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살의 쿠바사나이 Yoandri hernandez Garrido라는 이름은그의 24가락때문에 얻은 별명이란다. 그 이름 가운대 아마도 무슨 숫자가 있는듯하다.

 

그는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손가락은 몇개냐고 묻자 12개라고 대답했다가 혼났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손을본 선생님도 그를 칭찬했겠지만...

 

그는 지금 생계를 위해 야자나무에 기어올라 야자따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보다 그의 월수 $20이 문제가 아니라 관광객들하고 사진을 같이 찍어주면 한번에 $10을 번다고 하니 그는 그 자신 자기에게만 내려주신 신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보통사람보다 더 갖고 태어난 여분의 손,발가락이 보물단지라고 말하고 있다.

 

 

 

Yoandri Hernandez Garrido's nickname comes from the six perfectly formed fingers on each of his hands and the six impeccable toes on each foot.

Hernandez is proud of his extra digits and calls them a blessing, saying they set him apart and enable him to make a living by scrambling up palm trees to cut coconuts and posing for photographs in this eastern Cuban city popular with tourists.

Extra digits: Yoandri Hernandez Garrido, 37, known as 'Twenty-Four' shows his 12 fingers in Baracoa, Guantanamo province, Cuba

Extra digits: Yoandri Hernandez Garrido, 37, known as 'Twenty-Four' shows his 12 fingers in Baracoa, Guantanamo province, Cuba

One traveller paid $10 for a picture with him, Hernandez said, a bonanza in a country with an average salary of just $20 a month.

'It's thanks to my 24 digits that I'm able to make a living, because I have no fixed job,' Hernandez said.

 

Known as polydactyly, Hernandez's condition is relatively common, but it's rare for the extra digits to be so perfect.

Anyone who glanced quickly at his hands would be hard-pressed to notice anything different unless they paused and started counting.

Hernandez said that as a boy he was visited by a prominent Cuban orthopaedist who is also one of Fidel Castro's doctors, and he declared that in all his years of travel he had never seen such a case of well-formed polydactyly.

Proud: Hernandez calls his extra digits a blessing, saying they set him apart and enable him to make a living by scrambling up palm trees to cut coconuts and posing for photographs
Proud: Hernandez calls his extra digits a blessing, saying they set him apart and enable him to make a living by scrambling up palm trees to cut coconuts and posing for photographs

Proud: Hernandez calls his extra digits a blessing, saying they set him apart and enable him to make a living by scrambling up palm trees to cut coconuts and posing for photographs

Climbing: 'Twenty-Four' cuts coconuts from a palm tree in Cuba

Climbing: 'Twenty-Four' cuts coconuts from a palm tree in Cuba

'He was very impressed when he saw my fingers,' said Hernandez, who is the only one in his family to be born with extra digits.

In a part of the world where people's physical traits are often the basis for nicknames - even unflattering ones like 'fatty' or 'shorty' - 'veinticuatro' ('twenty-four' in English) is not an insult but rather a term of endearment, and Hernandez, now 37, said his uniqueness has made him a popular guy.

He has a 10-year-old son with a woman who now lives in Havana, and his current girlfriend is expecting his second child.

'Since I was young, I understood that it was a privilege to have 24 digits. Nobody has ever discriminated against me for that,' he said. 'On the contrary, people admire me and I am very proud. I have a million friends, I live well.'

Nevertheless, it occasionally caused confusion growing up.

Special: Known as polydactyly, Hernandez's condition is relatively common, but it's rare for the extra digits to be so perfect

Special: Known as polydactyly, Hernandez's condition is relatively common, but it's rare for the extra digits to be so perfect

'One day when I was in primary school, a teacher asked me how much was five plus five?' Hernandez recalled. 'I was very young, kind of shy, and I didn't say anything. She told me to count how many fingers I had, so I answered, '12!'

'The teacher was a little upset, but it was the truth,' he said.

Hernandez said he hopes he can be an example to children with polydactyly that there's nothing wrong with them.

'I think it's what God commanded,' he said. 'They shouldn't feel bad about anything, because I think it's one of the greatest blessings and they'll be happy in life.'





