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현상" 없이 확실하게 뱃살 빼기

많은 사람들이 나잇살 때문에 고민한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장이 약해서
조금만 많이 먹어도 제대로 소화가 안되고
아무리 맛난 음식,
또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하여도
만든 음식 이틀만 넘어가면 먹을 수 없다.

남의 집 가서 오래된 음식을 모르고 먹는날이면...
밤새도록 복통에다 심하면 토하기가 일쑤고
머리는 방망이로 두들겨 패듯 고통이 일주일씩 간다.
그러니 많이 먹지 못하고 조심조심....혼자 황녀다.
젊어서부터 그런 상태인 때문에 살이 많이 찔 새가 없다.

문제는,
남편이다.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심방이나 구역예배에 가면
맛난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으라 강권하는 곳은 많고

맛난 음식보면 절제가 안 되는 양반이라
밤이 늦어도 잘 먹고 소화도 잘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십이 넘어가면서부터 몸이 나기 시작,
몸만 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병도 이것저것 발병했다.

어느날 주치의가 경고했다.
"당신 이대로 가면 당뇨 합병증이 온다
운동도 더하고 살을 더 많이 빼야 산다."

그때부터
살빼기 노력을 피나게 이것저것 시도 했건만...
얼마 못가서 도로아미가 되고 말았다.
뺀 다음,
관리가 되지 않아 그런지 이전보다 더 찌고
그것을 가리켜 "요요현상"이라고 한다.

이제
나이는 점점 더 많아지는데...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를 이끌어나갈 역군,
귀중한 내 남편의 건강을 지켜줄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며 연구하며 .....
찾았다! 나 혼자만의 비법을!!!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되 손 쉬워야 하고,
무엇보다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아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30파운드나 뺏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탈이라면, 이전 옷은 너무 커서 하나도 못입는 게 탈.^^)

우리 독자님들 중에서 살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여기도 올려보니까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요현상 없이 살빼는 비법
1, 음식을 배불리 먹고자하는 느낌과 허기(배고픔) 증세를 잡아라.
그것은 인체에서 필요한 단백질 보충만이 길이다.
매일 저녁 식사는 계란 흰자 3개, 콩 두유(직접 껍질채 간 것)
한 잔이건 두 잔이건 큰 컵으로 양껏 마시면 된다.
매일 저녁 자기 전, 콩을 물에 담구어 두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나 일상화 되면 쉽다.

2. 아침 식사는 삶은 팥과 녹두를(이것도 저녁마다 담구어 둠)
한 그릇(배가 불룩해져도 좋다.)듬뿍 먹고, 고구마 한 개를 먹는다.
(양이 큰 사람은 고구마 한 개, 나 같은 경우에는 고구마 반 개.ㅎ)

3. 점심 식사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먹는다.
대신, 탄수화물은, 밥이나 국수 원하는 음식을 먹되
될 수 있는 대로 밥 한공기 이상 넘기지 않는 것이 좋고
각종 야채, 고기, 생선 등등 평소에 먹고 싶은 것을 양껏 먹는다

물론,
당뇨가 있는 사람은 단 것을 주려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죠.
이렇게 하면 1개월이면 표가 나기 시작한다.
콩과 계란 흰자는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주기에 여성이라면
다이어트 중에 얼굴이 못쓰게 되지 않고 머리결도 상하지 않는...
미용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단백질 보충으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 식탐도 줄어드는 듯...

모든 독자님들, 새해에는
애물단지 살도 빼시고 건강도 좋아지셔서 더욱 행복하세요.^^

팁~
(단, 목회자 가정이라면,
심방 약속 등 먹을 약속이 있으면 모두 점심 시간으로 미루어야죠.)
저녁에 있는 잔치 집 같은 것은 가서 먹되 탄수화물은 피하고
단백질 함류된 고기와
야채 쪽을 찾아서 배불리 먹어라..
마켓에 가면 얼마든지 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고
쉬우니까 혼자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남자분들도
자기 전에 담구어 놓았다 끓이기만 하니 손쉽게 할 수 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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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나?
대통령의 권위는 권세에 있고 군인의 권위는 계급과 총칼에있고 사장의 권위는 돈에있다.

