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이 책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전쟁 비망록이다.


전쟁이 발발한 날인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이후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재반격을 시작하는 1951년 2월 15일 상황까지를 다룬 이 일기는, 국가위난의 전시(戰時)에 대통령과 경무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국내외의 중요한 사건과 전쟁상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뉴데일리 김은주 기자) ]


이승만 초대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운데)



[ 6월 25일 ]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나갔다. 10시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 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라며 입속말을 했고, 순간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한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대통령과 나는 군인들을 꼭 우리 아이들(Our boys)이라고 불렀다―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 땅도 되찾겠지.”라며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 정보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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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6일 새벽 3시 ]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 6월 26일 새벽 3시 30분 ]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팅 신이냐,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이야. 나는 안 떠나.”하고 고함을 질렸다.…


그들은 “각하, 여기서 내리십시오. 서울은 이미 빨갱이들 수중에 들어갔습니다.”라며 더 이상의 북상을 만류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계속 서울행을 고집했다. 옆에 있던 이영진 충남지사가 대통령을 부추기는 말을 했다. “한 발짝이라도 서울 가까이 계셔야 민심동요가 적어집니다.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따라서 “자네 말이 옳아. 나 서울 가겠네.”라며 응수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려 했다. 대통령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 7월 2일 ]
오전 11시 30분] 공산군의 탱크는 미군의 공격을 받고도 끄떡 않고 밀려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들의 공산군 탱크에 대한 공포심만 자꾸 눈처럼 불어났다.
 
“정신 상태야, 정신 상태! 멍청한 것들! 우리 아이들이나 경찰에게 그들이 가진 무기와 장비를 주어봐. 이처럼 후퇴하기에 바쁘진 않을 거야.” 대통령은 ‘멍청한 양코장이들’이란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 7월 14일 ]
14일에는 ‘현 전선 고수’라든가 ‘아군 선전’ 등의 판에 박은 듯한 전황보고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서 어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만 왔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내가 이 이상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다”며 대구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대사관에 대한 공식답변은 이러했지만, 실은 미군의 전의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마미,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 것은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미군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나마 싸우지 부산으로 갔다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를 사람들이거든.” 대통령은 낙동강이 우리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지사관저 식당에 앉아 모기에 시살리며 이날 밤을 꼬박 새웠다.…







[ 7월 17일 ]
전투는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기도는 절규였다.








조재천 지사부인이 콩나물에다 파를 넣고 끓여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가져왔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국물을 아꼈다가 대통령에게 권했다. 대통령은 “마미, 당신이나 두고 마실 일이지...”하시더니 단숨에 한 대접을 몽땅 비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내가 앓는 동안 못 적은 일들을 보충해야겠다.



대통령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말고 국군에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 측의 심리전에 당황한 적은 어린아이들이 전단을 줍는 것까지도 총으로 쏘아 감히 어느 누구도 선뜻 전단을 주우려 들지 않았다…






[ 7월 18일 ]
대통령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곳저곳 지사관저로 옮겨 다닐 때마다 예닐곱씩이나 되는 그 댁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고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지사는 복도 많은 사람이야”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런 느낌을 가졌다. 대통령은 이내 내 안색을 살피고는 “대한민국의 청년이 모두 우리 아들이야. 마미는 수없이 많은 아들을 두었으니 할 일이 많아.”하며 위로했다.…






[ 7눨 29일 ]
이날 밤 대통령이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마미, 적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그쪽에 부탁해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손을 꼭 잡은 대통령이 “다시는 망명저우를 만들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과 같이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창밖 멀리 떼 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음이 가슴 저리게 들려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가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픈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격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박힌다. 창틀을 움켜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토을 받아야합니까? 이제 결전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한 명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 8월 3일 ]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라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한국동란 중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라지 않았다.(훗날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대통령은 장례에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라 사정이 빈까지의 여비도 문제였지만, 한시라도 대통령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엄두를 못 냈다)…









[ 8월20일.]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대구 임시관저에 있을 때 두어 번 미8군에서 냉동고기류와 빵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또 시민들은 대통령이 들도록 감자, 옥수수, 계란, 닭 등을 지게에 지고와 두고 가기도 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이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날씨가 더워 고기나 빵 같은 것은 하루만 지나면 상하는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양 씨를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부산 훈련소에 다녀오지. 저 음식들을 갖고 가서 자네 솜씨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게. 음식이 빨리 상하니 비행기로 가지.”


부산 신병훈련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특식을 제공한다는 연락을 받고 군악대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양 씨가 음식을 먼저 챙기기 위해 트랩을 내려섰다. 군악대가 대통령 환영 연주를 시작했다. 언뜻 보아 양 씨는 틀림없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것은 양 씨였다. 그는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군악대는 대통령이 환영에 답하는 줄 알고 더 신이 나서 나팔을 불어댔다. 이 해프닝이 있고난 뒤 대통령은 양 씨를 보면 “자네는 음식 대통령 하게. 앞으로 내 시찰 때는 함께 가서 우리 아이들 음식을 만들어주지.”하며 꼭 수행토록 했다.







[ 9월 12일 ] 아침에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3천 해병을 이끌고 정오에 배로 떠난다고 했다. 울산 쪽 동해안에 12척의 큰 함정들이 대기 중이라는 것이다. 한 달 쯤 전 대구에서 일본으로 훈련 차 떠났던 8천 명의 한국군 장병들도 이번에 돌아와 미군과 함께 상륙작전을 벌이러 간다고 한다. 상륙지점은 목포라는 말도 있다.


