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레스보스 섬의 난민 캠프에서 무슬림 난민 12명을 자신이

타고 온 전용기를 통해 바티칸으로 데려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난민 캠프를 찾아 세계 지도자들이 난민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촉구하며, 난민들 가운데 어린이 6명을 포함한 시리아 난민 12명을 자신의 전용기에 태워 바티칸으로 데려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세 가족으로 모두 시리아 출신에 이슬람교도(무슬림)인 난민 12명의 이주에 대해 바티칸은 "교황이 난민들에게 환영의 뜻을 보이고자 했다"면서 교황청과 그리스·이탈리아 당국이 난민 가족의 바티칸행을 위해 사전에 협의를 마쳤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이들은 로마에 머물면서 가톨릭 자선단체 산테지디오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고 바티칸은 덧붙였다.


이날 교황이 방문한 레스보스 섬의 모리아 난민캠프에는 시리아 등 중동 출신을 중심으로 3000명의 난민이 수용돼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EU-터키 합의 때문에 조만간 터키나 본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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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난민들 가운데 섞여 들어온 ISIS 대원들로 인해 발생한 파리와 브뤼셀의 테러와 2016년 제야의 밤에 독일, 핀란드, 스위스 등에서 벌어진 이슬람 난민들로 인한 집단 성폭행 사건 이후, 유럽의 국가들이 난민 유입을 꺼리는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12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바티칸으로 데려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2제자를 거느리신 예수님을 흉내 내려는 듯, 12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거느리고 바티칸에 도착함으로 현재 이슬람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겪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을 향해, 더 많은 이슬람 난민들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Daily mail의 단독 보도에 의하면 교황이 레스보스 방문 당시 바티칸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알려졌던 난민들 가운데 시리아 출신 기독교인 남매가, 마지막 순간에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채 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인인 이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ISIS에 의해 처형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교황이 바티칸으로 데려가는 시리안 난민들 가운데 왜 기독교인들인 이들 두 사람의 명단이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교황청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의 바티칸 이송"이라는 퍼포먼스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지막 순간 이들을 제외하고 대신 이슬람 난민을 두 사람 더 포함시킨 것으로 추측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2 제자를 거느리신 예수님처럼 12명의 이슬람 난민을 거느리고 바티칸으로 데려오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전에도 여러 번 예수님을 흉내낸 퍼포먼스를 보여준 바 있다. 예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슬림 신자들까지 사랑으로 받아준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정작 본래 바티칸으로 데려간다는 통보를 받았던 기독교인 남매를 제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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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타종교인인 이슬람 사람들까지 이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품어준다는 ‘종교통합의 퍼포먼스’를 위해 정작 시리아로 송환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기독교인 남매를 외면한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사도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교황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정치적이고, 교활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1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의 삶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이라
이미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아는 사실이
복음이 전파되는 전도가 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제자인 줄 알리라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By this shall all men know that ye are my disciples,
if ye have love one to another. 요한복음  13:34-35]

예수님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사랑의 핵심인 새 계명으로 주셨다.
계명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그리스도의 도(道)라
증인의 길이며 복음의 길이라
하나님의 의(공의)가, 복음의 참 의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치관, 인생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가.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서로 사랑해야 하고, 사랑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로 사는 힘,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한 힘(power of charity)을
성령님을 통하여 서로 사랑함으로 받는 힘,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받는 고귀하고 순결한 힘을 성령님을 통하여 공급받는
거룩한 사랑을 다시 기억하고 다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영혼을 흔들어 주심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서 매일의 일상에서 생활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이
다시 깨끗하고 청결한 영혼이 되기를,
일상의 생활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오길 바라시기에,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를 사랑을 의지하고 실천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샘솟는 물처럼 다시 힘을 주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의 단련과 연습이 ‘경건’ 이며
경건을 통하여 온전한 성령님의 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아야 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함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함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졌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공의)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경건의 생활을 실천하지 못하는 일상의 생활은
힘을 얻지도 못하여 죄에 대하여 무력해지며 죄에 대한 방어를 할 수 없기에
반복된 생활을 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교제’ 는
우선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는 제자로,
그러다 죄를 짓더라도 성령님의 인도로 죄에 대한 회개로,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
그 힘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이며
교제를 위하여 받는 능력 또한 은사이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는 말씀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권능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고
은사를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고
그러기에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고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말씀이고
그러기에 이 시대는 사랑을 잃은 시대라 무기력하여
무엇을 구하고자 울고불고 부르짖더라도 응답 없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의를 떠난 구함이 된다.