그렇다면 목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목사의 권위는 당회장이기 때문에 오는것이 아니고, 교회규모가 크기 때문에 오는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말 잘 하는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목에 힘을 넣고 거룩한 목소리로 거만 떠는데서 오는것도 아니고, 부정한 방법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슨 감투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에서 권위가 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그것들은 전부 가짜 권위이다. 만일 그런것 때문에 나는 권위가 있는 목사라고 생각하면 그는 마귀에게 홀린 얼 빠진 21세기 바리새 권위 인줄 각성 하여야 한다.

혹자는 그런데서 권위가 오는 줄로 착각하고 3천만원 이상의 막대한 외화를 지불하고 가짜박사증을 사기도 하여 당회장실에 모시고 자랑하기도 하고 불법을 자행하며 감투를 스기도한다.

언젠가 신문에 대형교회 목사들도 가짜 박사가 많다고 기사화 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어느 교단에서는 감투 때문에 재판을하고 일간 신문에도 계속 나고있는데 과연 교회를 위한 처신들인지, 개인문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고있는지 좀 생각 해야한다. 한국교회 신임도가 땅에 떨어저 있는것을 땅 밑으로 처 넣고있는 행위 들이다.

어느 시골교회에 담임목사 모시기로 광고를 내었는데 이력서에 거이가 박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장로님은 요세 목사들은 박사가 왜 이렇게 많은지 하면서 쓴웃슴을 웃으셨다.가짜는 포장이 화려해야 잘 팔린다. 오늘날 교회는 내용보다 포장을 중요시 하는데서 이런 가짜 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어느 박사 장사가 날 보고 박사 하나 해보라고 권하면서 도와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영어로 논문 한 폐지도 쓸줄 모르는 무식자인 고로 박사 학위를 공짜로 주어도 나는 싫다고 하였다.

그런 박사 학위증을 어디다 놓고 보며 그런 가짜 후두를 걸치고 어떤 양심으로 강단에 서는가? 이렇게 수준 이하의 양식을 갖고 어떻게 성직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의 존중도가 삭발자 보다 훨신 뒤 떨어저 있다.

수준 이하의 교인들은 속아 좋게 보아주고 높여 줄런지 몰라도 어느정도 상식수준 이상 이라면 말은 않지만 다들 비웃고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가짜박사 사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잔치까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무엇하는 짓들인가? 이렇게 감각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있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비례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높고자 하는자는 낮아자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자는 너희의 종이 되라고 하셨다. 목사들은 이말씀을 다들 암송하고 있는 줄 안다. 이 말씀으로 너무도 많은 설교를 했기 때문에.

필자는 심방을 할때 국 그릇이 목사 앞에 맨 먼저온다. 나는 그 자리에 나 보다 나이 많은분이 계시면 남녀 직분을 떠나 그분 앞에 맨 먼저 놓게한다. 그러면 한참 시글 벅적 하지만 거기에서 권위가 온다. 그것이 우리 문화요 예의가 아닌가. 냉수 한 그릇도 선후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목사는 이조시대 왕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은 자가가 당회장인고로 왕인 줄 착각하고 있다. 당회장은 행정 상 수반이고 목사의 처신은 종이여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필자는 서울 무궁교회 부임하여 처음부터 그 교회에서 가장 목사를 괴롭혔다는 년세 많은 장로님의 신발을 돌려 드렸더니 아버지 벌 되시는 그 어른이 돌아가실 때 까지 나의 신발을 돌려 주셨고, 나는 그 어른을 하나님 처럼 대해 드렸더니 그 어른은 나를 하나님 처럼 섬겨주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어린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목사의 권위는 억지로 거만 떨고 고집 부리고 독제 하며 반대자를 내어 쫒아버리는 데서 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낮아저서 종이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필자는 필자가 운영하는 목회 상담원 입구에 이런 비문을 하나 세워 놓았다

그 비문은
“군림하지 말고 장로의 종이 되라.
봉사는 하지않고 행세만 하는 장로들은 지옥 불을 면키 어려 우리라“.

