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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야 물러갈지어다-

36년 전, 그러니까 1981년 어느 늦가을 밤,
기도하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밤 10시 조금 넘어서 집에서 출발해서 골짜기로 한참 들어가다가 산에 올라 중턱을 지나 산꼭대기로 가던 중 꽤 넓고 비스듬한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근교에 살던 집 근처 산이었음)

전혀 인적이 없는 곳이라서 첨엔 으스스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1시 쯤 기도를 시작했지요.

혼자서 산기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산기도 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분주한 일상을 떠나 밤이 맞도록 산에 가서 혼자 기도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산기도 가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 좋은 20대 후반의 청년 시절이라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 중에서, 그것도 밤 중에 혼자 기도하면 마음놓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새벽 2시 경,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산짐승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무서운 것도 아닌 저였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놈이 등 뒤에서 나탔습니다. 집채만 해 보였습니다. 형체만 보였지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가 어렵군요. 그 놈이 저를 한 입에 삼키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베드로 전서 5장 9절의 그 말씀과 어찌 그리 똑 같던지요.

아! 이제 죽었구나! 꼼짝없이 죽었구나!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머리털이 서고 온 몸에 솜털이 일제히 솟았습니다. 무서움을 동반한 엄청난 공포가 마음과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마음 한켠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서 죽기를 각오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 들면서 너 한테는 안 죽겠다는 오기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 시커먼 엄청난 놈을 정면으로 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갈지어다!' 그런데 입이 얼어붙어서 모기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밖에는 안 나오더라고요.ㅎ

그러자 그 엄청난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무니를 빼면서 슬그머니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승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평온한 가운데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새벽 다섯시가 지나서 찬송하면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뒤에도 몇 번 산기도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다른 산으로) 8-9시간 밤새 기도해도 전혀(별로)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산 능선 묘 옆에서 엎드렸는데(20시-05시까지) 산짐승이 다가와서 숲에서 부시럭거릴 때는 겁이 좀 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에 바위에 8시간 동안 엎드려 기도할 적엔 정말 고통스럽더군요.

예전에는 산기도 가서 기도하다가 마귀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이상하게 된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산기도 가지 마시라고 올리는 글이 아닙니다.

담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산기도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무슨 능력받기 위해서 산기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산기도는 담력이 약한 분들은 분명히 삼가야 합니다. 산기도 한다고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간증을 하냐 하면 신앙생활 하면서 말씀을 통해 점점 알게 된 사실은 마귀란 놈은 너무나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고 사람이나 일을 통해서 시험을 해 오는데 정말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속아넘어가기 쉽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 어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은 모양이 없다는 말씀대로 가족이나 이웃을 통해서 미소지으며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제 경우, 그 체험 이후에도 마귀가 시커먼 형상으로 계속 공격해 왔다면 무서울 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또 대적하면 되었겠지요.

하지만 마귀의 공격은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를 대적해서 이겼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이제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모양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주로 사람을 통해서 시험을 해 왔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 줄 알아차리지 못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마귀를 물리친 그 일이 있은지 몇 해 후, 모함과 비방을 받아 몹씨 괴롭고 힘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교회 집사인데 그렇게 하더군요.

저는 아무 변명도 않고 저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달라고....사랑을 품고 기도하니 미움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나 하고 같이 대적하여 싸웠다면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을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으니까 다 해결되더군요

그 분들이 어느날 제게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더군요.

주님은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한 피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끼리 서로 싸운다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마귀는 이간질하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게 하고 험담하고 비방하게 만듭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마귀가 시험하는 것인 줄 알고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제가 신학을 시작한 것이 83년도였습니다. 신학을 마친 게 97년도였습니다. 안수는 2000년도에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한지 17년 만에 목사가 된 셈이지요. 공부를 많이 해서 기간이 길어진 것이 아닙니다. 80년대 중 후반에 한 몇년 공백이 있었습니다. 돈 벌어서 어려운 목회자나 선교사를 돕는 것이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 돈버는 데 나서서 그렇습니다. 돈을 벌기는커녕 쫄딱 망해서 고생만 잔뜩했습니다.

처음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 제게는 이미 목회의 야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신학을 갖 시작한 놈이 벌써 큰 교회를 이룰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게지요.

주님이 그런 자를 쓰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제게 돌아온 건 시련과 실패 고난과 연단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음 등등....

