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는 담임목사가 하는 게 정상이다"

축도, 하나님의 복 선포에 관하여

 

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에는 순서와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과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표기한 “주보”가 필요한 데, 이 주보의 순서와 내용은 일개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가 그냥 만든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인 예배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올려 드릴 수 있는가?”를 고심하며,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모로 심사숙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즉 예배학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보를 사용함은 오늘날 모든 교회의 예배 예전에 하나의 지침과  표준(standard)이 되어온 것으로서, 모든 교회의 하나의 전통이 되어온 것입니다. 이런 전통을 따라 올려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소위 “Traditional  Worship 혹은 Classic Worship”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배의 순서를 기재한 주보에는 언제나 1) 오르간 전주 2) 예배의 부름 3) 기원(Invocation) 4) 찬양과 경배의 찬송 5) 고백의 기도 6)영광송 7) 목회기도(pastoral prayer, or prayer of intercession) 8) 말씀 봉독 9) 성가대의 찬양 10) 설교 전 기도 11) 설교(preaching), 12) 감사와 응답의 찬송 12) 봉헌 13) 봉헌 기도 14) Benediction (축도,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선포) …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배학 개론)

여기서 위에 열거한 예배의 내용인 1) 부터 14) 까지의 모든 것을 다(all) 다룰 수는 없습니다. “Benediction, 축도”에 대해서만 다룬다면 이에 대한 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참고로 혹시 저의 부족함이 있다면 양해와 지적을 바랍니다.

축도(Benediction)란 무엇인가?

주보 마지막 순서인 축도(Benediction)는 예배를 집례한 목회자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담임목사의 염원과 바램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가 담임목사의 바램 보다도 더 우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배에 초청하였기에, 이제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차츰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복의 선포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 뿐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일군, 심부름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Benediction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의 선포” 혹은 “복의 선언”이지, 축복을 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 원합니다”가 아닌 “... 있을 지어다” 입니다. 

“… 있을 지어다”가 맞습니다.

주보에 Benediction을 “축도(祝禱)”라고 표기하였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축도(祝禱)”를 한자어 뜻대로 보면 “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Benediction이란 순서를 넣은 예배학자들의 정신과 그 의도를 볼 때, 축도가 아닌 복이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복의 선포”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언”이 맞습니다. 따라서 “축도”란 단어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포”등으로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혹은 여기에 맞는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만 할 것입니다.

 

축도의 유래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선포, 하나님의 복의 선언”인 Benediction은 성경에 기인합니다.

주보를 만든 예배신학자들은 Benediction의 그 기원을 민수기 6:22-27와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 찾았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다른 서신에서도 찾았습니다.

(참고: 롬 15:13절. 히13:20,21,25절. 유다서 24절. 벧전 5:14절. 요한삼서15절)

구약 성경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아론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시기를 기도가 아닌 “복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는 주체가 아론이 아닌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6:22-27절에는 아론 제사장이 복의 선포를 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 6:22-2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의 선포를 정확히 이해한 사도 바울은 성 삼위 하나님의 기능을 구약시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였기에, 성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를 고후13:13절에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예배학 개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처럼 아론 제사장과 사도 바울은 “원하노라” 혹은 “있을지어다”는 말로서 “복의 선포(Benediction)”를 했던 것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

민수기 6:22-27절을 볼 때,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포, 복의 선언)의 창시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에 아론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대로 순종하여 “원하노라”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론 제사장의 복의 선포의 개념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사도 바울 역시 “있을지어다”고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Benediction 이란 “축원 드리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지어다” 혹은 “원하노라”가 맞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 지어다”인 복의 선포/선언이 맞습니다.

