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넓고 광활한 대양을 4대 지역으로 구분한다.

1. 오스트랄리아 지역,

2. 멜라네시아 지역,

3. 폴리네시아 지역,

4. 미크로네시아 지역 등

4대 지역에 15개의 크고 작은 섬나라들이 있다.

 

미크로네시아 지역에는 마샬군도, 나우루,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 키리바시 공화국 등 5개의 섬나라들이 있다.

 

이 글 에서는 키리바시의 비극적 역사를 고찰해 본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하와이 남서쪽 2,500 mile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의 전체 면적은 32개의 섬들을 모두 합해 약 313sq miles이다. 32개의 섬들 중에서 21개 섬이 무인도이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는 Gilbert 섬에 있는 Tarawa시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 10만 명 중에서 27만 명이 수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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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지는 해수면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키리바시 주민들

 

키리바시 (Kiribati) 공화국의 간추린 역사
 

키리바시에 3000년 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주장한다. 마샬군도와 피지 섬 등 여러 섬들과 왕래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섬마다 추장들이 통치를 했으며 bangota라고 부르는 제단이 섬들에서 발견되었는데 원시종교 생활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상어 뼈로 무기를 만든 것으로 보아 부족들 간에 싸움도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 한다.


고대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키리바시의 역사와 문화는 폴리네시아 인들과 미크로네시아 인들이 서로 왕래하고 혼혈하면서 독자적 삶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1606년에 키리바시에 스페인의 해양 탐험가 Quiros가 제일 처음으로 상륙했다. 1788년에 영국인 Thomas Gilbert가 상륙하여 섬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Gilbert섬이라고 명명했다. 오늘 키리바시의 수도가 있는 Gilbert 섬은 그때 시작된 섬의 명칭이다.

 

1799-1826년 사이에 영국인들이 선봉대가 되어 많은 유럽인들이 키리바시에 왕래했으며 백인 부랑자들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Coconut Oil이 주요 무역의 상품이었으며 후에는 Copura 등 다양한 산물들이 영국인들의 주요 무역 상품들이 되었다.


1857-1875년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키리바시 여러 섬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 선교사들은 주로 London Mission Society에 속한 선교사들이었으며 Catholic도 별도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77-1892년에 영국은 키리바시 제도에 대한 통치권의 뿌리를 견고히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1892년에 영국은 드디어 키리바시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다. 대영제국의 국기가 키리바시 Gilbert섬에 우뚝 서서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키리바시의 32개 섬들이 차례로 영국의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이 1939년까지 줄곧 계속되었는데 1939년에는 섬들의 일부를 미국과 공동으로 활용할 태평양 상의 항공비행장 건설에 두 나라가 합의를 했다.


1941년에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2일 후에는 키리바시를 폭격하여 영국인들이 모두 떠나갔다. 일본군은 키리바시를 1945년까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1950년에 영국은 또 다시 키리바시에 돌아와 7년 동안 치안정국의 명목으로 식민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7년 동안에 영국은 키리바시에서 그 악명 높은 핵실험을 감행했다.


영국은 키리바시를 핵 실험장으로 완전히 망가트려 놓은 후에 1963년에 이른바 <키리바시 행정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창설하여 키리바시의 독립을 위한 준비단계의 공작을 시작했다. 영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키리바시를 영국의 태평양지역 지방행정관 산하에 속하도록 하고 영국인 행정관 John Field의 통치를 받도록 했다.


영국은 1973년에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을 키리바시에 끌어들였다.영국의 의도는 이를 활용하여 키리바시 민중들이 미국식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세뇌 되어 선거를 통하여 친 서방 정권을 창출해 내자는 것이었다.


영국은 1977년에 키리바시 자치정권을 승인하고 1978년에 이른바 자유선거를 통하여 키리바시 독립 정권을 수립하게 했다. 1979년 7월 12일에 독립국을 선포하여 영국연방의 제 41번째 국가로 등록하도록 했다.


