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창세기 1:16)

우리의 태양계 중심에는 있는 태양은  10억개의 세계 주요 도시가 일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를 매 초마다 내보내는 안정적인 “수소폭탄”이다. 태양은 그 복잡성과 힘에 있어서 매우 놀랍다. 태양에 관해 연구할 때,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 창조를 확증하는 것을 발견한다.

태양의 창조와 목적

태양과 다른 하늘의 광명체들은 창조 주간의 넷째날 만들어 졌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늘의 광명체들이 (1) 낮과 밤을 구분하기 위하여, (2)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경과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3) 지구에 빛을 비추게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 준다 (창세기 1:14-15). 네번째 목적은 성경의 다른 곳에 드러나 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시편 19:1-6).

이 네 가지의 목적은 광명체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두개의 목적은 거의 대부분 태양에 의해 수행된다. 오직 태양만이 낮과 밤을 구분한다. 모든 광명체들이 지구에 빛을 비추긴 하지만, 태양의 밝기에 비하면 그 밝기는 매우 적다. 창세기에는 태양과 달 모두 “큰” 광명체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태양과 달은 다른 광명체보다 훨씬 더 밝고, 큰 디스크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광명체들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점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이 달보다 더 크고 밝으며,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근원을 가지고 있다. 달은 더 적고 흐릿하며 빛을 내기 위하여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는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함으로써만 빛난다.

이들 두 개의 광명체의 다섯번째 목적은 창세기 1장 16절에 나온다 – 바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하기 위함이다. “주관하다” 혹은 “다스리다”라는 히브리 단어는 권세 혹은 통치를 의미한다. 태양은 낮을 정의하고 낮 동안 다른 모든 광명체들을 보이지 않게 할 정도로 밝기 때문에 낮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될 수 있다. 달은 다른 모든 광명체들보다 더 밝음으로써 밤을 “다스린다”. 달은 밤에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며, 달이 없을 때 별들이 밤을 “다스릴” 수 있다 (시편 136:9). 광명체들이 밤 낮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것들은 곧 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국기에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가족을 해와 달, 그리고 별들로 묘사하며 (창세기 37:9), 이는 성경을 통해 계속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2:1).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창조의 첫 3일 동안 낮과 밤을 구분하시기 위하여 임시적인 빛을 제공하셨다. 왜 태양이 넷째날이 되어서야 창조되었을까? 또한, 창세기는 왜 태양과 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까? 그것들은 단지 낯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편 136:7-9와 같은 다른 성경말씀을 통해 그것이 해와 달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 위의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은해와 달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일지 모른다. 태양은 생명의 1차적인 근원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태초라는 것은 첫째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태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태양은 인격적인 이름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창조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큰 광명체이다.

태양의 특징

태양은 9천 3백만 마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작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구의 지름보다 109배 더 크며, 지구의 부피보다 백만배 이상 크다. 태양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물체이며, 전체 태양계 질량의 99.86 퍼센트를 차지한다.  만약 10파운드의 볼링공이 태양의 질량이라면, 모든 행성과 위성, 혜성 및 태양계의 다른 모든 것들을 합친 것은 1센트와 5센트짜리 동전의 질량에 불과하다. 그리고 목성이 5센트짜리 동전일 것이다.

태양은 거의 대부분 수소와 헬륨가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우리는 태양빛을 무지개색의 “빛의 띠 (spectrum)”로 나누는 분광기를 사용하여 태양빛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측정한다. 태양의 스펙트럼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특정 빛의 파장을 가리키는 좁고 검은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밝혀졌다. 이 영역의 위치는 그 빛을 생산하는 물질과 일치한다. 그것은 마치 원자의 지문과 같다. 사실, 헬륨은 지구에서 발견되기 전, 분광기를 통해 태양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헬륨”이라는 이름도 태양신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신의 이름인 “헬리오스(Helios)”에서 오게 된 이유이다. 비슷한 분석을 통하여 별들 또한 훨씬 더 멀리 있긴 하지만, 태양과 같이 수소와 헬륨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태양은 너무 뜨겁기 때문에, 내부의 원자들은 완전히 이온화되어 있다 – 전자들이 핵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의 구조

