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야, 무화과야~

 

새로 이사를 온 교회의 앞마당에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익어가는 무화과,

올해는 유난한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흐드러졌다.

토요일 날 한 광주리 따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오늘 주일 날 성도들과 나누어 먹고도 또 한 광주리가 남았다.

잘 익은 무화과를 한 입 깨물면 향긋한 향과 함께 얼마나 달콤한지

 

우리 주님께서는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열매를 찾다가

단 한 개의 열매도 얻지 못했다는데

 

무화과야, 무화과야

창조 주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이토록 달콤한 열매를 썩 내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다 한 개의 열매도 맺지 못하여

영원토록 저주를 받고 말았단 말인가?"

달콤한 무화과를 입에 넣을 때마다 무화과 한 개를 드시지 못한

우리 주님 생각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 때 그 무화과나무는 제 철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치고,

나는 우리 주님 찾으실 때 내어드릴 열매가 무엇이 있을까?

달고 맛있는 무화과가 목으로 쉽게 넘어가질 않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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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 시절, 교정에서 애국가를 열창할 때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란 소절에서는 아주 신나하며 목청을 돋우어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애국가에도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내 친구들은 종종 ‘하나님이 맞냐, 하느님이 맞냐’하고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이시다, 왜?”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하늘에 계신 분이니까, 하느님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대도 같은 질문으로 성도들 간, 혹은 목사님들 간에 서로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이며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주요 논점으로 대두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문제를 두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잠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사전적이나 일반적 의미:

과연 국어사전은 ‘하느님’과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종교어로서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됨.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짐. 하늘. 황천'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살펴보면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란 모든 종교인이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 천주(天主), 하느님'이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하느님을 개신교(改新敎)에서 이르는 말'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일반적인 천공신(天空神) 개념으로 볼 때 ‘하느님’은 우리말로는 하늘, 한자로는 천(天)의 존칭어인데, 광활하고도 높은 창공은 종교적 궁극자 및 최고원리의 상징으로서 인류 종교현상 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종교표현이다. 종교학자들은 고대인들이 하늘이나 땅을 단순한 현상이나 물체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보고 그 거룩함의 신성을 경외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가장 오래된 문자문화를 지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누(Anu)신, 가나안 지방의 엘(El)신, 그리스의 제우스(Zeus)신들은 모두 천공신(天空神)으로서 다신(多神)들 중에서 그들이 아버지 혹은 천상회의의 임금으로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다신(多神)주의자들 개념으로서 절대주권자, 천주님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벨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을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주)로 번역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萬軍)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기독교는 왜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 부르기를 더 선호하는가?

기독교는 공식적인 '하나님' 칭호에 대한 태도는 시대별로 사용한 성서기록에 따랐다. 우리들의 '하나님' 칭호에 대한 변천은 성서 번역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먼저 대체로 한글성서의 번역과 사용시기를 구별해 보면 개인역 시대(1882-1903), 공인역 시대(1904-36), 개역 시대(1937-51),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개정판 시대(1952-70), 신.구교공동번역 시대(1971-현재)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한글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채택할 때 계속적으로 상관된 개념은 곧 '하늘'(heaven)과 '하나'(one)이다. 그리고 이들 개념의 복합, 지역적 방언, 한글맞춤법과 한국어 발음의 변천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완벽하다.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란 명칭이 옳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를 의미하므로 유일(唯一)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크다'를 의미하는 '한'에 통하는 말이므로 신의 위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명칭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올바르다고 본다.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에 무슨 근본적 차이는 없는 것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현재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그리스도교의 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통속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무당 종교의 신으로 오해한다는 것이 개신교도들의 입장이다. 이렇듯 기타 토속, 외래종교도 사용하는 신 명칭인 '하느님'과 구별, 기독교의 하나님을 선별 호칭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하나, 유일(唯一)신되심을 천명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사 45: 5-7 참조), (출 20: 1-17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심을 강조하셨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 12:29절 말씀), (요 5: 44절 참조), (요 17: 3절 참조 ).
 
‘하나님’이란 용어가 ‘하느님’이란 용어보다 부적절하다는 견해: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며, 그 이유로는 하나라는 수사에 존칭 명사인 님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수사학자가 아니기에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는 것이 수사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숫자에다 님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 분, 한 분,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 하나에다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오히려 그런 발상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 주장에 따르면,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으로서는 하나이기에, 삼위일체 신앙을 충분히 표현하기에 부족하며, 하나는 하나이지 삼위가 될 수 없고 단일 신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느님의 삼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글쎄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하나란 숫자를 표기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본다. ‘하느님’이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바로는, 천공 신이요, 다신(多神)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속에 든 다른 위로 보지 않고 각각 다른 세 분의 신으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다신(多神)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부 하나님 따로, 성자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부터 알아야하지만,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짧고 우선 간단히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곧 하나이며, 하나 속에 포함된 세 가지 다른 역할로 본다는 그런 의미다. 성서적 근거로는, 요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역할 분담의 정의는, 에베소 1: 3-10절을 근거한다.
성부 하나님= 창세 전에 인간 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분,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간 구원을 이루심, 성령 하나님 = 예수의 그날까지, 구원받은 백성을 인치시고 지키시고 견인하심. 이렇듯,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나뉘어져서 일하시는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고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유일(唯一)하신 하나님을 다신(多神) 종교와 혼합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에 신학적인 논쟁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그 어떤 논쟁도 피하려고 하며, 여기에 필자가 근거한 것은 신학적 자료가 아닌, 일반 사전적 의미와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그대로 적용한 것일 뿐으로 더 이상의 깊은 신학적 질문은 나에게 물어보아야 대답할 여력이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을 따져서 설왕설래 다투며 변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만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각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구할 따름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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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다