 기가 막힐 일입니다. 하나님이 백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겁니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 아브라함은 속으로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면 제게 하신 약속은 뭐가 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무를 쪼개어 나귀에 지워가지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두 사환과 함께 떠납니다. “하나님,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시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고 엎드려 심중에 웃던 아브라함이 말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러한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열심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를 쪼개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도끼로 나무를 내리칠 때마다 “탁- 탁- 쫙- 쫙-” 아브라함의 가슴도 피를 튀기며 쪼개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실행에 옮깁니다. 사라에게 말하면 분명히 울고 불고 붙잡고 난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 저는 그러려고 했는데 아내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할 핑계가 생길 것인데 말입니다. 모리아 땅까지 삼일길입니다. 먼 길입니다. 그 먼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민하며 마음의 싸움을 하였을까요? 한국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그 삼일동안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산 아래에서 기다리도록 합니다. 이삭에게 나뭇짐을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올라갑니다. 흡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과 못과 창을 들고 뒤따르는 로마군병의 모습입니다. 산 아래 기다리도록 할 것 같으면 두 사환은 뭣 하러 거기까지 데리고 왔단 말입니까? 나뭇짐을 두 사환에게 운반하게 하면 이삭이 덜 고생스러울 테고 두 사환으로 나무를 쌓게 하면 아브라함이 편할 텐데 말입니다. 아니, 그 보다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하면 그 두 사환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느냐고 덤벼들어 뜯어말려 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을 순종하지 못 하게 할 모든 방해물을 제거해 버립니다. 오직 이삭만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가슴이 찢어지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으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이 말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니 기이한 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내어주실 것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90세 할망구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시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무를 쌓고 이삭을 눕힙니다. 이삭도 그렇지요. 나무 위에 누우라고 한다고 순순히 누웠을까요? 도망치려고 하고 버둥거리며 반항하지는 혹시 않았을까요? 삼일길을 걷고 또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정도면 이삭은 이미 자랄 만큼 자라 늙은 아브라함이 힘으로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랬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순순히 아버지의 명대로 따랐던 것 같습니다. 어린양의 예표이니 양처럼 순하게 말입니다. 성경은 이삭을 순종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이 진짜로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지 않는다면 여태까지의 순종도 다 쇼일 뿐입니다. 참 된 순종은 하나님의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물러선다면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닙니다. 설마 참말로 그러시지는 않겠지,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쇼겠지, 날 시험해 보고 괜히 그러시는 거겠지..., 하고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거짓된 명령, 쇼로 여기고 거기에 맞장구쳐 드리는 쇼를 하는 거짓순종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은 진짜로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들고 이삭의 심장을 내리 찌르려 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다급하게 두 번이나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며 아브라함을 제지하셨습니다.

 참된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목회 소명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에서 온다
 


 

▲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목사에게 믿음의 은사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생활을 하게 한다. 제자직의 소명은 십자가의 소명이다. …… 이것은 특히 목사의 삶에서 분명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신의 소명을 점검해 보라.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이미 ‘성령에 매인 바 된 되어’ 주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갈 수 있는가?(행 20:22) 당신은 모든 것을 선뜻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즐겁게 환란을 당하고 그를 위해 바보가 될 수 있는가?(고전 4:9-13)”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실천신학 교수를 지낸 에드먼드 클라우니(E. Clowney)가 <목회의 소명>이라는 책에서 남긴 말이다. 지난 세기에 그가 했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목회자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맡긴 헌신의 상태에서만 순수한 복음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경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을 오해한다. 목회의 소명은 매우 특별해서 평신도들의 소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다름이 아니라 분량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의 문제다(롬 12:3). 사도 바울의 소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평신도들에게도 이런 소명이 있다. 사도 바울에게 영혼을 돌보는 사명이 주어졌다면 평신도들 중 그 누가 자신은 그 사명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는 평신도들은 물론 그의 부르심을 뒤잇는 목회자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분량의 사명이 주어졌다.

목회의 소명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위탁하고, 복음을 전해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과 성경 진리를 가르쳐 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도록 목양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종사하면 화가 임할 것 같은 신적 강제력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전 9:16). 그런 점에서 목회의 소명은 본질적으로 평신도들의 소명과 다르지 않지만, 특별하다.

목회자의 소명은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신학적 경험을 통해서 현실로 다가온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건이다.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분이라면 다시 살리실 리가 없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만큼 의로운 분이라면 저주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신 21:23, 롬 1:4). 이 두 개의 모순된 명제 사이를 메우는 것이 ‘대속’(代贖)의 교리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의 저주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저주였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신학적 사실을 깨달으면서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경험을 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행 9:5, 15).

