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에게 선택할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아담이 먹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 생명나무가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뱀이 던지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선택하고 말았다
아담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직접 지을정도로 지혜로운 자였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의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축복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아담에게 하나님은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들었음에도 아담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먹은후 건네주는 그 보암직하고,지혜롭기도하고,탐스러운 열매를 아무 댓구도 없이 받아먹었다

최소한 한번쯤은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해봐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미 그열매를 따먹어버린 하와를 한번쯤을 꾸짖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담은 기다렸다는듯이 열매를 넙쭉 받아먹음으로 온 인류의 죄의 근원이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지금 이세상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선택의 연장선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지상명령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정복은 곧 전쟁을 상징하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땅의 공중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겨나가야 함을 명령하신다

선악은 세상을 상징한다
아담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선택권의 기로에서 결국 세상을 선택하였기에, 우리는 결국 육체의 죽음을 모두 맛보게 됐으며 결국 지옥으로떨어질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또한 죽을때까지 선택의 귀로에서 마귀와의 유혹을 이겨내며 생명나무를 따먹기위한 전쟁을 계속 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체험한것만으로 구원을 받은걸로 착각을 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삶에서 끊임없이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행해 나감으로 이뤄지는것이다
우린 성경을 통해 그 수많은 순교자들과 전도자들이 오직 죽을때까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한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땅에 우리가 육으로 살아있는한 결코 안심해서는 안되며 우리를 끊임없이 실족케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나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야만 하는것이다

이세상은 혈과 육으로 해결할수 있는 전쟁이 아니고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성령님과 마귀와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를 이길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을 은혜의 시대에 주신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낮추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얻게되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마귀의 유혹을 계속해서 이겨내며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서 완성해 나가는 도구들이 되는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후 가장 크게 쓰임받았던 베드로 조차도 끊임없는 마귀와의 싸움을 굶주림에 달려드는 우는 사자와 비교했으며, 노아 시대에  수억혹은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중 올바른 선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8명에 불과하다는것을 경고했다

성경은 전체를 통털어 세상인 ‘선악과’와  참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선택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세상을 정복하며 이겨 나갈 방향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보내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성경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며, 오직 성령이 부어주시는 푯대만 바라보며 앞만보며 달려가야하는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하며 나가야할 방향을 잡아주는 ‘키’이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주는 육체의 짜릿한 쾌감을 위해 달려나가는 어리석은자가 되지 말아야하며 하며, 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주실뿐 아니라, 참 기쁨과 살아가야할 진정한 이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진정성있게 선택함으로 받게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 도구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야만 한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강현

문둥병자의 정결의식(규례)

본문 읽기:마태복음 8:3-4

참조 구절:레위기 14:1-32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입니다. '가라사대' 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느라"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심판의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길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계약적 약속-covenant promise)의 특징 또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육의 심비에 언약의 내용을 새기십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아니 종교 이상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살아 있는 체계와 모임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게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온전케 되기를 원하노라.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노라'-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충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병행하는 자의 신앙은 건강합니다. 거머리같이 맨날, '다고 다고' 하는 신앙은 연약하거나 어리거나 병든 신앙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손을 대시며-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말씀만 툭 던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나을 터입니다. 그런데도 허리를 구푸려 병자에게 손을 대십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십시오.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친근히 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애쓴 자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다 들으십니다. 다만 응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즉각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고 더디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제 문둥병이 나았으니 제일 먼저 가족에게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떨어져 살았으니 더욱 그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율법의 기록입니다. 아무에게도 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대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위 참조구절인 레위기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필자와 독자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됩니다.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가져와야 합니다. 모두 정결의식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잡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예전에 유명한 정치인이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못 돌린다"고 했었지요.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지 모릅니다.

질그릇의 특징은 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위에서 산 새를 잡습니다. 목을 따고 피를 흘려 질그릇 위에 받습니다. 그 피를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일곱은 완전 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완전합니다.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문둥병자는 흐르는 물과 질그릇과 새에다 자신을 투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질병과 죄악과 진영 밖 격리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피흘려 죽어가는 새의 피를 자신에게 뿌려 정결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산(living) 새 한 마리는 들판에 놓아줍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갔다가 죽음을 면하고 창공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보면서 죄의 무서움과 사죄의 은총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지요.

백향목은 아주 오래 사는 키가 큰 나무입니다. 성전이나 왕궁의 건축 재목으로 쓰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삼아 계십니다.

홍색실의 특징은 붉어서 눈에 잘 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자의 삶은 무리 중에서 홍일점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슬초는 물을 잘 머금기에 물이나 피를 적셔 뿌림으로써 죄인을 정결케 하는 데 쓰이는 하찮은 잡초입니다.

백향목과 우슬초! 솔로몬이 논했었지요.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백향목도 귀하게 쓰시지만 우슬초도 귀하게 쓰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여러분은 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크게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생긴대로 살고 있는대로 사십시오. 너무 잘난 체 하지도 말고요. 오히려 못난 자를 더 귀하게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속건제물인 숫양의 피를 신체의 대표적인 부위인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위에 기름을 바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소유권이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표호(사인)입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듣느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벙어리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외치십시오.

또한 손으로, 발로 행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십자가의 피의 복음으로 물들게 하십시오.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사장에게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입증이란 증인의 증거를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실체이신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여전히 율법의 의식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 시대에도 율법주의가 횡행합니다. 초대교회 때 갈라디아교회처럼요. 삼가 복음으로 무장하시길 바랍나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영혼과 몸을 이분법적 사고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인으로서의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따로 떼어내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인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날에 죽은(죽을) 몸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살아 있을 동안에야 오죽하겠습니까. 육체도 잘 보존하십시오. 건강하기를 구하십시오. 혹 병들었다 할 지라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잘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필요한 물질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어 사는 것을 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자외는 가난이 미화될 수 없습니다. 미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011:39:25

모바일 이타임즈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mobile/shellview_m.asp?ArticleID=2016081011372601478&LinkID=6344




사랑은 주는 것만큼 오는 것도 아니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돌아올 것이 없다고 해도

쉼 없이 주는 사랑에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를 바라보는 진실한 눈빛이

그리고..

마음을 담아 잡아주는 손의 따뜻한 온기가

곧 행복을 부르는 신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힘들어하는 것은

그 만큼 바라고 있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기보다는 상대에게서 받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실망도 불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산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유일한 계산은 내가 얼마나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것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마저 사랑하는 동안에 잊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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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⑴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3항)라고 한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3항)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기독교강요> 3권 17~28항을 읽어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이런 질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684

 출처: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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