독립된 키리바시 공화국은 Gilbert에 속하는 16개 섬들, Phoenix에 속하는 8개 섬들 그리고 Line Island에 속하는 8개 섬들, 모두 32개의 섬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영국이 키리바시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승인한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1900년대 초에 키리바시에서 발견된 인산 광산이 60-70년 후에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영국은 거의 1세기 동안 키리바시에서 막대한 인산을 착취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를 약탈해갔다. 하지만 이제는 인산 광산은 바닥이 났고, 또 핵 실험으로 완전히 망가진 키리바시를 더 이상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1979년에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영국의 연방국으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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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에는 이미 바다가 주민지대보다 높아진 곳도 있다.

 

크리스마스 섬 (Christmas Island) 에서 영국의 핵 실험 
 

왜 크리스마스 섬 이라 부르는가? 영국의 유명한 태평양 탐험가인 Captain James Cook이 1777년 12월 24일 Christmas Eve에 이 섬을 처음 발견하고 상륙을 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에 근거하여 크리스마스 섬 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럼으로 크리스마스 섬의 명칭은 종교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국인들의 끝없는 대양 탐험과 침략 야욕의 전통에 근거하여 붙인 명칭일 뿐이다.


영국의 핵 실험은 전적으로 미국의 설계에 의존하여 성공을 했다. 영국과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했다. 영국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 외에 또 다른 섬들에서도 수 없이 많은 각종 핵 실험을 미국과 합동으로 또는 미국이 단독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1953-1962년 적어도 50차 이상 감행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크리스마스 섬과 섬의 주변에서 그리고 또 말덴 섬에서 영국이 단독으로 실시한 두 핵 실험에 대하여서만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다. 


영국의 핵 실험 진행과 사후처리와 피해 보상문제
 

영국이 단독으로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핵 실험을 엄청나게 진행한 과정이었으며 핵 실험 후에 사후처리 및 보상문제 등도 너무나도 비도덕적, 비현실적인 야만적 처사로 일관하였다.


특히 보상문제에 대하여 너무나도 방대한 문제를 영국은 시종 묵살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문제를 계속하여 제기하고 있으며 명백한 역사적 자료가 태산처럼 넘쳐 나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빙산의 일각만 기술한다.


영국이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위험한 핵 실험을 감행하기 사전에 당연히 주민들을 안전지역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계획이 전무한 상태에서 핵 실험을 감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 군부의 비망록에 의하면 영국정부로 부터 아무런 확실한 지침이 없었으며 다만 구두로 민중에게 핵 폭파 광선을 피하여 눈을 감고 얼굴을 돌리라고 경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영국군 당국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건물 안 에 모여 있으라고 경고를 했다. 그러면서도 영국군 당국은 핵 실험 폭파로 인하여 창문이 부수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악랄한 영국인들의 기만적인 두 얼굴의 모습인가?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의 군부는 해상의 선박들에게 또 섬의 주민들에게 하등의 선전문이나 확성기를 사용하여 대피를 통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그러한 통고를 시도했다면 도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 논의가 있어야 하는 점은 당연한데 지금까지 그런 것은 전혀 제시된 것이 없다.


핵 실험 후에 방사선 낙진이 섬 전역에 떨어져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군 당국의 비망록에 의하면 핵 시험 후에 그러한 핵 낙진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감행한 핵 실험에 동원된 인원은 총 2,500명으로 추산한다. 뉴질랜드인 500명과 오스트레일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제공한 대다수의 인원 등 총 2,500명이 영국의 핵 실험을 위하여 종사했다. 그런데 1999년에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핵 실험에 동원된 2,500명 중에서 30%가 이미 사망했으며 이들은 하등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2,500명 중에서 100여 명의 자녀들이 불임증 환자들이 됐으며, 또 핵 실험에 종사한 2,500명의 후손들이 척추병 등 불치의 환자로 출생하는 확률이 일반인에 비해 5배 이상 높다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그 외에도 백혈병과 암환자들이 본인들과 후손들 사이에서 속출하고 있으며 또 염색체 이상형 환자들이 계속 발생했다.


핵 실험이 1950년대에 있었는데 40년-50년 후에야 보상 문제의 공방이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피해자들이 법정 소송을 진행하는 도중에 아무 결과를 보고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뒤늦은 법정 투쟁도 뉴질랜드 인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쟁을 시도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섬과 멘델 섬의 피해자들은 감히 영국정부에게 핵 실험 피해보상 같은 것을 요구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어제와 오늘의 현실이다.


