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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과 인천상륙작전 기념일 







*= 라면 이야기 =*
9월 15일은 아주 소중한 날입니다.
나만 아니라 한국사람 모두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적어도 1963년 이후부터는 그렇습니다.
국경일이냐고요?  당연히 아닙니다.

6.25 전쟁에서 북한에 밀리던 한국군과 UN군이 극적인 
북진 기회를 잡은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이자
한국 라면이 첫 선을 보인 날입니다.

라면, 라면이라 ..
한국사람 누구나 먹어봤고, 저마다 추억이 있을 라면은,
정확하게 ‘인스턴트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태어났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 날,
​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배  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봅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온 요즘 젊은 세대는 꿀꿀이 죽을 모릅니다.
나 역시 귀동냥으로 여러 가지 남은 음식을 죽처럼 끓여낸, 
​빈곤시대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전 사장은 고민을 했답니다.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 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 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따기였습니다.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사장도 
돈이 부족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씨를 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집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했답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사장은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 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아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면과 수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제작의 전 공정을 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어렵던 시절, 허기진 배를 채워줬던
‘제2의 쌀’이던 라면은 이젠 ‘인스턴트 식품’이란 이름으로 
구박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6.25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던 인천상륙작전과
국민들의 배를 채워준 라면이 선보인 9월 15일은 풍요로운 오늘,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날입니다. 

~* 옮겨온 글 *~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권하는 권고의 말씀이 아니고
분부이며 명령인 계명이다.
왜 우리에게 꼭 지켜야할 계명으로 주셨을까.
우리를 간절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힘이 나타나시길 바라시기에
능력을 주시기를 원하시기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계명이면서
우리를 향한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確證)이며 근거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악독한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으시며 돌아가시기 까지 한
고귀하고 간절한 사랑 ‘charity’ 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 가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치시고 새 생명을 얻는 소망을 주셨기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간직한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명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안에 함께 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알게 하시는
믿음으로 믿음을 확정케 하시는 믿음을 더 하시려고 능력을 더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분부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
증인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내신다는 말씀은,
성령님께서 계셔서 권능의 힘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성령님의 권능으로 나타나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완성케 하는
복음의 의(義)가 됨은 이것이 경건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가 완벽한 믿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공의를 행하려는
진리로 진실 되고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형제자매의 몸부림의 모습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으려 하는 간절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실천하는 경건을 바라보아
서로가 서로에게 말씀이 능력이 되는 힘이 되어 지치고 힘든 삶과
곤 한 환경에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아 힘을 얻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알게 되어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게 되며
사랑하는 교제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전도가 되기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은혜라
우리의 노력과 행위의 공로(功勞)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charity’ 의 사랑으로 거저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인 복음을 전한 사람과 받은 사람을 통하여
교통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기에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Godliness)한 선택(은혜)에 부르심에
부르심의 합당한 응답의 태도와 실천하는 생활이 경건이며
경건은 권능을 받은 자의 능력이고 더 경건하여 더 큰 능력을 받는,
더 큰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가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 왔기에
세상의 역사는 복음의 위대한 역사이다.
그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신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시라는 말씀인가.
우리를 조금 해코지하는 사람을 용서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시라
하시는가.
그러니 일상의 교제에서도 상대를 경쟁자 내지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지적해 주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으로 단정하여 본인은 선한데
질투와 시기 때문에 고통을 준다고 피해의식에 절은 사람들이 직분을 갖고 있으니
공동체가 조용한 날이 있겠는가.
외관으로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장로 때문에, 목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음모 때문에, 신천지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병이다.
그런 사람들은 뼈아픈 회개의 기도를 해야 성령님께서 치료해 주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다음절에 예수님께서 설명하셨다.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3-36]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자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진정한 축복을 받았기에
이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받은 우리의 은혜라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의 죄인 된 원수를 사랑함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자녀로서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극진한 사랑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닮고 행하려는 경건으로
그 경건으로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더 큰 능력을 받음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케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감화 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을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앙망(仰望)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는 교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된
자의 생활로 마음이 넓어져서,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6:11-12]
속 좁아진 마음에,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화로 지식이 되어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린도후서 6-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는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라 힘(power)이며 경건이고
경건한 자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원수를 능히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린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all things to your remembrance,
whatsoever I have said unto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요한복음 14:26-27]
그리스도 예수님 이름으로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가르침이 가슴에 박혀 잊어버리지 않게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일을 도우시며
세상의 근심과 염려의 순간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가르치시고
이를 위해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여
천국의 평안(Peace)을 너희에게 끼치기 위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 평안을 권능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평안을 누리는 권능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주시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 이며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평안 인 히브리어의 ‘샬롬’ 은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주시는 평강이며 평화라서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참 평안이라 사랑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이며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 평안의 복음이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And your feet sho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 에베소서 6:15]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자.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관습과 사회 윤리에서 살아왔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전한 복음을 받아드렸을 때
얼마나 많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하였겠는가.
그리고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선민이라는 유대인의 핍박을 받았을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굴복하였는가.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동족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그 고난이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이 되었음은
성령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소망의 확신으로 평안을 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신약교회의 모범적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종교지도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왜 사랑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중에 이 한 구절을 뽑아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축도라 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이 어떻게 축도를 가르치신 말씀인가.
오늘날 사이비들의 설교를 자세히 들어보라
말 머리 마다 ‘사랑’ 과 ‘축복’을 반복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은 단지 무조건 적인 복종의 조건이며 분별을 희석(稀釋)시켜 비판을
차단하는 구실이라서
축복, 축복을 반복 말하지만 그 축복도 종교지도자를 향한 무조건 적인 순종이
축복의 조건이라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의(공의)로
예수님의 사랑인 복음을 알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가 축복이라
이미 받은 구원보다 큰 축복은 없다.





