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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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훈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의학)

 

 

아르뱅주의?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가르친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한번 구원에 참여한 자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이 없고 타락한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르뱅주의(Ar[minian+Cal]vinism)”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결합시켜, 성경이 그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가르친다면서, 우리는 두 견해 모두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 두 가지 모두가 사실일 수 있는가?

모순되는 두 가지를 함께 붙잡으면 된다는 말이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계시를 모순으로 만드는 무책임한 신학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모순에 만족하고 넘어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번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둘 모두를 다 믿고 붙잡아야 한다.”는 식의 궤변과도 진배없는 것이다.

 

신학은 그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아르뱅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 받은 책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성경에 대한 올바른 고백인가?

 

성경은 모순적인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모순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성경이 만일 이 중차대한 구원 문제에 있어서 모순적인 책이라면, 과연 다른 문제에 있어서 또한 모순과 오류가 없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르뱅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대한 신뢰성을 무참히 떨어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얼핏 보기에 모순 같은 상황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진리의 하나님은 원만한 이해의 모든 풍요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참된 신자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말씀들

 

우선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신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말씀들은 너무나 많고 또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갈 1:4; 벧전 1:18; 마 20:28; 딤전 2:6). 그런 분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방관자요, 구경꾼으로 남아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우리를 구원에서 끝까지 지키신다.

 

둘째,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결코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지키신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요 6:37-40). 또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요 10:28-30). 너무나 유명한 로마서 말씀에서,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롬 8:28-39). 우리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빌 1:6; 살전 5:24).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다고 한다(행 20:28, 고전 6:19-20, 고전 7:23, 벧후 2:1, 계 5:9).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신 것은 단지 구원을 위한 가능성만을 제공할 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최종 심판대까지 통과하게 하는 완벽한 구원이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양녀 삼으셨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된다고 가르친다(롬 8:15, 갈 4:6, 엡 1:5). 세상 사람들도 양자로 삼은 이를 중간에 버린다는 것에 대해 옳지 않게 여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양자양녀로 삼은 우리를 최후 심판대에서 버리시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다섯째,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로마서 6:1-14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6-7절), 최후 심판 때까지 확실하게 보호 받을 것을 가르친다(8-9절).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과연 그 연합 관계가 깨어질 수가 있는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다시 그것에서부터 분리된다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가르치는 바가 전혀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왜 성경은 연합 교리를 가지고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힘주어 말하겠는가?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파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연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여섯째, 신자가 가진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3:16).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가 다시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지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 요일 2:25, 요일 5:11-13). 주님과 믿음의 성례 통해 결합한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주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다(요 6:53-55). 주님께서 주신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생명이며, 그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요 10:28).

 

일곱째, 그리스도를 믿어서 칭의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종 심판에서 구원 받는다.

로마서 5장 9절에서 사도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은 곧 최후심판에서 구원을 받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칭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후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칭의는 최후심판의 판결에 대한 현재적 선언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에서 탈락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듯한 구절들에 대한 설명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해할 때 이런 분명한 가르침들이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얼핏 보기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종 심판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때문에 그때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들(마 25:31-46; 롬 2:6-11)은 참된 신자의 경우에는 최종 심판에서 결코 정죄 당하지 않으며 반대로 참된 신자가 아닌 경우에 반드시 정죄 당함을 가르치는 구절로 해석해야 한다.

 

최종 심판은 행위에 대한 물음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최종 심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성령 안에서 행한 행위들”이다(갈 5:5 참조). 그렇기에 그 행위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의 행위이지, 믿음에 뭔가를 더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에 근거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후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최종 심판에서 정죄 당하지 않는 근거를 “행위”에 잡는다면 “어떤 행위를 얼마나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불거지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구원 받는 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첫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최대한 낮추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최종 심판대에서 결코 낮아질 수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어떻게든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공로적 선행을 위해 별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그런 신학에 빠져서 면죄부 장사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고 단순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서 쌓아간 “행위에 근거하여” 판단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의의 기준은 신자라 할지라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사 64:6, 슥 3:3-4 참조).