이온화된 가스로된 공이라고 하기에는, 태양은 놀랍도록 복잡하다. 그것은 온도와 움직임이 서로 다른 몇몇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태양의 핵은 가장 드거운 곳이며, 온도는 섭씨 천 5백만도 (화씨 2천 7백만도)가 넘는다. 이토록 높은 온도에서, 수소 원자의 양성자는 매우 빠르게 이동하여 서로 부딪쳐서 – 여러 단계를 통해 – 헬륨을 형성한다. 이과정은 “핵융합”이라고 불리며, 엄청난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태양 표면에서 끊임없이 우주 공간으로 방출되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핵융합의 과정은 또한 “뉴트리노”라고 불리는 작은 입자를 만든다. 이 입자들은 일반적인 물질을 그대로 통과하는 유령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태양의 중심부에서 한번 만들어지면, 뉴트리노는 거의 빛의 속도로 밖으로 이동한다. 사실, 몇백조의 뉴트리노가 지금도 매초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채 당신의 몸을 통과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일은 뉴트리노가 지구 반대편에 먼저 도달하고 지구를 통과한 후 당신의 몸을 통과하기 때문에 밤에도 진행된다. 과학자들은 뉴트리노가 실재로 태양으로부터 나오는지를 확증하는 탐지기를 만들었고, 이는 태양의 중심부에서 실재로 핵융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양의 방사성 지대는 태양의 중심부 바깥에 있는 태양 반지름의 약 3분의 2정도 되는 층이다. 이 지역의 온도 역시 수백만도이지만, 핵융합이 일어나기에 충분히 뜨겁지 않다. 대류 지대는 태양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서, 이온화된 기체는 뒤집히는 단위 안에서 상당히 복잡하게 움직인다. 대류 지대는 적도 지역에서는 빠르게, 극 지역에서는 느리게 회전한다. 따라서 태양의 바깥쪽 3분의 1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러한 순환이 태양의 자기장이 11년마다 한번씩 역전되는 부분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대류 지대는 태양의 가시적인 표면인 광구 (photosphere)로 둘러싸여 있다. 광구의 온도는 섭씨 약 6,000도 이다. “과립세포 (granule)” 라고 불리는 대류 지대의 가장 작은 단위는 태양의 광구의 고해상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다. 광구에는 또한 “흑점 (sunspot)”이라고 불리는 작고 검은 지역이 있다. 흑점은 밑에서 올라우는 에너지의 이동을 막음으로써 대류를 방해하는 자기장에 의해 생긴다. 따라서 흑점은 주변부보다 온도가 더 낮으며, 더 어둡다. 흑점은 흑점을 태양과 분리시킨다면 매우 밝게 보일 것이지만, 훨씬 더 밝은 주변부로 인해 대조적으로 어두워 보이는 것이다. 흑점은 11년을 주기로 커졌다 작아지며, 태양의 자기장의 역전과 관련되어 있다.

광구 바깥에는 거의 투명한 채층이 존재한다. 채층의 기체 밀도는 매우 낮으며,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채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기일식 때 태양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이다. 일식이 일어나면, 달은 밝은 광구를 가리고 채층을 볼 수 있게 한다. 채층은 복잡하고 매우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채층 (chromosphere)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chromo” 가 “color” 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채층 바깥에는 매우 얇고 조직되었으며 이온화된 기체로 이루어진 광환이 존재한다. 광환(corona)는 왕관(crown)을 의미하며, 태양을 둘러싸는 가시적인 디스크이기 때문에 적절한 이름이다. 역설적으로, 태양의 광환은 섭씨 약 백만도 이상으로 아래층보다 훨씬 더 뜨겁다. 왜 코로나가 이토록 뜨거운지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생명을 위해 디자인됨

천문학자들은 태양을 주계열성 (main-sequence star)으로 분류한다. 태양은 다른 별들과 구성성분이 거의 비슷하고, 온도와 밝기 또한 다른 별들의 평균정도 된다. 여러 모로 보아, 태양은 단지 일상적인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태양은 지구에서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 명백하다. 어떤 별들은 엄청난 양의 치명적인 방사선을 내뿜는 초화염 (superflare)를 가지고 있다. 태양은 다행이도 초화염을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의 화염은 약하다. 태양의 온도와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생명을 위하여 최적화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더 밝은 별들은 생명체에 치명적인 자외선을 훨씬 더 많이 생산한다. 더 차가운 별들은 가시광선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적외선 (열선)을 방출한다.

