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것 The most fearful thing in the world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when the night is the darkest black for the morning's sun will come soon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In the midst of the winter storm one can patiently sit and wait for the springtime's warm rainbow 그러나 그대 마음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But If you stack up desperation in your heart Who can move that mountain for you?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So to be feared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is world is your despairing heart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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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엄동설한 모진 바람도 이제는 한풀 꺾인 듯, 남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제법 싱그럽게 느껴진다. 겨우내 누렇게 메말랐던 잔디가 파릇파릇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언덕을 따라 아지랑이가 사르르 휘감아 도는 이른 아침, 혼탁한 교계도 겨울 옷처럼 낡고 더러워진 사고들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봄, 주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했으면 좋으련만…이 생각 저 생각 가슴 아픈 교계의 현실을 개탄하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향 집 뒷산에 있던 작은 옹달샘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도토리나무, 소나무, 대나무며 잣나무가 울창하고, 진달래꽃 철쭉꽃 각종 들꽃이 철 따라 다투어 피고 지는 곳,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나지막한 야산이 병풍처름 둘러쳐진 뒷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거기 울퉁불퉁 큰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그 중 제일 큰 바위 밑에는 밤낮으로 퐁퐁 쉬지 않고 솟아나는 조그만 옹달샘이 하나 있다.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그곳의 물은 언제나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차디찬 것이 정말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수 맛이었다.

혹독한 된서리 몰아치는 겨울, 삼라만상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어도 그 옹달샘만은 얼어붙는 법 없이 수면 위로 약간의 살얼음이 사르르 한 정도일 뿐, 그 살얼음을 살짝 고사리 손으로 걷어보면 속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보드라운 물결무늬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여름, 간혹 논밭이 타들어가는 가뭄이 와도 그 작은 옹달샘은 결코 마르는 법 없이 늘 한결같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좋은 물이란, 물줄기가 땅속 깊은 곳 원천(源泉)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원천에 연결된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하여도 물이 더 많이 불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가뭄에 물이 말라버리거나 장마철에 물이 넘치는 샘은 가까운 개울이나 빗물이 얕은 땅으로 스며들어 샘을 이루는 물이고, 그런 샘의 물은 좋은 물이 아니란다.” 방금 언니가 길어온 차가운 옹달샘 물에 고소한 미숫가루를 듬뿍넣은 그릇을 간식으로 챙겨주시며 어린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로우신 울 어머니의 ‘좋은 물 나쁜 물’의 수질 검증법(?)이시다.