그 문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잘못 된 것 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 말씀이 아닌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예수님 말씀하신 너희가 누구인가? 모든 성도들을 다 가르친 말씀이 아닌가?
교회에서 진정한 으뜸자, 권위자가 되고 싶으면 종이 되면 권위가 온다. 필자는 목회 하면서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세배하였다. 그러면 그분들이 목사를 없인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 높여 주고 존중하여 주었고 필자가 내는 안이면 거이가 따라 주었다.
필자는 학벌도 없고 지식도 없고 3천만원짜리 가짜 박사학위도 없다. 설교도 잘 못하는 목사이다. 30년동안 장기목회를 하면서 맨날 했던소리 아브라함, 다윗, 나사로. 욥셉을 재탕 3탕을 하며 죽을 수었지만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설교를 좀 잘 해주었으면 하는 소리는 있었지만.

필자는 부 목사들에 겐 무조건 장로님들을 찾아 세배케 하였다. 어떤 부 목사들은 어떻게 목사가 장로들에게 세배를하는가 언잔케 생각하는 자도 느꼈으나 원목이 하라니 할수 없이 하는자도 있었다. 권위가 거기서 오는 줄울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낮아 짐과 섬김이 예수님 말씀인데.

목사들이 종을 크게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종의 자리에 내려앉지 않고 실은 상전의 자리만 누릴려고 하고 왕 노릇 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 사고와 처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목사이다.

권위 주의자로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주를 하지말고 진정으로 종의 자리에 내려앉아 예수님 말씀을 실천 하여보라. 권위가 온다.

합동 측 큰 교회 젊은 부목사가 학벌도 좋고 설교도 잘하고 인물도 출중하여 치열한 경쟁을 뚤고 단임 목사로 선발되었다. 목회에 자신 만만햐였다. 안하 무인으로 종횡 무진으로 속도전을 펄쳤다. 그런데 갈등이 일어나고 중직들의 원성은 많고 충성된 중직이 교회를 떠나고 세월이 흘런는데 교회는 부흥되지 아니하니 그 다음은 본인이 지처 버렸다.

그는 지처 부부간에 필자의 강의를 들으러왔다. 강의를 듣고 필자의 저서 “성공적 목사 처신법”을 읽고 목회 파라다임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낮은자리에 서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고 중직자들이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다며 교파도 다른데 목사님은 나의 잊을수 없는 은인 이라고 하면서 장로 안수식을 하는데 와서 축사를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 교단은 통합목사를 강단에 세우는것을 꺼려하는고로 그 젊은 목사를 위하여 사양하였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바래하고 종의 자리에 내려 앉이므로 얻어지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위이다. 그것을 의론 적으로는 알고 가르치기까지 하면서 정작 본인은 하지않고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병폐이다. 바리새 인은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
목사의 권위는 그 어떤 것에서도 오지 않은다.
권위를 세우려고, 붙드려고 하지말고 권위가 스스로 오게하라.
목사의 권위는 오직 종으로서 섬기는 데서만 오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비래하고
상전 행세자는 권위주의자로 타락한다. 권위주의 자는 바리새이다.

 

출처: USA아멘넷/장달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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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열쇠인 복음 (그레엄 골즈 워디)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1-6,9)

 

 

                                                어린 양과 사자

 

