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장) 땅에 생명을 주는 자


오늘 말씀 37절을 보니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과 7년 풍년 뒤에 닥칠 7년 흉년을 대비하자는 요셉의 계획을 좋게 여기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일 바로나 바로의 신하들이 요셉의 7년 흉년 예언과 요셉이 제안한 ‘범국가적 식량저장계획’을 허투루 여기고 비웃었다면, 나일강 푸른 물이 도도히 흐르는데 7년 기근이라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혹세무민 하는 황당한 예언 집어치우라고 하면서 요셉을 도로 감옥에 집어 넣어버렸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바로와 신하들은 요셉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그를 애굽총리로 세웠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복음을 외면하고 어두움 가운데로 달려가는 이 세상이 걱정됩니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치리자로 높이 세웠습니다. 자기의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수레에 그를 태웠습니다. 버금수레란 두 번째 되는 수레이지만 첫 번째에 뒤지지 않는 수레라는 뜻입니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쳐 모두 엎드리라 하였습니다. 애굽 말로 ‘사브낫바네아’, 곧 ‘땅을 살리는 자, 땅에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의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혼인시켜 제사장의 사위의 신분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였고, 애굽을 구원할 구세주로 믿었고, 실질적인 왕으로 삼았으며 제사장으로 세운 셈입니다. 노예생활과 옥살이로부터,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것 같은 요셉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엎드러지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애굽총리로 세움 받은 때 그의 나이 삼십 세였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와 같으니 이 일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애굽 온 땅을 순찰하고 풍년으로 남는 식량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게 하였습니다. 일곱 해 풍년에 거두어 저장한 곡물이 바다모래와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요셉의 아내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노예로 팔려와 감옥에서 고생하던 요셉으로서는 이 일과 이 기간이 꿈과 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 ‘잊다’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과 아버지의 집 일을 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 ‘창성’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미국 땅에서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창성했으면 좋겠습니다.

53절에 이르니 이제 하나님이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닥칩니다. 모든 나라에 기근이 닥치나 애굽 땅에는 곡식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5절을 보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들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합니다. 7년이나 풍년이 들었어도 한 해 농사지어 한 해 먹는, 환난의 날에 대비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 해도 버티지 못 하는 무서운 흉년이 닥친 것입니다. 바로 왕은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요셉이 이르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천하의 모든 주린 자들이 요셉의 앞에 이르러 식물을 구하고 요셉이 명하는 대로 합니다. 마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심 같고 모든 주리고 목마른 자들 죽게 된 자들이 그 앞에 나아와 엎드려 생명을 구하는 모습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주린 기갈로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비틀거리며 헤매던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우리 앞에 나아오는 역사 말입니다.

1. 바울 서신에 나타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 루이스 B. 스미디즈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만큼 쉽지가 않았다. 바울 서신에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문구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보다 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문구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개념은 바울의 사고 내에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자기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전형적인 예를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거하심이 교회 내의 특별한 엘리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전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13: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엡3:17)

 

그리스도께서는 한 몸이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바울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단 두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두 번의 경우 모두 구약으로부터의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간의 결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결혼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들이 있는 것 만큼이나 화합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유추는 훌륭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6:16). 또다른 하나는 바울이 예배와 성찬식에서 교제의 필요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르치는 내용 가운데 있다.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하며 누구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외부인들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너희 안에 계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 말을 이사야 45:15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신학을 폄에 있어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펴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나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바울의 서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이 흔하지 않은 것 만큼이나 흔한 개념이다. 우리는 아마도, 바울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에게 역사하신다고 항상 말하고 있다고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표본적인 구절을 언급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바울의 경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주장하고 있다. 성령의 내주는 궁극적인 부활에 대한 확신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8:11). 우리는 2장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과 그리스도간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연구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언급되었던 내용을 여기서 다시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령의 내주그리스도의 내주 로마서 8장에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들은 로마서 8장에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에게 확신과 그리스도인의 덕에 대한 설명이 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삶에 사랑을 가져다 주신다(롬5:5).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 세워 주신다(고후1:22).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불멸성에 대한 보증이다(고후5:5).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고전2:12).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8:16). 바울은 또한 성령이 그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고전7:40). 이 예들 가운데 성령의 거하심이 명백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강하게 암시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바울의 말을 고려해 볼 때,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이 명백해진다:

(1)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내주와 성령의 내주의 분명한 구별이 없다.

(2) 바울이, 비인격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은 존재 또는 성령과 닮은 존재로 만든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비유를 사용한 예는 전혀 없다.

(3)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구체적인 개체인 예수라는 이름의 인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4)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이나 특별한 순간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사실이다.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170-173)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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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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