이렇게 물 하나에도 좋은 수질을 분별하는 검증법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물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야 어머님의 그 깊으신 마음이 조금씩 깨달아 알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살고 죽는 것, 그것은 무엇이 되었건 바르게 분별을 해야만 한다. 분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먹거나 마시면 자칫 귀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라고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입에 넣다가 귀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들이 산에 놀러갔다가 식용버섯이라며 채취해 온 독버섯을 끓여 먹고 일가족 모두가 즉사했다는 끔찍한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을 얼마 전에 읽어 보았다. 또 복어의 맹독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끓여 먹은 노부부가 이튿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일본에서는 지금 음식이나 물에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될 방사능이 들어 있어 초비상이다. 인간이 먹어도 해가 되지 않을만큼의 방사능 기준치는 얼마만큼이어야 하는가? 물과 음식에 포함된 방사능 성분의 기준치를 분별해 내는 검사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 일본 열도가 울고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날마다 집중 보도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는 육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필수조건을 충족시켜줄, 좋은 물, 좋은 음식도 많이 있지만, 반대로 그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극물도 함께 섞여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분별하고 먹고 마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의 세계로 직결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음료와 영의 양식이랴? 모든 교리를 분별함 없이 무조건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theory만큼 위험천만의 말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을 잃은 현대 교계를 잠시만 둘러보면, 어지럽기 그지없다. 모두 제각각이다. 극단적 신비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극단적 자유주의, 극단적 폐쇄주의(?)등등.. 천차만별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정작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분별법의 척도가 되고 인생의 잣대(Canon)가 되는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오히려, 말씀으로 분별하고 바르게 믿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성령체험이 없는 자, 페쇄적 근본주의자, 불량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 패거리라도 되는 듯 호도하고 비방하는 거센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지금 최바울 목사님이 지탄받는 것도 바로 “영적 도해”란 책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목사님들이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 과장하여 왜곡시켜 전하는 데서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사 43: 7, 21)라고 성경이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그것은 내가 이해되지 않아 그런 것이지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란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 되었지만, 저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란 데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난해구절이란 것이 있고, 난해구절은 난해구절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상상력으로 풀이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범죄행위다. 그러기에,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 (벧후 1:20-21)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할 목사님들마저 말씀을 읽지 않고 경시한 탓에, 말씀의 분별력 상실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부흥이 되는 듯하고 구변이 좋기만 하면, 아무것이나 모두 수용하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너무도 큰 현실이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상을 분별함 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따르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1) 영(靈)의 세계를 너무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임을 우리는 잘 안다. )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르고 영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수성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외에, 인간이 지나친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의 세계에 도전하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만큼 영의 세계가 인간의 영역 밖의 세계,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도전 정신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적(
) 세계로 도약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의 한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인간이 영의 세계, 神의 세계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집착의 보다 근원적 출발은 인간이 神과 같이 되고 싶은 탐욕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탐욕은 道를 넘는 행위로서 물리적이건 영(靈)적이건 모두 우상숭배만큼이나 가증한 것, 인간에게 금지된 계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반대로 이런 인간 본성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는 간교한 사단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어 거짓 예언, 환청, 환상, 이런 영의 세계를 미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이끌어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영의 세계를 너무 깊이 파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릴 때, 그 욕심이 그를 주장하여, 영적인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 쉽고 어둠의 권세자들의 조종을 받게될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따라서 인간에게 허락된 한계, 성경에 기록된 영(靈)의 세계,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건전한 신앙인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 영(靈)의 세계에 속한 힘, 권능들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성도에게 주어졌는가?

그 대답은 ‘No, 그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성도가 이 영적 존재들,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theory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다.

물론, 영의 세계는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두 종류 즉 좋은 존재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지는데,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 '정사들', '권능들', '어두움의 주관자들', '악한 영들'(엡6:12), '왕좌들', '지배들'(골1:16),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옥에 있는 영들'(벧전3:18-20), '마귀들', '미혹하는 영들'(딤전4:1) 등으로 구분된다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들(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권이 천사들 뿐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히 1: 14절) 천사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수종자이고 신약시대(지금)는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성령 시대, 은혜 시대'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중에 천군 천사가 동원하여 지켜주십사 주님께 부탁하는 것과 성도가 천사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약시대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성서적인 표현과 신앙은 성령님(하나님의 영(Holy Spirit, Holy Ghost)으로써)께서 친히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신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면,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어떤 때는 천사를 보내기도 하시고 친히 그 권능의 손을 펴시사 풀무불 속 같은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어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고로, 성도는 천사를 명령하는 등, 영적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갈구하는 기도를 매순간 주님께 올려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이다.

개혁 교회의 신앙과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다. 이 원리에 가장 충실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Precisians or Puritans)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福音)이란 고대 그리스어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Ευαγγέλιον: euangelion, 라틴어 Evangelium),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은 우리를 위해 이땅 위에 오신 주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신 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이 예수님을 힘써 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생명의 샘, 생수의 근원이요, 원천인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 모두 힘써 그분께로 돌아가자. 끝으로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이신 cy님의 경고의 말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DK대사(악령)로부터 받아적은 뉴에이지 바이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세계질서에서는 영성이 신학을 대신할 것이다. 살아있는 체험이 신학적 수용을 대신할 것이다. 영적 실재가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나고 형태적 측면은 뒤로 사라질 것이다. 동적이고 표현적인 진리가 신세계종교의 기조가 될 것이다." –cy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현대는 뉴에이지 사상이 종교,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각 분야로 급속도로 확산, 침투하고 있는 무서운 말세지말이다. 이런 무서운 말세를 살아가는 선도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神의 영역을 탐하는 탐욕을 제어하고, 영의 세계를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수 없느냐"(마 16: 2-3)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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