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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은 400 세겔이나 지불하면서까지

광야....,
인생은 광야, 광야 같은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서 광야를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65세에 남편 아브라함을 따라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 127세에 죽을 때까지 광야를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175세에 죽을 때까지 10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가나안도 지옥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광야도 천국입니다.
당시 중동지방의 장례풍습은 시신을 세마포 같은 천으로 싸서 굴속에다 넣어두는 것입니다. 시신에다 향료를 바르고 방부제를 넣기도 합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나 요셉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공적인 산과 굴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피라미드입니다. 왜 굴 속에다 장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바라고 또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찾아와서 화친을 하였고,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심고 브엘세바에서 수십년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소유한 땅이 없었습니다. 평생을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목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서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사려고 합니다. 그러자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돈을 내거나 땅을 살 필요 없이 헷 족속의 묘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사라를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은 400 세겔을 에브론에게 지불하고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 포함된 밭을 삽니다. 은 400세겔이면 4.1 킬로그램 정도 됩니다. 약 1,200돈(120냥)입니다. 인터넷으로 은 시세를 찾아보니 한 돈(3.75 그램)에 2,550원이더군요. 1,200돈이면 300만원 가량이 됩니다. 금값은 18만 8000원이나 되네요. 금과 은의 값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요즈음은 은이 별로 귀한 금속이 아니라 값이 싸지만 그 당시에는 은이 금이나 다름 없이 귀했고 비쌌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은 400 세겔은 300만원이 아니라 3,000만원, 3억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밭을 은 17세겔로 샀으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굳이 그 많은 돈을 지불하고 헷 족속의 땅을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은 다음 사라를 거기다 장사하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우상을 섬기는 그들과 함께 나란히 장사되어 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내 아내도 그들의 땅에, 그들의 묘실에 절대로 함께 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나라에 장사하겠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눕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며 부활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죽습니다. 다 떠납니다. 그러나 소망 없이 땅에 묻히는 인간이 있고 영원한 소망을 안고 하나님 나라에 묻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망 때문에 믿음 때문에 400 세겔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기어이 땅을 사서 죽은 아내를 장사하는 아브라함이 그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시민이요 이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100년이나 광야의 삶, 나그네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광야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살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누울 것입니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디모데, 실라를 데살로니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그들의 수고와 함께한 성령의 역사로 세워졌고 그들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전도를 하기 전,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여
그들이 빌립보로 향하기 이전에 바울은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마게도냐(지금의 그리스)의 빌립보로 향하여 빌립보가 유럽 전도의 기지가 되었다.
그들이 빌립보에 이르러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성령님께서 루디아라의 마음을 열어
바울을 말을 따르게 하여 그 집에 머물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의 처소를 찾아 가다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큰 수익을 주는 여종의 주인은
수익이 끝이게 되어 바울과 실라를 관리에게 끌고 가 엄청난 소란을 피운 유대인으로
로마 사람들이 행하지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하여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깊은 옥에 발에 족쇄를 채워 갇히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였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의 터가 흔들리고
문이 다 열리여, 간수는 자다 깨어 옥문들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려 하나,
바울이 소리 질러 우리가 여기에 있다 하니 간수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고 세례를 주었다.
그 밤에 그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음식을 주었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뻐하였지만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도망을 치듯이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시작된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1-2]
그들이 마케도냐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서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데살로니가라는 이름은 BC 315년 알렉산더 대왕 사후 헬라를 다스리던
카산더(Cassander, BC 338-297)가 인접한 도시들을 새로운 도시로 건설하고
그의 아내였던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누이)
이름을 따서 붙였고 1430년 십자군에 의해 터키의 영토가 되었다 1913년
그리스의 영토가 되어 예전과 같이 아테네에 이어 그리스의 제2의 도시가 되었고
그 당시에는 다수의 유태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곳에 유태인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자기가 행하던 대로 세 안식일을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세워진 교회이기에 어느 신학자는 ‘세 안식일’을
여러 달 동안 머물며 세 번의 안식일에 말씀을 전했다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세 안식일’ 이라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주장하지만
어찌되었든 짧은 시간에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서신은 바울이 주 저자로 데살로니가를 떠나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초신 자들이라서 떠난 후에 염려하고 궁금하여
디모데를 보냈고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지만
문제점도 있었기에 그들의 믿음에 감사하고 재림과 죽음의 문제 등을
설명하고 권고하려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 전서 5장과 후서 3장으로
총 8장의 짧은 서신으로 첫 신약 성경으로 쓰여 졌고
이 짧은 서신이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되는 신학적인 요약된 글이라 읽을 때 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고 어떻게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한 서신이 성경이 되게
인도하셨는지 감탄하게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늘 전도를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지만 유대교를 배도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강론하였기에 유대인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잡았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복음을 받아 드리는 성과도 있었고
그러나 위급하여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급히 베뢰아로 보냈고 그들은 배척하는 유대인의 회당에 또 들어갔고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베뢰아에서 전하는
줄 알고 거기로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하기에
그 곳의 형제들이 바울을 바다까지 가게 보내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게 되고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