Benediction을 할 때, 목사님들이 사도 바울의 선포인 고후13:13절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고후13:13절의 말씀 보다 더 좋은 “복의 선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고후13:13절 말씀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능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고후 13:13절에는 복을 주시는 주체인 성 삼위 하나님이 들어있고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을 선포하는 강력한 Powerful 메시지  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학 시간에 어느 교수께선 아론 제사장의 선포인 민수기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Benediction(축도)가 담임목사의 마지막 폐회인사이기도 하고, 성도들 가정에 복이 있기를 바라는 담임목사의 축도(빌어주는 기도)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Benediction에는 목회자가 아닌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는 더 놀라운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절)  

주보에는 하나님과 성도의 반응이 계속 교차된다

사실, 예배(Worship)는 우리가 올려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예배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보를 만든 신학자들은 주보를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 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가 교차되어 계속 반복되는 모습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낭독, 여기에 대한 성도의 찬양이나 회개기도 등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주의 종이 대신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응답하여 예배를 올려 드렸다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무엇인가를 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부르심에 응답한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선 Benediction을 통해, Benediction을 감당하는 당신의 일꾼(종)인 목회자를 통해, 당신의 복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바로 Benediction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언)을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요, 매개체이며,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심부름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도하는 자의 구비 조건

Benediction을 하는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목회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도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마치 자기가 복을 주는 것처럼 하면, Benediction의 정신에 어긋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목사가 들어 앉는 교만과 우를 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배학 책은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목회 현장을 보면 많은 목사들이 복을 선언하고 빌어주는 행위를 상품화 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마저 탈선하는 사례를 본다. 그러나 곧 초라한 인간의 정체는 밝혀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마는 것을 우리는 엄숙히 기억해야 한다.”(예배학 개론)

또 이렇게도 지적합니다. “목사는 여기 저기에서 축도를 남발하는 습관적 태도를 삼가하고, 정중한 Benediction으로서 그 진지성을 지속해야 한다.”(예배학개론)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목회자와 위임 받은 다른 사역자도 가능하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 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 되어져야 한다.” 또한 “Benediction 을 선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 받고,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목사들”이라고 규정합니다.(예배학개론)

물론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도 Benediction을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반드시 담임목사의 허락과 승락, 그리고 위임이 있을 때에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님이 출장으로 교회를 비울 때,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이 담임목사를 대신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을 경우입니다. 이 때 담임목사의 승락/위임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만약 담임목사님의 승락이 없었다면 주기도문이나 기도로 대체해도 될 것입니다.

축도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것

아마도 예배학자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그 근거를 레위기 9:22절에서 찾았을 것입니다.(성경대백과사전)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위기 9:22)  

그러므로 축도를 행하는 목회자는 아론 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축도를 겸손히 한다고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 “원하옵나이다 혹은 축원합니다”로 마치는 분이 있는 데, 축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르기에 오히려 아론처럼 당당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학개론은 축도(Benediction) 할 때 조심할 2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여 축복하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높은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달라는 뜻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인식을 계속하면서 거기에 맞는 어휘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Benediction의 끝맺음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고 함은 “하나님이 주실 복을 선언하지 않은 기도이기 때문에 목사는 여기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복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반적 기도와 복을 선언하는 목사의 benediction과는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예배학 개론)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Benediction은 단순한 기도라기 보다 하나님이 내려주실 것을 선언하는 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 (예배학개론)

“축도 (Benediction)의 근본 취지는 결코 오늘의 육적인 삶에 풍요한 물질적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Benediction 의 참 목적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에 나아가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명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한 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요즈음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의 위탁(charge)”이라는 순서를 마련하여 새로운 사명의 부여를 강조한 후에 Benediction을 하는 예가 많이 있다”(예배학개론)  

마치면서

따라서 “축도권”이란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축도권”이란 말은 사이비 혹은 무지한 사람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만든 잘못된 용어입니다. 축복권도 마찬가지 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축도”란 용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에 적합한 용어를 찾아야만 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축도 즉 빌어주는 기도””라고 하였기에 오해와 착각이 많습니다.

예배에 부른 이는 하나님이시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기에, 더불어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이 담임목사에게 있기에, 담임목사가 축도(Benediction)를 하는 것이 타당하며, 담임목사의 허락이나 위임을 받은 다른 사역자도 능히 축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서적: 예배학개론(정장복 저. Page 150-152, 1997), 성경대백과사전(정인찬 편)  

김한길 목사 / 미 남침례 한인 총회, 세계 한인 기독교 이단대책 연합회 위원

김한길  josephk999@gmail.com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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