 

최종 심판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위”의 분량이나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행위”는 무엇인가? 신자의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참됨을 보여주는 “징표요 보증이요 열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행위의 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도 없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은 최종 심판대에 섰을 때에 비록 행위에 있어서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최종 심판대에서의 차등적인 판결이 있음을 가르치는 구절들(고전 3:10-15)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급의 형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토의할 문제이다. 차등상급이 계급적 위계질서를 낳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상급이 물질적인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일단 알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완성이요 충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마도 상급은 서로를 더 섬길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신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구원의 길에서 도중에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갈 3:3, 딤전 1:19)은 참된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들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마 25:31-46에서도 마찬가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경고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나, 신앙생활에서 행위가 부족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하셨다. 여기서 “도무지(헬라어, 우데포테)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6장에서, 구원의 길에서 탈락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성”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히 6:4-9).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경고 뒤에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라고 덧붙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고 질문한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믿음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므로 아직은 기회가 있는 상태에서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구원의 길에서 결코 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은 위와 같은 설명으로 여전히 견지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길에서 멀어져 버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난다면,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안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말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져 있어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죽음의 자리(death bed)에서도 역사하사 구원을 이루신다.

 

셋째, 신자가 구원을 열심히 이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은 구원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권면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말씀은 곧 이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신앙의 길은 인간의 책임성 있는 반응이 요청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주심 속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보다 확실한 구절에서 시작하는 성경해석

 

이처럼,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영원히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구절들(“A그룹 구절”이라 부름)에서부터 출발하면, 구원의 길에서 현재든 최종심판대에서든 탈락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구절들(“B그룹 구절”이라 부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성경에서 보다 명확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보다 불명확한 구절들로 접근하는 성경 해석의 원칙을 지키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B그룹 구절들에서부터 시작하면 A그룹 구절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구원에서부터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요 5:24, 6:40),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었고(고전 6:20), 그리스도와 죽음과 부활에서 연합했으며(롬 6:5),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되었고(롬 8:14-15),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고후 1:22, 5:5),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으며(롬 8:1), 장차 진노에서 구원 받는다(롬 5:9)는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모순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도 최대한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이해력이 가진 한계 상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다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이지 성경이 모순을 가진 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 가망성 없는 아르뱅주의

 

나는 A그룹에서 출발하여 B그룹을 이해하려는 입장이 정통 기독교를 따르며 종교개혁의 신학에 부합하는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B그룹에서 출발하여 A그룹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입장은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며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입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성경의 일관성은 믿고 있다.

 

하지만 A그룹과 B그룹을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순을 그냥 품고 가자는 입장으로서, 건전한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없고 계시의 온전성을 믿는 신자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교회사를 통해서도 가망성 없는 입장으로 판명이 난 견해라 생각한다. 아르뱅주의자들의 입장이 지금 이 마지막 입장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개혁주의마을

고린도전서 14장 번역과 주석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본래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보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몇몇 구절들을 잘못 번역했거나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든다.

1.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흔히 방언 기도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잘못된 방언을 꾸짖는 것이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교정하는 것이다(115).
2.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하는 자가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교회를 세우는 것에 반대된 것이다. 곧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3.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에서 동사는 가정법인데 이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올바른 번역은 “내가 만일(ean=if)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de=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이다(118).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도 영과 이성으로 모두 기도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방언 기도가 있다면 미래에 영과 마음으로 번갈아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라는 말이다.
4.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했다고 하고 또 방언을 하라고 할 때, 그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바울은 외국어를 잘했고, 또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하도록 권고했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를 사용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외국어를 나타낼 때는 복수형 명사를 사용했다.
5.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는 개역개정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로 고쳐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하는 방언 행습은 ‘품위 없게 하는 것’이다.