은하계 안의 태양의 위치또한 생명과 과학을 위하여 최적화된 듯 보인다. 만약 태양이 은하의 중심에 좀 더 가까웠다면, 해로운 방사선으로 인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태양이 조금 더 은하의 바깥쪽에 놓였다면, 하늘의 절반에서 별을 볼 수 없을 것이며, 계절을 측정하거나 우주를 연구하는 일이 더 어려워 졌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태양은 다른 비슷한 별들과 비교했을 때, 리튬이 약 100배정도나 부족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도 또다른 디자인적 특징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태양은 창조를 확증한다

태양은 창세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다. 세속주의자들은 약 50억년간 수소의 핵융합이 태양에서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핵융합은 중심부의 밀도를 서서히 변화시키며, 별이 서서히 밝아지게 한다. 물론 6,000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는 그 영향이 미미하다. 그러나 만약 태양이 수십억 년 되었다면, 과거에는 현재보다 30퍼센트 정도 더 어두웠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태양이 그렇게 어두웠다면, 지구는 꽁꽁 얼어붙은 땅이었을 것이며, 이는 생명이 스스로 진화되는 것을 더욱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태양은 저절로 형성되었다는 시나리오를 거부한다. 세속적 천문학자들은 현재 태양 (및 다른 별들)이 우주에 존재하는 거대한 수소와 헬륨 기체인 성운(nebula)이 뭉쳐서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수천 개의 성운을 발견했지만, 그 누구도 성운이 뭉쳐서 별이 생기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성운의 기체가 바깥쪽으로 퍼져 나가려는 압력은 기체가 서로 당기는 미약한 중력보다 훨씬 더 크다. 중력이 어떻게든 기체 압력을 극복했다 치더라도, 자기장과 각 운동량으로 인해서 더이상 기체가 뭉치지 못하게 될 것이며, 태양은 전혀 저절로 형성될 수 없다. 과학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확증하는 듯 보인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By Jason Lisle, Ph.D.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제자

영접(迎接)

대장쟁이 ㆍ 2016-04-09 (토) 11:09 IP: 100.xxx.137    

(창세기 18장 1-4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앞에서 살펴본 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금 확인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고쳐 주신 다음 올라가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정, 낮 열두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달려가 영접합니다.

  아브라함은 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아 있었으며, 왜 세 사람을 보자 달려가서 영접하였을까요?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 남부지역, 나그네로 뜨거운 한낮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어려움을 아는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서 영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대접한 나그네가 알고 보니 하나님과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금 후손을 약속하시고 이름을 고쳐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한 다음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맞은편에 나타난 세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이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오시기를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장막문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고 앉아서 바라보았어도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쳐 보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세 사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뵙기 원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소돔을 멸하기 위하여 가는 천사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남은 한 분 여호와(YHWH, 야훼) 앞에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만 있으면 사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간구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 사람 중 둘은 천사이고 한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셨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서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렸기에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한 눈에 알아보고 이들 앞에 달려 나가 땅에 몸을 굽혀(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가지 마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극진히 영접합니다. 사라에게는 떡을 굽게 하고 자신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고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상을 차리고 그들을 나무 아래 모셔서 수종 듭니다. “전심을 다 한 극진한 대접” 이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요1;12)”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성을 다 하여 극진히 영접하였는데 우리는 그저 “그 이름을 믿는 것”으로 영접을 대신하니 너무나도 홀대하는 것 같다 싶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그 영접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문에서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나이 89세 늙은 사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웃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웃눈구나. 여호와께 능치 못 할 일이 있겠느냐.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않고 안 웃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에게 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극진히 영접하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정 극진히 영접하였습니까? 그 이름을 믿는다 하면서 아직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혹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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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30년 전 헤어졌던 생모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버렸다.


