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거룩한 삶이라는 위대한 목적에 이를 수 있는가?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방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셔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네 가지 자질이 있다. 이런 자질을 다 가지고 있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런 자질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14:31). 모든 어둠의 권세와, 세상과 세상의 유혹들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와 타락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가면서, 악한 세대와 맞서 싸울 영적인 준비가 바로 되었는지 점검하지도 않고 나갈 것인가?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본성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싸우러 나간다. 그 결과, 항상 패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만큼이나 영적인 싸움을 싸울 능력이 없다. 이 말을 믿으라. 우리가 가진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죄와 악에 맞설 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무엇이 필요하다!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셔야 하는 첫 번째 자질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복종할 수 없다. 이성 없는 동물과 같이 본능대로 행동할 수 없다. 죄를 피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내면의 성향이 있어야 한다. 자연적인 상태로라면 우리 마음은 악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로는 죄와 사탄의 종 노릇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미워하는 사람이 그것을 지킬 리 없다! 계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저 그런 관심만 가지고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위대한 계명은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분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방식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그분을 가장 탁월한 분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송이꿀보다 더 달콤해야 한다(19:8).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바라고 목말라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된 정욕을 이겨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고,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5:17, 36:4).

 

참된 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즐겨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지 않고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죄를 미워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청결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딤전1:5). 우리의 마음이 먼저 악한 성향과 더러운 생각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마음이 새롭게 된 다음, 거룩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에서 다뤄야 할 가장 큰 악은 남아 있는 죄이다. 남아 있는 죄로 인해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을 향해 나아간다. 남아 있는 죄에서 모든 실재적인 죄악이 나온다. 죄짓는 것을 멈추고 싶다면 먼저 이런 본성적인 성향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성향을 없애려면 먼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인 갈망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마음의 성향이 없다면 계속 뒤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선한 일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죄를 향한 자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역사를 통해 죄에 종 노릇하는 우리를 풀어 주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거룩으로 회복하신다. 돌과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신다(36:26,27).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12:2). 이런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생명이 가진 경향을 바꾸신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악을 향한 갈망을 선을 향한 갈망으로 바꾸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순종의 원천이다.

 

경건한 삶을 위한 두 번째 자질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구렁이 완전히 채워졌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요 가장 큰 복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케 되었다(4:5-7). 일단 의롭게 되면,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실 구원 역사를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화평케 된 것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으면서,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 진리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진실로 율법에 순종하고 싶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그분의 은총 아래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을 죄책에서 풀어 주사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후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용서는 선행이라는 마차를 끄는 말이다.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자!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생각해 낸 모든 방법을 버리자!

 

거룩한 삶을 위한 세 번째 자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고 영원한 장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안전이다. 영원한 안전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첫째, 천국에서 누릴 복된 장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살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순종은 바로 이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광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순종으로 독려하시는 것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12:2).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은 무수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후4:16-17).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알았기 때문이다(10:34).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도 헛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말한다(고전15:58). 하나님은 영광의 소망을 주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다(6:11-12,요일3:3).

 

셋째, 영원한 하늘의 복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지 깨닫고 이 복락을 확신하는 사람은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일부다. 영생을 확신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과 육체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게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선한 분인지 알수록 하나님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울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향해 타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않다(11:16). 하나님은 사랑의 사슬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이 놀라운 특권과 은택을 우리 앞에 펼져 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가장 위대한 은총 가운데 하나는, 경이롭고 영원한 기업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기업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더욱 사랑하지 못할 사림이 누구인가?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네 번째 자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대로 살기 바라고 또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망뿐 아니라 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습관을 조금 바꾸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될 줄 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로 겸비해진 적이 없는 사람이고,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원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몇 가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나쁜 습관을 만들어 내는 타락하고 죄악된 욕망을 죽이는 것이 진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죄악된 탐심을 충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대신 거룩한 사랑과 거룩한 욕구로 채우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고즐거워진다!

 

우리를 부르사 하게 하신 일을 우리가 바라고 또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혜를 따라 충분한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하시는지 성경은 잘 보여준다.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기 전에,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6:13-14). 그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고 말한다(6:10-11). 요한은 신자들이 이미 강하고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다(요일2:14-15).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독려하신다.