책에서, 또한 유투브에서 노우호 목사는 이 부분을 주장할 때 매우 교조적으로, 확신 있게 말한다. 사실 여기에서 주장하는 내용에는 상당한 정도의 헬라어 실력과 성서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필자는 그가 신약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내용으로 볼 때 다음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그의 성서 번역과 주석에는 억지와 무지가 난무한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14:2)

헬라어:? γ?ρ λαλ?ν γλ?σσ? ο?κ ?νθρ?ποις λαλε? ?λλ? θε?· ο?δε?ς γ?ρ ?κο?ει, πνε?ματι δ? λαλε? μυστ?ρια·
개역개정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역: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114).

여기서 노우호 목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역한 단어는 접속사 γ?ρ와 불변화사 δ?다. 그는 문장 첫 마디에 있는 γ?ρ는 번역하고 뒤에 나오는 γ?ρ는 번역하지 않는다. 이 접속사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요 2:25).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확실히”라는 뜻으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면서 쓰이기도 한다(롬 2:25). 그러면 그 의미는 문장과 문맥에서 결정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을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과 14장 2절의 문장과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바울은 예언을 하라고 해놓고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γ?ρ는 별 뜻 없이 사용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γ?ρ가 번역되면 여기서 이 접속사는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14:1). 그 이유는 방언은 그렇지 않는데 비해 예언은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14:2-3).” 그런데 14장 2절의 중간에 있는 γ?ρ는 본 절 안에서 두 문장의 관계를 명확히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인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혹은 즉] 영에 의해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우호 역은 매우 엉뚱하다. 첫 번째 γ?ρ가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고, 두 번째 γ?ρ는 14장 2절 내의 두 문장에 관련된 것인데, 14장 2절 내에서 앞 문장을 이유의 근거로, 뒤 문장을 그 결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은 헬라어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 본문 내에서는 그가 말한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뒤 문장이 이유의 근거이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인간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γ?ρ) 그것은 그는 영으로(혹은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불변화사 δ?에 대한 번역이다. 이 단어는 문장의 계속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여 “이제, 그리고, 그런데”라는 뜻이다. 문장에서 비교되는 것이 상반될 때 이 단어는 “그러나” 혹은 “이와 대조적으로”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바울은 “세우다”라는 동사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데 여기에서 δ?가 쓰였다. 여기서 이 단어의 뜻은 “이에 반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14장 1절의 문맥에서 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가? 여기서는 δ?가 어떤 두 개념을 대조시키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단지 문장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 특별히 번역할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도 본 절의 δ?는 번역되지 않았다.

설혹 δ?가 본 문맥에서 “그러나”를 의미한다고 해도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δ?가 “하지만”을 의미하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 여기서 뒤 문장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14장 14-15절에서 영으로 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완벽한 오역이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삼은 KJV조차도 올바로 번역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2-4절의 KJV을 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즉[혹은 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JV은 전반적으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본 절에서는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노우호 목사는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까? 그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방언은 외국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방언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방언을 외국어를 말하는 표적이라고 보고, 이 정의를 바울 본문에 대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글에서 방언을 정의하는데, 노우호 목사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정의를 여기에 심고 있는 것이다.
본 문맥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은 그 방향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14:3), 방언은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는데(14:2), 노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면 문맥상 방언과 예언의 대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우호 목사의 고린도전서 14장 2절 번역은 헬라어 문법과 문맥, 바울 전체 신학으로 볼 때 완전히 틀린 것이다. 
  
