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애도의 날 선포 "쿠르드노동자당(PKK) 소행"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두 차례 폭탄 공격으로 버스 유리가 깨져 있다. © AFP=뉴스1

(서울=뉴스1) 김윤정 기자 = 터키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인한 사망자가 38명으로 증가했다. 터키 정부는 11일을 희생자들을 위한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11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비날리 이을드름 터키 총리는 전국에 조기를 걸 것을 명령하고 하루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카자흐스탄 방문 계획을 연기했다.

앞서 10일 오후 10시 30분쯤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에서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은 축구팀 베식타스의 홈구장으로 축구팀 부르사 스포르와 베식타스의 슈퍼리그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이어 45초 뒤 경찰 다수가 모여있던 인근 막카 공원에서 자살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현재 38명으로 증가했다. 터키 내무부는 경찰 30명, 민간인 7명, 신원미상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부상자 166명 중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가 다수여서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한 현장에서 정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 AFP=뉴스1

경찰 피해가 컸던 만큼 당국은 경찰을 노린 테러 공격으로 보고 있다. 쉴레이만 소일루 터키 내무장관은 "이번 폭탄 공격과 관련한 용의자 10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공격 배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부는 쿠르드노동자당(PKK)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만 쿠르툴무스 부총리는 CNN에 "정황들이 PKK를 가리키고 있다"며 "조사가 끝나면는대로 발표가 있을 예정이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분명히 말할 순 없다"고 밝혔다.

한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경기가 끝난 직후 폭탄 공격이 발생해 인명 피해가 컸다"며 "우리는 또 한번 이곳 이스탄불에서 테러의 추한 모습을 목격했고, 이는 모든 형태의 가치와 도덕을 깔아뭉게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베식타스 구단도 성명을 발표하고 "비열한 공격을 벌인 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도록 맞설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의 성명도 이어졌다. 젠스 스톨텐버그 나토 사무총장은 "끔찍한 행위"라며 "우리는 터키와 견고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과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 주재 미국 대사도 트위터를 통해 "이스탄불 테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밝혔다.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에서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해 경찰 버스가 완전히 파손됐다. © AFP=뉴스1

(창세기 39장)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기록 속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담겨 있을까요? 피 묻은 채색옷을 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힌 줄만 알고 슬퍼하는 아버지 야곱의 통곡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그의 귀에 들렸을 리 만무합니다. 하필이면 애굽으로 끌려가는 길이 아버지의 집이 저만치 보이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은 이십 개에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던 그의 가슴은 얼마나 멍들었을까요? 아버지의 사랑 속에 애지중지 자라온 열 일곱 살 소년 요셉은 채색옷을 벗기우고 신발을 벗기우고 그 먼 길을 걸어 애굽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중동의 뜨거운 광야길을 끌려가며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을까요?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시어 온 세상 죄인의 질고를 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비아돌로로사’, 주님께서 홍포를 벗기우시고 채찍질 당하시며 피투성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걸어가신 그 길에는 주님의 핏방울이 알알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요셉을 노예로 샀습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 은 몇 개를 주고 샀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하여 형제들이 은 이십 개에 요셉을 이방인의 손에 판 것은 가룟 유다가 은 삼십 개에 주님을 팔고 그들이 로마인의 손에 주님을 넘긴 것과 닮아 있습니다.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 로마의 총독 빌라도...., 빌라도의 아내는 저 죄없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주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넘기워 죽임당하셨고 요셉은 죄 없이 애꿎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주님의 양편에는 두 강도가 달렸고 요셉에게는 바로의 두 관원이 꿈의 해몽을 부탁하였습니다. 한 편은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 편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옥에서 풀려나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애굽을 통치하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는 요셉의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고 온 백성을 구원하시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질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보셨고 모든 사정을 아셨고 모든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렇습니다,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였을까요? 어떻게 요셉은 그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늬 사람 같았으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가.’라고 원망하고 반항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시고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셨기 때문에 요셉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붙잡았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요셉은 행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었고 어떠한 고통의 순간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므로 끝내 십자가의 그 고통을 이기셨을 것입니다. 아,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버림당하신 것입니다.