그런 가운데서 신학을 마치고 간절히(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기도하니까
응답을 하시더군요. 일평생 그 때 딱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를 쓰리라!"
"양떼를 맡기리라!"
(1-2초 간의 시차를 두고 말씀하시더군요)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가슴에 떨어져 들리더군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위로부터) 왔는데 가슴에서 들리더라고요. 중후하고 묵직하고 위엄있고 온유하고....
글로서는 표현이 제대로 안 되는군요. 귀로나 머리로 들리는 음성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제 경험과 말씀에 비춰볼 적에 신빙성이 별로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말씀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 맨날 음성을 들려주셔서 신앙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못한(안 한) 일을 현대교회의 어떤 분들은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음성을 듣겠다고 설치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도 없거니와 자칫 잘못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고난과 실패, 연단의 과정을 지내오면서모든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의 야망과 성공, 그리고 명성은 확실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니까 관심조차고 없어지더군요. 겨우 8-9년 전부터 입니다. 참 더디 변하는 제 모습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성화란 단번에 되는 일이 결코 아니더군요. 주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를 다듬어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실제였습니다. 이제는 그저 이름도 없이 빛고 없이 작은 것에 충성하는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이 얼마나 귀하고
또한 성도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예전에는 왜 안 했겠습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의 배후에는 우리로 범죄케 해서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욕심이 생기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을 빙자하여 성공과 번영 축복을 받으라고 욕심을 부추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으로 말미암는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여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첨언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복음)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임을 살아오면서 더욱 절감합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은 우리에게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모기소리같은 목소리에도 도망가던 마귀였습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작은 목소리로 외치는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이깁니다.

성화(주님을 닮아가는)의 과정도 오직 복음으로만 됩니다. 성화를 위한 우리의 의지나 노력 또한 주님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종(노예)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인이 사례하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주인은 없습니다.

할 일을 다 한 후에 엎드려서
'할 일을 했을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종이 참된 종입니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본 뜻은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신분입니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대하는 주인 앞에서 할 수 있는 고백이라고는 '그 고백'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더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을 섬기며 뜻(명령)을 받드는 종입니다.

중심을 잡고 자신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샬롬!

글/구자준 목사

마르틴 루터, "나는 농부의 아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1)

 

시대적인 상황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는 교황의 권세가 대단했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 독일 교회도 교황의 통치 아래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교황제도로부터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제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개혁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큰 빛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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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 생가 - 아이슬레벤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가 탄생한 곳, 루터 생가이다. 16세기의 중심 인물이 된 루터는 (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과거 동독의 작센 지역인 아이슬레벤(Eisleben)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첫째 아들(혹은 둘째)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성 베드로- 바울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날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르는 날이어서 세례명으로 마르틴(Marti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베드로-바울교회는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루터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어 루터의 부모는 약간의 돈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큰 광산지역인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의 부모는 교육받지 못한 하급 신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촌스러운 자신의 배경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평소 “나는 농부의 아들이며 (ich bin eins Bauern),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들은 모두 정직한 농민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농민들의 사상과 감정과는 대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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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부모     ⓒ뉴스파워 김현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젊은 루터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훈련은 엄격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 기술의 주요 수단은 체벌이었으며 루터의 부모도 매우 엄격한 훈육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루터가 약간만 잘못했어도 혹독한 체벌을 했기 때문에 루터는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또한 학교에서도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구타하면서 라틴어 초급 문법을 가르쳤다. 루터도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터의 어린 시절이 혹독했다 할지라도 그는 부모의 훈육이 오직 사랑 안에서 행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 마가레테(Margarete)는 그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가르쳤는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 루터는 요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그리고 라틴 문법과 독일어 찬송을 배웠다.

 

한편 아버지 한스(Hans Luther)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만스펠트 백작의 법률고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육에 집념이 강한 아버지는 어린 루터를 라틴어 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리고 루터가 14살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아이젠나흐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학교에서 루터는 종교, 도덕, 정확한 문법, 라틴어, 논리학, 웅변술, 시, 음악 등을 배웠다. 이런 과목들은 장래 루터가 신학자로서 활동과 종교개혁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기본 도구들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을 만스펠트, 막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등지에서 받았다.

 

1501년, 학문에 대한 열정이 점점 뜨거워진 18살의 루터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 대학에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인문주의 학문의 권위자들로 존경받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라틴어 실력이 탁월한 루터는 고전 라틴 작품들, 중세 철학, 스콜라 철학, 논리학, 변증법, 수사학, 물리학, 형이상학, 라틴어 성경, 고대의 고전에 대한 연구,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루터는 언어를 성령의 검을 보관하는 칼집으로 여겼으며, 대학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열의를 다하여 공부를 했고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 4년 후인 1502년에는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1505년에는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루터는 그의 아버지의 큰 기대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법률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세속 법률 교육을 받도록 학비를 계속 지원했고, 심지어는 턱 없이 비싼 책인 법전까지 사 주었다. 루터는 1505년 부활절부터 법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터는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 두었다. 신기하게도 루터에게 돌연한 방향 전환이 생겼다. 루터는 같은 해 7월 17일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Augustinerkloster) 의 문을 두드렸다. 루터는 신학으로 기울어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새로운 그의 인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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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생가(박물관)     ⓒ뉴스파워 김현배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이 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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