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자의 믿음

본문 읽기:마태복음 8장 1-4절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 10:11:53

출처: eTimes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2011/ShellView.asp?ArticleID=2016080810104401091&LinkID=6507

 [하늘에서 쫓겨난 루치펠, 밀튼의 실락원, 귀스타프 도레]

 

 

사탄의 또다른 이름이 루시퍼이다? 아니다? 라는 논쟁이 있다. 아마도 이 논쟁의 가장 큰 원인은 킹제임즈 버전에서 이사야서(14:12)에 나오는 힐렐(계명성/새벽별Morning Star)을 루시퍼로 번역한 때문으로 보인다. 힐렐과 루시퍼의 의미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경에 루시퍼에 대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경이 사탄을 루시퍼라고 확인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블로거의 입장이다. 하지만, 루시퍼를 사탄 또는 사탄적 존재로 그리는 것이 많은 뉴에이지나 영지주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루시퍼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의 상징으로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존재인 것은 확실한 만큼 이에 대해 조금 살펴 보기로 한다. (참고로 루시퍼가 사탄임을 대중적으로 퍼뜨린 데에는 "타락 전의 사탄의 이름이 루시퍼였다"고 주장한 밀턴의 실락원과 단테의 신곡도 일조를 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루치펠<<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빛으로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루시퍼 매거진; '빛나름이' 루시퍼를 내세운 신지학회지 표지]

 

근현대 뉴에이지 배교의 중추세력 중의 하나인 카발라적 신지학회나 프리메이슨 등의 에소테릭 비밀집단은 그들의 '빛'의 원천인 루시퍼를 옛부터 숭앙해 왔다. 빛나름이light-bearer/light-bringer라는 어원을 가진 루시퍼는 '빛'으로 상징되는 영지주의의 '지혜/지식'(소피아/그노시스)를 사람에게 날라다 주어서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유도하여 선악의 지식에 눈을 뜨게 한 사탄이 바로 "빛나름이"였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 루시퍼 또는 사탄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인간에게 깨우침을 준 빛의 존재이다.

 

영지주의 빛/불/지식/지혜의 전달자 루시퍼의 전파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 중의 하나가 뉴에이지 신지학회이다. 루시퍼매거진(후에 "신지학리뷰"로 개명)을 발행했던 신지학회 설립자 마담 블라바츠키는 루시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루시퍼는 신적 그리고 지상적 빛이다. 동시에 '성령'이자 '사탄'이다... 이제 붉은 불의 용과... '빛나름이' 루시퍼는 우리 속에, 우리 마음 속에 있므여, 우리의 유혹자이자 구속자, 우리의 지적인 해방자이자 구원자임이 드러났다.

 

교회는 인격적인personal 신과 인격적인 마귀를 믿도록 강요하지만, 오컬티즘은 이것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출처<<)

영지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신은 별도로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은, 그들 자신들의 더 높은 자아를 포함하는, 만유내재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 루시퍼는, 위의 블라바츠키의 말대로, 영지주의자들 속에서 그들에게 빛(깨달음)을 날라다 주는 어떤 마음(영혼) 속의 비인격적인 에너지적 존재이다. 뉴에이지에서는 이 신적 에너지 존재를 '포스'force라고 부른다.

 [뉴에이지 신 '포스'의 각성을 그리는 영화 스타워즈 7: The Force Awakens]

 

하지만, 애매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루시퍼는 인격적인 천사적 존재로서도 숭배되어 왔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사상의 모순을 모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뉴에이저들에게 루시퍼는 크리스천들의 그리스도(또는 때로는 성령)에 대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며, 따라서 앞으로 재림할 (적)그리스도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격적인" 신과 마귀를 부인한 블라바츠키도 다른 곳에서는 루시퍼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과거와 현실에서, 루시퍼는 진리의 빛을 관장하는 천사적 존재의 이름이다... 위대한 발렌티누스 복음인 피스티스 소피아에 의하면, 성스런 이름으로부터 발산되는 세개의 힘 중에서 소피아의 힘(성령)은 비너스(금성) 또는 루시퍼에 거한다.