 

-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pp 39-61

 

출처: 청교도 아카데비/강대식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엄마, 새로 산 내 운동화 어딨어요? 엥~! 학교 늦겠는데!” “그건 네가 네 방에 가져다 두던 것 같던데 왜 밖에서 찾느라고 그러냐, 아가, 너무 허둥대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찾아보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평소와는 달리 소리부터 질러대는 어린 딸을 타이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몸이 유난히 허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벌레란 소린 들었지만,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서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새벽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봄, 가을 운동회란 것이 있었고, 이 운동회는 학교의 행사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지역의 큰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 들고 와글와글 학교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경기 종목도 다양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던 즐거운 날이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지만, 그중에서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종목은 단연 ‘줄다리기’였다. 유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유난히 기대되었던 종목은 역시 줄다리기였다. 나는 어떤 종목에서건, 개인기만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그러나, 단체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줄다리기 같은 종목은 축구처럼 고도의 테크닉과 뛰어난 개인기를 요하는 종목도 아니다. 그저 줄을 잘 서, 그날 힘센 아이들이 많은 팀에 잘 배치되기만 하면 함께 승자가 될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할 때, 선생님은, 힘이 세고 건장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나처럼 유약한 소녀들은 맨 꼴지에 세운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도, 물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야 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일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조역일 뿐이다. 아닌 말로 줄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앞에서 힘센 아이들이 잘 해내기만 하면 모두 함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청군 홍군, 혹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고, 모두 자신이 소속된 팀의 칼러를 상징하는 청색 홍색 또는 백색의 예쁜 띠를 하나씩 건네받아 머리에 둘러 표식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은 색깔로 정해지고, 내가 좀 약해도 내가 속한 팀이 강해서 그들이 이겨주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이기는 것이 되니, 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는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 31)”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보면, 내가 어느 팀에 속할 것인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 속할 것인가, 소속팀(?)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상 술어로는 기본 구원론이라고 하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 외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구원론, 여기에 우리(성도)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니 성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회개만 하면 된다,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대는 잘못된 구원관이 오늘날 기독교를 싸구려 구원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한순간에 공로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확실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 구원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로서 삶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ry, prosperity gospel)은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변질 시킨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prosperity gospel) 은 같이 설 수 없다. 하여, 수많은 개혁교 신학자들,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오늘날 이 번영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번영신학을 논하기만 하면, 오순절 교회를 비방한다, 라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 말씀의 떡을 떼며, 내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교단이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한가 다투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좀 더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단은 제외)

진정한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나라에는 '고지론(高地論)' 이 왕성하다고 한다. 이 "고지론(高地論)”이란, 기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오르는 것이 더욱 그 파이를 크게 한다고 하는 지론으로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함으로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더욱 확대하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의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종 질병, 가난, 고통, 그리고 불운 등에 아니 심지어 사회적 현상인 전쟁과 정치에도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않아 당하는 고난이라 주장한다는데 있고, 고지론(高地論), 번영신학의 취약점은, 십자가의 도,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데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고백과 결단,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수하는 신앙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 좁은 길,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될 때, 순교도 가능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prosperity)란, ‘번영’외에도, ‘잘 해내는(doing well), 성공하는(successful),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승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이 prosperous란 단어를 ‘번영’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victo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Victory는 완전한 승리란 뜻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단 한 번의 그 십자가 사건이 완전한 승리(victory)인 것이다! 그러니까, victory가 결과라면, prosperous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기본 구원론( 그리스도가 이루신 (victory)와 삶에서 지속하는 성화론(sanctification), 승리하는 믿음(prosperous faith)은 반드시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고로, 필자는, 번영(prosperity, prosperous)란 단어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뒤바뀐, 잘못 사용되는 (prosperity gospel)이 문제라고 본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육신만을 위해 일을 해 주시느냐?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번영 신학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나쁠게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후 5:7)”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은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도라면,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대개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 아니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사건 은폐를 위해 충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의 이야기 정도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로서 다윗의 신앙과 삶을 부요케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란 것이다. 다윗, 그가 ‘프라스프러스'(prosperous) 신앙의 소유자일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 그 숨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이다!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 속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리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 7-8)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의 저주성 폭언에 대처하는 방법,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doing well)신앙, 성화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인 실패자로 남느냐 갈림길의 시금석을 가르는 놀라운 비밀이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다!