우리의 일상은
내적인 교만의 탐욕과 외적인 상황의 시험의 삶으로
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도전에 부딪치고 이를 극복 하냐는 성패(成敗)는
일상생활의 도전이라 경건의 훈련이며 단련이며 연단이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
급한 현대인의 조급함은 인내를 필요하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 장성한 자는
경건의 경험과 훈련으로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며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But strong meat belongeth to them that are of full age,
even those who by reason of use have their senses exercised to discern both good and evil.  히브리서 5:14]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잠시 흔들리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각인된
성령의 인치 심으로 세상의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유혹을 이기고
희망을 넘어 죽음의 저편 소망을 바라보는 자 이다.
그러나 경건을 떠나서는 승한 것 같으나 패한 자이고  
권능을 받지 못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말뿐인, 능력이 없는, 힘
없는 교인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가 되어 험담하고 시험을 주고받는
해를 끼치는 일상이 되어 서로가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상처뿐인 관계가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전통과 신학과 교리로 무장한 ‘거룩’ 이라는 예배와 의식으로
포장된 믿음이라는 세속화된 축복인 세상의 성공과 출세
행복의 성취라는 사탄의 달콤한 거짓에 속아 왔고
그 전통에 접붙인 믿음의 행위가 종교의식 화한 오늘날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내놓고 생명을 바꾼 생명의 역사인 복음을 직시하지
못하여 서로가 서로의 허물만 본다.

우리가 서로 사랑 하는가?
말로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 하면서
한 몸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가?
지체끼리 서로 상하 우위를 가리고 끼리끼리 어울려서 갈라지는
교회의 조직은 전혀 성경적인 모임이 아니고
아이러니하게 잘못된 조직의 구조가 형성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교계와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는,
신앙을, 신앙인을 공장의 제품을 만들 듯
규격(規格)과 격식에 맞추고 규정을 만들어 종교적인 전통에 적(籍)을 둔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의 전통은 부패한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개혁을 언급하면서 부패한 가톨릭같이 되었고
시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사두개인을 들 수 있고 이들은 유래는
불의한 제사장들을 들 수 있음은
제사장들과 같이 예루살렘의 권력가들과 결탁하여 귀족과 같은 지배 계층이 되어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세력을 유지하였던 세상의 권력과 영광으로
헛된 믿음을 종교의식으로 가장하고 정당화 한 전통을 정통(正統)화하여
하나님의 의를 팔아먹은 종교인들이라
모두가 합심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무리들은 종교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 이었고
오늘날 복음의 길에서 어그러진 길의 세속화한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의
건물에서 화려한 가운을 입고 거룩한 척 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똑 같이 세상의 부를 갈망하기에
그런 자들과 세상의 부의 축적에 목멘 부자들에게 그들에게 변화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4]

신앙은 믿음에 생명을 둔 생활이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낮아짐의 겸손에 두기에
믿는 자라도 완벽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기에 자랑의 교만을 버리고
완벽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다 지치면 긍휼을 구하며 낮은 데 처하는 믿음의 자세를
갖아야 하는데 믿음이라는 순수함에 벗어나 교만하여 저서
자신의 믿음과 지식에 술이 취하듯 취(醉)하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자신의 권위를 더하면 특별히 선택된 자로 망상(妄想)하여 과대망상이 되면
몽롱한 혼돈에서 몽상(夢想)에 빠지고 종교적인 몽상가(夢想家)된다.
이런 자들은 종교개혁의 개혁 기념일을 꼬박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종교개혁의 동기와 원인, 내용, 가치 등을 거창스레 떠벌리지만
본인은 종교 개혁자들이 사제에서 목사로 바뀐 호칭도 모르고
가톨릭의 사제의 복장인 로만칼라를 입고 개혁을 말하며 거드름을 부린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교만은 만 악의 뿌리이다.
높아 질려는 교만은
하나님과 동등해 질려는 타락한 천사,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교만은 우상숭배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이사야 2:11-12]
교만한 자, 자신을 뽐내는 자,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에게
낮아지는 비천에 처하는 심판이 임하기전에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에
로만칼라나 가운을 착복한 위선자들에게
이곳에서 수 없이 충고를 했고 이제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가 특별한 신분을 드려내려고 복장으로 신분을 표출하는가.
예수님도 제자들도 사도바울도 아무도 특별한 예복이나 남 다른 복장을
하지 않았고 이 성직자의 복장이 중요한 건 구약의 제사장과 왕의 예복이
예수님의 복음 이후에 다 사라진 것은 복음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
만민은 공평하신 하나님 안에서 공평하고 평등한 같은 생명이라
생명을 위한 생명의 법이 복음이고  
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완성이며
거룩하신 사랑을 본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가 자녀로 같은 신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가로막는
높아 질려는 신분으로 구별된 성직자의 복장은
평신도라는 기이한 차별을 만들었음은
중세의 귀족과 평민을 나누듯
‘성직자’ 라는 신분이나 호칭이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진 자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며
자기 신앙의 자기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표시의 복장이다.

