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장) 얍복강을 건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고 '네가 알아서 돌아가라.'고 야곱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셨고 그 밤에는 야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밤새도록 두려움에 휩싸여 그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아니 보이는 하나님은 멀게 느껴지고 보이는 두려운 에서는 눈앞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을 매여 종노릇 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임당할까 봐 아내를 누이라 했습니다. 이삭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애굽군대가 두려워 울부짖었습니다. 가나안 땅 장대한 족속이 두려워 울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한 다음, 아침에 이르러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환도뼈 탈골된 다리를 절룩거렸는지, 엉금엉금 기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에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해가 돋았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이젠 피할 수 없습니다. 환도뼈 탈골된 다리로는 가족과 양떼를 데리고 도망갈 수도, 맞서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야곱은 여종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 레아를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우고 에서를 마주하여 나아갑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 몸을 굽히고 에서에게로 나아갑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숫자라고 일컬어지는 숫자입니다. 에서에게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예우와 같은 예우를 갖춘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반갑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400 명을 이끌고 살기등등하게 달려온 에서가 야곱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 맞추고 웁니다. 이 무슨 조화인가요? 야곱이 일곱 번이나 몸을 굽히니까 야곱의 그 간절한 모습에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장하시지 않고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에서를 주,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공경의 도를 넘고 비굴과 아부의 수준을 넘어 차라리 경배의 경지입니다. 에서는 반가이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맞이합니다. 야곱은 형에게 소와 양떼를 선물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듯 하다.’고 말합니다. 비굴인지 아부인지 공경인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분간이 안 갑니다. 아무튼 극진한 동생의 대접과 선물에 마음이 녹았는지 어쨌는지 에서는 이제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호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을 간곡히 거절하고 형 에서를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해후의 장면을 대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에서를 못 오게 막으시거나 아예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 버려서 야곱에게 평안한 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이 기어이 형 에서를 만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반드시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 우리 죄인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송사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 호리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 반드시 부닥치고 넘어야 하는 것, 반드시 씻어야 하는 것, 그것을 갚게 하시고 부닥치고 넘게 하시고 씻게 하심으로 누구에게서든 원망이 없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의를 세우게 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길을 가노라 하는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부모형제로부터 그들과 화목하지 못 하고 오히려 지탄 받고 원망 받는 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 하고 형제와 화목치 못 하더라도 주님만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고르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렇게 두려운 형 에서를 기어코 만나 화해케 하신 뜻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아무리 싫고 무섭고 힘들더라도 우리의 에서를 향하여 얍복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에서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에서와 화목케 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조력자, 협력자, 앞잡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성결입니다. 원망과 비난을 받으면서 성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형제와 화목하고 원망과 비난을 없이 하는 것이 성결과 거룩의 첫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성결한 자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의 얍복강은 성결케 하는 강, 세례의 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번성케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를 번성케 하시고 롯의 딸들이 낳은 불륜의 자녀들로도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 보다 저들을 더욱 애틋하고 안타깝게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더욱 그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손을 붙잡아 생명길로 이끌어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많은 야곱들이 얍복강 건너기 두려워 하고 에서를 피해 도망다니며 주의 일 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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