30년 전 입양을 보내기 위해 양육권을 포기했던 엄마가 아들과 결합하여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앞으로 결혼을 하여) 아기를 가질 예정이다.


51세인 Kim West는 그녀가 입양을 보내기 위해 일주일만에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던 아들 Ben Ford(32)와 만나 2년 째 사랑에 빠져있다.


이 커플은 자신들의 성관계가 ‘근친상간’이 아니라 강변하며 자신들은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릴 적에 헤어져야 했던 친족들이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 성적으로 끌리게 되는 ‘Genetic Sexual Attraction(유전적인 성적 유인)’이라고 학자들을 말하고 있다.



30년 전에 헤어졌던 아들과 연인이 되었다는 기사 내용


기사원문 >> Mother says sex with her son is 'incredible' as she reveals they're planning marriage and trying for baby



* 마지막 때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대의 타락상이 동성애, 수간, 소아성애에 이어 이제는 천륜을 부정하는 ‘근친상간’을 사랑으로 소개하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이 인간의 타락상이 정도를 넘어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없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타락한 문명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심판)이 임박한 말세지말인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동성애, 차별금지법, 소아성애, 수간!

- 김지연 약사 (순복음교회 철야예배) -


바쁘신 분들은 31분 20초부터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를 알려주시면서

소아성애, 수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십니다.


소아성애, 수간..

지금은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동성애도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 반대하며 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에서 쉽고 긍정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에 한 가수가 소아성애라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연예인 중에서 특히 가수들을 좋아하는데,

이 시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니 더 심각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을 반대하지만,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분별력을 갖길 바라는 의미에서 동영상을 올립니다. 

 

 

동성애 차별금지법-김지연 약사

 

옮긴 글/이웃 블로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다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For our rejoicing is this, the testimony of our conscience,
that in simplicity and godly sincerity, not with fleshly wisdom,
but by the grace of God, we have had our conversation in the world,
and more abundantly to you-ward.
For we write none other things unto you, than what ye read
or acknowledge; and I trust ye shall acknowledge even to the end;
As also ye have acknowledged us in part, that we are your rejoicing,
even as ye also are our's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고린도후서  1:12-14]
이를 상고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면,
간단히 단순히 있는 그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사로이 육체의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과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본받은 자녀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믿음의 양심으로 증언하는 일은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다.
(믿음의 양심, 성령님의 증언을, 바울을 통하여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도인 복음이 기쁜 소식이기에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에게도 기쁨이고 자랑이 된 것은
성령님과 함께한 증언이라,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말은 분명하게 너희가 읽고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니(성령의 인도로)
주 예수의 날(세상 심판의 날)까지 네가 너희를 인정하고
너희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며
우리가 너희의 기쁨이고 자랑이 되리라.
(복음이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감사의 능력, 권능)
이 권능은 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같은 자녀로서의 성령의 감동감화
(感動感化)라 감격된 말이, 마음속의 영혼을 움직이는 운동력 있는
권능(power of charity)의 말이 되었다.
나의 형제여!
my brethren!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Finally, my brethren,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에베소서 6:10]
강하여 지고 그의 힘을 얻는,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성령의 권능으로
in the power of his might.
그것이 권능이다.
그 권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이를 증명 증표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그래서
너를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
너는 나의 기쁨이고 나의 자랑이 되며
나는 너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my brethren!
나의 형제자매여!
power of charity!

