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천지와 이만희의 교리 비판’을 집필하여 <교회와신앙>에 10회에 걸쳐 기고했던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이자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인 김홍기 목사의 ‘지방교회(위트니스 리) 교리 비판’을 연재한다. 정당한 반론이 있다면 김홍기 목사의 글이 연재 형식인 만큼 10회분 단위가 게재된 후에 수용할 방침이다. 만일 반론이 편집상 연재 형태를 띠어야 할 정도의 분량(A4 용지 10쪽 이상)일 경우에는 <교회와신앙> 대표메일(webmaster@amennews.com)을 통한 사전 협의가 필수이다. 김홍기 목사는 최근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christiantoday.us)를 통해 지방교회 측과 지상토론을 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


김홍기 목사 /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사실을 웅변해 준다.

“자신들을 ‘이단’이라 칭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을 상대로 고소 협박을 하는 (실제로 고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지방교회(LC)는 자신들과 관련하여 ‘이단’이라는 단어를 철회하도록 많은 단체들을 강요하는 일에 성공적이었다. ... 가장 최근에 그들은 <이단과 새 종교들에 관한 백과사전>에 있는 언급을 문제 삼아 존 앵커버그와 존 앨던 및 그들의 출판사(Harvest House)를 상대로 1억 3천 6백만 불에 이르는 피해 보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이 소송이 성공했더라면 두 기관 모두 파산했을 것이다. 페멘트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했다.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의 협박을 한 횟수를 모두 합해도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소송을 일으킨 것처럼] 그렇게 많은 소송을 제기했을지 의문이다.”(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p.1)

지방교회가 미국의 교계 안에서 유명해진 것은 이와 같은 공격적인 소송 및 소송 협박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방교회의 제 2인자인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본거지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1905-1997)는 지방교회의 창시자인 워치만 니(1903-1972)의 수제자였는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에 의해 대만으로 파송되어(1949) 사역을 하다가, 1962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사역지를 옮겨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위트니스 리가 타고난 논쟁가(controversialist)라는 사실이다. 그의 말과 사상은 종종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며 난폭하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의 말을 하나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개혁교회는 ... 다양한 이름으로 자신을 교파화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은 배교이다. 주님의 이름 외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교회를 교파로 나누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A Defense of the Gospel: Responses to an Open letter from “Christian Scholars and Ministry Leaders” (2), p.98)

이 말에 나타난 교파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생각은 분명히 균형을 잃은 극단적인 것이고, 교파를 ‘배교’나 ‘영적 음행’과 같은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정죄하는 표현 또한 자극적이고 난폭하다.

위트니스 리는 또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 이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내가 나의 사역에서 기독교에 관하여 담대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잃어버린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p.588)

논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잃고 기름부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심각한 동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생각을 공격적으로 전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논쟁가이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논쟁가로서의 특징이 지방교회를 논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 교계의 주목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위트니스 리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제자들의 삶을 통해 지금도 끊임없이 논쟁을 유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방교회가 미국의 교계에서 유명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는다면 그것은 지방교회의 독특하고 논쟁적이며 이단적인 교리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리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교리(양태론). 둘째, 인간의 본성에 관한 교리(신인합일론). 셋째,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교파들의 합법성에 관한 교리(배타적 교회론).

여기서 필자는 세 가지 교리들 중 첫 번째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교리에 집중할 것이다.

2007년, 지방교회의 지속되는 소송과 소송 위협 및 교리적 문제에 대처하여 미국을 비롯한 7개국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70여 명의 지도자들이 지방교회에 공개 항의서를 보낸다. 공개 항의서의 서명자들은 이렇게 이 문서 작성의 취지를 밝힌다.

“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설립된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스와 ‘지방교회’(주의 회복으로도 알려짐)는 수십 년간 유명한 그리스도인 단체들 및 지도자들과 법적, 신학적 논쟁에 말려들어 왔다. 이러한 소송과 갈등의 역사를 고려하여, 우리는 이러한 공개적인 호소를 하기 위해 서명을 했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부정하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스와 ‘지방교회’가 이러한 선언들과 이와 유사한 선언들을 부정하고 출판을 중단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

이 공개항의서는4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의 항목에 따라 문제가 되는 위트니스 리의 몇몇 주장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 중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기술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쳐졌을 때(joined with us),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신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도 보좌에 남아 계시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An open letter에서 인용됨)

여기 위트니스 리의 진술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은 사실상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준(準)삼신론자들’로 비난하는 위와 같은 주장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할 때, 나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p.82-3)

따라서 위트니스 리의 도발적인 주장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통교리에 대한 공격인 것이며,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그의 계획된 공격은 자신의 신학적 확신에 기초한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위트니스 리와 그의 제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교리적 관점에 의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는 “전통적인 생각” 다시 말하면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그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164)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비판은 그가 창안한 ‘삼일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은 삼일 하나님이 당신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있는가? 신약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엡 4:6; 골 1:27; 요 14:17).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우리 안에 그저 한 분(just One)이 계심을 인식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한 분(One)이 삼일 하나님이시다.”(Witness Lee, God, Christ, and the Spirit (1), p.32)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 개념을 또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the Three of the Godhead)의 공존(coexistence)과 상호내재(coinherence)를 믿는다. 즉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본질적으로(essentially) 동시에(at the same time) 같은 조건들 아래서(under the same conditions) 존재하심을 믿는다.”(Ibid., p.30)

그러면 공존과 상호내재는 어떻게다른가? 위트니스 리의 말은 이러하다.

