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장 18 - 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산자여 따르라-

마치 '임을 향한 행진곡'에 나오는 가사같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산자이기에 생명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그렇게 븥여봤을 뿐입니다. 

필자는 세상적 이데올로기나 그 어떤  '이즘'에도 물든 사람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성경주의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보수 진보를 초월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신학적 도그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영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삶으로나 가난한 목사일 뿐입니다.

한 때, 현대철학의 사조에 관심이 있어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 질 딀레즈나 미쉘 푸코의 철학적 사변에 잠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지만 이내 식상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직 성경말씀에 천착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시녀로 거느린다고들 말을 하지만(일부 신학자들의 말일 뿐입니다) 필자는 모든 학문적 영역의 고유한 입장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우월주의에 물든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입장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수하는 사람입니다.

여담입니다. 밥만 먹고도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맨날 밥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가끔 짬뽕이나 짜장면도 먹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간 중간에 자전적 에세이를 칼럼형식을 빌어 올리고자 합니다. 식상함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번 글 다음에 올릴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죽어가는 자도 없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하는 말인 지를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숨쉰다고 다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 참된 생명, 하나님이 부여한 새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산자와 죽은자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주님의 사역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서기관과 제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만 실상은 똑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와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먼저 서기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셨습니다.(단순히 예수님 주변에 있는 무리가 아닙니다. about him-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분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무리를 보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역성경의 역동적 대응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왜 에워쌌을까요. 쉽게 말해서 어디로 가시지 못 하도록 둘러 진쳤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스크럼을 짜고) 우리들 만을 위한 분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이신 줄 몰랐기에 그랬겠지만요.

 '우리가 당신을 따를 터이니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주소서. 우리가 당신을 추종하면서 세력을 모으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아시기에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하신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별로 살지 않는 호수 건너편 데가볼리(데카 폴리스-열 도시로 구성된 도시국가) 지역으로 배타고 가시면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의 맹점과 병폐는 사람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을 불려서 선교와 구제를 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요.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물리적 힘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왕국관과 별 다를 바 없는 교회관을 가진 일부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히 대형교회가 그러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괜히 큰 교회 기웃거리다가 배곯는 수가 있으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들의 심리를 잘 압니다. 로마의 수탈로 인해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무리 모두가 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바르게 안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메시야 운동을 했습니다. 로마를 깨부술 정치적 메시야를 군중들 스스로 만들어 옹립하고 메시야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서기관이 나선 겁니다.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을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지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선생으로 모시고 한 수 배우다가  때가 되어 세력이 커지면 한 자리 할 모양새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좋은 자리만 찾다가 이제 나를 보고 더 좋은 것을 기대한다마는 나는 네가 바라는 그런 선생이 아니니라'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습니다. 청빈한 삶을 사심을 강조코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동가식 서가숙' 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한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 수 없으십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서는 나그네같은 목자의 삶입니다. 

모든 자가 복음을 들어야 하기에 쉴 겨를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안식처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잃은 목자 없는 양떼가 온 사방에 있는데, 어디다 거처를 마련하고 정주한단 말입니까.

사람은 안주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처없는 나그네 삶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다 하늘 본향을 향해서 가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정처없는 삶이기에 고난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면서 천국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비록 집이 있고 좋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훌훌털고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제자들도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서기관처럼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나이다"고 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식적 교육을 받는 것으로 가능하다면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자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께 요구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을 잠시 뒤로 하고 집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 제자의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연로하기에 집에서 기다리다가 죽으면 장사지내고 다시.오겠다는 말입니다.

효자소리 듣고 싶다는 말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 산 사람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체면차리고 인정사정 다 봐주고 언제 주의 일을 합니까. 그러다가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제자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입니다. 무릇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마다 자기 삶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요. 

세상사는 이치나 사람사는 도리에만 매이는 자들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스리기에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다들 나름대로 잘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아우성을 치며 난리입니까.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산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 아니면 죽은 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를...

주님 없는 삶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어디 육신적으로 죽은(죽을) 자들를 위해서 그 귀중한 세월을 허비한단 말입니까. 효도는 살아 있을 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만큼 주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이목에 매여 집에 가겠다는 그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제자교육은 바로 이런 겁니다. 주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명목상의 제자만 잔뜩 양산하지 마시고!

결론은 이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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