그러니 담임 목사라면 얼마나 명예로운 직분인데 당회장이라니
집사는 어떻고 장로는 어떠한가.
집사는 집사이지 서리집사 안수집사는 무슨 직분이고
안수집사는 안수 받았다고 자기들 끼리 모임을 갖고 더 하여 안수집사의
회비인지 헌금인지 알 수 없는 돈을 내는 일은 무엇인지 돈, 돈 이다.
하긴 돈 없으면 장로 되기 힘든 교회가 많으니
교인을 붙잡기 위한 직분, 신분처럼 갈라놓고 평생 직분이 이름처럼 서로
부르는 호칭, 이건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한 직분이기에 직분에 걸맞은 성경의 지식으로 인생관과
교회관, 세상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직분자라면서
교회의 지도자라면서, 신학자라면서
성경적인 체계화된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여 직분에 매여 직분이 계급이 되어
분쟁의 원인이 됨을 수 없이 보고 듣는다.
왜 그럴까.
대체적으로 직분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지 않아 복음의 본 뜻을 모른다.
열심히 있어서 교회에서 숫한 예배와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하면서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을 제대로 강해하고 설교 못하는 목사들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
예문과 예화로 설교시간을 허비한다.
읽더라도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눈에 보기 좋게 맞추고
자신의 높이에 성경을 두기에 자기 의에 빠져서
믿음이라는 신앙의 생활이 자신의 환경과 인적 교류도 초월하지 못하여
자신이 만든 자신의 벽에 갇혀 자신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기호(嗜好)에 맞는 성경의 구절과 장과 권으로 성경을 재단(裁斷)하고
남을 재단하기에 자신의 도취에 취하고
더하여 감성의 높낮이에 좌우되는 믿음이 되어 믿음의 실상과 멀어지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전통과 관습과 습관과 버릇으로
스스로 굳어진 믿음은
세상의 사상과 철학과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려
성경을 읽고 신학을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에 눈이 먼 장님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구실로 변명을 찾으면
성령님의 인도로 받지 못하여
눈에 보기 좋은 전통의 구습(舊習)을 따르는 답습(踏襲)을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지고 끊어지면
말과 글로는 정통(正統)신학, 정통교단, 정통교회 라 자부하지만
스스로 만든 자신의 믿음의 우월감 위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이비가 되면
그렇게 굳어진 마음과 영혼에 찔림이 없어
관료화된 종교인이 되어 입에 머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찾는다.
이런 지도자들 따르면
감성적 분위기와 자기 복음의 자기도취에 취한 광신자와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여 자기변명의 구실로 삼은 맹신자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수치(羞恥)를 잃은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직분을 받지 말거나
직분을 받았더라도 쉼이 필요한 자 이거늘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목회자는 광신과 맹신자를 선호(選好)하여
직분을 주고 자신의 세력으로 삼아 자신마저 맹신과 광신의 한통속이 되어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살피듯이 살피다 높은 자리에 거 한다.
높은데 거하는 자들이여
내려오라.
[바위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레미야 49:16]