  완전함은 무엇이며 완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걸어서) 완전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고통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완전함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모습, 욥의 모습을 통하여 한 순간이라도, 어떠한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떠나지 않는 완전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심으로 그 완전함, 그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습니까? 광야 가운데, 역경 가운데 걷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아니하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이겨내십시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여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2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찰스 톰슨(Charles Thomson,1729-1824)은 낮선 이름 같으나
그러나 그가 미국 최초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LXX: Septuagint)을 영어로 번역한 톰슨 성경(The Thomson Version)의 저자라면
조금 아는데 도움이 될까 싶다.
그는 아일랜드 Gorteade에서 태어났고 1739년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의 아버지는 찰스와 형제들과 함께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으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망하자 무일푼의 소년은 홀로 되어
대장장이로 델라웨어의 뉴캐슬에서 자라나 펜실베이니아의 뉴런던에서 공부하였고
1750년에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에서 라틴어 교사가 되었다가
그 당시 프랑스와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쟁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
소유주인 아메리칸 인디언의 정책을 상담하여 이스턴 조약(1758)을 만들어
장관을 역임하고 영국의 식민지 사업자로 인한 전쟁을 비난했다.

*이스턴 조약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의 미시시피를 경제로 신민지 소유권을 서로 갖겠다는
다툼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여러 인디언 족속과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을 프랑스의 지지 부족들로 삼았고 영국은 체로키 족으로 만 지지를 받았지만
1758년 체로키 족과 전쟁으로 관계가 깨지자 오하이오 지역의 부족이 프랑스와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키면 그 대가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에서 인디언의 땅의 소유를 인정하겠다는
펜실베이니아 행정부의 협상조약.

그는 반 독 점 파티의 리더니 벤자민 프랭클린과 동맹을 맺고 두 사람은
자유의 필라델피아의 아들(leader of Philadelphia's Sons of Liberty)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1765년 스탬프 법(Stamp Act)원리로 정치적으로 갈라졌다가
그는 독립선언서의 대리인으로 벤자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V)의
다른 서명자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후 대륙회의의 서기가 된 찰스 톰슨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다 서술을 포기하고
훗날 그는
“미래 세대에게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큰 죄를 짓게 된다.
온 세상이 우리의 애국자들과 영웅들을 찬양하게 하라” 말 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좋은 이야기 감이 되어
우리의 애국심을 고취하게 한다." 했다.
그는 애국자라 불리면서 더욱이 성경을 번역을 하고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거짓을 은폐하고 애국심을 부추기는 선동과 기만을
했다는 사실이며 애국이라는 시대의 이념(理念)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반 신앙적인 행위였다.
그런 행위의 결과는 지난 역사에 수 없이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영웅을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근대에 이루어진 ‘민주국가’라는 개념조차도
국가의 유지인 부의 경제논리와 위정자들의 통치적인 자기 욕망을
가톨릭과 개신교는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합리화 하였고
복음의 전파라는 명분(名分)으로 착취를 정당화한 식민지를 삼았으며
미지의 개척의 수단이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위정자들의 정권유지에 이바지하였고
실질적인 국가라는 현대의 개념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에 절정을 이룬
식민지 착취를 바탕으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죄악의 역사에서 이루어졌고
식민지를 개척이라는 정복자의 논리는 전쟁의 필요 불가결한 자원과 무역의 필요를
가증한 신앙으로 정당화 하였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그리고 미국은 인적 자원인 노예를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충당하는 인신매매의
이면(裏面)에는 선민사상이라는 삐뚤어진 신앙이 변절된 시대의 사상과 문화가
혼합된 시대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세계 1차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를 시기하였기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그 시대의 당연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의 믿음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信念)이 되고
그런 자들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옳은 양, 다수결이 옳은 양, 민주주의의 대의로
착각하면 그런 사회와 국가의 사상과 문화는 종교를 빌미로 정당성을 부여하면
종교가 신념(信念)이 된 환경과 조직의 형태를 이루면서
더 하여 신념으로 무장한 신앙은 이미 믿음도 아니고 자기도취이며
이를 관리나 통치의 수단이 되면 사탄의 하수인과 같은 짓임을
자신도 모르는 도취에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의 벽에 갇히면 성령님과 단절되어
자기 신념의 믿음이 정의가 된 인간의 역사와 교회사,
그리고 오늘날의 제도화한 체계적인 계급조직과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관료화된 모습은
복음을 가장한 신앙의 무늬만 남은 종교의 모습이라서
이미 복음의 근본을 떠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기에
개신교를 바라보는 반사회적인 인식과 현상을 자초하였고
이를 반기독교적인 당연한 세상적인 시류로 받아드리는 자들과
더 하여 온갖 음모론을 재생상하여 변명을 일삼는 자들이
복음을 막고 있는 현실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결과라서 이미 복음은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끼리 모임인 교계와 같은 직분 자들만의 모임은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룰 수도 없고 모였다 헤어지고 흩어지는
이산 집단이라
이미 신앙 공동체의 모습도 아니다.

