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뒤돌아보고 들어가면서.
어릴 적부터 성경을 배워가면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 성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에서 설교와 수많은 사람들의 성경 풀이와 간증을 들으면서
자라 청년이 되면서 고민한 주제가 ‘성령’ 이다.
그 당시 은사를 받아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특히 방언을 못하면 버림받은 신자로 취급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기복신앙을 향한 어그러진 길로 대형교회를 꿈꾸는  
그 유행의 시작은 미국의 대형교회(메가 처치)의 영향을 받았고
그 밑바닥에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의 복음주의를 앞세운
보여 주기 식 사람모우기가 자신의 영향력 과시와 은사로
잘못된 은사 주의와 이렇든 저렇든 복음이 전해진다는  
세 과시는 이미 순수한 복음을 떠나 어그러진 길을 향하였고
그 이전에 이미 잘못된 청교도 운동의 원인은 아직도 잘 아려져 있지 않다.
나의 청년시절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은사제일 주의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면서
미국의 것은 모두가 좋다는 맹목적인 숭미 주의와 와전(訛傳)된
청교도의 덫에 걸려 무분별한 온갖 잡동사니 프로그램과 신학, 책 등이 한국교회의
부흥이란 이름으로, 선교란 명목으로 부패를 부추겼음을
미국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부패해가는 교회의 변절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 성경 학습 책을 구입하여 공부를 하고
수많은 유명한 목사의 설교 집과 간증과 성경강해와 주석서를 읽고
또 유명한 부흥사의 부흥집회에도 참석했고
더 성경을 읽기 위하여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첫 번째로 깔아놓은 프로그램이
성경이었고 그 후 인터넷이 연결되었을 때, 또 수많은 설교자의 설교와 강해서,
유명한 신학자와 신학 책, 교리 등 온갖 책을 다운 받아 읽었고
강연 등 동영상을 보고서도 ‘성령’을 알고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성령’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다시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시작하여
속독을 하면 약6개월에 한번, 늦어지면 1년에 한번
더 정독하면 대략 1년 반,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읽었을 때
구약과 신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성령’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나름 지론(至論)이 생겼을 때
청년시절 거부하였던 거대한 부흥으로 둔갑한 은사주의의 물결을
보고 겪었던 부흥을 빙자한 잘못된 ‘성령 론’ 이라는 부패의 거대한 물결에서
반항하였던 시절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신한 신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체감하여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도장을 새기듯
가슴에 각인(刻印, carving a seal)된 사랑 'charity' 으로
인치시고 (sealed)보호하시고
성령님이 주시는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나를 인침(sealed me)이고
우리를 인침(sealed us)이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의 끈으로 하나를 묶는,
그 끈이 순결한 사랑이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으로
소망의 끈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 모습의 손과 발과 온몸과 영혼이 되어
소망의 도구로 쓰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경륜으로 하나가 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크고 깊고 위대한 사랑,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눈이 밝아지듯이
이는 엠마오로 가는 슬픈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으로
눈이 밝아진 두 제자처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31]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19-21]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According to my earnest expectation and my hope,
진실한 믿음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제 같이 인침(sealed us)을 받고 그 사랑 'charity' 의 눈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능력,
그 실마리가 권능(power of charity)이다.
이 ‘권능’ 은 지금까지 알아왔던 의미의 일반적이고 통속(通俗)적인
개념(槪念 fundamental concept)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고 별난 주장이 아닌,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본 나름의 풀이를, 나누고 싶어 글을 쓰고 있고
아주 커다란 은사를 생각하고 은사주의에 치우쳐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성경풀이가 될지 모르겠다.
본인부터 이런 성경의 풀이를 들어보지 못했고 이런 글을 처음 쓰니까
그냥 한 신앙인의 격고 배운 고백으로 참고 하였으면 한다.
그러나 ‘권능’을 이해하면 사도들의 사도행전을 이해하기 쉽고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능력이 되어 간다는
본인의 고백이고,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랑이나 혼자 진리를 독점했다는 우월의식은
조금도 없음을 밝히며, 이로 인해 성경을 읽으면서 참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진리, 특히 ‘권능’을 간증하며 설명하려고
지금까지 쓰고 있고 쓴 세 가지의 글은 다시 소개하면

*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주제는 ‘하나님’
부제는 ‘공의’ 로 하나님의 의(義)

*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주제는 ‘주 예수’
부제는 ‘그리스도’ 로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

*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주제는 ‘성령’
부제는 ‘권능, 으로 진리의 권능

