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6)

 

외로운 투쟁에 선 루터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 붙여진 95개 논제는 약 몇 주일만에 독일 전체 퍼졌다. 이 논제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루터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어두운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던 사람들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공격도 거세게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에 완전 비상이 걸렸다. 

 

우선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공개적으로 루터를 이단시 하면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의 공격과 선동으로 인해 결국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독일의 추기경 카예탄(Thomas Cajetan, 1496-1534년)의 심문을 받았다. 추기경은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교황이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터와 추기경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싸웠다. 이때 추기경은 로마로부터 루터를 체포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게 되며, 이 정보를 입수한 루터는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한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 도시를 빠져 나온다. 

 

당시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레더릭(Frederick)은 루터가 로마에 있는 이단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명령서를 철회하고 독일 땅에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루터를 도왔다. 그 선제후는 잠정적이지만 루터를 계속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막강한 영주들이 로마의 위협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루터는 홀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데 험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가까이 있는 수도회 형제들이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이 루터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희미하지만 마지막에는 화형을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자신이 서 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스쳐 갔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십자가 신학”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로마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루터 자신은 면죄부와 신학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관련하여 벌어진 첫 번째 논쟁이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건물에서 열렸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신학을 ‘40개 조항’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루터 당시 신학의 주류는 ‘영광의 신학’이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그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대해 입장을 밝히게 된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루터가 승리함으로 인해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마르틴 부처(Martin Butzer)를 비롯하여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던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료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 등 여러 사람의 동조자를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 “교회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 

 

논쟁으로 유명해진 루터는 자연이 계속적인 논쟁에 연루되었다. 개혁을 위한 치열한 한판 싸움인 중요한 논쟁이 1519년 6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발생하였다.

 

그때 루터는 로마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네스 에크(Johann Eck, 1486-1543)와 논쟁했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에크는 교황과 주교들, 공의회, 종교회의들, 교회 전통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감독들이 곧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 로마 교황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다. 

 

반면에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의 통치권이 성경에는 전혀 없는 개념이며, 공의회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황과 공의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황의 최고(지상)권을 믿는 것은 불필요한 일임을 강력히 반박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변할 수 없는 진리는 교황이나 공회가 아니라 성경만이며,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루터는 신구약성경 66권 이외의 외경과 가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외경까지를 성경에 포함시킨다. 결국 에크는 루터에게 존 후스(Hohn Huss)와 같은 이단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 - “거룩한 불”

 

추기경 카예탄(Cajetan)과 엑크가 루터 파면에 앞장섰다. 교황은 루터의 반박문 중에서 41개 항목들이 이단적이라고 정죄하면서 1520년 6월 15일, 교황의 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발표하였다. 

 

이 칙서가 발표된 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만약에 취소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단으로 선포하겠고 곧 파문에 처해질 것이라고 위협받았다. 

 

이 교황의 교서는 10월 10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기소장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명령받은 60일이 지났지만 물러서지 않은 루터는 이 교서를 “저주받은, 뻔뻔스럽고 악마적인 교서”라고 불렀다. 

 

12월 10일, 오히려 루터는 교황이 내린 교서와 모든 교회법전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루터는 거짓 사상을 불살라버렸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는 강의하기 위해 다시 비텐베르크로 왔다. 

 

수 많은 학생들 앞에 선 루터는 지옥과 순교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하여 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에게는 순교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세지며 확고해져갔다. 루터는 천 년이 넘도록 든든히 버텨오던 가톨릭교회의 절대교리들을 향하여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서슬 퍼런 황제의 권력 앞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보여준 영적 파워의 힘은 엄청났다. 루터는 진리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기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러한 루터의 영적 파워는 결국 성경의 힘이었다. 루터는 영적전쟁터에서 움츠러들거나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약해진 우리들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루터와 같은 영적파워이다. 

 

보름스 의회 -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당했다. 로마 교황청은 독일 의회에 압력을 넣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보호자였던 프리데릭 현제는 루터의 공개적인 심문이 독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의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하였다. 

 

1521년 4월 17일-18, 독일 보름스 대성당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심문을 받게 된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이때 루터는 두려워하는 친구들에게 “후스는 화형 되었지만 진실은 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루터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지붕위에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다”라고 전했다. 

 

4월 16일 아침 10시,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덮개 없는 마차를 타고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루터는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불렀고,“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그때 회의장 주변은 루터를 격려하기 위해 모여든 5천여 명의 독일 시민들로 붐볐다. 시민들은 외쳤다. “남자답게 싸워라. 죽음을 무서워 말라. 저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뿐이다.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했다. 

 

루터가 하루 밤을 머문 보름스는 흥분과 기대로 열광의 분위기였다. 첫째날 4월 17일 수요일 오후 4시, 루터는 젊은 황제와 선제후들, 교황의 특사들, 대주교, 주교, 백작, 영주들, 여러 자문들, 제국 각 도시의 대리인, 외국 법정의 대사, 각 계층의 고관 등, 즉 교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잘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 섰다. 