시대마다 정신적인 신앙인의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그 사상의 주류는
반동으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어 발전하고 어둠의 역사로 이어지고
그런 사회에서 이리 저리 수많은 부흥 운동과 프로그램을 따라서
감성을 자극하고 종교적인 신념을 주입한들
근본인 복음의 의를 잃고 세상의 이데올로기(ideology)에 갇혀서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기커녕 이기는 힘을 잃고 영향력을 잃어
자기 위안도 못되는 종교가 될 뿐이다.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받아드렸다는 사람들이 왜 그리 속 좁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왜 그리도 편협한가.
간단한 진리를 다시보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음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서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 이시라서
세상을 사랑하시여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오셨음은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믿는 자 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모든 인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선민사상이나 이스라엘의 회복의 주장은
복음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 하는
복음의 능력을 시인하는 것 같으나 부정하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잘못한 성경 해석을 하는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한
교회사의 오류와 요즘의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간단한 진리를 외면한 무지의 결과이다.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허물과 잘못은
우선, 하나님께 잘못이고
그리고 상대에게 잘못이며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시인(是認)이 믿음의 근본적인 신앙이라 생활이며
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消滅)시킨 자라
성경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가슴에 꺼져가는 빛처럼 소멸하지 말고, 억제하지 말고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이끄시는 힘을
자신의 그 무엇으로도, 어떠한 변명이 라더라도 자신으로
성령님의 뜻이 자신의 가슴에 일어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억제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아 자신의 주장이 악이 되지 않게 어떠한 악의 모양도 버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Prove all things ; hold fast that which is good.
Abstain from all appearance of evil. 데살로니가 전서 5:21-22]
모든 일에 자신을 바라보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인지 증명하고 확신하여 ‘Prove all things’
성령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며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의 확신과 신념이든
그 동기(動機)와 원인을 버려서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게
악의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기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며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Now we exhort you, brethren, warn then that are unruly,
comfort the feebleminded, support the weak, be patient toward all men.
See that none render evil for evil unto any man; but ever follow that
which is good, both among yourselves, and to all men. 14-15]

게으른 자들을 복음으로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복음의 소식으로 격려하여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붙잡아 주며
악을 악으로 갚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지 말며
모두에게 오래 참으며 선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이는 삶의 생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고
이를 실천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 시대 우리에게 본을 보인
신앙생활의 모습이었다.

2. 예수님과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님은 결코 성령 없이 존재한 적이 없으셨다. 또한 그분은 성령 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적도 없으셨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은 그분이 성령과 결코 동일시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별개의 인격체이시다.

창조 사역을 통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길을 예비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1:20). 성령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셨으며, 그와 함께 하셨다(막1:10). 성령은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으며, 그곳에서 그는 원수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자신과 "권세들" 간의 문제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셨다(막1:12).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통해서 그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내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였다(마12:28). 그리고 그가 지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활의 직접적인 증인들로서 부활을 증거할 것을 명하신 것 또한 성령을 통해서였다(행1:2).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시도록 그에게 자격과 권한을 부여 하시고 고무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셨다.(행10:38)

그러나 성령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활동의 주체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집행인으로서 활동하시는 구체적인 인간이시다. 성령이 없이 단순한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었느냐는 것은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질문이다. 모세가 기도할 때 그의 손을 받쳐 주었던 사람들처럼, 성령은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조력자로서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증거인 것이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자신과 성령 간의 차이점을 강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께서 자신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눅12:10; 막3:28).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의 능력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끊어진 자이다. 그는 "영원한 죄에" 처한 자이다(막3:29). 어쨌든 예수께서는 성령을 자신과는 구별된 분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는 시점에서, 특별히 요한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 강조점이 바뀌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의미에 있어서만 이 세상을 떠나신다. 또다른 의미에 있어서 그분은 세상에 머물고 계신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몇 장에 등장하는 "떠나심"과 "머무심" 간의 놀라운 연결은 바울의 전망을 예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떠나신다. 그러나  그는 후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요14:1-3). 따라서 한 편으로 그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요16:16),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14:16). 예수께서 떠나시고 성령이 그 자리를 대신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그가 임하실 때,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물의 외모만 보고 중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때뿐 아니라 처음부터 임하실 것이다. 그의 강림과 성령의 강림은 서로 구별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반드시,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 것임에 틀림 없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또한 그의 임재는 다음과 같은 낙관적인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께서는 이미 인류 역사의 조류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6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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