반면,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 감정을 다 풀었노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 위장된 겸손, 자기 실력을 가꾸고 다듬어 빛을 보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할 틈만 노리는 비루한 사울의 편협함, 내 가슴 시리고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형제의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을 다독일 줄 모르는 유아적 사고, 다윗처럼 듬직한 감정으로 대범함을 보이는 대신, 감정처리가 잘 되지 않아 들쑥날쑥, 팔팔끓는 냄비처럼 찼다 더웠다 바글대는 사울의 얄팍함, 성령의 사람답지 못한 이런 한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원수가 저주하는 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단으로부터 오는 사악한 음성이라며 혈기 내고, 비아냥거리고, 한 개 받으면 열 개로 되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당신이 사단이다, 아니다, 네가 사단이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들이기에…

물론, 다윗은 우리네 범인과 다른 점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처량한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맹렬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 왕의 부하 장수 중 하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허락만 하시면 당장에 칼로 쳐죽이겠다고 왕께 간언했다. 그때 다윗 왕의 반응,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너무 허허롭고 너무 멋지다. 그 호기, 그 믿음을 배우고 싶다.

내가 만약, 이웃의 저주성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혹시 실수로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갈 것을 염려하셔서 속히 그 자리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프라스퍼러스(doing well, successful)신앙을 소유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 같은 영적 경기장에서, 나도 승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언제나 꼴찌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나마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말씀의 줄을 맥없이 놓아버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으리만큼 피곤한 때가 너무 잦은 것도 탈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잡고 있는 구원의 밧줄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데, 손바닥이 아프고 쓰리다 하여, 시합 도중에 잡고 있던 줄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탈락자’가 될 것 뿐이다. 내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팀의 소속 요원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던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승리(doing well)해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난 자는 주께서 이루어두신 찬란한 승리(victory)와는 무관한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말세가 가까워져 옴을 볼수록, 더욱더 주께 바싹 붙어 있어야 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주님께 붙어 있는 신앙,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의 힘, 주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12)”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 10)”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의 신앙 칼럼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시련이나 고난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실패와 범죄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을 하기 전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겸허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하였다가 빼앗기는 똑같은 실수를 두 차례나 반복하는 창피스러운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랄 땅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 지중해변 블레셋 지역입니다. 또다시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이곳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도 여럿 있고 이스마엘과 하갈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정한 곳에 집도 없이 장막을 치고 장막을 걷으면서 양과 소들의 뜯을 풀과 마실 물을 따라 계속 이동하는 목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목자의 삶은 양떼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양떼를 이끄는 삶입니다. 나그네의 삶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신 주님도 목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목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삶을 통하여 진정한 목자로 오실 주님의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과 같은 완전한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하지 못 한 아브라함은 그래서 목자의 삶과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흔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99세, 89세 영감,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눈이 삐었는지 89세 할머니인 사라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라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워 보였으면 그랬을까요?
저도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찬양대의 찬양이 천국의 합창 같았고 찬양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모습이 천사들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아비멜렉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아니, 사라는 그 때 정말 젊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이삭을 낳게 하기 위하여 젊은 몸으로 만드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젊고 아름답게 하신 사라를 보고 반하여 아비멜렉이 데려갔으니 하나님이 가만 보고 계실 턱이 없습니다. 그 밤에 당장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혼을 내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만 알고 데려왔고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아베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주고 은 천 개를 따로 주면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내리셨던 진노와 징벌을 푸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힌 바 되면, 우리를 사라처럼 젊고 강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면 창피스럽도록 연약하고 비겁한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악한 자가 손도 못 대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을 우리의 기도에 따라 처치하시고 또 용서하실 것입니다. 실로 저들의 생사화복이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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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을 본받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고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And ye became followers of us, and of the Lord,
