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를 하고서도


     (창세기 17장)

창세기의 장(章)이 거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씩 조금씩 계시하시며 아브람에게 믿음을 넣어주시고 그 믿음을 이끌어 키워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후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는데도 아브람이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면서 증표를 요구하자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준비하여 쪼개놓게 하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로 지나시며 또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일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이 삼년 공생애의 주님을 예표하고 비둘기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면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그 사이를 지나시면서 하나님의 목숨을 거는 약속을 하신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솔개를 쫓다가 지쳐 자빠져(? 실례^^) 깊이 잠들고 하나님 혼자서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도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지 못 하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뻐꾸기 새끼 이스마엘을 기르며 13년을 보냈습니다.  

그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오셔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제 갈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이미 하셨던 약속을 또다시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손이 번성하고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하나이다.” 하고 불신을 버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고 사라가 전혀 믿지 못 하는데도 하나님은 또다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인간이 잊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약속을 깨고 버리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란 약속과 믿음의 상대가 애당초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금방 변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잊지 않게 몸에다 표시를 하라는 것인가 봅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의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너무나 신비롭고 완벽한 작품이어서 무엇을 베어내거나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몸에서 쓸데없는 한 부분을 잘라 버리라고 한다면 어디를 잘라내시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라낼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몸 어느 한 부분도 불필요한 것이 없고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걸작품인 인간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상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을 그리는 것(문신)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신체에서 일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잘라내어 ‘브릿트“, 곧 언약의 표시를 해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요? 어디를 잘라내는 것이 신체의 훼손이나 변형도 없고 부작용도 없고 외부로 흔적도 안 남을까요? 그래서 남자의 성기의 껍질을 자르라 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화장실 갈 때마다 보고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왜 남자에게만 할례를 하라 하셨는가? 이것은 성차별이 아닌가,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다음 주신 잉태의 고통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며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먼 훗날 오셔서 뱀의 머리를 밟고 우리를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며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잉태의 고통을 당하며 자식을 낳을 때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이러한 약속의 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더 귀하게 여기셨는지 여자에게 약속의 표를 먼저 주신 셈입니다. 하긴 여자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귀하고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니까요.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남자들에게도 약속의 표, 곧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할례를 받으면 나을 때까지 걸음도 걷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세겜의 학살사건에서 보듯이) 잉태의 고통에는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 역시 인간이 하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약속, 아들을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한 쪽은 기껏 양피를 베는 것이었지만 한 쪽은 아들을 내어주어 쪼개는 불평등 약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남자들의 할례는 시작되었습니다. 억지로 몸에다 약속을 표시하는 할례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했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든든히 붙잡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받고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결국은 앗수르에, 바벨론에 멸망 당하였습니다. 참 할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나긴 암흑의 세월이 지난 다음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은 오셨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들의 약속'을 지키시었고 마침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마음(심비)에 새기는 언약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키신 약속, 그 아들의 피의 약속을 말입니다. 십자가, 그 참혹한 광경, 그 피로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언약을 말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여러분은 육의 심비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아로새겨진 언약의 할례를 갖고 계십니까?
이 약속마저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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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은 짧은 3주간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설립된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감을 감사하면서 다시 방문하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는 온전한 믿음으로
더 성장하길 바라며 데살로니가를 썼고
데살로니가 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Paul, and Silvanus, and Timotheus,
un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which is in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Grace be un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1]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였던 것은 ‘은혜’ 와 ‘평강’ 이었고
바울이 모든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은혜’ 와 ‘평강’이라는 동일한 문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은혜(Grace) 와 평강(peace)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un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which is in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그 때문에 ‘은혜’ 와 ‘평강’ 이 있다.
이는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시인하고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은혜와 평강의 삶,
그래서 바울과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고
이제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이 은혜와 평강임을 시인하며 강조하고 있다.
다시 상기하면
한글성경을 KJV는 더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1절을 보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하며
은혜와 평강을 기원 한다 는 구절이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 ==>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으로 발전해 있다.
하나님 아버지, God the Father
하나님 우리 아버지, God our Father 로 발전했고
하나님 아버지 ==>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은혜와 평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개인의 삶이 성장된 믿음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로,
여기의 '나‘에서 ‘우리’로 변하고 성장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름이
‘교회, 라는 구원을 받은 믿음의 공동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어졌고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평강으로 이루어 졌다는
그러기에 이를 수없이 되풀이 하여 편지에 쓰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는,
그들의 고백과 삶으로의 시인은,
먼저 그들의 신앙 고백 후에,
먼저 그들의 가슴 한 복판
마음의 중심에
끝임 없이 피를 공급하는 심장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흔적을 남긴 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성령님의 증거로 흔적으로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임하여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공의)가 나타나서
이를 전해 받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은혜와 평강이 되었고
자랑거리로 소문이 났음은 변화하였음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지역에 만들어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의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기를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은혜와 평강이 떠나지 않기를 기원했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받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가 되는 한 가족이 되었으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으며
이를 믿음으로 증명하시고 보증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한 몸을 이루었기에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부르심의 단서(但書)이며 조건이라,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that love God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자들
to them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그런 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이지,
무조건 적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엉터리 설교와 주장도 아니고
간증도 아니며 기복적인 고백을 요구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니다.
이는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현하는 생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은혜로
복음을 받은 자로, 은혜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성령님의 평강을 받은 자로
평강을 누리는 자의 신앙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아들
곧 주 예수 우리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의(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이 자리에서,
부르시고 또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시고, 더하여 지도자가 되기를 부르시고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리라  :30]
공의의 하나님의 아들로 의롭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의롭게 이 땅에 살다가
영화로운 영광에 참여하는 그래서 영화롭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하고 누구에게나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공평히 대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 그러다 지치고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강을
잃어버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리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6-27]

교회는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은혜와 평강을 고백하는 자 들의 모임이 예배이다.
그래서 은혜로 평강을
이를 이사야는 그리스도 우리 주를 평강의 왕이라 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 이신가?
그분은 당신의 평강의 왕이신가?
진실로 그런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난 자
이유야 어찌되었든 은혜와 평강의 부르심에서 멀어진 자
사이비가 된 자, 신앙이 위안뿐인 종교가 된 자, 밥벌이가 된 자
밥벌이로 노력도 하지 않는 삯꾼이 된 자
무늬만 교인이고 무늬만 지도자인 자들
그리스도의 복음의 길을 떠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은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온전히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안목의 정욕에 매여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 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멸망은 마침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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