지체(肢體)는 다르나 직분(職分)은 같으며
직분은 다르나 지체는 같으며
모두가 성도라는 진정한 직분은 같다.
내려가야 한다.
낮아 저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같이
낮아짐의 교훈을 되새길 세대가 우리의 세대이다.
실천하여 지도자인 목사부터 은퇴 후 자기가 임명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내려가면 성도가 서로 더 교통(交通)하고
그런 목사가 많을수록 교회와 교회가 더 교통할 수 도 있다.
그럴 수도 없다면 직분을 남용하지 말 것을
소명(召命)이라는 잘못된 소명과 더불어
남용한 직분이 한국교회의 지난날과 오늘날의 병폐임을 모르는가.
하나님의 종이라 면서 상전(上典)이 되어 주인이 된 종들,
챙길 돈은 이 명목 저 구실로 다 챙겼으면서 무엇을 섬겼다고 광고를 하고 다니는지,
잘된 건 모두 자기 탓으로 믿고, 잘못된 건 모두 남 탓으로 믿는
자신의 믿음의 능력과 망상에 빠진 과대망상증 환자들,
돌아가자.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숭고하고 고귀한 길을 따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charity’ 의 길로 가서 사랑을 본받자.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고 더해서 고함과 폭력이 오가고도 모자라
세상의 법정에 위임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리고 원수같이 외면하고 딴 살림을 차리듯
교회를 세우는 일들은 다반사인 시대라
그리스도 인 으로 수치를 잃고
서로 책임을 미루고 전가하는 모임의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이럴 진데 교회 밖에서는 어떻겠는가?
교계의 모임은 어떻고...
복음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도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심는 일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인 다 운 정신적인 문화를 만들고 조직이 조직의
유지를 위한 안일한 관리자로 관료화 되지 않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개혁하고 다음 세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본이 되는 계승적인 문화로 발전하고
끝임 없이 변화하는 개혁적인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현대의 교계는 그런 원동력을 잃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신앙이 관습과 관행으로 굳어진 종교화된 조직, 조직의 유지를 위한 조직,
관료화가 된 조직이 되었기에 개혁되어야 할 신앙이 제도화 되어 겉모습만
교회고 교인인 현상은 변화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내가 사랑한 것 같이
생명을 버리기 까지 하시며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한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하나의 사랑인, 생명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안에 함께 거하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e are the branches: He that abideth in me,
and I in him, the same bringeth forth much fruit: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요한복음 15:5]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포도가지인 우리가 함께 거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랑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듯
He that abideth in me,
예수님께서 성령님 안에 계시듯,
and I in him.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 ‘charity’ 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의, 공의를 이 땅에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성령님을 통하여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우리 삶을 공급하시기에
그 공급하시는 힘을 받은 권능(power of charity)으로
‘열매를 많이 맺나니
he same bringeth forth much fruit’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열매를 많이 맺나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라 법이 없느니라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gentleness, goodness,
faith, Meekness, temperance: against such there is no law.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성령의 열매, 성령님의 권능은 사랑으로 시작함은
포도나무 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내가 사랑으로 붙어 있고
다른 가지인 형제자매도 사랑으로 붙어 있기에 한 포도나무에 같이 붙어있는
사랑이 생명이기 때문이고
이것을 다른 비유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에,
성령의 권능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하고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우리의 화답이자 대답적인 삶이므로 산 예배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 성령 안에 거한자의 열매이며
이 권능으로 맺은 이 열매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
이 법, 성령의 법을 금지할 법이 없고 이 사랑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25-26]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야 하기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for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예수님을 떠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서는 성령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우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물질을 나누고 형제자매의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고 서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는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헛된 높아지려는 직분에서 내려와서 낮아지고 겸손하여 생활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모범을 보이고
헛된 명예적인 직분 때문에, 헛된 권위로 서로 상처를 주는 받는 일로
마음에 분을 쌓은 행위를 하지 말고,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과 사건은
성령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power of charity)에 거하여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의 생활로  
연습과 훈련이 ‘경건’ 이다.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주께서 사랑한 것 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믿음의 한계와 환경적인 원인 등으로 할 수 없지만
경건으로, 조금씩 습관이 되어 버릇이 되듯이 더 많이 더 크게 사랑을 할 수 있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시며 도우신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는 삶
그 능력을 취하는 연습, 경건을 참 모습을 성령님께서 원하셔서
이 무기력한 시대, 우리를 찾으신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And the Lord direct your hearts into the love of God,
and into the patient waiting for Christ.  데살로니가후서 3:5]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은 신인합일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지상논쟁1-2 교회와신앙측
1996년 09월 01일 (일)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윗트니스 리 씨(지방교회·회복교회)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동시에 상당 수준 이단 시비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윗트니스 리 씨 측에서 기존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지난 호부터 본지와 지상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호에는 예정대로 본지 발행인 최삼경 목사의 글을 싣는다. 다음은 윗트니스 리 씨 측의 순서다.<편집자 주>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에 대한  지상논쟁을 시작하면서

