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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목회자의 아내를 사모라고 부른다. 교회의 전통적인 직분에는 사모가 없다. 하지만 목회자의 아내를 집사님이나 권사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어색함이 많다. 그렇다고 이름 뒤에 씨자를 붙이기에는 너무 불경해 보인다.

지극히 적은 숫자의 교회들이 목회자의 아내에게 직분을 줘 부르게 하지만, 대다수 교인들에게는 아직 먼 산이다. 목회자의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는 것에 반발도 있고, 그렇게 부르지 않는 교회도 있지만, 대다수 한국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고, 문제의식도 별로 없다.

목회자의 아내, 사모

보수적인 한국교회 상황에서 사모들은 특히 힘들다. 여성이 살아가기에 한국사회가 힘들긴 하지만, 사모의 삶은 조금 더 힘들다.

교회 일에 적극 나서면 나선다고 비난하고, 소극적이면 교회 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한다. 옷차림이 조금만 화려하면 우리 목사님은 힘들게 목회하는데, 사모가 사치한다고 뭐라 하고, 반대이면 우리 목사님 창피하게 꾸미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모들이 참고 산다. 참고 살수밖에 없다. 목회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데이터이긴 하지만, 60% 이상의 사모들이 우울증을 겪은 바 있다는 통계도 있다.

내편을 들어줘야할 남편은 짐짓 알고도 모르는 척 한다. 가정에서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있지만, 대부분 목회자들은 집에서 무뚝뚝하다. 마치 자상하면 안 되는 것인양.

그래서 목회자의 아내들은 더 외롭다. 고민이 있어도 남편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서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일부 대형교회를 제외한 사모들은 남편을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들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사모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쉽게 얘기하지만,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은 사치다. 그렇다보니 스트레스는 더 쌓여만 간다.

전통적으로 사모는 목회자의 뒤에서 묵묵하게 돕는 역할이라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생각에 사모들 스스로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전통적인 사모상에 이의 제기하는 분위기 늘어

오륜교회가 주최한 사모 리조이스 행사에 참석한 사모들은 "이제는 사모도 달란트를 활용해 목회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전통적인 사모상에 대한 반발이다.

물론 현실에서 당장 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들이 조금씩 모일 때 변할 수 있다.

사모 리조이스 행사를 기획한 오륜교회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응원을 더하고 있다. 김은호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영혼"이라며 "사모들도 독립된 주체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생각들이 많이 변했다"며 "전통적인 사모상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륜교회는 지난 2007년부터 매해 사모들을 위한 행사를 열어왔다. 2009년에는 교회 내 사정으로 열리지 못 했지만, 꾸준하게 지켜왔다.

행사에 참석한 사모들의 만족도는 높다. 일단 남편과 교인들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한데, 사모들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올해 주제는 '응답하라 여고시절'이다.

사모들은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옛 추억에 젖어 들었다. 또 교회 앞에 있는 올림픽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며, 여고생 시절 친구들과 갔던 소풍을 떠올렸다.

2박 3일의 꿈과 같은 짧은 나들이었지만, 사모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얼마 안 가 현실에 다시 눈물 흘리겠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가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이승규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아멘넷

16.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고
깨끗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고
부르심을 저버리는, 형제자매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무시함 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For God hath not called us unto uncleanness, but unto holiness.
He therefore that despiseth, despiseth not man,
but God, who hath also given unto us his holy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4:7-8]
우리를 부르심은 신성(holiness)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성품
but unto holiness,
부르심은
of God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of places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of things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기 위하여
성령님과 함께 하시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으로 서로 사랑하게 함이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But as touching brotherly love ye need not that I write unto you:
for ye yourselves are taught of God to love one another.
And indeed ye do it toward all the brethren which are in all Macedonia:
but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And that ye study to be quiet, and to do your own business,
and to work with your own hands, as we commanded you;
That ye may walk honestly toward them that are without,
and that ye may have lack of nothing. 데살로니가 전서 4:9-11]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했고 더하여 마게도냐 교회 형제들도 사랑하였기에
바울은 그 사랑의 행위를 더욱 하기를 간청했다.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이것이 교제(fellowship)이다.
교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경건’으로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의식이 예배이며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고백적인 생활이고 삶이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예배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자하자는
의지와 태도가 표출된 언행이며 감사와 찬양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교제가 예배이며
경건이라
경건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경건하여져서
일용할 양식인 말씀과 물질을 나누어 자신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교제가
이루어졌음은 서로 사랑하는 교제, 그 교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 삶이 되어
더불어 기도로 간구하고 고백하는 마음의 자세와 실천이 경건이라
이것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여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으로 되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다시 힘을 갖는 공급하시는 힘(power of charity),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다.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입술로 감사와 찬양으로 고백하고 경배하며
생활로 시인하는 삶의 예배가
이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령님으로 허락받은 능력의 힘(power)이 권능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능력이 되고 또 다시 힘을 얻는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힘이
권능 받은 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힘이라  
세상을 이기고 변하게 하는 힘이고
증인으로 사는 자의 힘의 근원이라서
오늘날 우리가 무기력한 원인의 하나는 진정한 교제를 잃었기 때문이며
이는 진정한 예배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건을 잃은 모습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입고 더 챙기고 더 가질까 하는
세속화된 믿음을 가장(假裝)한 기복신앙으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안락(安樂)을 먼저 구하여 자신의 만족의 기쁨과 도취를 믿음의 결과인양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 모든 일에 만사형통(萬事亨通)을 바라는 신앙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 경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Because 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th shewed it unto them.  로마서 1:18-19]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와 공의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밝히셨으니
하나님을 그들을 익히 알고 그들에게 진노를, 벌을 심판을 보이셨다는 뜻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며 경건하지 않아서 공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28-32]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돌아서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경건하지 못한 모든 언행이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 이므로 악을 도모하는 자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의미는,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 아니라서
생명이 붙어 있어 능력을 자랑하며 유명한 사람이 되어 부자와 같이 화려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며,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옳다 한다는 의미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고 확증하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믿음 안에 있다면 일상생활에서 교회에서 생활로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charity’
그 고귀한 사랑으로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상대했는지
그 위대한 사랑으로 위대한 넓은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대했는지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는지 자신을 확증하고, 증명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타락한 사람이다.