이 세 가지 주제의 글로 하나님 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성품과 진리를
쓸려 했는데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는 처한 환경 상 더 깊게 쓰질 못했고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은 20편 정도를 쓸려고 했는데 일상의 사정으로 6편으로
줄려 쓰다 보니 아쉬움도 많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은 두 편에서 못다 쓴 글을 보안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려 하며
우리의 능력,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와 능력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급받는 힘
성령의 전으로서 권능으로
자신의 비굴한 신앙이 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을 닮아 가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여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가 일상의 속박에서 자유로, 은혜로,
더하여 평강을, 능력을, 권능을 받기를,
진리의 영, 성령님이 늘 함께 하길, 간절함으로 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일서 5:5-8]
세상을 이기는 믿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즉 성령이 임한 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는다는 의미로
권능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인 복음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 된 삶,
하나님의 높고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인 하나님의 의 인 공의로
살며 행하길, 인도하시고 증명하시는 능력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진리의 인치 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 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읽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석과 신학 책, 강해서는 참고서 일 뿐,
성경의 같은 장, 구절이라도 우리의 이해와 인도하시는 성령님께서는
각자의 처지와 환경이 다르듯 다른 의미의 뜻으로 진리를 인도하시만
성경의 범위에 벗어나지 않으신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는 권능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변화 당하여 세속적인 유행과 사상을 쫓고
복음을 얘기하면서도 복음의 능력을 잃어서
어그러진 길로 향하고 있는지,
시간상 이곳의 지면상 길게 쓰지 못하여 짧은 글들이 되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하며 쓴다.

* ‘권능’ 은
권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권능 자’ 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권능을 받는다면 하나님과 같은 권력이 생기는가?
아니면 예수님 같은 능력이 생기는 건가?
아니다.
그렇게 권능(power)이라고 착각한 숫한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이
어둠의 길로 갔고 하나님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authorized)는
기도원 원장, 목사, 부흥사 들이 이단이 되었고
더 하여 하나님의 대리인, 대언 자, 선지자, 예언자등과
예수님의 직통 제자, 계시자, 대리 자 등이 된 자 들이 진정한 능력자임을 과시하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사실 권능을 정확히 표현한 단어가 없다.
어느 신학자는 권(power) 능(authorized)이라 하고
많은 성경은 권능=power 로 사용하지만
권능(authorized)을 부여 받은 대행의 능력과 힘이라 하면 옳지 않다.
또 그것은(authorized) 어떤 권력기관이나 당국자, 국가의 권력으로 표현하였지
하나님을 어떻게 그런 권력과 비교 할 수 있는가.
권능은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얻어지는 능력이기에
권능 =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이라 할 수 있고
본인은 본인의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한 의미로,
권능=power of charity 라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power of charit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성경에 없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다.
구약에도 ‘Holy Spirit’ 는 표현이 있고
권능은 확실히 성령님으로 받는 힘과 능력이고(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구나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간직한 사람만 받기에
(power of charity),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는
본인의 주장이다.
왜냐 하면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와 예언자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령님을 증언하였고,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과 오실 성령님을 증언하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언하셨지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심이 중심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의 증인이 되었고
증인이 됨이 고귀한 사랑의 증명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
권능=power of charity 이다.
이는 권능 자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받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시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의 생활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듯이 공의의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고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기에 권능을 받는 과정(過程)이 있다.
순서(順序)가 있기에
‘권능’ 의 더 자세한 뜻의
우리의 믿음의 시인은, 고백이
'acknowledge' 로
인정받고 허락받은 감사의 능력, 힘(power)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권능을 받았다했고
권능은 믿음으로 얻어 지기에
믿음의 분별력처럼 권능도 분별력 있는 힘(power)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나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켄터키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하고 오천이었더라.” 하는 대목에서 한 여자성도가 발딱 일어나더니 “아니, 성경에서 왜 여자는 빼요? 여자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는 휑 나가 버리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참 여자들의 한이 서린 것 같습니다. 우선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 엄마, 무슨 댁으로 불렸습니다. 저의 조모님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백부님 이름으로 누구 엄마, 친정인 하회의 지명으로 화회댁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족보와 호적, 그리고 묘비에 조부님 이름 옆에 “하회 유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내를 쫓아내는 일곱 가지 악행이라는 겁니다.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범했을 경우 여자를 좇아내는 겁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출이라 하여 내쫓아도 갈 곳이 없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전에는 가난했다가 살림을 일으킨 경우는 쫓아낼 수 없도록 하였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李氏)가 (이 분도 이름이 없군요.)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는데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굶겨 죽였답니다. 세종임금은 사간원에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고 그를 귀양 보냈으나 그의 부인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부인 이씨가 자식도 없고 질투가 심하여 계집종을 잔인하게 죽여 칠거(七去) 중 이거(二去)를 범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삼불거를 인용하여 '전에는 빈천하다가 나중에 부귀해지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면 버리지 못한다.'면서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시 세종임금은 착하고 어질고 총명한 명군(名君)이요 특히 여자에게 너그러웠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라는 여자도 자식 못 낳은 채 늙었고, 몸종 하갈이 잉태하자 하갈과 싸우고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 욕은 당신이 먹어야 옳도다.” 하고 따졌으니 칠거지악 중 이거(二去) 내지 삼거(三去)를 범한 셈입니다. 그러나 드센 사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배가 불렀을 하갈을 쫓아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공처가로 만든 순악질 여사요 당찬 여장부요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사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돌아온 하갈을 맞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며 13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99세 때, 사래가 89세, 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어 흠이 없으라,” 하시고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다. 내가 대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때 사래가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래가 이를 보고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거칠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 와서 하마터면 바로왕의 왕비,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도 했던 위기(기회?)를 넘기며 고생했는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결국 자신의 자리에는 몸종 하갈이 들어와 앉고 자신의 자식 대신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뻐꾸기 새끼처럼 자신의 안방에 들어앉아 자라나고 후사가 되는 것인가,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 때문에 결국 이대로 구세주의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 하고 죽어 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이미 늙었고 아무런 힘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사라라 하라.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시지요. 하나님도 주책이시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사람 웃기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삭, “웃긴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삼으시려고 그 아내 사래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래를 부르신 것은 사래가 가진 생식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래를 통하여 행하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을, 할망구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을 사라를 통하여 보이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사래들이여. 그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대를 통하여 많은 영적자녀들이 나고 열국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대들을 일으켜 새 이름을 주시고 힘 주시고 낳게 하실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진 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일어나 웃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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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이란...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고백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이 글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가? 그러하기에,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사람인 듯, 다른 목회자들을 형편없는 사기꾼 정도로 몰아가면서 뛰어난 화술로 말씀을 강론하던 한 유능한 목사가 자살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우리들 때문에 흑암의 세계 속에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야 할 교회는 오히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고, 서로 잘믿는다고 내세우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정신세계는 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는 한 번쯤,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성경을 되새김질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 성도가 아닌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소리 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삶 속에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다. 사람의 영(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많은 성도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하는 것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내가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 성령으로 가장한 사단, 광명의 천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것뿐이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성령의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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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 바쁜 걸음 하는 세상 사람들 보시오!
      잠시 잠시 쉬어도 가면서 가시구랴.