크리스마스 섬에는 2007년 현재 5,200 명이 생존해 살고 있다. 이들은 핵 실험 낙진과 오염된 핵폐기물 대한 제거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매우 위험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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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금물의 침수로 죽어가는 키리바시 야자수, 지하수에도 염분이 침투하고 있어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수몰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키리바시 공화국
 

남태평양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는 1900년대에는 서방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핵 실험장으로까지 사용되는 비운에 처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방대하고 잔인한 핵 실험의 참화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오늘의 키리바시 민중들에게 2000년대에 들어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000년대에 들어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북국의 빙하가 녹아 내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라들은 수몰될 비극의 운명에 처해있다. 키리바시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로서 예외로 될 수 없다.


지구온난화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문명국들의 경쟁적인 산업화로 인하여 무진장 방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이불효과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태평양의 작은 나라들이 수몰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행한 영국과 미국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펜타곤의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향후 50년 내에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하여 난민의 발생이 증가하고 더욱이 핵무기 경쟁으로 인하여 세계는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보고서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키리바시는 인구 10만의 작은 나라인데 수몰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이렇다 할 대책은 속수무책이다. 하루 두 번 썰물과 밀물이 엇갈리는 시간에 해안 주택들은 수상 가옥으로 변하고 아이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길을 헤쳐 왕래한다.


코코넛 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들은 침수되고 있으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지하수가 바닷물에 오염되는 것이다. 30년 안에 이곳 섬이 바다 물에 잠길 것을 생각하면서 떠날 곳을 찾고 있지만 고향을 버려야 하는 슬픔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키리바시 섬 사람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이렇다 할 기술도 학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는 어디든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노동능력이 있는 젊은 이민자들만 키리바시 난민으로 받아들인다는 엄격한 제한을 제시하고 있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제 5대 대통령으로 현재 집권하고 있는 Annuo Tang대통령의 말은 매우 심각하다. Tang대통령은 영국과 미국을 향하여 쓴 소리를 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으세요?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 하고 싶어요."


키리바시가 처해 있는 수몰의 운명에 대한 영미의 태도를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눈이 떠졌습니다. 얼떨결에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아직도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모든 만물이 고요 속으로 헤엄치듯 하느적 거리는데…간밤에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온몸이 천근같이 무겁고 머리가 지근덕거렸습니다.