“공존과 상호내재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존은 함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상호내재는 서로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서로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Ibid., p. 240)

결국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의 개념, 달리 말하면 그 자신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에 근거하여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준(準)삼신론자’로 규정한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 ...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164)라고 말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론’으로 볼 때, ‘준(準)삼신론’에 속한다.

게다가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에 의하면, 주후 4세기 이후 정통교리로 확정되어 현재까지 천 칠백 년 이상 정통교회가 고수해 온 ‘정통 삼위일체론’은 참된 정통 교리가 될 수 없다. 지방교회의 이러한 독선적인 주장은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통상적으로 인정되어 온 정통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영원히 구별되는 삼위로 계시며, 동일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쟁점은 충분조건에 해당되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있다.”(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또한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에 의하면 정통신학의 보루인 노먼 가이슬러에 의해 정확하게 대변된 정통 삼위일체론은 “사람이 만든 신학(man-made theology)”(Brothers, Hear Our Defense: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p.79)이며, 신적인 삼위일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공식(overly simplistic formulation of the Divine Trinity)”(Ibid., p.85)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주장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정통 삼위일체론은 ‘준(準)삼신론’도 아니고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도 아니며, “사람이 만든 신학”이나 “신적인 삼위일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공식”도 아니다.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이런 표현들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희석된 용어들일 뿐이다. 실제로 지방교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신론자들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다!’

이러한 분석의 객관적 타당성은 지방교회가 써놓은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을 보면 쉽게 입증된다. 지방교회의 글을 보면 “거의 삼신론과 같다”는 주장이 ‘다신론이다’ 혹은 ‘삼신론이다’라는 주장으로 확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인규 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이라는 글에서 지방교회는 이인규 권사를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즉 지방교회에 의하면 ‘분리된 세 위격들’은 ‘다신론’ 혹은 ‘삼신론’인 것이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한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교리는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 실제로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를 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상호내재론’에 기초하여 “신약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엡 4:6; 골 1:27; 요 14:17).”(Witness Lee, God, Christ, and the Spirit (1), p.32)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믿지 않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을 주장하는 ‘준(準)삼신론,’ 실제로는 ‘삼신론자’로 정죄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삼신론자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인정하는지 여부”(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골 1:2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 목사는 지방교회의 기준으로 볼 때 영락없는 삼신론자인 것이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The New Testament is clear that Christ, by the Holy Spirit, takes up permanent residence in all believers (참조. 롬 8:9; 고전 6:19, 20; 엡 2:22). ... 신자들은 지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indwelling Christ)의 놀랄 만한 풍성함을 소유하고 있다(요 14:23; 롬 8:9-10; 갈 2:20; 엡 1:7, 17-18; 3:8-10, 16-19; 빌 4:19).”(John MacArthur, WORD search 7, CD-Rom).”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갈 2:20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내가 행한 것이나 나의 공로 때문에 그러한 신적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살아 계시고 강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주하시는 너그러운 특권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그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Ibid.)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의 개념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존 맥아더는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 안에 계시며’ 모든 성도는 성령에 의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성도 안에 계시는 분은 제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령이시고, 성령과 본질상 동일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이다. 그래서 그는 롬 8:9을 주석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이다. (The doctrine of God’s being one essence, yet existing in three persons, is one of the most certain truths in Scripture.)”(Ibid.).

그러나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존 맥아더의 삼위일체론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더 나아가 존 맥아더가 주장하는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삼위의 분리(three separate persons), 즉 ‘삼신론’을 뜻한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볼 때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강해설교가 중 한 사람인 존 맥아더는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분명한 ‘삼신론자’이다.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 역시 틀림없는 ‘삼신론자’이다. 그루뎀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명문 중 하나인 트리니티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다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던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구성하는 3가지 명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이시다(God is three persons). 둘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p.231).

물론 지방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루뎀의 이 같은 삼위일체론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김바울, 지방 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게다가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지방교회가 볼 때, 그루뎀을 삼신론자로 확정짓는다.

“양태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인 관계들(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the Trinity)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혹은 이것들은 단순히 환상이거나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태론은 예수님이 세(침)례 받으시던 장소에서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내리심을 통하여 계시된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242).