 

트리어 대주교의 법률고문인 요한 폰 에크(Johann von Eck)는 황제를 대신해 라틴어와 독일어로 질문을 하였다. 제국의회 앞에 불려 나온 루터는 긴 책상 위에 자신의 책 25권 정도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에크는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책들은 당신이 쓴 책인가?”, 또 “그 책에서 쓴 내용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철회할 것인가?.” 즉 그 저술들을 다 취소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때 루터는 그 책들의 저자가 자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취소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충 처리할 수 없어서 답변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는 루터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 

 

다음날 4월 18일 목요일, 루터는 전날보다 더 자신 있어 보였다.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세웠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횃불이 켜지고 루터는 보름스 의회 법정에 들어섰다. 에크는 전날 던졌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그 책들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었다. 

 

마침내 루터는 입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단순히 전달하는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황권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폭정과 사악함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로 논박하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해 있어서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고 싶지 않고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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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새겨진 기념 표지석

 

 1521년 마르틴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건물의 터, 바로 그 현장에 세워진 하일스호프공원(Heylshofgarten)이 있다. 이 공원 내에는 루터가 소환되어 출두한 지점의 바닥에 기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HIER STAND 

VOR KAISER UND REICH

 MARTIN LUTHER 

1521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다)

 

보름스 칙령 

 

로마 교황청은 할 수만 있었다면 존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에 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제는 열렬한 교황주의자인 제롬 알렉안더(Jerome Aleander, 1480-1542)에게 이단자 루터를 정죄하는 포고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5월 8일에 완성된 포고령에 황제는 5월 26일에 서명했다. 이어 독일 제국의회는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국가와 교회로부터 위법자로 정죄되면서 파문을 당했다. 그에 대한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박탈하였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불로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책을 인쇄하거나 판매하거나 읽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 되었다. 

 

또한 루터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불법자로 규정했다. 루터를 돕거나 소식을 주고받는 일도 금지되었고 루터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은 구속되거나 소유를 몰수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과 황제, 대학들로부터 사회의 이단자로 찍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루터는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천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오던 황제의 권위와 교리 그리고 교권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사람을 믿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기독교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며, 사도적 신앙과 예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즉 성경으로 되돌아가며,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며, 신약 성경에 나타난 표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구호는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는 중요한 영적 모토들이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국민만평-서민호 화백] 반기문과 고사성어~ 기사의 사진

퍼온 글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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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란 청년들의 외침 "교회가 세상의 대안 되자"

루터가 로마가톨릭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95개 반박문을 내걸고 신앙인의 갱신을 촉구한 지 올해로 500년이다. 그런 루터의 정신을 이어 가는 루터교회가 전세계에 퍼져 있다. 한국에도 기독교한국루터회란 이름으로 교단이 존재하고 50여개의 교회가 소속돼 있다. 

 

작지만 '오직 믿음으로' 복음의 한 획을 담당하고 있는 이곳에 루터처럼 한국교회 갱신을 열망하는 열정의 청년들이 있다. 이런 열망은 그들을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 비텐베르크로 이끌었고, 한국교회 개혁과제 10가지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행한 청년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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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정신을 잇는 루터교인을 '루터란'이라 부른다. 루터란 청년 후예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지 지난 25일 만나 들어봤다. (왼쪽 박영국, 오른쪽 이수산나 청년)ⓒ데일리굿뉴스 

 

10박 11일 일정 속에서 느낀 루터의 마음

 

31명의 청년들이 11일 일정으로 루터의 흔적을 더듬으며 숙고해낸 한국교회 개혁과제는 △십자가 부활 경험 △하나님 뜻 분별 △바른 교육 △물질 숭배 배척 등이었다. 

 

이수산나(26·여·예수사랑교회)청년은 “1년간 준비하면서 루터의 생애를 밀접하게 느끼고 배웠다. 루터가 어떤 마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할 수밖에 없었던 절심함을 알게됐다”면서 “예수님과 하나님, 성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수산나 청년은 “그 사랑으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영적으로 잠자던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깨어나는 귀한 경험을 했다”면서 “한국교회도 초심을 잃지 말고 성경을 가까이 하고 개인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박영국(25·남·평택제자들교회)청년에게는 일방적 회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뻔뻔한 일인지 느낀 시간이었다.

 

그는 “루터가 면죄부의 허상을 꼬집은 것은 철저한 회개를 위한 역설이었다. 말로만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죄씻음 받았다’ 하고는 말아버린다 "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통렬히 부르짖으며 자신을 내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금 강요 문화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박영국 청년은 “지금은 중세 가톨릭이 판매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면죄부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면죄부가 있는 것 같다"며 "고액의 헌금을 하면 그만큼 뭔가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한데, 적은 돈이어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점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또한 헌금 문제를 지적하며 독일교회를 방문했을 때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청년들이 현지 교회에서 헌금시간에 늘 했던 것처럼 지폐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 목회자가 다가와 ‘하나님은 동전 소리를 더 좋아하신다’며 부담감을 내려놓게 했다는 것.