저녁 무렵 대구에서 국방장관이 와 대통령에게 청도에 있는 피난민촌을 방문하도록 권했다. 대구와 부산 사이 중간쯤에 있는데 기차를 타고 3시간, 다시 지프로 45분 걸리는 곳이다. 신장관은 또 총공격이 계획됐으나 일본을 덮친 태풍 때문에 연기해야 될듯하다고 보고했다.
밤새 바람이 미친 듯 불어댔다. 도대체 어찌될 것인가. 바람 불거나 비 오는 날이면 공군기들이 적을 공격할 수가 없다.








[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모든 전선에서 총공격이 시작됐다. 날씨가 또 궂다. 가신 줄 알았던 태풍이 다시 횡포를 부린다.


어제 하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고 한다. 공식발표나 보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SCAP(연합군최고사령부) 방송을 들어서 알뿐이다. 인천작전은 해군과 해병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워커 장군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비행기로 지원 폭격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좀 이상하지만, 그게 미 육군과 해군이 이곳에서 작전하는 방식이다.







[ 9월 23일.] 어제 대통령은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사변 이후 처음 회견을 가졌다. 서울탈환을 앞둔 소감을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변했다.


“처음에는 무기가 없어 곤란을 당했으나 이제 서울탈환을 목전에 두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언제나 민주진영은 끝에 가서 승리한다. 그동안 동포들이 화를 당하고, 더욱이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전재민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하루바삐 서울을 탈환하고 정부가 들어가면 앞으로 더욱 우리가 할 일이 많다.








[ 9월 29일 오전 8시 ] 우리는 부산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환송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대통령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조봉암 국회부의장과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도 함께 탔다. 한 시간 반 이상의 비행 후에 우리는 인천 앞바다에 줄지어있는 전함들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은 시종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여러 군데가 파괴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들은 앙상하게 파괴되었고 여기저기 포탄에 맞은 자취가 드러나 보였다.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뒤에 타고 있는 황 비서에게 맥아더 장군에게 수여할 훈장과 훈기를 확인시켰다.


김포비행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가 탈 차는 맥아더 장군이 마련해준 카키색 세단이라고 노블 박사가 가르쳐 주었다. 눈에 익은 몇몇 특파원과 기자들이 대통령의 서울 복귀를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곁에는 워커 장군, 아몬드 장군, 조이 장군 등이 서있었다.
대통령은 비행기트랩을 내린 다음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으로 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 대통령 뒤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나에게 자기 부인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부인은 아주 매력 있는 주부이고, 남편의 지위 때문에 티를 내는 일이 없는 겸손한 아내였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금방 친숙해졌고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전승국 최고사령관의 부인으로서 늘 검소했으며 사치나 낭비를 죄악으로 생각하는 절제 있고 조용한 내조자였다.








[ 10월 15일 ]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일은 정말 어렵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 줄이라도 좋으니 날마다 간단하게 기록하라고 당부했다. 어제는 김광섭 비서가 연락도 없이 늦게 왔다.


대통령은 그에게 시킬 일이 많이 있어서 아침부터 김 비서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시간을 잘 지켜야만 문화인이라고 누구에게나 가르쳐 왔으며,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 비서는 시인이기 때문에 문인기질이 있어서 자유분방한 면이 있지만, 나와는 달리 대통령은 항상 그를 감싸준다.


김 비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의 잘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너그럽지 못한 성미 탓에 나는 부석해진 김 비서의 얼굴과 술 냄새로 “또 술 마시고 늦었구나”하고 바로 직감했다. 대통령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음성으로 늦게 온 이유를 김 비서에게 물어보았다. 김 비서는 납북됐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을 만나 밤새껏 막걸리를 마셨다고 실토했다.


이 말에 화가 풀린 대통령은 “절친한 친구들이 안 끌려가고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으니 반가웠겠구먼. 그래 별다른 소식들은 없었나?”하고 물었다. 김 비서는 많은 문인들이 적 치하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견뎌냈으며, 현재 확인한 바로는 박종화(朴鍾和), 김동리(金東里), 유치진(柳致眞), 방기환(方基煥), 오종식(吳宗植), 양주동(梁柱東) 씨 등이 무사하다고 보고해서 대통령이 무척 기뻐했다.









[ 10월 30일 ] 대통령이 평양을 무사히 다녀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반 경무대를 출발하여 8시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평양으로 향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김광섭 비서, 김장흥 총경, 이선근 대령 등이 수행했으며, 공군의 김정렬(金貞烈) 장군이 경호비행을 했다. 동행하지 못한 나는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죄며 기다렸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태극기를 든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정일권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 11월 28일 ]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전문을 보냈다.


「본 사령부는 능력범위 내에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였으나 지금은 그 통제와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음.」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 특별회합을 소집했다. 이 회합에서 애치슨 장관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야할 것” 이라고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기자단과의 주례회견 석상에서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3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원자탄 투하 여부의 결정을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맡겼다”고 한 뒤 “유엔군이 한국 국경을 넘어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 문제는 유엔이 결정할 것이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달려온 영국수상 애틀리와의 회담 뒤에 트루먼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 12월 24일 ] 내일이 크리스마스여서 우리는 예배를 보러 오전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는 예배당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너무나 쓸쓸하고 황량하며 난롯불 하나 없이 썰렁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운 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으로 꼽아 약 20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다. 목회를 인도할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 한사람이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신도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교인들이나 대통령은 함께 예배를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였다. 그 신도는 성경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와도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이 예배는 지금껏 우리가 참석해온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기억에 새겨질 만큼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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