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이성(理性)은 고귀하고,

능력(能力)은 무한하고,

행동(行動)은 천사같고,

이해(利害)는 신(神)과 같다.


그러한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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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가네.../ 최송연 깊어가는 가을 따라 노오란 낙엽이 쌓이듯 서러운 세월도 수북이 쌓여만 가네 가을이야 가고 또 가고 푸르른 솔잎마저 누렇게 퇴색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 사모하는 내 마음만은 영원히 파아란 하늘 그대로이면 좋겠네... 그분의 따사로운 숨결은 그렇게 늘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 生의 아픔과 고통일랑 떨어지는 저 낙엽과 함께 모두 다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

 

 

 

가을은 가네.../ 최송연

깊어가는 가을 따라
노오란 낙엽이 쌓이듯
서러운 세월도
수북이 쌓여만 가네

가을이야 가고 또 가고
푸르른 솔잎마저
누렇게 퇴색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 사모하는 내 마음만은
영원히 파아란 하늘 그대로이면 좋겠네...

그분의 따사로운 숨결은
그렇게 늘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

生의 아픔과 고통일랑
떨어지는 저 낙엽과 함께
모두 다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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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소(歸巢)본능 /최송연

 

험하고도 먼 순례의 길,

허덕이며 달려왔건만

 

아직도 이곳은

내 집 아니라 시네


길고 긴 여정 지친육신 

객관에 누었자니... 

 

사그럭 거리며 떨어지는

낙엽 소리 가슴 에이고,

 

 서러운 세월 뒤돌아 보니

시름만 더하여 가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

달빛마저 힘겨운 듯...

 

새파란 입술 파르르 떨며

작은 뜨락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구나 

 

밤이 깊어질수록

쌀쌀한 새벽 바람

가슴 헤집으며 파고드는 데

 

 떨어지는 낙엽이 서러워서련가...

먼 길이 힘겨워서인가...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쩌자고

저리도 애절한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아직도 멀고 아득한 데...

 

 가을 낙엽 떨어지 듯..., 

생의 영화도 덧없이 떨어지고


버석거리는 늙은 몸 

티끌로 돌아가는 그 날,


지친 내 영혼

본향에서 안식하리라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11:13하,~14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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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Yesterday John MacArthur GTY 블로그 1 Comment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증거와, 성령의 성화 사역의 증거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까?

요한의 첫 번째 서신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제시해준다. 이 짧고 강력한 편지만큼 성경에서 비주재권 신학이 주는 약속들에 맞서는 편지는 없다.

요한일서의 목적은 간결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의도를 상세히 설명한다. 요한은 믿는 자들을 의심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는 자들이 온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할 뿐이다. 참된 믿는 자라면 요한의 말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명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은 7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을 설명한다. 이 요소들은 각 사람이 진정한 신자인지 아니면 거짓 신자인지를 드러내어 준다. 이것은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떤 시험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자신의 그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방법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요”(요일 1:6-7).

‘어둠에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어둠에서 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속 받아 빛으로 옮겨졌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진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는 빛 가운데서 행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일1:7). 여기서 동사는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죄를 지을 때도 우리는 이미 깨끗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둠도 우리가 거하는 빛을 가리지 못한다(벧전2:9).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위치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을 모두 묘사하는 표현이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빛에 따라 사는 것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죄를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2:1).

구원에 대한 참된 확신은 언제나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실 구원에 대해 확신할수록 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더 깊어진다. 이 말이 모순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죄를 발견할 때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죄를 미워한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깨끗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죄를 더 극복하고 억제하려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2:1).

참된 믿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2:3-4;5:3).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다.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이것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지키는’ 자의 열렬한 순종이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참된 믿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한다

이 내용(형제 사랑)과 앞선 내용(순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참조3:10,14-15; 5:2)

이 두 가지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이유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선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율법을 성취한다(마22:37-40).