      당신네가
      숨 가쁘게 찾고 있는 목적지, 그 어딘진 몰라도,
      또 간절히 찾는 곳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잠간 잠간 쉬어가며,
      지나온 날들도 되돌아보고 다가올 날들도 생각해가며
      지금의 자신을 살펴보자구요.

      그렇게 급하게 가다가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외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라는 것일 것이오.

      지금 당신네에겐 그것이 하찮은 걸로 치부될지 모르겠으나
      이 세상을 떠날 때엔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오.

      쉬며 머물며 가다보면 마음의 여유를 찾을 것이외다.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떤 것이 진실로 값진 것인지도 깨달을 것이외다.

      잘하면, 지금 찾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게 보람 있는 삶인지도 깨달을 것이외다.
      그 목적지 바로 다음의 마지막 결승점은 아시는지.....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는 곳.
      설마 그 곳에 빨리 가고자 지금 그렇게 헐떡이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 결승점 전에 들러야 할 곳이 또 한 군데 있으니
      그 곳은 자신을 심판하는.....셀프 심판 정.
      피고는 나요, 원고도 나이며 심판장도 나라오.

      자기가 일생 동안 잘한 일, 잘못한 일을 스스로 가리는 곳.
      자성(自省)의 결과가 한숨이라면 한 평생 헛 살은 것이외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점에 이런 곳들이 있다는 걸 명심하시면
      지금의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낄 것이외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후회 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소?
      떠나갈 때 마음 가볍게 눈 감을 수 있어야 할 것이고
      한 평생 잘 살았노라 웃으며 떠날 수 있어야 할 것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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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의학적, 법률적,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본 동성애


아래 영상들을 통해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의

경악할만한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좌파성향 국회의원들이 통과시키려 애쓰는 차별금지법을

왜 교회가 나서서 막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1)

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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