“누가 이런 새벽에 전화를 걸었을까?”
웬만히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 없을 텐데… 혹시,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무슨 문제라도…? 갑자기 불안한 생각에 쿵덕거리는 가슴,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들려오는 낯선 음성은 구슬같이 밝고 명랑한 것을 보니 별로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담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사람을 깨운담…, “여보세요? 누구시지요…?” “사모님! 저예요, 저… 김 선화(가명)말이에요. 절 모르시겠어요?” “김…누구 시라구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잠결이라 그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왜 있잖아요? 한국에 계실 때, 교회마당 아래 살던 사람…김 선화 말이에요.” “아, 그때 그 지독한 사람…” 그제야 철거민 촌에서 개척할 때, 어려웠던 젊은 시절의 기억과 함께 우리를 많이도 괴롭혔던 그녀의 누렇고 둥그런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신학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우리가 개척을 시작한 곳은 부산 지역의 어느 철거민 촌이었습니다. 단칸방에서 개척을 시작해서 고생하기를 몇 년…, 이제 겨우 언덕 위의 조그마한 밭떼기를 교회터로 장만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말은 성전부지였지만…실은 손바닥만 한 언덕 위의 밭떼기였지요. 그 땅을 파고 반듯이 고르게 다듬어야만 교회로서의 허가가 나온다는데 …맨손으로 땅을 고르자니 막막했습니다. 근로자를 사서 하려니 돈도 없고 도와줄 만한 성도도 없어서 남편 전도사님이 혼자 삽과 괭이를 가지고 올라가서 열심히 그 땅을 고르느라 손바닥엔 피가 다 맺혔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고생 끝에, 겨우 손바닥만 하게 반반한 터를 만들고 그곳에다 가마때기를 깔아 놓고 나니 우리의 눈엔 더없이 훌륭한 성전 터가 된 것입니다. 그 가마때기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눈물로 봉헌한 최초의 성전이었지요. 그곳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우리 전도사님은 매일 낮에는 그곳에 올라가서 일했고… 새벽 미명이면 일어나 그곳에 올라가 깔아놓은 가마때기 위에 엎드려서 혼자 눈물의 새벽 재단을 쌓고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해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벽기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갔다가 들어 오는 남편에게서 심한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예요…?” 놀라서 묻는 내게 “글쎄, 지난밤에 누군가가 우리 성전터에 오물을 쏟아붓는 모양이요. 나도 역겨워서 기도가 다 헷갈리더니만…이런, 이런…바짓가랑이가 홀랑 다 젖어버렸군그래….” “어떻게 하죠? 우리 집에는 물도 귀한데….” 사실, 그 당시만 하여도 철거민 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돗물이란 사치의 대명사였었지요. 집집이 수도를 놓아준 것이 아니라 한 동리에 하나씩 공동 수도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저는 오물이 잔뜩 묻은 그 바지를 싸서 멀리 동구 밖 개천까지 나가서 빨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밀가루 수제빗국으로 대충 때운 전도사님은 삽을 들고 교회 부지로 올라가서 그 오물들을 깨끗이 치우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치웠으니 괜찮겠지…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다음 날도…또 그 다음 날도…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물을 쏟아붓는 일을 그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남편 전도사님의 단벌 바지는 물이 마를 사이가 없이 빨아서 말리느라 또 진땀을 빼고는 했지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누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부지 아랫동네 삼십 대 초반의 한 아주머니가 좀 수상쩍긴 했지만…, 그렇다고해도 그들은 모두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이니…따져서 물어볼 수도 없고… , 그렇게 오물과의 쓰라린 전쟁을 묵묵히 참아내기를 몇 년…, 이제 자그마하게나마 아름다운 성전도 지었고 성전 뒤에 칸을 막아서 그곳을 사택으로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도 나날이 부흥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처음 보는 듯한 아주머니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교회 언덕 아래에 사는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도 혼자 남아서 한참을 오열하고 있던 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사택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다짜고짜 “전도사님, 저같이 나쁜 년도 교회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목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편이,
“그럼요. 아주머니 정말 잘 오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는 꺼이꺼이 목을 놓고 한참을 통곡하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이 년이 천벌을 받아도 싸지요, 싸…흑, 흑, 제가 천벌을 받은 거예요…천벌을…”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면서 우느라 말을 채 잇지 못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아주머니, 천벌은 무슨…울지만 마시고요,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좀 해 보세요. 그래야, 우리가 기도라도 해 드리지요.” 하면서 달랬습니다.

 