이번에 윗트니스 리 편의 요청에 의하여 이런 지상논쟁이 본 지면을 통하여 개설되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특히 필자는 윗트니스 리 편의 자발적인 참여를 귀하게 여기며 다음과 같은 점을 미리 주지시키고 싶다.

무엇보다도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란다. 논쟁이란 잘못하면 유익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쉽다. 그것은 운동선수에게 승리가 목적이 됨으로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더욱이 이 논쟁에는 객관적으로 인정된 심판이 따로 있지 않다. 단지 독자와 역사의 심판을 기대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논쟁이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라며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을 제시하는 바이다.

첫째, 인신공격성 논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선 교계에는 이런 논쟁이 별로 없었고, 있었어도 평형이 어긋나 어느 편에 치우친 논쟁이 있었으며, 때로는 인신공격적인 논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하는 것이다. 이단논쟁은 분명히 교리적인 논쟁이 그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단으로 지목받는 편에서는 비록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교리적인 논쟁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신공격적인 형태로 발전되지 않기를 바란다.

둘째, 논쟁의 핵심을 피해가지 않기를 바란다. 본지는 창간 이래 지금까지 정통교회나 필자가 이단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최대한 반론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것을 좋게 보는 정통교회 교인들도 있었지만 “무슨 이단에게 반론권이냐“, “이단의 글을 어떻게 넣어 줄 수 있느냐“, “그렇게 하다 이단에게 미혹을 받으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는 등의 항의를 종종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단 연구의 객관성을 보장하자는 것이요, 또는 만의 하나 이단 연구에 잘못이 있으면 시정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지가 이단이라고 규정되거나 지목받는 자들에게 이렇게 지면을 할애하는 뜻을 상대편에서는 마치 자신들의 교리 선전장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특히 그 동안의 안식교와의 논쟁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라기는 혹 내적으로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표면적인, 일차적인 목적만은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한 내용 중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무엇이 잘못 이해된 부분인지 그것이 논쟁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논쟁을 할 때마다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는 공통적인데 자신들의 교리가 옳아서(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통교회가 이단이라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아니면 정통교회가 자신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혹 자신들의 교리 선전장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일차적인 목적이 형식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해도 하고 묵과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의 핵심은 신인합일주의다
우리 몸은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저 병은 이 병을 불러일으키듯이 어떤  사람의 사상은 여러 가지 사상이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단성도 교리마다 고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사상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포도송이가 꼭지에 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핵심 사상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의 핵심 사상을 말한다면 신인합일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의 면에서 시작하고 진행되고 발전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나아간다. 모든 사상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일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에게 어떤 이단성이 있는지 그 핵심은 예장 통합측의 결의를 소개한 본지 전호에 명시되었다고 본다. 비록 윗트니스 리도 양태론을 이단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삼위일체관 역시 양태론적이다. 또한 인간관도, 기독관도, 교회관도 정통교회와는 다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모든 사상들을 끌고 가는 핵심 사상을 신인합일주의라고 본다. 앞으로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교리들 속에 있는 그의 이단성을 하나씩 밝혀가겠지만 본 호에서는 서론적으로 신인합일주의 사상이 어떻게 다른 교리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필자의 본 글이 너무나 함축적이라서 평신도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앞으로 진행되는 논쟁을 지켜보면 충분히 이해되리라 믿는다. 먼저 그의 신인합일주의 사상을 살펴보자.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 내지는 창조 목적은 사람 속에 하나님 자신을 넣어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윗트니스 리, 내주하는 그리스도, pp. 10~11; 하나님의 경륜, p. 10, 244 등). 이 사상은 중요하므로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겠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해 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그분 `자신' 만을 우리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곧 그분의 모든 자본이다. 그 자본을 가지고 하나님은 자신을 대량으로 `생산'할 것을 계획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사업가도 되고, 자본도 되고, 생산품도 되신다. 그분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에게 대량으로, 값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pp. 9~10, 1987).