묵시는 종교적인 글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문체로서 기원전 약 2세기경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성행했습니다. 이 묵시의 특성 중 하나는 환상을 본 자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그런 계시를 받았는지를 서술하며(묵시는 '계시'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또한 두루마리에 써서 계시할 때가 이르기까지 봉해 놓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의 공표는 때가 이미 이르렀고 그 비밀이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바로 이러한 특성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메시지, 즉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펼칠 합당한 자가 없고, 그렇게 되면 두루마리가 봉해진 채로 있게 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어떤 분이 이기었는데,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분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the Lion)이시며 다윗 왕가에서 나온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묘사를 듣자 요한은 엄청난 위엄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고 맙니다. 여기서 그분은 자신의 칼에 적의 피를 묻힌 채로 싸움터에서 갓 돌아온 전사(戰士)이신 왕(the warror-king)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정복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적하려던 모든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고, 결국 패하여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승리를 이루어낸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고개를 돌려 그 사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런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히려 '마치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서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 묵시의 전형적인 이 수수게끼 같은 표현조차도 동물의 왕인 사자로 묘사된 주님의 이미지(image)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효과를 증대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우리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둔 승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묵시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복음의 핵심적인 파라독스(paradox)를 예증합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는 그분의 아들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하기 위하여 사자는 어린 양의 온유함을 취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이제 그 두루마리는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리가 찬양으로 들려옵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봉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일찍 죽임을 당하사...(때문입니다)

 

그 어린 양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이 붙은 것(계1:1)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진리의 열쇠가 곧 이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묵시적 어법으로 엮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드러내 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을 죽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어법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풀어내려면 오로지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참된 말씀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역시 복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복음의 어떤 함축적인 의미들을 강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복음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윌콕(Michale Wilcock)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말씀과 증언, 즉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메시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영감된 그 밖의 성경책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임에서 큰 소리로 읽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이미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간추린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리의 패턴(pattern)을 되풀이 하시는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엄청남 권능과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보이시며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복음 중심 사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오셔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사역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 사건의 효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효과들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의 효과들 또는 열매들과 복음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믿음, 성화는 복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의 열매들인] 믿음이나 거듭남 또는 성령을 주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대속자로서 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조차도 복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한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못박아 말할 수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복음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일어난 완전하고 완성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역이 아닙니다. 이러한 복음,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이 후자의 사실을 가리켜 종종 의롭게 여김(칭의)이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여김이란 어떤 사람에게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대로 옮겨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순전히 그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계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죄인이란 믿음을 가진 죄인을 뜻하는데, 그(또는 그녀)는 이땅에 실제로 오셨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서 계신 자신의 대리자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실제 대리자이셨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곳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중심 사상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복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회개시키시고 성화시키셔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므로, 복음은 진정 하나님의 능력임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역사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과 계속과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유일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뽑아 버려야만 할 잘못된 사고는 복음이란 단지 우리를 회개시키는 데 쓰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선교사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선교지에 파견된 한 목사님이 자기의 교인들에 대해 선교본부에 써 보낸 편지를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이제 복음을 압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더 확고한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고 일단 우리가 그 관문에 들어선 후에는 우리를 계속 전진시킬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실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성화 또는 거룩하게 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 등을 종종 회개한 후에 도달해야 할 새로운 단계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헌신" 또는 "스스로를 비움" 또는 "옛성품을 죽임"으로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체험을 분명히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들과 설교는 "더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들" 또는 "풍성하고도 승리하는 삶의 열쇠" 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러한 경건에 관한 표현이나 용어들을 흠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점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 우리를 회개시킨 그 복음 - 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화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났음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중심 사상

 

또한 우리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연관하여 복음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 중심 사상은, 신구약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의 궁극적 목표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그리스도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창조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하려면,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1-2은 우리에게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로서 오신 그 말씀이 곧 창조자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5-20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골1:20)가 곧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목적이시며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죄가 창조계를 망치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내신 일종의 사후대책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만물을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언약들과 율법의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언약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본질을 밝혀 놓은 일종의 규약인 셈입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 사역으로 수립된 이 언약관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이 언약을 주제로 삼았으며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언약의 성취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묘사됩니다(눅1:46-55, 68-79; 2:29-32을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마5:17)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covenant partner)로서 [그 언약이 요구하는] 삶을 완전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그분의 세례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인간으로서 취한 선택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점과 연관지어서 누가는 계보를 열거하는데(눅3:22-28), 이러한 계보의 열거를 통해서 누가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참 인간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38절의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의미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예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해서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관한 어떤 예언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포괄적인 것으로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새 언약,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들 안에 거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처럼 이 모든 것들은 복음 사건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후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예언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yes)가 된다"(고후1:20)는 바울의 확신을 살펴봅시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노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셨다"(행13:32-33).