방언이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하는 말이라고?(14:4)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과 예언을 “세우다”라는 단어로 비교한다. 방언은 자신을 세우는 데 반해,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 노우호 목사는 본 문맥을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면과 자신을 세우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방언은 자신을 세우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도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또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생각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 다음 절(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맥상 바울이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 두 은사는 모두가 사모해야 할 은사인데(고전 12:31; 14:1), 공동체 예배 가운데 사용될 때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 즉 타인에게 아무런 “세움”(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언은 그 자체로 소통이 일어나는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 가운데서 더 권장된다. 반면, 방언은 개인 스스로를 세우기에 개인 기도에서 귀중하다. 다만, 예배 가운데 사용할 때는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통역을 동반해야 한다(고전 14:5).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개인의 영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로 “방언이 자신을 세운다”고 한 것은 방언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고?(14:14)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ν [γ?ρ] προσε?χωμαι γλ?σσ?)에 사용된 동사가 가정법 현재형인데,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현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방언기도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노 목사는 영어의 가정법과 헬라어 가정법을 헷갈린 것 같다. 헬라어 사전에서 ??ν을 찾아보면 이런 용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상의 조건을 인도하는 영어의 if와 같은 용법이 있다(막 3:24). 하지만 ??ν은 많은 경우에 미래에 나타날 조건을 말하는 영어의 if와 whenever, 혹은 when을 의미한다(요 14:3). 또한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when의 의미로도 쓰인다(살전 3:8). 물론, 그 용례는 문맥에서 결정된다. 본 문맥에서 ??ν은 when의 의미다.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면(고전 14:2) 이것은 당연히 기도 혹은 찬양일 수 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영으로도 기도하고(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노우호 목사는 사용된 동사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가 얼마나 법거롭겠는가?” 하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 해석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자 자신 스스로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이성으로도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다고?(14:18)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은 바울이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옳다면 영적 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바울이 갑자기 자신이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했는가? 둘째,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깨달은 이성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고전 14:19),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선교를 위한 일만 마디 외국어가 어떤 이유로 이성에 기인한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한 것인가? 한 마디로, 이렇게 해석하면 뒷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통성으로 방언기도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위라고?(14:40)

노우호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적당하게 하고”(개역한글)를 개역개정성경이 “품위 있게 하고”로 번역한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방언과 연관하여 “품위 있게”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설정한 품위와 질서는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 교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6-40절에서 말하는 품위와 질서는 예배 시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차례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방언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지 않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의 입장은 노 목사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4장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번역을 시도했지만, 그의 헬라어 실력과 신약학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새로운 번역 제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번역을 확인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좀 더 물어보았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 목사의 헬라어 실력, 주석 실력,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는 초보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전제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억지스런 문법과 번역을 들이댄 것이다.

방언부정론 평가

노우호 목사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방언부정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방언부정론은 신학적 고찰과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성서적 근거가 미약한 주장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과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그의 사상 기저에는 은사중지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방언론은 은사중지론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사부정론까지 간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 방언 기도의 은사는 있었다가 중지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한 때 바울이 잠시 오해해서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한 적은 있었으나 후속 서신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교인들의 헛소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주장은 바울 방언론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이 성령이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또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도 물론 없다.

어설픈 역사비평적 성서 이해에 의한 주장
방언 반대자 중 특이하게 노우호 목사는 성서해석을 하는데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을 일부 도입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잘못 판단하고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고린도후서에서(특히 11장에서) 이 오류를 교정했다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보다 후에 쓰여진 로마서에도 은사 목록이 나오는데(12:6-8), 여기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바울의 방언 은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0-31).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약성서 서신은 상황에 따라 그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 계속해서 어떤 주장을 업데이트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 다 은사이지만, 그 성격상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은사는 영적인 은사이고,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것은 교회 봉사를 위한 재능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가 신약학자들이 사용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를 해석하기는 했으나, 그 방법을 제대로 익히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말았다.

편견에 의해 균형을 잃은 주장
본서에서 그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본서를 쓴 것인가는 다음 인용구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작금 한국 교회에 번지고 있는 방언을 두고 지난 37년 동안 검증해 본 결과는 100% 거짓 방언이었다.”(5)
“필자가 알기에는 정상적이고 아름답게 사역을 하고 주님께로 가신 분들 중에 방언기도를 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229)
“방언하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들이 많았다.”(201)
“..지난 200년 동안 여성들 중에서는 탁월한 신학자나 철학자가 없었다.”(110)

이 인용구들 속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 그의 편견,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첫째,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야 말대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 둘째, 남성우월 사상에 의한 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상식적인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위험 수위에 올라있다. 셋째, 성서학 전문가도 아니요 영적 은사에 대한 체험도 별로 없는 개인이 자신의 권위로 방언을 혼자 검증하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도 확신 있게 말하는 태도에 의해 그에게 설득당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주장을 듣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달리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확신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과 누가 모두에게 방언은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나는 한 결과 혹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과 누가가 기록한 성경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필자는 신약학자로서 방언에 대해서 십 수 년 간 집중적으로 이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방언중지론, 방언부정론은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독자 중 아무도 이러한 이론에 현혹되지 말고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바란다.
  (c) 뉴스미션.