 

박영국 청년은 “사실 충격이었다"며 "교회가 하나님은 돈의 크기보다 동전일지라도 기쁘고 신실하게 내는 헌금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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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앞에서 한국교회 10가지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루터교청년연합회 제공) 

 

루터란 청년의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 과제

 

루터교는 한국에서는 작은 교단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개신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세계 98개국 145개 교단이 존재하며, 약 8천만명의 교인이 있다. 국내에는 1958년 세워졌고 전국에 50여개 교회를 두고 있다. 청년들이 교단에 바라는 점은 뭘까 궁금했다.

 

이수산나 청년은 “한국 루터교단이 다른 나라보다 역사가 짧고 교회와 교인수가 적은 게 사실지만 너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의 후예(루터란)로서 자부심을 갖고 조금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고 전했다.

 

박영국 청년은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면서 “루터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랐는데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많이 들어 알고 있지만, 종교개혁을 외쳐야 했던 심정, 발걸음 등 그의 정신에 대해서는 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유럽의 루터교회를 방문했을 때 루터교회만의 아름답고 경건한 예배의식이 있음을 보고 감동했다"며 "한국교회에 우리만의 소중한 예식을 널리 널리 전파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루터교단에서 기획한 이번 독일 방문은 각 교회를 통해 청년들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처음엔 20명을 예상했지만 31명이 지원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교단에서 경비 50%를 지원했고, 오직 독일만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청년들은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고 서로 삶을 나누면서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개혁과 갱신을 향한 루터의 뜨거운 심장소리를 들은 것이다. 청년들은 한국교회 개혁과제를 논의했고 10가지로 추려 500년전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 앞에서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교회가 듣고 행하는 일이다.

 

한연희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인류는 이전보다 전멸에 더 가까이 근접하고 있다!

(By Sarah Karacs, for CNN, Updated 5:18 AM ET, Thu January 26, 2017)

 


얼마나 세계의 종말에 근접했는지에 대한 과제를 부여받은 시카고 과학자 집단은 2016년의 사건들로 하여금 “지구종말시계” 침이 얼마나 움직이기 시작했는지에 관해 목요일에 발표할 예정이다.


상징적인 시계는 현재, 자정이 인류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볼 때, 3분전에 서 있다. 분침은 핵무기 경쟁의 출발년도인 1949년도에 3분전 자정에 서 있었다.


시계의 분침은 미국과 소련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실시된 이후 자정에 1분 더 가까이 근접했다고 - 2016년이 1953년과 동등하게 된 - 예상하고 있다.


이번 주 초에 발표된 진술에서, 원자과학자회보(Bulletin of Atomic Scientists)는 어느 정도 최근의 발전이 고려되었다고 말했다.


“핵무기와 기후협정에 대한 대통령 트럼프의 논평, 음울하게 하는 전세계 안보 전망이 세련된 기술에 의해 증가되는 추세, 그리고 과학적인 전문지식에 대한 점진적인 무시가 불쾌한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상승세“라고 말한다.


원자과학자회보의 노벨 수상자들 팀은 1945년부터 “지구종말시계”를 세우고 조사와 분석을 편집하여 자료를 만들어 왔다. 이 독립적인 비영리단체는 기술세계의 조약 협정, 지정학적 긴장과 발전에 연계된 세계적인 위협에 대한 자료를 사용한다. 


1963년 미국과 소련 지도자들이 모든 대기권 핵실험을 끝내자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에 서명한 이후 분침은 12분 전으로 내려 왔다.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고, 미국이 월남전에 적극 가담한 1968년, 분침은 자정 7분전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 체결됨으로써 긴장이 완화 - 분침이 뒤로 움직였다 - 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1991년 분침이 자정 17분 전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그 후 몇 년 간 분침은 왔다 갔다했다. -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1984년의 분침은 자정 3분전에 도달해 경고음을 울렸다.

  

지정학적 요인들이 올해의 평가에 상당한 특징을 띄게 한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잘못된 사람들의 손에 빠짐으로 생성될 수 있는 어떤 대미지의 신호가 보이고, 그로 인해 제기되는 위험들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잠재적인 생물공학의 오용을 포함하여 인공 지능과 안전 위협의 상승을 포함한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 - 인간들의 상처에 유기적 조직체의 합성을 가능케 하는 - 은 생테러주의자들(bio-terrorists)이 인조 바이러스로부터 무기를 제조하는 위험을 초래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이미 세상의 종말을 위협하는 다양한 축적된 무기류를 확장한 상태이다.



http://www.cnn.com/2017/01/26/world/doomsday-clock-2017/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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