수직적인 계급의식이나 조직적인 상하 복명의 세상의 전통과 체제와
사회의 관습과 관행과 문화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로 하나 되는
‘사랑의 띠’ 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진정한 교제를 맺어주신 성령님의 역사가 권능이기에
권능을 받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랑 'charity' 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Rei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Charity never faileth: but whether there be prophecies, they shall fail;
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 whether there be knowledge,
it shall vanish away.  고린도전서 13:6-8]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 ‘charity’을
그 거룩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불의, 불법.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터, 이 땅의 하나님의 의(공의)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이미 성령님의 인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한 터에서,
불법의 자리에서, 죄악 된 마음에 떠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 그 거룩한 사랑 ‘charity’ 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여정은 예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께로 갈수가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갈라디아서 5:24]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육체의 탐심을 따르는 비방과 거짓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길이라,
이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길로 간 사람들의 화려한 말이나 글이나
어떠한 주장도 진실이 될 수 없고 더욱이 진리가 아니기에
그러한 자들의 능력은, 어둠의 세력과 결탁한 권세의 어그러진 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Charity never faileth.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 ‘Charity’는 언제까지 항상 함께 한다.
세상 끝날 까지,
the day of the Lord Jesus,
그래서 사랑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 마태복음 28:20]
보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lo, I am with you always,
세상 끝 날 까지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재림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님이
세상 끝 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어느 이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한 구절을 떼어놓고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성령은 소멸하지 말라 하여 성경을 곡해하고
더 하여 자기 의로 가장한 탐욕을 드러낸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정확히 이 구절은 성령의 소멸이 아니라
성령의 억제적인 제한을 의미한다.
‘Quench’ 는 사무엘하 21:17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쟁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quench not the light of Israel'
'quench' 는 등불을 끄거나 억제하는 의미로 쓰였지
사라지고 없어지는 ‘소멸’ 아니다.
이사야 42:1-3를 보면 더 확실하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ine elect.
in whom my soul delighteth;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to Gentiles.
He shall not cry, nor lift up, nor cause his voice to be heard in the street.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
이사야가 예수님을 예언한 장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영(성령)을 주었은즉,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에 성령이 임하였고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은 후에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우리도 성령을 받고
우리의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권능이 임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상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정의와 심판을 시행하시기에,
우리가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에게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억제하고 제한하지 않게 하시려고,
진실로, 진리를 알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일삼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못하시기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구절의 해석은 잘못되었고 이는 성경의 앞과 뒤 문장으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무지이고
이 구절로 사이비들과 부흥사들은 교인을 겁주고 호통 치는 구절로 인용하여
무조건 적인 교회의 충성으로 광신자를 양성하고
그리고 무조건 적인 담임 목사의 순종을 강요하여 맹신자를 만들어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았고 이런 무지와 선동에 속거나 믿음의 분별력을 잃어서
자기 위안을 방도(方道)로 삼으면,
감성적 분위기의 예배로 좌지우지된 감성을 따라 자기도취에 취하면,
수치심을 잃어버려서 도무지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면,
성경은 자기주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 어그러진 길로 간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결국, 자기들 자신이 세상적인 윤리와 도의의 수준에도 못 미침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합리화 하여 자신의 의의 올무에 걸려 남을 탓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4-24]


Renaissance Pleasure Farie는

지난 4월 6일에 개막하여 5월 19일까지

주말에만 개최되는 LA 최고의 축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축제는

Renaissance Faire,

혹은 Renaissance Fair, 또는

Renaissance Festiva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축제(이하 RPF)는

미국의 몇 개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개최되는데

캘리포니아에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4월부터 5월에 걸쳐서,

 

일리노이와

위스칸신에서는

7월 6일부터 9월 2일까지,

 

그리고 뉴욕에서는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 개최됩니다.

 

RPF는

한마디로 중세시대,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과

셰익스피어 시대를 중심으로한

의상과 볼거리들로 이루어진 축제입니다.

 

더불어,

헨리 8세, 바이킹 시대,

17-18세기의 해적시대의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당시의 각종 의상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음악과 각종 쇼들로 흥겨운 축제의 장을 이룹니다.

 

입장료가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주말 나들이로 최고일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보기 힘든 의상과 장면과

음악과, 각종 쇼,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는

RPF만의 자랑거리입니다.

 

특히,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 포즈를 취해주기 때문에

 

초보든, 프로든 간에

사진사들에게는 인물 촬영에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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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지역의 RPF는

Santa Fe Dam Recreation Area에서 열리고 있는데

행사지역이 워낙 넓어서 찬찬히 훑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특히,

사진을 찍느라고 한 곳에서 오래 지체하면

하루 종일 있어도 전체 행사장을 다 돌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뭐, 물론

대충 돌아보면

몇 시간 만에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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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입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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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초입부터 쇼가 펼쳐지는데

비록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볼만한 쇼들이 제법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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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구경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입니다.

한 여자의 시선은 사진사를 향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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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F는 볼거리와 먹거리,

살거리가 즐비한 곳이기도 합니다.