이단 헨리 나우웬의 정체와 그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끼친 악영향들
헨리 나우웬을 이단 타종교인들보다 더 추앙하는 기독교 종교혼합주의자들

1.  보편구원론자(만인구원론자)
헨리 나우웬을 백과 사전에서 조사해보면 그는 이단 타종교사제이자 작가로 나온다. 그는 1957년 이단 타종교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은 자이다. 헨리 나우웬은 보편구원론자이다. 보편구원론은 예수님을 알든 모르든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이단 신학 사상인데,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저서에는 그의 보편론적 구원관을 잘 설명하는 글귀가 있다.


“오늘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집 대문을 열려고 오실 때, 모든 인간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예수를 알든 모르든. 각 사람 나름대로 신께 나아가는 길을 청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소명임을 깨닫는다.”(‘Sabbatical Journey’ 1998년판. p.51).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정확하게 말한다[행4:12],[요14:6].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즉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헨리 나우웬은 또한 이단 뉴에이저이다. 뉴에이지는 모든 만물에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누구든지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뉴에이지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불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모든 종교의 합일 내지 세계 단일종교를 추구하며 기독교의 타락 및 종교혼합주의화를 바라고 있다.



2. 동성애자, 동성애 옹호론자인 헨리 나우웬
헨리 나우웬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타고난 동성애자’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는 1932년 1월 24일에 네덜란드의 네이께르크(Nijkerk)에서 세무법학자였던 Laurent Jean Marie Nouwen과 Maria Huberta Helena Ramselaar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57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4년부터 81년까지는 노틀데임, 니메건, 예일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부에서 말년까지 정신장애인을 위한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일을 했다.


그는 “동성애 감정을 지니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은 심장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척 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할만큼, 동성애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인 것처럼 언급했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아니거나 성령과 물로 거듭난 진정한 크리스찬이라면 헨리 나우웬의 이러한 언급은 전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는 불행하게도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동성애의 영’에 사로잡혀 이 악령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헨리 나우웬이 진정으로 거듭난 참된 크리스찬이었다면, 그는 이 죄악의 수렁에서 건짐을 받고 그 죄로부터 돌이켰을 것이다.


이런 종교혼합주의자, 동성애자(Gay ; 사실에 근거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Wikipedia’(위키백과)에 헨리 나우웬은 남성 동성애자인 ‘Gay’로 등재됨)이며 보편구원론자인 이단 헨리 나우웬의 삶을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라고 말하는 기독교 목사를 비롯하여, 헨리 나우웬의 책을 팔아 수익을 올리는 자칭 기독교 출판사(두란노[대표 OOO씨 ; 前職원장 故 하용조목사]를 비롯한 일부 출판사들)들의 정체는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아니면 뉴에이지 종교혼합주의 및 보편구원론에 두고 있는 것일까?  동성애를 하더라도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면 그것을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일각에서는 헨리 나우웬이 정신장애우들을 피부에 닿게, 살갑게 돌봐준 것이 ‘동성애’의 애욕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는 최고의 영성가가 아닌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적 장애우였다.