“하나님은 어떠한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나는 `담는 그릇'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릇'이라는 말보다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빈 그릇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내용이 되기를 원하신다. 좀더 설명을 하자면 병은 음료를 담는 데 필요하며 전구는 전기를 담는 데 필요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담지 않고 우리의 내용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모순 덩어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내용이며 우리는 이 내용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담아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위의 책, pp. 51~52).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뜻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분배받는  그릇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셨다. 온 우주 가운데 시간과 우주와 영원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안에 공급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변화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사람의 우주적인 연합이다“(위의 책, p. 244).

위와 같은 말을 그의 책에서 인용하려면 너무나 많다. 모든 교리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이 그의 핵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만 들으면 무엇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모른다. 더욱이 대부분의 한국의 크리스천마다 간접적으로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성도라면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는 것이 상례인 점을 볼 때 오히려 옳은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이 바로 윗트니스 리의 신론에도, 기독론에도, 그리고 인간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결국 구원론까지 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구조를 영·혼·육 삼분설로 보고 그중에도 항상 영을 강조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첫째는 우리의 영을 거처로 삼아 일하시고, 둘째는 혼에 영향을 주어 변화시키고, 마지막으로는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의 몸도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탄은 몸에 거하여 혼에 영향을 주고 끝으로 혼을 통하여 영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pp. 136~137).

그래서 그는 `육신은 악한 것이요, 영은 선한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든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 성령을 받은 우리보다 못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즉 인간에게는 성령과 사탄의 중간은 없다고 말하면서(하나님의 경륜, p. 139), 창조시 만든 인간은 순수한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중립의 순수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위의 책, p. 127). 결국 인간의 타락은 사탄이 인간의 몸 안에 들어온 것으로서(위의 책, p. 130,  138; 사람의 영, p. 45)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특히 사이비나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입으신 주님의 경우 예수님에게 죄는 없다는 말은 하면서도 육신을 입고 있었을 때는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하고(그의 영과 몸, p.  73), 또한 예수님에게 죄는 없었다고 하면서도 사탄의 모양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고 말하고(하나님의 경륜, p. 131), 따라서 그 인성은 거룩해져야 할 필요마저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함으로(그의 영과 몸, p. 76) 정통교회에는 없는 불경스런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도 하나님 사랑의 실현과 구속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속에 들어오시기 위한 신인합일의 측면에서 이해했으며(하나님의 경륜, p. 215),  예수님의 부활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을 넣어 주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며(성경의 핵심, p. 29),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영적으로 호흡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오 주 예수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도 바로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호흡한다는 것이다(그 영과 몸, pp. 29~30).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오 주 예수여!“를 외쳐도 영적으로 호흡하는 의미는 없을 것 같으며,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이 육신을 입고 있을 의미도, 우리가 부활한 후에 육신을 입고 있을 의미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을 이단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이 양태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은 수박 덩어리요, 아들은 조각난 수박 조각이요,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 몸에 들어가는 수박즙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그의 말에 의하면 삼일 하나님)을 설명한 것도 신인합일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양태론적인 비유인 것이다(본호에서 필자에게 할애된 지면이 적어서 다음에 구체적인 비판을 하겠다).

결국 회복교회 교인들이 아무리 주님을 호흡한다고 “주 예수여“를 외치지만 그 예수는 우리가 믿는 예수와 다른 예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이유를 하나만 든다면 인간의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함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육과 혼만을 위해서 죽으시고 영을 위해서는 죽으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받을 구원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워치만 니의 사상과 윗트니스 리의 사상이 한때 한국교회를 휩쓴 것을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본다. 지금도 워치만 니의 책을 출판하는 기독교 출판사가 있으며 또한 윗트니스 리의 책자를 판매하거나 선전하고 있는 언론들이 있는데, 이는 반드시 경계되어야 할 위험한 일이라 여겨진다.
(월간<교회와신앙> 199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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