 

 

 

 

 

종교개혁사를 쓰면서 부제로 ‘진리의 재발견’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의 부패의 고리를 풀려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가? 성경에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타락했다. 종교개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칭의’를 주장하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즉 스콜라주의자들은 당황했다. 그것의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자로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역시도 칭의에 대한 개념을 희미하게 말할 정도였다. 약 1500년 동안 ‘칭의’개념은 묻혀 있었고 감춰져 있었다.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이 진리가 재발견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놀랍게 전해준 진리 중에 진리인 칭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자.

 

 

1. 칭의란?

칭의의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3문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70문에 잘 밝히고 있는데, “죄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한 정의를 위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11장 2항, 11항, 23항 그리고 17장 8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죄들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에 근거하여 죄들을 사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와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다.

 

 

2. 죄들의 용서란?

죄들의 용서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행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무상적으로 우리에게 죄들의 사면이 이뤄진 것이다(3권 3장 18~19항 참고). 최초의 부모로 인한 부패와 타락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푸신 것이다.

죄들의 용서라는 의미는 시편 32장과 로마서 4장에서 잘 나타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23항). 죄들의 용서란 ‘덮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죄들을 우리가 범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기에 또는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긴다. 이것을 과거나 미래에 범한 죄들이라도 용서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용서를 지운다거나 없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3. 오직 믿음이란?

아르미니우스파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영생의 보상을 받는 가치로 여기고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거절 4항). 믿음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죄들의 용서를 받고 그분이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단순히 수용하는 도구에 불과하지 무슨 힘을 제공하는 뭔가가 결코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밝힌다. “내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수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족, 그분의 의와 거룩만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3째 주간 61문).

그런데 왜 ‘이신칭의’라 부를까? 그것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것을 받을 수 없고 내 것으로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62문). 그래서 지식을 의미하는 믿음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들의 사하여 주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에서 위로를 얻는다(21~22째 주간 54~58문). ‘오직 믿음’의 의미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오직’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이신칭의는 행위로부터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자만이 오직 믿음에만 모든 것을 기인시킨다”(<기독교강요> 3권 11장 19항). 오직 믿음이란 의는 칭의를 얻기 위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배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4. 의의 전가란?

칭의는 죄들의 용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분이 행하신 구속 사역이 곧 우리가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순종을 내가 성취한 것처럼 또 내가 결코 모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23째 주간 60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으로 여기신다. 지상에서 인간의 그 어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수천 년 동안 모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치 물 한 방울을 태평양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 오시안더 뿐만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는 칭의를 무슨 알약을 먹어 힘을 얻는 것처럼 여긴다. 구원을 얻게 하는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 즉 인격을 보시지 외모를 판단하지 않는다(3권 23장 10항). 무상적 칭의를 믿음으로 확신하므로 그분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양자됨인데 다음 호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81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1. 가슴에 기쁨을 가득 담아라
담은 것만이 내것이 된다.

2. 하루를 멋지게 시작하라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3.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라
웃음꽃에는 천만불의 가치가 있다.

4. 남이 잘되도록 도와줘라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

5. 자신을 사랑하라
행운의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6.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은 나를 향해 축복해 준다.

7. 기도하라
기도는 소망성취의 열쇠다.

8. 힘들다고 고민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들게 마련이다.

9. 준비하고 살아가라
준비가 안되면 들어온 떡도 못먹는다.

10. 그림자를 보지말라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라.

11. 남을 기쁘게 하라
10배의 기쁨이 나에게 돌아온다.

12. 끊임없이 베풀어라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게 마련이다.

13. 될 이유만 말하라
안될 이유가 있으면 될 이유도 있다.

14. 약속은 꼭 지켜라
사람이 못 믿는 사람 하늘도 못 믿는다.

15. 불평을 하지말라
불평은 자기를 파괴하는 자살폭탄이다.

16. 어디서나 당당하라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

17. 기쁘게 손해를 보라
손해가 손해만은 아니다.

18. 요행을 바라지 말라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차게된다.

19. 밝고 힘찬 노래만 불러라
그것이 성공 행진곡이다.

20.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라
그 노래는 복나가는 노래다.

21. 푸른 꿈을 잃지 말라
푸른 꿈은 행운의 청사진이다.

22.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감사하면 감사 할 일이 생겨난다.

23. 남의 잘함만을 보고 박수를 쳐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24. 좋은 말만 사용하라
좋은 말은 자신을 위한 기도다.

25. 희망의 꽃을 피워라
희망의 꽃만이 희망의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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