왼쪽 꼬마 여자의 뒷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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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앉아서 20-30분 음악을 듣다 보면 시간이 저절로 흐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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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무대를 자세히 보면,

같은 사람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노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여러 무대를 돌아다니면서 각기 다른 장르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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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서정적인 Wild Mountain Thyme을 부르는 동안 한컷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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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무대도 있군요.

이들이 비록 전문가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은 연습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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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여염(閭閻, 서민의 살림집) 집앞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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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우물가, 혹은 빨래터의 모습입니다.

중세의 유럽도 우리네처럼 우물가가 동네의 소식을 주고받는 중심가 였을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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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 혹은 청혼을 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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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을 한 참 걸어다니다 보면 상당히 더운데

이런 알록달록한 양산을 쓰고 다니면 시원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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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저 여인들이 들고 먹는 고기의 크기로 보아서

닭다리는 아닌 것 같고, 칠면조다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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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곳곳에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처럼 많은 것을 보면

인파가 얼마나 많고 붐비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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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중세시대의 미용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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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미뉴엣과 17세기 궁중 음악같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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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귀족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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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또다른 귀족?

옷차림을 보니 왕족같기도 하고.... 복식문화에 조예가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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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런데서 너를 만나게 되다니 무지 무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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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로 분장한 사람의 모습... 진짜 잭 스패로우 처럼 생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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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든 여자가 나에게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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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아직은 부활의 때가 아니다

       

      오늘은 괜스레 아침부터 마음이 울적하다.

      이런 때면, 나는 오래된 글을 찾아 읽어본다.

      좋은 글, 은혜의 글이란 읽을수록

      마음에 얼마나 위로가 되고 큰 힘을 주는지...

       

      우리가 잘 아는 한국 초대교회의 대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는 본래 유명한 깡패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후 부고장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했다.

      “그놈 정말 잘 죽었다!”하는 심정으로
      장례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장례식을 치른다는 장소로 찾아가 의자에 앉아

      장례 집행식을 기다리는, 모두의 마음엔 슬픔이 아니라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이 참기름처럼 고소하여

      춤이라도 출 것같이 화기애애한 기쁨이 넘친다.

      그런데 잠시 후 죽었다던 김익두가 걸어 나오며

      ‘여러분 제 장례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게 아닌가?
      참석한 사람들 혼비백산해 하며 난리가 났다.

      이젠 정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데

      김익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동안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고, 이따금씩 옛 기질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려 할 때가 있었지마는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이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되살아나려고 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죽어 있어라!”
      그러면서 끓어오르는 혈기를 삭혔다고 한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령 충만의 생활이란 어떤 모습인지,

      의구심이 들고 환멸이 올 때가 가끔씩 생긴다.

       

      아,

      다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가 먼저라고 말해야 하겠지...

      다행히 나는 타고나기를 내성적인 성격이며

      다혈질이 아닌 탓에,

      혈기가 끌어오르는 것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내성적인 타잎은 또 다른 것들,

      죽여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현대 신앙인들을 살펴보면 지도자가 없던

      고대 이스라엘 땅 '사사시대'를 연상하게 된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내뱉고, 무법천지, 상식부재, 질서부재 시대가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각자가 나름대로, 모두가 다 의인이다.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고,

      자신의 체험이 최상이고,

      조용한 사람은 불같은 사람을

      불같은 사람은 조용한 사람을 비방한다.

      다른 이는 성령도 받지 못한 이들로 매도하는 태도,

      자신만이 가장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우리 모두 죽어야할 것들은 무엇일까?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실세를 넓히려는 욕심,

      자신의 사상을 밀어주지 않는다 하여

      섭한 감정을 넘어 상대를 원수시 하고

      더 심하면, 온갖 악한 말로 모함하기도 하는

      이런 유아적 표현의 악플들이 난무함을 보게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모두가 다 본성을 죽이지 못한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죽자, 죽어야 열매가 맺히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아직은 주께서 일어나라 말씀하지 않으시는데,

       

      김익두 목사님처럼, 

      우리 모두 부활 때까지 죽어지날 수 없는 것일까....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찬양하라 내 영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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