다시 보면 바울과 디모데 실라를 인도하시 성령님이시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핍박을 받을 때 마다 피할 길을 내시는 성령님은
바울 혼자 복음을 전하게 아니하시고 믿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실라를
함께 일하게 하셨기에 그들의 교제와 복음의 전함에 권능을 주셨음은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 그 곳에, 그들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 중간에 계신다 함은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권능을 주신다는 말씀이라
이것이 진정한 교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인 그곳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22]
그곳에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교를 배반한 그들에게
적대적인 유대인 회당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장소로 늘
이용하였고 그들이 핍박 중에도 평안을 누리며
핍박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알기에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복음 15:21]
그들을 긍휼이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또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6]
그들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일에 쓰임을 받고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져서 세상의 가치관이 복음의 의인
하나님의 공의로 변화되기를 바라기에 특히 데살로니가서는 바울 개인이
아니라 디모데와 실라와 같이 저자로 기록되어 있고(1:1절)
그래서 데살로니가 편지에는 바울을 ‘나’ 라는 일인칭 단수가 아이라
‘우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옴은
'불의' 는 동역 자들 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배도(背道)는
사이비나 이단 뿐 만 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는 행위가 불의(不義)이며
그것이 배도이다.

따라서 이곳의 사이버공간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가 아니라
반쪽뿐인 사이버공간에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하여 여러 아이디로 댓글을
쓰는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보아 왔고 더하여 한 댓글에 여러 아이디의 쪽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것은 교제가 아니라 동기가 미움과 시기라 불의 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제를 기대 할 수도 없다.

더 하여 영상화면으로 설교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기로는 오래전에 조용기 목사가 시작하더니 분가한 교회에서 따라하고
이제는 어느 뉴욕 뉴저지 교회에서도 영상설교로 예배를 본다.
이 설교자들은 교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라
진정한 예배 자가 아니며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 중보자가 되었기에
늘 ‘축복’ 타령의 설교로 유혹하고 ‘복’을 주는 사람들이라
예배 자가 한분의 성령님처럼 하나가 될 수 도 없어
서로 사랑함으로 교통케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이 불통이 되며
따라서 듣는 청중도 예수님의 중보자이심을 부인하는 꼴이라
이들의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맹신자 이거나 광신자라
성령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라 불의한 자이며 배도 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2]
연약한 우리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지만
성령님을 거역하면, 성령님이 교통하시는 교제를 막으면
이 세상에서도 성령님께 주시는 권능을 받지 못해, 분별력을 갖추지 못해
경건의 모습을 갖추지 못해 능력을 받지 못하기에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심판을 받는 다는 말씀이다.
생각해 보라.
영상예배라니,
과학이 발달된 미래의 배교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설교자를 눈감아 주는 목사들과 교계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불의한 시대라 아니 할 수 있으며
그들이 진정 교제의 의를 알고 있는지 한심함을 넘어 통탄할 노릇이고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직업이 종교인 인 그리스도의 도를 파는 자들이다.

믿음은
믿음의 교제로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선을 알게 하시고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That the communication of thy faith may become effectual by the acknowledging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in Christ Jesus.  빌레몬서 1:6]
'acknowledge' 로
우리의 믿음의 시인과 고백이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믿음이 자라서 장성한 사람이 되면
그 믿음이 ‘나’를 넘어 ‘우리’를 바라보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가 실현(實現)되는 소망의 실체를 바라보는 능력,
성령님께 인정받고 능력을 받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믿음의 교제에서 받는 능력임을 알아
‘acknowledging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에 이르는 역사는
acknowledging, 진행 중이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떠나서는,
예수님의 사랑 ‘charity’을 떠나서는
그 거룩한 사랑의 능력(power of charity)을 가질 수 없을 뿐더러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거역하기에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거짓 아이디로 는 교제가 될 수 없고
영상예배라는 불의와 배교에서 떠나라는 말씀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잘것없고 힘없는 작은 자 중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자는 예수님의 제자라
이 세상에서 힘주시고
저 세상에서 기억하신다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And whosoever shall give to drink unto one of these little ones a cup of cold water
only in the name of a disciple, verily I say unto you,
he shall in no wise lose his reward.  마태복음 10:42]





(사)한국교회언론회

   
▲ 유만석 목사
(사)한국교회언론회 대표

지난 2일 대부도 토막살인 사건의 진상이 경찰에 의하여 밝혀지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경제는 “대부도 토막살인 배경엔 동성애…조성호, 동거男에 성관계 대가 못 받자 살해”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 씨는 피해자 최모(40)씨에게 성관계 대가로 받기로 했던 90만원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몸 파는 놈이" 등의 욕을 듣고 격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보도했다. 동성애의 현주소다.