감사는 숲을 담는 그릇 감사는 원천을 기억하는 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원천이십니다. 감사하기 위해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을 돌보십시오. 특별히 고난속에 있다면 감사를 선택하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받아 들이고 날마다 천국을 누립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을 기적으로 여깁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해보십시오. 오늘, 당신이 뿌리는 작은 '감사의 씨앗' 하나가 울창한 '감사의 숲'을 이룰 것입니다. 강준민,<감사는 숲을 담는 그릇입니다>토기장이



    우주를 연구한 천문학자들은 우리 우주의 탄생은 138억년 전에 백뱅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신문사의 백성호 기자님께서 한국의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와 인터뷰를 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인터뷰에서 기자님은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요?" 그러자 저명한 천체물리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그렇다면은 빅뱅이라는 출발선을 그만큼 앞당겨야 한다......"



    백성호 기자님은 빅뱅 이전 의문의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자님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님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 1장 1절] 성경구절에서 그 해답을 찿고자 노력을 했다........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이전의 역사이고,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후의 역사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도 요한님은 예수님 제자중에 가장 오래 살면서 기록을 남기신 분이며, 사도 요한님 만큼이나 신약성경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이 있는데 예수님의 13번째 제자 이기도한 사도 바울님이다.



    2000년 전 사도 바울님은 주님의 부활 후에 상황과 전도를 기록한 분이며. 그 사도 바울님이 바라본 우주를 이렇게 간증하고 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그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 후서 12장 1절-4절]



    사도 바울님의 유체이탈과 같은 간증 내용은 논란이 있을 수도 있으나, 사도 바울님이 본 셋째 하늘의 우주 모습은 다중우주와 같은 특이한 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미국의 MIT 물리학과의 막스 테그마크 교수는 관측의 한계인 우주 반지름 420억 광년을 하나의 우주로 구성하여서 수학적으로 다중우주를 연구 했는데, 우리 우주 밖에는 이런 우주가 붙어서 늘어서 있다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교 브라이언 그린 교수는 다양한 다중우주 종류가 9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다양한 다중우주가 실존할 수 있다는 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다중우주를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창조한 인류의 21세기 과학은 슈퍼 컴퓨터로 우주와 다중우주를 만들어 시뮬레이션 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 하였다.





    철학적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하버드 대학교 로버트 노직 교수는 다중우주와 같은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상태는 물리적으로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영국 출생자인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우리가 시뮬리에션된 실제 속에서 살 확률이 이렇게 높다는 결론은 모든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다중우주론이 잘못된 증거라고 주장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은 모든 가능한 우주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받아 들이면, 무수히 많은 우주들 속에는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고도의 기술 문명들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런 기술 문명이 만들어 낸 시뮬레이션 우주들 또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인 우주보다는 우리의 우주 또한 시뮬레이션의 다중우주의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불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런 결론의 다중우주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용 추가중>


    2016년 4월 13일

    펑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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