다른 믿는 자들에 대한 사랑은 참된 믿음의 중요한 증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타고난 것이거나 우리의 선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믿음의 증거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4:12)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지지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것으로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느니라”(요일 2:21-23; 4:6)

요한은 영지주의라는 초기 이단에 대항해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요한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오류나 이단에 빠질 수 없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20,27)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기술이나 어떤 성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거룩함을 추구한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2:29; 3:3-4, 6–9)

이 말씀들은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는 3장 4절에 나오는 죄의 정의이다. “죄는 불법이라.” “불법”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아노미아’다.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법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된 습관의 문제로 부도덕하고 불경하며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고,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다스리고 있다는 듯이 살아간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도 요한은 죄 없는 완벽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서신서를 시작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또한, 요한은 사람이 죄를 얼마나 자주, 지속적으로 혹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다. 그리고 참신자라도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요한이 여기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죄와 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 죄를 지을 때 우리 마음의 반응,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것이다.

영생의 약속을 붙잡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고백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철저히 가짜이고 속임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단지 속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진실로 자신의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요일 3:3).

참된 믿는 자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신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4:13)

이 말씀에는 바울이 가진 신학이 동일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성경은 말한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 참조 마 18:16; 고후13:1).

이것은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치 행위에 믿음을 두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로마서 8장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그것으로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 점검을 통해 기대하는 증거들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성령의 열매야말로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증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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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 책은 한국어로는 “ 구원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로 번안되어 판매 중입니다.

COPYRIGHT (C) 2016 Grace to You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창세기 38장)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부터 “낳고, 낳고”가 이어지는데 원어를 보면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헬라어 에겐네센, 영어 fathered)”입니다. 낳는 것은 여자의 몫이요 공급하고 지키는 것은 남자의 몫입니다. 이름과 명분은 남자의 몫이요 실속과 생명은 여자의 몫입니다. 한국에는 칠거지악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쫓겨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었습니다. 사라나 라헬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를 못 낳으면 종을 사용하여 아들을 낳아도 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 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자가 아들을 낳거나 만들거나 구하거나 해서 남편에게 주면 남편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아버지가 되고, fathered"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풍습에 의하여, 율법에 의하여 요셉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의 적법하고 당당한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는 네 사람의 여자가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같은 쟁쟁한(?) 주연급 여성 성경인물들이 아닙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의 여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이라는 점, 정상적이고 순탄한 과정을 거치지 못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8장의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맏아들 엘의 아내로 취한 가나안땅 여자, 곧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하여 여호와께서 죽이심으로 다말은 과부가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오늘날 수혼제도라고 부르는 풍습법대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의 씨가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 셀라도 죽게 될까봐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혹시 또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다말은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늙어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어 유다도 홀아비가 됩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친정이 있는 딤나로 양털 깎는 자에게 갔을 때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말은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합니다. 화대로 염소새끼를 받기로 하고 그 증거로 유다의 도장과 근과 지팡이를 맡아 놓고 동침합니다. 잉태하게 됩니다. 자신이 며느리와 동침한 것을 꿈에도 몰랐던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어놓으며 이것들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유다는 말합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유다는 왜 며느리 다말이 옳다고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유업을 잇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크게 하시고 언젠가는 오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는 여자의 후손, 곧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고통하며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여인이든 여자가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구세주는 오지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 그것은 모든 여자의 권리요 의무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혼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다말을 구세주의 계보를 잇는 생명의 유업의 여자로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까지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고, 여자의 후손이 오실 계보를 끊으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코 아들을 낳아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야 하는 다말은 목숨을 건 결단을 하였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잉태한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아들 셀라를 아끼려다 자신이 며느리에게 들어가 잉태하게 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쌍둥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먼저 밖으로 나온 아이의 손에 산파가 붉은 실을 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다른 아이가 먼저 태어납니다. “어찌하여 먼저 터치고 나오느냐?” 하고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손에 붉은 실을 맨 세라가 나옵니다. 그들도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계보, 장자의 계보를 붙잡으려고 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계보가 부끄러운 불륜의 계보라고 말합니다. 구세주의 족보라면 뭔가 근엄하고 거룩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근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악하고 부끄럽고 추하고 연약한 죄인들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악 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신묘한 약도 겉에 발라야 소용없습니다. 주사기를 통하여 핏줄 속에 들어가야 효력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살리려고 그렇게 죄인의 혈통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만일 다말이 가만 앉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 이름은 성경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먼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이름도 계보에 기록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아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도덕, 윤리,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점잖게 가만 앉아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대신 해주는 일도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상은 달음박질하는 자의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오직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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