 

창세기의 뱀인 사탄을 영적 인류의 참 창조자이자 은인, 아버지로 보는 것이 지당하다. 여호와가 창조한 로봇automaton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빛의 전령", 밝게 빛나는 루시퍼였기 떄문이다. (출처<<)

블라바츠키의 후예이자 루시퍼트러스트출판사(후에 "루시스트러스트"로 개명)를 만들어서 유엔의 출판물을 배포해온 앨리스 베일리(참고: UN과 뉴에이지: 앨리스 베일리의 루시스 트러스트 (LUCIS TRUST)<<)는 앞으로 등장할 뉴에이지 그리스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참고: "뉴에이지" 그리스도의 재림<<) 못지않게 유명한 뉴에이저이자 유엔 Planetary Initiative 디렉터인 데이비드 스팽글러 역시 앞으로 다가올 "전세계적인 루시퍼 숭배"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루시퍼를 숭배하기로 서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신세계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시퍼 입문을 치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뉴에이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출처: The United Nations and The New World Order<<)

신지학회와 뗄 수 없는 관계인 프리메이슨의 루시퍼 사상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조금 짚고 간다. 존경받는(?) 33도 메이슨 앨버트 파이크는 "빛나름이 루시퍼여! 어둠의 영에 주어진 신비로운 이름이여!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라고 불렀는데, 그가 배운 카발라 철학에 따라 루시퍼는 "흑암의 신이 아니라,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입문자들에게 이것은, 선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악을 위해 쓰일 수도 있는, 사람(인격체)이 아니라 포스Force(힘)"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 157 페이지) 하지만, 루시퍼가 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그도 다른 곳에서 "맞다. 루시퍼는 신이다. 불행하게도 아도나이도 신이다... 빛과 선의 신 루시퍼는 인류를 위해 어둠과 악의 신 아도나이와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본다. (출처<<) 만유내재신 사상 속에 감춰놓은 루시퍼의 사탄적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론적으로, 영지주의자/뉴에이저/프리메이슨에게 루시퍼는 영지(소피아)를 나르는 빛이며, 오컬트 마법의 비인격적 힘/에너지이며, 또한 동시에 그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적 신이다. 따라서 위 제목이 가진 질문에 대한 블로거의 답변은 "모두both"이다.

 

 [양성(자웅)동체적 바포멧에서 보이는 '빛나름이' 루시퍼의 상징인 '횃불' (참고: "불"을 나른 프로메테우스<<)]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1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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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외 노동자, 러시아에서 분신 자살!

- 참혹한 북한 해외 노동자 현황과 인권실태 -

 

 

 

 

'종교 공식'에 갇혀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할 것인가?

- 대한민국이 맺을 회개의 열매 -




말도 안나오는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 땅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별하지 못하고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은 영원히 저런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차리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교회(그리스도인)가 분별하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고,

회개치 않고,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북한땅을 여실리 만무합니다.

되려 우리에게 심판이 임할까 두렵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통회와 자복하며 행동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부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끊이지 않는 살육!

 

끊이지 않는 살육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절규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을 하며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처절한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버둥칩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신음과 핍박 그리고 아픔들이 바로 남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지 않고 침묵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북한 정권의 칼부림 아래서 극도로 탄식하는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북한 정권과 거짓 평화를 외치며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독함을 넘어서는 국가적 차원의 악독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다가 걸리면 총살당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을 애써 외면하고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봉수교회에 남한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바치는 사역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이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창궐한 영적 불모지 북녁 땅을 위한 기도보다 이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악독함을 하나님은 조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잔인한 이기심입니다. 수천만명을 학살한 짐승같은 정권과 무슨 경제협력이며 수백만명을 굶겨 죽인 사탄 정권과 무슨 연방제입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김일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북한 정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부서져야 합니다. 종북좌파 세력은 무너져야 합니다.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의 탄식에 대한 남한 교회의 태도가 바로 남한을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현재 남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남한 교회는 이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글 출처: '예슈아 제4권' 수록글 (예슈아 출판사)

http://cafe.daum.net/biblemunjanara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북한 인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탈북자 구출과 북한 선교, 인권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함께

많은 후원의 손길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통일소망선교회: http://www.tongilsom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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