3. 뉴에이지적 관상기도 열풍을 불러온 장본인 헨리 나우웬, 그가 이 시대에 하고 있는 역할
헨리 나우웬은 스스로가 관상기도를 즐겨했고 적극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시대 교계에 ‘관상기도’ 바람을 불러온 장본인이다. 헨리 나우웬의 관상기도는 중세 때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카톨릭) 수도원에서 동방 신비주의를 도입하여 특히 힌두교의 만트라를 기도의 도구로 활용하여 생겨난 관상기도를 더욱 더 종교혼합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소개하는 관상기도는 성경 묵상이 아닌, 하나님이 아닌 뉴에이지 영성과 직결된, 다른 영적 존재에게 나가는 것이며 극히 위험한 것이다. 관상기도에 심취한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카톨릭, 불교, 힌두교와 연계된 종교혼합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세계크리스천관상커뮤니티(WCCM)’의 디렉터인 ‘로렌스 프리먼’은 타종교 신부인데, 그는 관상기도를 이끄는 궁극적인 목적이 ‘세계종교의 단일화’에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주로 추구하는 것은 ‘세계 평화, 세계 단일화’로서, 종교합일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리먼은 기도모임을 이끌 때 ‘요가 교습’도 함께 하고 있다. 알다시피 요가는 힌두교에서 몸으로 하는 기도이며, 요가를 지속할 경우 악한 영, 특히 음란의 영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 개신교의 ‘유스스페셜티즈’ 역시 요가를 수시로 보급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의 영적 스승인 ‘토마스 멀튼’은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에 앞장선 사람이며, 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며 동서양의 종교 합일을 지향했던 사람이다. 나우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제자인 ‘로벗 조나스’는 미국 보스턴 인근에 기독교, 불교 혼합식 영성수련 기도처 ‘빈종’(관상기도수련센터)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말씀이 아닌, 말씀을 벗어난 신비적 영적 체험을 통해 종교혼합주의 결과물을 양산하는데 힘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단들인 리차드 포스터, 필립 얀시, 유진 피터슨은 관상기도 보급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모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인사들이다. 또한 이단 리차드 포스터, 이단 달라스 윌라드, 이단 유진 피터슨, 이단 래리 크랩, 프리메이슨 로버트 슐러, 이단 브라이언 맥클라렌, 이단 릭 워렌, 이단 필립 얀시 등은 헨리 나우웬을 열렬히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영(다른 예수)을 좇는 자들이다.


관상기도를 적극 추천하는 인물들은 토마스 멀튼, 헨리 나우웬, 리차드 포스터, 브라이언 맥클라렌, 필립 얀시, 유진 피터슨, 댄 킴볼, 레너드 스위트, 릭 워렌, 로렌스 수사, 리처드 모우 등은 관상기도를 적극 추천하고 있으며, 이머징처치, 유스스페셜티즈,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서점, 일부 기독교 언론들이 관상기도를 보급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서울 지구촌교회(이동원목사)에서는 ‘관상기도 세미나’도 개최했었다.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작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센터에서 모두는 하나가 됩니다…그곳은 하느님의 마음 속이므로 우리는 모두의 연합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여로를 위한 양식’에서), “우리의 내성소 안에 계신 하느님은 각 인간의 내성소에 있는 분과 똑같습니다.”(‘여기와 지금’에서)


나우웬의 말대로라면 관상기도를 통해 모든 종교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종교를 떠나 각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은 다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뉴에이지적 사고이며, 종교혼합주의 정체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나우웬은 “관상기도 훈련을 통해 크리스찬 지도자들은 사랑의 음성 듣기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리더십이 미래에 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도덕론자들로부터 신비주의자들까지 망라한 운동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이름’에서 1989년)라고 말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뉴에이지적 종교합일운동이다. 그는 모든 것들 안에 신성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신에게로 가는 길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동성애를 버리지 않았다. 나우웬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단’이다. 그와 함께 하는 자들 역시 영적으로 일맥상통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지적장애인들을 위해 말년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참다운 성공이라고 추앙하는 기독교 목사도 있다.


이와같은 논리는 장애학교인 ‘인화학교’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해 일하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하면서 ‘성추행’을 하더라도 장애인을 섬겼기 때문에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이단 보편구원론자이며 Gay인 나우웬의 추종자들, 그리고 그의 추앙 세력들이 저항없이 나우웬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나우웬의 추종자들 역시 같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행4:12]. 그 외에도 길이 있다고 믿거나 다른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우웬이 인간의 감성과 지적 정서에 혹할 만한 달콤한 글을 잘 썼는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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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salt3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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