 

용기 있는 몇몇 언론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단순한 동거가 아닌 동성애자들의 성매매 관계로 보도했지만, 대부분 언론은 이를 단순한 성매매 화대 사건으로 보도했다. 한국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 제8장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경우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다. 대부분 언론들은 강제규정이 아닌 나쁜 규정을 동성애 문제에 관한 만큼은 엄격하게 지키기로 한 것 같다. 언론들의 이와 같은 2중적 보도 행태가 우리 사회의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덮어버리고, 오히려 미화시킴으로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이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히려 혐오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현주소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강력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져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역풍을 맞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 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 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매년마다 맞대응을 언제 까지 할 것인가?

 

오히려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외집회가 한국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 동성애 조장과 동성애 등 독소조항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저지운동과 대응방향을 과감하게 바꿀 것을 제안한다.

 

첫째, 이제 외부집회는 시민단체인 NGO가 중심이 되어 NGO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함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NGO를 적극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학부형이 중심이 된 어머니 단체들의 집중 육성이 절실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이름으로는 교회당에서 기도회로 모여야 한다. 교계지도자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계지도자들은 NGO시민운동의 방향성만 제시하고 시민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둘째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언론들에게 적극적인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체를 알려야 하며, 이것이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알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민세금 부담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 언론들을 깨우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미 이를 위해 모 단체에서 각 언론사 기자와 피디들을 대상으로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상을 알리는 책자를 배포하여 그 효과를 얻고 있다. 언론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언론들에게 적극 다가야 할 것이다. 외부집회에 쏟아 붓는 재정이면 언론들을 깨우는데 상당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의 슬로건은 ‘동성애 반대운동’이 아니라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한 것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동성애에 대해선 무관심하지만, 동성애 조장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반대 여론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육부, 교육청 공직자들과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교 교수들을 깨워야 한다. 학생들을 바로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진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만 따라 인권문제로만 다가가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교육자들도 진실을 알게 되면 학생들의 장래를 망치는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정부와 국회를 깨우는 일에 손을 놓고 있었다. 1,0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에 정부와 국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와 국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전략적 실수다.

 

여섯째, 대학생들과 군 장병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군부대 내의 동성 간 성추행, 성폭력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드러난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수면하의 심각성은 덮어진 상태라고 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국가인권위와 진보인권단체들은 군형법 92조6을 폐지시키기 위하여 줄기차게 위헌소송 제기를 해오고 있다. 군 당국에 동성애와 에이즈는 인권문제가 아닌 것을 깨우쳐야 한다. 국군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국가안보의 문제요, 우리 장병들의 건강과 장래에 관한 심각한 문제임을 깨워야 한다. 대학교마다 동성애 동아리가 갑질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모 단체에서 이를 깨우기 위해 엄청난 전단지와 배포와 현수막 걸기, 대학교 기도회를 갖고 있다.

 

일곱째,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를 깨워야 한다. 지금 극장가에서는 ‘아가씨’라는 노골적인 여성동성애 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다. 예술계에 만연된 동성애에 대한 잘 못된 인식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깨우쳐야 한다. 드라마나 일본만화를 통한 동성애에 대한 환상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11일이면, 서울광장에서 동성애자들의 퀴어문화를 가장한 광란이 펼쳐질 것이다. 이제는 불쾌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반대만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장기적인 전략으로 국민과 언론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전 방위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위해서,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며, 돌출된 행동을 피하고, 심사숙고하여 전략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미국에서 동성애 혐오방지법이 만들어지고, 동성 간 결혼이 합법화가 된 것은 일순간에 된 것이 아니다. 반세기 이상이 걸렸다. 미 국민의 동성애 지지가 50% 이하일 때는 동성애운동이 힘을 얻지 못했다. 국민의 지지가 50%를 넘어서면서 동성애 혐오방지법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작년 6월 26일에는 연방대법원의 동성 간 결혼 합법화 판결을 이끌어 냈다. 미국교회가 동성애와 에이즈 문제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깨우지 못하고 반대만 해온 사이에 국민들의 과반수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되어버렸다.

 

거리에서 벌이는 퀴어 반대 집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성애를 포함한 “차별금지법”을 근본적으로 막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수년 전 동성애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의식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처와 대응 방법과 방향도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백년 이상을 동성애를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저지해야 하는 한국교회 입장에서 이젠 장기적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과 언론을 깨워야 한다. 정부와 국회를 깨우고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깨워야 한다. ( 논평 원문 보기 )

 

 

출처: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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