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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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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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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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커스텀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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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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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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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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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재판을 선보이려는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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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NIV)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을 따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히 다른 점은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창조주 성자하나님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흡사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성자하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었으나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 하였고,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1장 12절) 그런데 바로 다음절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13절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 받고,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에 의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엑 데우 에게네세산”,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출산은 피를 흘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피, 곧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이 들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이 고통의 출산을 통하여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1장 12절만 암송하여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3절 말씀에 얼마나 처절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과 인내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 얼마나 극적이며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가슴을 찢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손에 아들을 넘기셨으며 참혹한 십자가에서 그의 살을 찢어지고 그의 피는 십자가 나무를 타고 대지에 흘러내렸습니다. 그 살과 피는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마다 먹고 마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 전이므로 그렇게 절박하거나 현실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한 번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니 나는 그 속에 포함되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에고 에이미, I am",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께서는 잊어버리시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탄생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생생한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 사람이 십자가 아래 엎드려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의 십자가의 고통, 피를 흘리며 출산하는 그 고통을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다시금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죄악을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시금 당하고 피 흘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낳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 단 한 번 십자가 사건으로 무더기로,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영어로 읽어 보십시오(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욱 분명합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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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바라바는 예수 대신 석방되어 도적질과 폭력으로 가득했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총애하던 창녀 라헬은 기독교도가 되었다 돌에 맞아 죽는다.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일삼는 삶을 계속하던 바라바는 다시 체포되어 평생 동안 광산 노역을 선고받는다. 바라바는 광산에서 기독교도인 사하크를 만나고, 바라바를 알아본 사하크는 그를 공격하려 들지만 둘은 얼마 안 가 친구가 된다. 바라바는 광산에서 20년을 일하며 죽음을 선고받았던 때의 고통과 예수의 희생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받는다. 바라바와 사하크는 광산의 매몰에서 살아남아 로마 콜로세움으로 가게 된다. 둘은 그곳에서 검투사로 훈련을 받지만 사하크는 죽음을 당하고, 바라바는 사하크의 복수를 감행한다. 기독교도인 사하크의 시신을 기독교 모임으로 옮겨간 바라바는 섣부른 신앙을 내보였다가 그곳에서도 배척받는다. 신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바라바는 로마의 대화재에 가담하지만, 결국은 순교자가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

 
이 책에서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다,
안된다,
기다려라,
네가 할 일이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
 
이 책을 읽고 나면 결론은 한가지로 요약됩니다. 물론 다섯가지 응답으로 나타나지만,
그 각각의 의도엔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크나큰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은 “좋다”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가 주님의 행하시고자 하는 뜻에
합당할 때 나타난다. 그렇지만 기도할 때마다 이처럼 “좋다”고 하시기를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좋다”고 하신 경우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있다.
1) 한나가 아들을 얻기 소망하여 여호와께 통곡하고 서원하였더니 주님은 그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
2)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하였더니 주의 사자가 그를 깨우고 쇠사슬이 풀리고 파수를 물리치고 감옥 문이 열렸다.
3) 솔로몬이 주께 지혜를 구했다. 그의 그 기도가 주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은 그에게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고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
4)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려고 보낸 편지를 보고 기도한다. 그는 산헤립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오직 주만 바라보고 확신하는 믿음을 보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를 치셨고 산헤립은 죽임을 당하였다.
5)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바울이 기도했다. 그리고 안수하여 그를 낫게했다.
6)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여 그를 소생시켰다.
7) 엘리야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비웃는 백성들에게 그 분의 존재를 보이도록 기도했다. 정성으로 번제물을 준비하고 도랑에 물을 흐르게 하였더니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
 
두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안된다”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담겨 있을지라도, 우리가 주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요구가 담겨 있을지라도 첫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좋다”고 하시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하신다.
성경속에 나오는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주시길 세 번이나 기도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中)
이 말씀을 들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中)라고 전한다.
우리가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 “안된다”고 하시면 우리는 얼마 못가서 기도를 포기하고 주님을 원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거나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고치도록 길을 안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를 계획하셨는데,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도록 무조건 “좋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다려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오랜 기다림 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빨리 눈앞에 보여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주 뜻에 합당할 때만 “좋다”고 하신다. 만일 우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수도 있고 우리가 자만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전,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추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곤 한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헛되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어야 한다.
둘째, 그 기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예를 들어 여러분의 건강)이라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기도보다 구하는 것을 멈출 자세가 더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물질적인 복을 위한 기도라면(욥처럼), 도대체 그 기도를 드렸어야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만일 영적인 복(하나님의 인도, 특정한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 성경을 이해하는 것등)을 위한 기도라면,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또는 하나님이 기도를 멈추도록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하는 시점에 이르지 않는 한, 계속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네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은 “네가 할 일이다”이다.
부모님이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길 바라신다.
우리는 가끔씩 아픈 사람들이나 선교지를 위해 기도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실천으로 행하길 원하고 계신다.
아픈 사람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병원에 있기에 사람을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의 만남은 그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물론 나도,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뿐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직접 선교사로 가서 실천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헌금을 통해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헌금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기도에 대한 응답은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이다.
우리는 가끔씩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기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이 있는 날에 날씨가 맑기를 기도하지만, 그 때 농부들은 시들어 가는 작물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쪽의 기도를 들어 주실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선 적절하게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 내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고 놀란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기도를 할찌라도 우리에게 더욱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네게 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유조차 밝힐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나를 신뢰 하거라.”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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