그럼 현대의 교회와 비교하여
데살로니가 성도 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서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고
말씀과 물질을 나누고 연약한 지체를 도움으로
자신들의 믿음이 더 굳세게 되어 형제의 우애를 더 곤고히 하고
우상을 버림은 물론 다른 지역의 성도를 까지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이 소문이나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비교하면 어떨까?
예수님 이후로
한국교회 만큼 수많은 종류의 예배와 더하여 새벽예배
이렇게 많은 종류의 예배를 드리던 때가 있었던가.
수많은 부흥집회와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떻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헌금의 종류는 어떻고.
아마 타락의 대명사인 중세 교회도 한국교회만큼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한국교회 만큼 많은 헌금의 종류도 없었고
부흥회와 허다한 운동과 프로그램 등
헌신과 열정이 대단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왜
열심과 열성이 두 번째라면 서러울 한국교회가 이처럼 망가졌을까.
교회는 싸움박질 하는 장소로 오래전에 인식되었고
교인이 정직하다는 말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교회의 모든 직분은 교회 밖 세상과 교회 안에서도 더 이상 존경해야할
대상에서 멀어졌고 존경은커녕 존중과 관계도 없어
교회가 거대하고 화려해진 만큼 그 만큼 초라해 보인다.
왜 그럴까?
시대가 변했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진리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도 그 당시의 문화와 전통을 권력자를 존중하셨다 는 주장의
변명을 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그리스도는 주 시요,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시자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어찌 한 시대의 위정자와 문화와 전통으로 예수님을 구속(拘束)하여
자신의 설익은 지식에 가두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어그러진 모양이라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자신의 명예와 대중적인 명성으로 진리를
가로막을 자들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종당에 그럴 자들이다.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경건으로,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된다.
경건(Godliness),
하나님을 선택(Godliness)할지
자신을 선태(unrighteousness)할지
세상을 선택(ungodliness)할지
선택은,
이제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되느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岐路)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선택을 은혜(Grace)라 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태도와 삶의 응답을 경건이라 하고
그 선택을 또 기회(Second chance)라 고백하면
은혜(Second chance)가 된다.

이끌려 나온 자

 

 성경을 매우 불경스럽고 더러운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죄와 저지른 범죄행위를 곧이곧대로 가감 없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도덕과 인간수양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는 세상종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아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은 과감히 떨치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전력을 다 하여 산으로 도망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렸고 천사의 손에 이끌려 겨우 소돔성을 빠져 나왔고, 산으로 도망하는 대신 천사에게 애걸하여 중간의 작은 성 소알에 들어갔습니다. 덕분에 소알성이 멸망을 면했는지 모르지만 롯이 본 소알성은 소돔과 다를 바 없는 죄악 가득한 성이었던가 봅니다. 롯은 그곳에 임할 심판이 두려워 다시 그곳을 나와 산으로 올라가 두 딸과 함께 굴속에 거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굴속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예 그곳을 은거지로 삼아 주저앉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 굴속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더라면, 그들이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돌아갔더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갔더라면 이런 해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굴에 틀어박혔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정혼한 남편들은 멸망한 소돔성에서 죽었고 그들에게는 후사를 낳을 희망이 없다고 여긴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워 취하게 하고 아버지로 인하여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아이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술만 아니었더라도 노아가 술 취하여 벌거벗었고 그로 인하여 한 아들을 저주하게 된 것처럼 롯이 취하여 이미 소금기둥으로 변한 아내인지 딸인지 분간 못 하여 딸들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족속이 됩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였을 때 모압왕 십볼의 아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발람을 매수합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또한 이 두 족속의 우상들, 곧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은 솔로몬 왕의 왕비와 후궁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산당으로 모셔져 유대땅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됩니다.