목회의 소명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현재적 경험을 통하여 대속의 신학적 의미를 깊이 경험함으로써 주어진다.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있다. 이러한 체험이 없이는 그 누구도 회심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 그 체험의 분량이 평신도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구원 사건을 종자씨로 삼아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 그리고 우주와 역사를 보는 사상이 열리는 신학적 개안(開眼)을 경험해야 한다. 많은 신학생들이 내게 묻는다. “참으로 좋은 목회자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 때 내가 들려주는 대답은 이것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둘째로 죽도록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목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오늘날 ‘목회’(牧會)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회’라는 말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됨으로써 목회 사역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목회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다. 목회는 그리스도가 시키셨고, 그리스도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이며 탁월한 청교도인 월리엄 퍼킨스(W. Perkins)는 그의 책 <설교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이다. 그의 대언을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서 은혜로써 부름을 받고 은혜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오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리하여 백성들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위대한 청교도가 제시하는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명확한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가 맡기신 일이며, 그리스도의 일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신학적 체험에 매이는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고(故) 방지일 목사님께서 어느 선교사집회에서 백세의 노구를 이끌고 오셔서 남긴 한 마디의 설교는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오늘날 설교에는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목사들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피 냄새가 안 나요.”

이것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지적인가. 목회자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냄새가 사라졌다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능력 있고 감동적으로 선포되고,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는 미래 조국교회를 위한 파릇파릇한 모판이다. 성도들이 조국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 본받으며 가는 소명의 길

오늘날 널리 유행하는 말 중에 ‘멘토링’(mentoring)이라는 말이 있다. ‘스승’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멘토’(mentor)로부터 ‘멘티’(mentee) 곧 제자가 폭넓은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목회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그리스도로 묶는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린도 교회의 바울과 성도들과의 관계는 ‘본받음의 관계’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도들은 바울의 인격과 삶에 의해 체화(體化)되어 나타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초대교회의 교부이자 오리겐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T. F. Clemens)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참된 삶의 모본을 보이시고 당신 안에 있는 자들을 훈련하신다. 그리스도는 명령을 내리시고 그것들을 몸소 구체적으로 실천하시는데, 그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명령을 다른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돕게 하기 위함이다.”

목회의 소명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명령하고 그분을 따라 살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회의 소명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이 아직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을 뒤잇는 것이다. 그래서 충성스럽고 유능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일수록 목회자는 잊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기려지기 마련이다.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G. Whitefield)도 말한다. “사람들이 나 휫필드의 이름을 잊게 하라. 오직 그가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억하게 하라.”

목회는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의 섬김이다. 들리는 말씀은 성경과 신학으로써, 보이는 말씀은 인격과 삶으로써 성도들에게 유익을 준다. 목회의 길이 어려운 것은 단지 설교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본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면 싫증을 느끼지 않을 관객이 어디 있겠는가? 성도들은 목회자의 인격과 삶 안에서 끊임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끊임없는 ‘자기 죽음’이 요구된다(빌 1:21).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하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벧전 3:18). 그래서 예수와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하는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 안에서 죽어가고,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살게 하는 새 사람은 부활의 경험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나야 한다. 이처럼 목회자는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자기 깨어진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목회의 길을 걸었던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하)

설교보다 아름다운 삶

기독교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만큼 위대한 지성의 업적을 남긴 인물도 없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절반 가량을 저술한 바울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그만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 없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서양 사상의 바다로 나가는 수문의 역할을 하였다. 칼라마의 주교였던 포시디우스(Possidius of Calama)는 목회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그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던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가운데 보였던 그의 삶의 특징을 어느 정도라도 접해 본 사람들이 그 유익을 누렸을 것입니다.”

참된 목회의 소명의 기원은 목회의 성공이나 비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양떼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다. 그는 십자가 아래서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목회의 길을 간다. 고백해 본다. “하나님, 제가 목회자입니다.” 언젠가 이 고단한 목회 사역을 마치고 눈을 감은 후에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소명을 따라 그리스도를 선포했던 설교자, 그러나 설교보다 삶이 아름답던 사람 여기 잠들다.”

김남준 목사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6550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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