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하고 살자 - 손영호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눈에 보이는것 어찌 다 좋게만 보이랴?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내 보는것 누군가는 눈쌀 찌프리게 되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 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하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마음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고 너무 안타까워 하거나 슬퍼하지말자.
인생은 결국 가는 것.
무엇이 영원한 것이 있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 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그래, 우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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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유태화(현 백석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 유태화 -

 

 

저자는 안양대학교(영문학)를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교의학을 연구한 후

남아공의 프레토리아대학교에서 G.C.Berkouwer의 마지막 학생이였던 C.J.Wethmar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과정에서 교의학을 2년동안 연구하였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로 옮긴 후

A. van Egmond 교수의 지도하에

The Spirit of Liberation : Jurgen Moltmann's Trinitarian Pneumatology

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2002년도에 학위(교의학, Dr. Theol.) 를 취득하였다

 

 

 

미국의 개혁신학자인 B. B. Warfield는 오늘 기적들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자연적인 현상들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으로 볼 필요가 없으며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로

제한하는 것이 옳으며 동시에 그 사역은사도직의 종결과 더불어 종결되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바가 있다.

273) B. B. Warfield, Counterfelt Miracles, NewYo 1918, 119-120

 

이 견해를 벌코프도 상속하였으며, 완고한 개혁주의자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워필드의 이 주장은 당시에 널리 신봉되었던 소위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야말로 시대제약적인 상황에 편승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계속성과 표적과 기사를 연결시킨 것은 본질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계시는 성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계속되지 않는다. 실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사건으로 계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성례와 설교와의 관계처럼, 말씀계시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명석한 계시로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요”, 혹은내 피요라는 말씀의 선포 없을 때, 그저 떡이고 포도주에 머무르고 마는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서 표적과 기사도 마찬가지다. 표적과 기사는 말씀계시와 함께 있을 때, 분명한 의미를 획득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호해진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씀계시가 주어질 때,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면, 전달하는 바가 더욱 효과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항상 그런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고전2:1~5; 살전1:5~6).

 

이것은 21세기 복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씀사건으로 계시는 새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록된 성경이면 족하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그 때와 같이 지금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큰 능력과 확신으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더불어 증거되어야 한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일하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21세기 인간에게도 동일한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하비 콕스(H. Cox)는 그의 Fire From Heven이라는 책에서, 워필드의 주장을 색다르게 다룬바가 있다. 콕스에 따르면, 워필드의 이런 주장은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는 다소 주관적이지만 정황적으로 볼 때 적절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당시 성령의 오심을 경험한 교회 안에 당시로서는 이상하고 낯선 결과가 나타나곤 하였다. 아직도 흑백(黑白)의 갈등이 상당했던 때에, 성령오심을 경험했던 교회 안에 흑백이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하며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워필드의 눈에 낯설게 느껴졌고, 이것을 불편하게 여긴 소상한 귀족인 그가가짜 기적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성경주적에 충분히 근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성경을 인용하지 않은 낯선 책을 발표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하비 콕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하비 콕스의 주장의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식철학 때문이든, 인종적 편견 때문이든, 령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은사와 성령께서 그때와 같이 지금도 능력 가운데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확신케 하시며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여 가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그의 태도는 비평에 열려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확신이고 가장 평범한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발견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출처: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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