 롯은 스스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하여, 천사의 손에 의하여 억지로 이끌어냄을 받은 “억지로 성도”의 모형인지도 모릅니다. 롯이 억지로 이끌려 나왔더라도, 그 때부터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붙좇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양다리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나섰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소알성으로 타협하지도 말고 굴속에 주저앉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때부터 군사요 군병이요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해괴한 일을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을까요? 노아가 술 마시고, 아브라함이 애굽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롯의 두 딸이 모압과 암몬을 낳고....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하와의 선악과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죄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막는다고, 금한다고, 누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막고 억눌러서 죄인이 안 될 수 있었다면, 금하여 의인이 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지 아니하시면 도무지 해결방법이 없는 것이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나온 자, 롯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말씀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용서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이미 사랑하셨고 그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억지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억지로 이끌려 나온 롯들입니다. 죄악의 성으로부터 떠나지 못 하고 머뭇거리다 억지로 이끌려 나와 소알성에 기어들고 굴 속에 머물고 여전히 죄의 열매를 맺기까지 하고 있는 롯들입니다. 그런 나, 그런 죄인을 사랑하사 그 아들의 피로 대속하시고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나를 동역자 삼아 이끌어 가시며 그리스도의 신부, 주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기이한 은혜를 인하여 송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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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미꽃으로

맘을 나누어 보세요

  

 

 

사람의 향기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향기를 품고 태어났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향기가 있는 것이다.
 

향기로운 사람,
함께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멀리 있으면

 늘 그리운 사람,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나는 오늘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청학동 훈장의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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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시장에 파키스탄 출신 버스운전사의 아들인 노동당 후보 사디크 칸(46·사진)의 당선이 확정됐다. 최초의 ‘무슬림 런던시장’이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수도의 수장으로서도 처음이다. 

영국은 지난 5일 런던·리버풀·브리스톨 시장 등과 스코틀랜드·웨일즈·북아일랜드 의회 의원, 잉글랜드 지역의원 등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를 치렀으며, 6일 오전 8시부터 개표를 시작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칸 후보가 오후 5시 기준(현지시간·개표율 90% 이상) 1순위 득표 기준 44%를 얻어 경쟁자인 잭 골드스미스 보수당 후보(1순위 득표율 35%)를 9%포인트 차로 따돌렸다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런던 시장 선거는 1순위 득표를 헤아려 50% 이상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2명의 득표자에 한해 2순위 득표까지 합쳐 당선자를 가린다. 이같은 방식으로 헤아려도 칸 후보는 당선이 확실하다고 영국 언론들은 전했다. 

전임자 켄 리빙스턴(2000~2008년 재직, 노동당)에 이어 두 번째 민선 런던시장이었던 보리스 존슨(2008~2016년 재직, 보수당)은 칸 후보 당선이 확실시되자 “지난 8년간 시장으로 재직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런던에 감사한다”며 시장 직을 내려놓겠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칸 후보 측은 가디언에 그의 당선이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의 승리로 해석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코빈 대표의 ‘강성’ 이미지가 칸 후보에게 덧씌워질까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칸 후보와 골드스미스 후보의 대결은 영국판 ‘금수저 대 흙수저’였다. 보수당 골드스미스 후보는 유태인으로 재벌 가문 출신이다. 12억파운드(약 2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았다. 

반면 노동당 칸 후보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영국으로 건너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버스운전사, 어머니는 재봉사로 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도 청소년기부터 신문을 배달하거나 여름철엔 건축현장에서 일하곤 했다. 

기사 이미지 보기


치과의사가 되려다 교사의 권유로 노스런던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런던 지역의원을 지냈다. 2008년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그를 지방정부 및 커뮤니티 담당 부처의 장관으로 임명했다. 교통부 장관으로도 일했다.

이후 노동당이 집권하지 못해 하원의원으로서 예비내각의 ‘그림자 장관(집권하면 내각에 임명되는 내정자)’ 자격으로 여러 부처를 담당했으며, 지난해 런던 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 위해 그림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론조사에서 무슬림 경쟁자에게 밀린 골드스미스 후보는 “칸 후보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며 그가 인권 변호사 시절 극단주의자를 옹호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런던시 투표 시스템은 후보자가 3명 이상일 경우, 유권자들이 1순위 지지자 외에 2순위 지지자도 적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순위에서 50% 이상 득표자가 있으면 그가 승리하지만, 아무도 50%를 넘지 못하면 상위 2명의 후보에 대한 2순위 득표 수를 헤아려 1순위와 더해서 승부를 낸다. 상위 2명에 들지 못한 나머지 후보에 대한 2순위 득표는 세지 않는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런던 시장 및 런던 지역구 선거 개표상황>

https://www.londonelects.org.uk/im-voter/election-results/live-count-progress-2016?contest=23

 

출처: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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