having received the word in much affliction,
with joy of the Holy Ghost.
So that ye were ensamples to all that believe
in Macedonia and Achaia. 데살로니가 전서:6-7]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며
그들의 비난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능력을 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그들이 더 큰 권능을 받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더 온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의 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원해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And we beseech you’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애원하노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절히 기도하노니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믿음이 더 성장하여 더 큼 기쁨을 누리고 더 큰 능력을 받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간청했기에
복음을 전한 자들이나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신 성령님의 권능이 그들을 통하여
기쁜 소식인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기쁨으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이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Be perfect, be of good comfort, be of one mind, live in peace;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1-13]
사도바울의 작별인사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저서
가슴을 울리고 흔든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끝으로 형제여 잘 지내길’
farewell, Fare you well,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형제여 잘 있기를.
Be perfect, (성령님으로) 온전하며
be of good comfort, (성령님의)위로를 받으며
be of one mind,(한 성령님 같이) 한 마음으로
live in peace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형제들과 함께 하리니.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서로 거룩한 성령님 안에 한 가족으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성령님과 교제로 모든 성도의 문안이, 모두 같은 형제들과 함께
성령님께서 형제들과 함께 하길.
이를 작별의 인사를 한 사도바울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받은 권능으로 말씀을 받은 기쁨이 있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되어 위로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타난
증인의 삶이기에 그의 작별인사는
세상에서 형제로 또 하늘나라에서 형제로 만날 것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의 죽음마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사랑이
끊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이 구절은 암기하고 연습하여 축도(축복기도)로 사용한다.
축도는 목사가 예배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기도로 이 축도 때
회중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며 축복을 받는 예배의 순서가 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성직자는 하나님과 성도의 중보자가 되어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예복을 입고 축복을 선언하는
개신교에서는 이런 축도가 시작된 것은 중세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많은 개신교에서는 민수기 6:24-26 과 같이 축도로 사용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러나 이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말씀이었기에
현대의 목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과 성도들의 중보자가 아니기에
이 성경구절들을 사용한다면 중보자 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는 이단이 되기에
어느 자들은 고린도후서 13:11-13절을 신약의 유일한
축도의 본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임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고 그 작별의 인사가 세상에서 마지막
인사라 그의 바람의 기도였고 믿음의 확신 이였지 예배를 마치는 축도는 아니었다.
설령 축도라 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있을지어다” 라는  명령인지 분부인지 오만한 말투의 기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들의 기도를 성령님께서 허락하시겠는가.
더 건방진 자들은 “~있기를 원하노라” 라는 당부의 표현을 쓰고도
그 뜻은 당부가 아니라 기원이라 하니 교만도 이런 교만이 없고
이를 듣는 자들마저 ‘아멘’ 이라 화답할 때에는 귀를 막고 싶다.
그러니 가톨릭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한 신분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중보기도’ 와 ‘영성’이라는 가톨릭 냄새가 펄펄 나는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무당이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샤머니즘을 교권주의에 접붙인
이 불경하다 못해 도무지 경건을 모양도 없으며 거룩한 체를 하는 종교 지도자와
선생이 넘치고 이를 추종하는 맹신과 광신자들에게
성경은 단지 그들의 복의 욕구를 채워주는 부적(符籍)같이 장식이라
자동차의 사고를 면해주는 신물(神物)과 같이 자동차에 보관하는 책이 아니라면
책꽂이를 채우는 책이 아니라면 어찌 읽지 않고
읽고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그 뜻과 의미를 자신의 믿음의 고백으로 시인하고
성경으로 이를 확정하는 믿음의 확신이 없으니 이리저리 흔들리고 모임의 분위기에
휩싸여 감성적이 된 대중을 따라 기분의 높낮이가 믿음인양 신앙의 기준이 되면  
사치한 감정을 따라 허울뿐인 신자가 되기에
복음을 뒤로 한 채 구약으로 돌아간 사이비들과 터무니없는 교권(敎權)을
잡은 자들에게 맹종하여 그들과 같이 기복신앙이 되어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여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을 받았더라도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는
허식만 남아 겉모양만 직분자인 맥없는 교인으로 남아 부질없는 열심히 있어
경건을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능력이 없는 교인으로 머문 교인으로 넘치는 교회가
된 오늘날의 현실은 축복에 목멘 공동체가 되어 베풀 움이 사라진
구걸(求乞)의 축복과 자기 자랑만 남은 분수(分數)를 잃어 분별없는
복음이 어그러진 시대라
올바른 복음의 길로 가는 자들이 구박(驅迫)을 받는 시대
이 시대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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