 

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산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빌1:2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그리스도로서, 육신의 고통을 받으시고 영광된 처소로 올라가 하나님과 더불어 계신 그분입니다(빌2:6-11). 따라서 주님은 곧 복음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간의 참된 관계를 계시하시며 다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구원 사역을 값없이 선물로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죄인에게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죄는 없이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소유하게 된 똑같은 상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라는 바울의 표현 외에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죽음의 결과로써,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참되신 언약의 파트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외롭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심판받으신 죄인이시며 새 생명이시며 성령이 총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즉 복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 사실에서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동기와 원동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복음의 열매는 바로 글자 그대로 즉 복음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거듭남, 믿음, 성화, 끝까지 인내함, 이 모두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헌신"이나 "전적인 헌신"을 이루어 내려고 가하는 율법주의적인 요구들이나 감언이설 또는 위험들은 복음의 은혜에서 벗어날 경우 단지 낙담과 환멸, 배반만을 산출하는 몹쓸 잡초일 뿐입니다.

 

5. 그리스도는 재림의 의미입니다

복음 사건인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를 이미 세워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을 곡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해서 생기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은 새로운 또는 다른 사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다시 돌아오셔서 이미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역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 가운데 오셔서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가 지금은 맏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믿는 자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믿는 자 안에서 실재로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신분이 그 때에는 우리들 자신 안에 갖춰져서 실재의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자기 사고의 구조로 삼고 있는 초림과 재림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어린 양(the Lamb)과 사자(the Lion)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메시아/왕으로서 지닌 위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양은 고난 받으신 나사렛 예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자를 보려는 자는 먼저 어린 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국은 오직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만 그 실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높아지셨으므로 여전히 어린 양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에는 그 어린 양으로부터 사자의 위엄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로서는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만이 복음을 통해서 그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믿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복음서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구원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일 뿐, 그 외의 방법으로는 그런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반응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배척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줄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좇기에 열광적이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분 안에 이스라엘의 참된 영적 소망의 해답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오해했던 말씀들을 마침내 제대로 이해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였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맏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유목민처럼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 짐을 진 것처럼 탄식하는 것은 그것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늘 집을 입음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목적을 우리로 이루도록 하셨으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4-7).

 

이처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데서 우리가 미완성이라는 느낌과 인식이 비롯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모호한 정의를 가진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그리스도, 즉 복음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령님이 주어진 것은 마침내 주님과 떨어져 있는 일이 결코 없는 그 나라에 믿는 자가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증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은 이러한 보증으로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일은 우리가 믿음 그 자체나 성령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힘있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곧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나사렛 예수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지금은 이 구세주가 모든 것을 정복하신 사자, 즉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께서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결과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신약성경 안에 진부하리 만큼 수없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가르침을 한 번 더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구약성경에 쓰인 표현과 이미지로 다시 옷 입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이후에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대단히 큰 가치가 있는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 목적이란 오스틴 패러(Austin Farrer)가 묘사한 것처럼 이미지(image), 즉 지나간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이 사용하던 옛 이미지들을 되살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의 장엄함을 살짝 그러나 새롭게 들여다보고 놀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시로 갈등을 겪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미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린 양의 받으신 고난 때문에 믿는 자 각자의 고난도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무의미의 늪 속에 가라앉힐 수는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간추림

 

사자는 영광스러우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실 수 있고, 그것의 실재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우리가 그 사자를 볼 수 있으려면 그분께서 먼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나라의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복음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의 의미는 복음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계속되는 현재 질서 사이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복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것입니다.

 

 

* 중심주제 *

어린 양과 사자 사이의 긴장은 복음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보여 준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 계시록] 중에서 발췌(25-3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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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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