위의 진술에서 지방교회는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라는 표현을 대하며 아마 눈이 크게 떠졌을 것이다.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삼위의 다른 기능과 활동(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을 묘사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또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이라는 표현을 통해 위트니스 리가 언급한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은 ‘준(準)삼신론’이 아닌 ‘삼신론’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의 다른 기능과 활동을 설명하며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주장한 웨인 그루뎀 교수는, 지방교회가 볼 때, 분명한 삼신론자이다.

그런데 그루뎀이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언급했을 때 그는 삼위의 본질적 분리를 주장한 것인가?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준다.

“현대의 집단들 중에 삼신론을 지지하는 집단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Ibid., p.248)

위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루뎀은 결코 ‘삼신론자’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언급했을 때 그는 삼위의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인 유일성’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루뎀은 양태론을 비판하는 중에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라는 표현을 통해 ‘구별된 삼위(three distinct persons)’를 강조한 것이다. 그루뎀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의 구별’과 ‘삼위의 본질적 유일성’을 동시에 믿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그루뎀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들’로 정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적인 교리 체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각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거주하신다는 이론)은 정통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이 신봉하는 ‘상호내재(coinherence, 페리코레시스)론’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달라스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스코트 호렐은 ‘상호내재론’을 믿는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 위는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충만한 위격을 감소시킴이 없이, 상호 내주하신다(That is, each member of the Godhead in some sense indwells the other, without diminishing the full personhood of each.).”(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

이처럼 ‘상호내재론’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의 구별을 주의 깊게 유지한다.

반면에 전혀 다른 개념의 ‘상호내재론’을 주장하는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 (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상호내재론’을 설명한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주장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말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삼위의 구별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이 말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한 위격, 한 본질’을 뜻한다. 결국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은 지방교회가 ‘일위일체론’, 즉 ‘양태론 이단 교리’를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양태론적인 개념을 이렇게 분명히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 한 인격이다.”(Witness 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p.48).

그는 또 이렇게 표현한다.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p.18)

물론 이 신학적 명제에서 위트니스 리는 본질이 아닌 위격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일위일체론(양태론)’의 개념을 가지고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한다.

지방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인격, 한 본질’로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삼위의 다른 활동 혹은 삼위의 다른 위치에 대한 설명’은 곧 ‘분리된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삼신론이 되는 것이다. 이미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 164)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개념을 “거의 삼신론과 같다.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한다(“분리된 세 위격들”은 이후 지방교회에 의해 ‘삼신론’으로 확정됨).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을 참고하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p.288)

그의 진술을 하나 더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전부, 삼일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Witness Lee, God's New Testament Economy, p.230)

이 같은 진술은, 노먼 가이슬러의 말을 빌리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이신 아들 만이 성육신 하셨다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교리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Geisler, A Response, p.3).

지방교회는 ‘한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양태론)이 ‘상호내재’를 통해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이것을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개념을 ‘삼신론’으로 정죄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편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감히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 버리다니!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이 신적 본질 안에서 ‘시간과 공간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영원히, 어디에나)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이 땅에 오신 아들’ 및 ‘성도들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을 ‘분리된 위격들’로 여기지 않고,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구별된 위격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또한 완전히 연합되어 계심’을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로즈와 가이슬러는 “구별된 세 위격은 각각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상호내재 하신다.”(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p.8)라는 말로 삼위의 ‘본질적 연합(essential unity)’을 설명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편재(遍在, in His omnipresence) 안에서 함께 하셨다.”(Ibid., p.5)라고 주장한다. 물론 지방교회의 이단적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인 가이슬러와 로즈 역시 틀림없는 ‘삼신론자들’이다.

삼신론은 ‘세 위격, 세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이단 교리이다. 따라서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는 결코 삼신론자가 될 수 없다. 정통 삼위일체론자가 용어나 예화의 부주의한 사용으로 인하여 삼신론자로 오해를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가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동안에는 그를 ‘세 위격, 세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삼신론자로 결코 정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절대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엘리옷 밀러가 언급한 ‘나쁜 마녀 사냥’이라는 말은 부주의한 용어나 예화를 문제 삼아 삼신론자 꼬투리를 달아서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목에 올가미를 뒤집어씌우는 경우에 적용해야 마땅하다. 물론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루뎀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Ibid., p.248)는 고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하는 자들은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곧 ‘한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이다. ‘현대판 양태론 운동의 진원지’인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를 ‘삼신론 이단자’로 정죄하는 심히 그릇된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양태론 이단’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도표 참조). 이런 맥락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지방교회의 비판의 무게는 훅 불면 날아가는 솜털만도 못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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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홍기 목사 소개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철학박사(Ph.D.)
미국 탈봇신학대학원(Talbot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석사 및 목회학 박사(M.Div.,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목사

출처: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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