그제야 하시는 말인즉, 그 아주머니는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매일같이 밤만 되면 온갖 더러운 배설물이 든 요강이며…멸치젓 찌꺼기며…할 수 있는 대로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것은 다 동원을 해서 성전 터에 들고 와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전도사님 내외분이 한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오히려 더 얄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쓰레기가 모자라면 동네에 있는 것까지 모두 거두어 밤이면 교회 터에 가져와 쏟아붓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하혈이 비치면서 심한 악취마저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뭐 괜찮겠지…하면서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것은 남편이 양복점 기술자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에 아이들은 올망졸망 5명씩이나 되니 그 어린 것들의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워서였답니다. 하기야, 그때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철거민들이었고 보니… 대부분 모든 사람이 다 어려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개척하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끼니를 거르는 날이 밥을 먹는 날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건강만 있으면 그런대로 버텨나갈 수가 있었는데 건강을 잃고 병원까지 들락거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여유가 없는 그녀는 병원에도 한번 가 보지 못하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고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더 이상해 오고 기운이 빠지면서 밥맛도 없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산부인과를 찾아가 진찰을 받은 결과 자궁암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는 암 말기에 3개월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들 부부는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용하다는 무당은 다 불러서 굿도 해 보고 효험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는 절간에 올라가서 삼천 배도 드려보고…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고…남편마저 일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데 아내가 아프니 정신이 다 나가서 그런지 일은 점점 더 어렵게만 꼬여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빚을 얻어서 메꾸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더 이상은 돈을 꾸어주지를 않더라고 합니다. 3개월 시한부 생에 돈을 더 꾸어주었다가 언제 받겠느냐는 것이겠지요. 하는 수없이 낙심한 상태에서 포기한 그 아주머니는 집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울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자기가 지난날, 교회터에 온갖 더러운 오물을 다 쏟아붓던 악행이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이 떠오르면서 속에서부터 벌벌 떨려오기 시작을 하는데 나중에는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심한 두려움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두려워 떨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지난 날 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나 빌고 죽어도 죽어야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새벽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이렇게 교회로 올라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 그랬었구나…그때 그 지독한 사람이 바로 이 아주머니가 틀림없었구나….” 생각해 보면 그때 일이 괘씸하기는 하지만…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보아하니 이제 30대 초반, 나보다 겨우 네댓 살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올망졸망 다섯 명이나 되니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서야 하겠는가… 하는 불쌍한 마음이 더 앞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부둥켜안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를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이제 예수님이나 잘 믿어 보자고…교회에 찾아오셔서 너무나 고맙다고 위로하고 기도해 주면서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아주머니는 저녁만 되면 이불을 싸들고 교회로 올라와서는 밤새도록 혼자 울면서 기도하다가 새벽기도를 마치면 집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때가 10월 중순쯤 된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런 모진 추위에도 그 아주머니의 애절한 철야기도는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때로는 저도 방에만 누워서 잠을 청하기가 너무 미안해서 아기 둘을 재워 놓고 나면 살며시 빠져나와 교회에 나가서 울면서 같이 기도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지나고 의사가 선고한 3개월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서리치게 추운 가난한 철거민 촌의 기나긴 겨울도 다 지나가고 이제는 3월… 아름다운 개나리꽃이 여기저기 다투듯이, 노랗게 떼를 지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3개월이면 죽어야 할 아주머니가 6개월이 넘어도 죽지를 않고 오히려 몸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누렇고 핏기없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아오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 주었다.”하고 여기저기 간증을 하고 다녔고… 남편을 비롯한 온 가족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빚쟁이들이 괜한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정말 그런지 어디 같이 한 번 처음 암이라고 진단을 내렸던 그 병원에 가서 확실한 진찰을 받아 보자고 하며 그 아주머니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그때 그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었습니다. 다시 자세히 검진해 본 담당의사가 나오더니, “당신이 정말 그때 그 김 선화 씨가 확실하냐? 암이 있었던 흔적마저 사라졌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은 죄를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회개한 자를 용서해 주시고 치료까지 해 주심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든지요...

그 후로 우리는 곧 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왔고…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그 교회에 남아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질로도 크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남미에 있는 어느 큰 회사에서 양복 기술자 중 최고 책임자로 뽑혔고… 지금은 온 가족이 남미에 이민을 하여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요 …헤어진지 20년이 더 넘은 지금도 그녀는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목사님 내외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는 것이…그만 이곳 남미와 그곳 미국의 시차를 잘 몰라서 실수했노라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용서라니요…집사님은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몸으로 보여주신 산 증인이신데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대목에서 사랑하다는 두 가지 헬라동사,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사용되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아가파오는 무조건적,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신적인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셈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신적인 사랑으로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뜻으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물으실 때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발한 해석인 것 같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헬라 문헌처럼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헬라역본인 70인 역(LXX)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상호교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아가파오가 숭고한 신적 사랑만 의미하지 않는다. 한 예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했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딤후4:10). 요한도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도 두 단어가 등장한다(요3;35, 5:20). 특별히 요한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동의어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주님과 베드로가 실제로는 아람어로 대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셨을까? 이 질문에 실패한 자를 일으키는 섬세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실패로 인해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에게 죄와 실패를 잘못 지적하면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그를 회복하기보다 그를 더 망가트릴 수 있다. 베드로의 마음과 그의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이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센서라도 달아놓으신 듯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시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신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심을 직관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로 인해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는 말에서 주님이 자신의 진심을 아심을 그가 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그의 과오를 상기시키시는가. 그것은 그의 실패를 온전히 만회해주시기 위해서였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을 이제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상쇄해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변절자가 아니라 세 번이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해주셨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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